<교수신문> 2006년 10월 31일 (화) 03:11:50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612
“아름다운 나라는 없다”
[걸리버의 시선] 마루야마 마사오가 아베 신조에게
김항 동경대 통합문화학 박사과정 lthang@hanmail.net
1946년, <세카이(世界)> 지에 발표된 한 편의 논문이 새로운 앎을 갈망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超家主義の論理と心理」라 이름 붙여진 이 논문의 저자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라는 젊은 정치학자였다. 이 논문은 ‘초국가주의(ultra nationalism)’를 비난하고 부정해야 할 ‘심성’이 아니라, 분석하고 성찰해야 할 ‘개념’으로 파악함으로써, 전시체제에 대한 도덕적인 비난이 지배적이던 당시의 지성계에서 ‘냉철한 이성’에 기초한 비판의 장을 열었다. 이후 일본 사상계에서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거대한 존재로 군림하게 된다.
마루야마 서거 10주기를 맞는 일본 지성계
하지만 그가 군림한 자리가 범접할 수 없는 지고의 왕좌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강호의 야심가들이 스스로의 무공을 천하에 떨치기 위해 마루야마에게 도전했고, 많은 경우 마루야마는 그가 미처 알지도 못하는 장소에서 처절하게 패배하여 ‘몰락한 왕’ 취급을 당했다. 즉 그는 왕좌에서 끌려 내려오기 위해 그 자리에 군림해야만 했던 것이다. 1950년대에는 전후 민주주의의 대표적 이데올로그로,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서구중심주의와 권위주의의 대명사로, 1980년대 이른바 포스트 모던이 풍미할 때에는 이미 한 물 간 근대주의자로, 1990년대에는 국민국가 형성의 최대 이론가로, 시대마다 내용은 다르지만 마루야마는 언제나 몰락하는 왕으로서, 야심가들의 명성을 위한 스케이프고트의 역할을 해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된 올 해, 여전히 마루야마를 왕좌에서 끌어내리려 하는 강호의 야심가들이 도처에서 무공을 펼치고 있다. 수많은 마루야마 마사오 관련 특집과 저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너도 나도 마루야마를 디딤돌 삼아 세상에 명성을 떨치려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루야마의 왕좌는 공고해져만 간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은 마루야마를 대신할 스케이프고트가 없다는 사실, 즉 그를 대신할만한 사상계의 왕이 등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며, 아직도 마루야마에 대한 도전이 스스로의 무공을 시험할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렇듯 마루야마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이론이 갖고 있는 깊이 때문이리라. 이 짧은 지면에서 그 깊이를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능력 밖에 일이기에, 아래에서는 마루야마의 국가론을 개괄하고, 일본의 현재 상황에 비추어 그 비판의 힘을 확인해보도록 한다.
마루야마의 국가 이해는 헤겔, 베버, 마이네케, 슈미트 등의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거론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이론적 훈련기에 주로 독일계열의 국가론에 경도되었다. 이들을 포함한 독일 국가모델에 관한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언설들은 다양하고 서로 반목하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공통된 점은 ‘시민사회’에 대한 이해이다.
헤겔 이후 독일에서 ‘시민사회(burgerliche Gesellschaft)’는 이른바 ‘시민사회(civil society)’와는 다른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정착된 시민사회(civil society)는 사적인 영역과 국가로부터 구분된, 시민(citoyen)들이 구성하는 공적 영역으로 자리 매김 되어왔다. 이 영역은 홉스의 civil state라는 용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로부터 비롯되어 점차 독립된 것으로, 사적이익을 공공이익으로 매개하는 자율적인 장을 뜻한다.
반면 헤겔이 법철학 강의에서 정의한 ‘시민사회(burgerliche Gesellschaft)’는 시민이 아니라 부르주아들이 사는 영역으로, 사적인 개인들이 스스로의 욕망을 실현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장이다. 이 영역은 국가와는 완전히 구분된 것으로, 국가는 이 영역 위에 군림하여 공공이익을 독점한다. 즉 ‘시민사회(burgerliche Gesellschaft)’ 내의 다양한 사적인 이익들은 국가를 매개함으로써 공공이익이 될 수 있고 국가는 그 권한을 독점한다. 따라서 사적인 이익을 매개하는 자율적인 공공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헤겔에 따르면 공공이익은 사적인 이익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 되고, 전문적인 관료집단에 의해 결정되고 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루야마의 기본적인 시각은 헤겔에서 비롯된 독일형 국가-시민사회론이다. 그에게 시민사회는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개인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영역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공공이익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국가가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국가의 시민사회에 대한 우위를 지배관계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마이네케나 칼 슈미트를 따라 국가는 종교나 전통에서 비롯되는 모든 가치로부터 중립적(neutral)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국가가 도덕적이거나 미적인 가치에 관여하게 되면 국가로서 존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치란 특수한 것으로 개별적인 내용을 갖는 까닭에, 하나의 가치가 유일하게 정당한 것으로 정립될 때, 국가는 공공이익을 독점함으로써 보유한 거대한 힘을 사적인 지배를 위해 사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국가는 하나의 가치를 보편화하고 전체화하기 때문에 자신의 위험성을 망각하고 폭주하게 된다. 즉 스스로의 위험성과 한계를 부단히 재확인하고 결정하는, 냉철한 국가이성(raison d’etat)이 사라지는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 마르지 않는 샘
마루야마의 ‘일본’론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의 초국가주의 비판은 일본제국의 통치원리가 중립에 기초한 공공이익의 추구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모든 가치를 천황제를 통해 독점하는 데에 있었다는 점에 집중된다. 즉 그는 일본제국의 전체주의가 개인의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를 침해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가로서의 존재이유를 망각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그는 개인의 자유라든가 민주주의라든가 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신봉하지 않는다. 국가가 여러 가지 특수한 가치들로부터 중립을 지켜야 함에도, 초국가주의는 가치의 독점에 집중함으로써 특정한 가치, 즉 ‘천황=지고의 선’을 보편화한 데에 문제가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초국가주의 비판의 시각은 전후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지속된다. 패전 후 민주주의가 지고의 가치처럼 인구에 회자될 때 마루야마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민주주의가 생생한 정신의 원리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내면에서 갱신되고 비판되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이런 내면성을 결여할 때 그것은 하나의 도그마, 교의로 굳어버리리라. 그리하여 민주주의는 파시즘에 대한 가장 준엄한 대립점을 상실한다. 현대일본에는 민주주의가 지상명령으로 교의화될 위험이 있다. 민주주의는 결코 이상적이거나 최고선의 대명사가 아니다. 모든 정치제도가 그렇듯이 민주주의는 국민적 통일의사를 만들어내기 위한 기술적 수단이며, 다른 수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성을 가질 뿐이다. 그것을 만능 치료약처럼 신봉하는 일은 결국 민중을 심각한 환멸로 몰아넣어, 반동세력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게 되리라.”
마루야마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그 어떠한 정치이념이나 제도라도 지고의 가치가 되어 보편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념이나 제도는 어디까지나 수단에 머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국가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유주의적 원칙에서 비롯된 인식이 아니다. 그러한 원칙은 개인을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자연화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개인이 존립 가능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인은 국가에 대해 부정적으로 독립함으로써 존립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개인이 지고의 가치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은 어디까지나 국가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조건 하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내면은 국가와의 긴장관계 속에서만이, 즉 국가에 의한 가치의 독점화를 저지하는 한에서 존재할 수 있다. 이미 개인의 내면이 있고, 국가가 그것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국가는 필연적으로 상호 존립해야하며, 그 긴장관계 속에서만이 내면이 가능해진다. 즉 파시즘이란 개인의 내면에 대한 침해나 지배가 아니라, 내면이 존립 불가능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즉 개인이 사라지면 국가도 사라진다는 사실은 물론이지만, 반대로 국가가 사라지면 개인도 사라진다는 사실, 그리고 양자 사이의 긴장관계가 마루야마가 사유한 근대국가의 본질이다.
신임총리의 베스트셀러가 놓치고 있는 것
현재 일본에서 4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가 있다. 신임 총리 아베 신조가 쓴(썼다고 하는 : 일본에서도 대리집필은 대리 작가의 이름을 병기하지 않는 모양이다)『아름다운 나라를 향해』이다. 아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하지 않아도 되리라. 이 글의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저 책의 제목이다. 왜냐하면 마루야마에 따르면 ‘나라’는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라의 정책방향을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로 설정할 때, 국가는 개인과 긴장관계에 있다기보다 서로를 가르는 경계를 지워버린다. 아름다움은 개인의 내면에 기초한 가치판단이기 때문이다. 이 때 개인의 내면을 가능케 하는 국가와의 준엄한 거리의식은 사라진다.
마루야마의 비판적 사유가 현재에도 힘을 갖는 까닭은 그 비판이 단순히 국가주의를 겨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가 있어야 개인이 있을 수 있고 개인이 있어야 국가가 있을 수 있다는 점, 또한 중요한 것은 그 사이에 거리를 유지하는 한에서 서로가 존립할 수 있다는 점, 이것이 마루야마의 비판적 사유가 갖는 독창성이다. 현재 일본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마루야마를 무덤에서 편히 쉬게 하지 않는다. 비판자들은 공허한 국가비판으로 일관하고, 국가를 소중히 여기자는 위정자들은 자신들이 국가가 존립 불가능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루야마의 타계 10주기를 맞이한 2006년, 그의 비판이 한 층 더 빛을 발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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