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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강성률의 씨네포커스] ‘설국열차’는 희망의 영화다 / 미디어오늘20130804

by 마리산인1324 2013. 8. 12.

<미디어오늘> 2013-08-04  11:13:29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1268




‘설국열차’는 희망의 영화다

[강성률의 씨네포커스] 가장 암울한 묵시록면서도 가장 밝은 메시지가 있다


강성률 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 rosebud70@hanmail.net



봉준호의 영화를 본 날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영화가 항상 비극으로 끝을 맺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인물은 항상 죽고, 사건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봉준호는 항상 교복 입은 여학생을 자신의 영화에서 죽였다. 안 죽여도 될 것 같은데 반드시 죽인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괴물>에서 굳이 고아성을 죽여야 했는가, 라는 것이다. 마치 성경의 한 편처럼 괴물에게 잡아먹혔다가 아버지에 의해 밖으로 나오지만 결국 그녀는 죽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녀가 구해준 소년과 함께 여전히 한강변에서 쓸쓸히 살아가고 있다. 왜 굳이 죽여야 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이 <설국열차>에 있다. 

   
영화 <설국열차> 포스터.
 

<설국열차>에는 <괴물>의 그 고아성이 출연한다. 흥미롭게도 극중 이름이 요나이다. 고래 뱃속에서 살아 돌아온 성경의 바로 그 이름! 이것은 우연일까? 그런 것 같지 않다. 17살인 요나는 봉준호의 전작과 달리 영화에서 살아남는다. 그것도 거대한 괴물과 같은 기차를 벗어난다. 여학생이 살아남은 것도 처음이고, 그녀만 같은 또래의 남자 아이와 살아남아 빙하기가 끝나는 세상을 본다. 그렇게 희망을 이야기한다. 다음 세대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봉준호는 변한 것일까? 일관되게 그리던 사회 구조적 모순의 슬픈 현실에 절망하다가 이제는 희망으로 돌아선 것일까? 우회해 보자. 그의 전작에서는 한국 사회의 특수한 문제들이 조명되었다. 지독히도 어두운 사회에서 소녀들은 죽어나갔다. 스릴러와 재난영화의 형식을 취하지만 정작 봉준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여기에 있었다. 사회적 모순과의 대면. 해서 봉준호의 영화는 장르의 틀을 빌려오지만 어느 순간, 그 장르적 쾌감을 넘어선다.

외형적으로 <설국열차>는 한국 사회의 모순과 만날 수 없다. 아니, 빙하기의 묵시록적 세계관을 그리고 있으니, 한국을 넘어선 세계적 문제와 대면해야 한다. 때문에 이전의 오밀조밀한 영화는 아니지만,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 봉준호가 세밀하게 집중한 것은 계급 문제이다. 그것을 기차의 꼬리칸과 앞 칸의 지형적 구분으로 재현한다.

   
영화 <설국열차>의 한 장면.
 

우리에게 계급이란 무엇인가? 가장 처연하게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지만 대중영화나 문화에서 계급을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하나의 계급이 되었고, 강남과 강북이, 서울과 지방이 계급이 된 세상에서 왜 영화는 계급을 그리지 않고 사랑 타령에만 빠져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이상한 외면을 관객들은 왜 좋아했던 것일까?

이 상황에서 우직하게도 봉준호는 계급을 정면에서 들고 나온다. 그것도 매우 과격한 방식으로. 마치 1920년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방식처럼, 꼬리칸의 지도자가 민중을 규합해 혁명을 일으켜 한칸씩 앞으로 나아간다. 얼마나 단순하고 우직한 방식인가! 영화의 시각적 효과는 앞칸 사람들의 화려한 생활을 보는 것이고, 극적 동일시는 점점 더 앞으로 가면서 이루어지는 성취적 쾌감에서 작동한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철저하리만치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고착화된 계급 질서를 무너뜨리자는 선동의 영화가 된다. 너무 과격한 발언이라고? 결코 그렇지 않다. 영화는 문자 그대로 계급 사회와 혁명을 그린다.

봉준호는 여기에 하나의 키워드를 더한다. 통제 사회. 설국열차의 창조자이면서 엔진의 창조자이고 제일 앞 칸에서 열차를 조율하는 윌포드는 신적 존재이다. 열차의 학교에서 아이들은 윌포드에게 경배와 찬양을 보낸다. 윌포드에게 설국열차는 세상의 축소판이며 완전한 세상이자, ‘전 인류’가 타고 있는 노아의 방주이며, 자신이 창조한 세상이다. 고로 그는 신적 존재가 된 것이다. 

윌포드가 있는 앞 칸은 기계 사회에 대한 긍정의 포스가 강하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인간이 불러온 빙하기를 극복한,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낸 설국열차, 그 가운데 핵심 부품인 엔진을 그린 장면은 이 영화가 유일하게 SF적 상상력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 어느 공간에서도 이 영화가 미래의 SF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지만, 반드시 이곳에서는 그 사실과 대면하게 된다. 기계가 인간을 구원하는 세상, 인간이 그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야 하는 세상.

윌포드는 기계의 그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설국열차를 철저히 통제한다. 통제의 원리는 간단하다. 인간의 개체수와 동물의 개체수를 통제하지 않으면 세상은 멸망한다는 주장. 이미 우리가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 아닌가? 심지어 윌포드는 젊은 반란군 지도자 커티스에게 이 기차를 이끌어 달라고 한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이야기인가? 정반합의 충돌을 통한 발전을 이야기한 것인가? 여기서 커티스는 무너지고 만다. 그에게는 앞으로 나가 엔진을 소유해야 한다는 희망만이 있었고 다른 희망과 비전은 없었다.

   
영화 <설국열차>의 한 장면.
 

엔진의 설계자 남궁민수는 달랐다. 윌포드의 황당한 조언을 거부하면서 남궁민수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고자 한다. 그 세상은 통제된 세상도 아니고 계급 사회도 아니다. 계급으로 구성된 통제 사회라는 틀을 깨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그는 지구의 환경을 유심히 살피며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고, 시기를 조율했다. 결국 커티스가 찾아나선 희망은 열차 안에서 좌절로 끝났지만, 남궁민수가 찾고자 한 희망은 이제 시작되었다.

물론 그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철저한 준비와 지혜가 있어야 한다. 준비된 자에게만 새로운 세상이 허락된다. 그렇게 준비된 자에 의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17년 동안 흙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소녀가 지구로 나가 새로운 세상의 희망을 본다. 자신의 옷과 같은 하얀 곰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때문에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가장 암울한 묵시록이지만 가장 밝은, 희망의 영화이다. 그 희망이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