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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활

「설국열차」, 혹은 우상과 함께 /이향준(교수신문20130820)

by 마리산인1324 2013. 8. 26.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7620

 

 

 

「설국열차」, 혹은 우상과 함께
문화비평
2013년 08월 20일 (화) 16:29:59 교수신문 editor@kyosu.net

 
영화 「설국열차」가 화제다. 대규모의 물량공세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불만인 모양이지만, 영화의 내용이 직설적인 화법으로 인간 사회의 숨길 수 없는 진실을 언급한다는 데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부자와 거지, 지배와 피지배라는 원형적인 구조의 문제는 열려진 두 개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지배 관계를 뒤엎을 것인가? 아니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인가? 영화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두 가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하나는 질서와 질서에 대한 담론의 主語라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길 없는 길 걷기라고 이름붙일 만한 거의 가치에 대한 것이다. 열차 안의 각종 사회적 관계는 정상 상태라고 가정된 질서 개념을 배경으로 한다. 개별적인 구성원의 사회적 위상이 달라지더라도 질서는 항구적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엔진은 신성하다’는 단일한 구호로 압축된다.

 

문제는 이러한 질서의 제한적 성격이다. 그것은 기차라는 시공간이 갖는 폐쇄적 성격에 의해 결정적인 제약을 받는다. 그 생태계가 무한대의 공간이라고 가정된다면, 엔진이란 낱말이 가지는 신성한 의미는 하느님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와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질서를 부르짖는 이들의 내적 열망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IMF 체제가 한국을 뒤덮었을 때 뜻하지 않게 헐값에 자본재들을 손에 넣게 된 일부 자본가들이 ‘지금 이대로’를 외치며 건배했다고 한다. 이것은 질서의 영속이 어떤 관점에서 옹호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나 혹은 우리에게 유리할 때에만’이라는 전제 조건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들과 상반되는 사회적 위상을 갖는 이들에게 질서는 오히려 타파의 대상이 된다.

 

이들이 대부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자명한 이치다. 자본가의 아들이 가난한 노동자에게 ‘스트레스 가득한 월급쟁이 대신 자기 자본을 투자해서 사업장을 운영하며 사장 노릇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은 ‘어째서 빵 대신에 고기를 먹지 않는가’라는 질문만큼이나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비현실적이다. 반면에 아예 질서가 없는 것보다는 나쁜 질서가 낫다는 담론은 거의 언제나 논쟁에서 유리하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우리는 나의 울음에 반응하는 외부의 존재를 경험하고, 그 존재의 행동 양식을 유도하기 위해 몸짓과 의사표시의 방식을 발달시킨다. 음식물은 외부에서 들어와 소화 작용을 거쳐 배설된다. 이 단순한 과정의 유기적 흐름 어느 하나가 막혀도 우리는 곧장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복잡한 사물과 사태의 체계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가장 정상적인 상태의 체계와 그렇지 못한 상태의 체계가 나에게 갖는 가치를 구별하게 만든다. 우리가 잊고 살거나, 혹은 누군가가 일부러 망각하도록 만드는 것은 ‘질서라는 개념이 애초부터 나라는 존재 인식과 강하게 결부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누군가 자신을 타인의 질서 아래에 두라는 요구를 받을 때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저항감을 느끼는 이유이다. 그것은 ‘너’의 질서이지, ‘나’의 질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질서의 주어에 대한 자의식이 지배적이 될 때 개인들은 좋게 말해 질서를 이용하거나, 나쁘게 말하면 질서를 무시하게 된다. 무시당하는 질서란 사실상 무너지기 일보직전에 있는 권력의 지표다. 지배 담론은 이 위험성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주어를 보다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우리’로 대체하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껏 우리를 위하지 않는다는 정치인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결국 어떤 담론이 ‘질서 자체를 위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의 이름으로 너의 어떤 것을 희생하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개인을 숭고화하거나 아니면 같은 이름으로 억압하는 둘 중의 하나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숭고화 자체가 억압의 다른 이름이다. 영화의 막바지에서 주인공은 이 딜레마와 마주한다.

 

지배를 끝장내기 위한 혁명이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한 장치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에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그는 비로소 기차를 경계면으로 그 안과 밖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윌포드와 남궁민수라는 극중 인물은 사실 이 안-밖으로 구별되는 삶의 양식을 대변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상반된 가능성의 다른 한쪽에 놓인 ‘길 없는 길 걷기’라는 삶의 양식이 다소 미적지근한 방식으로 제시됐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사람들이 불만을 품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길 없는 길 걷기라는 방식 또한 질서와 관계를 갖고야 말리라는 불안감이 그것이다. 하나의 길이 창조될 때, 처음에는 외면당하다가 이윽고 받아들여지고, 마침내 찬양되는 경우는 너무 흔하다. 이렇게 길을 가지 않고 타인의 길을 우상화할 때 질서는 확립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아래와 같이 말했을 때, 그는 분명 철학자들조차도 이런 어리석음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은 우상들을 파괴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우상을―가령 ‘우상의 부재’ 중에― 창조하지 않음을 뜻한다.” 영화의 우상인 기차는 파괴됐지만, 아직 당신의 우상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것을 떠올리지 못하는 한 여전히 기차는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향준 전남대 BK21박사후연구원·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