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13.11.18 03:36:17
검찰, 청와대 가이드라인 따랐나
박근혜 대통령, 수사 초기 '대화록 실종은 역사은폐' 규정
'폐기 의도·국정원에 남긴 이유' 설명 못해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검찰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실종 사건을 수사ㆍ발표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의 가이드라인을 의식한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대화록 실종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 착수 직후 이 사건을 사실상 '역사를 은폐한 국기문란 사건'으로 규정한 박근혜 대통령의 언급으로 검찰이 수사 방향과 결과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8월 6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대화록 실종' 사건과 관련 "중요한 사초가 증발한 전대미문의 일은 국기를 흔들고 역사를 지우는 것으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대화록 실종'이 의도적으로 역사를 은폐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성격 규정이 깔린 발언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새누리당의 고발로 검찰이 이 사건에 대한 수사에 막 착수한 단계로 대화록 실종 경위나 의도 등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앞서 7월말쯤 여야 의원들이 국가기록원의 대통령기록물관리시스템에서 대화록을 찾지 못해 여야간 정치적 공방이 벌어졌으나 대화록의 국가기록원 미이관 여부조차 불분명했다. 그간 청와대는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한 언급을 자제해왔지만 유독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선제 규정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언급 후 3개월여 만에 나온 검찰의 수사 결과는 '전대미문의 국기문란 사건'에 걸맞지 않게 엉성하다.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 지시에 따라 대화록 초본을 의도적으로 폐기했다며 조명균 전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 등 2명을 불구속 기소했으나 폐기 경위나 의도에 대한 설명이 석연치 않다. 검찰은 수사발표에서 조 비서관이 노 전 대통령의 폐기 지시를 '일관되게' 진술했다고 했지만 정작 조 전 비서관이 17일 "(1월 참고인 조사에서는 불분명한 기억에 의한) 잘못된 진술이었다고 여러 차례 설명했다"고 반박했다. 국정원에 대화록을 보관하는 대신 보안상의 유출 사고가 없도록 청와대에는 남기지 말라는 취지의 지시를 검찰이 호도했다는 게 조 전 비서관 주장이다.
이를 삭제ㆍ미이관 지시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그 의도에 대한 검찰의 설명은 궁색하다. 검찰은 대화록 초본이 역사적 기록물이기 때문에 폐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만 내세울 뿐, 이를 폐기한 범죄적 의도성에 대해서는 사실상 입을 닫았다. 검찰 스스로 초본과 수정본이 본질적 내용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 초본 삭제가 '역사 은폐'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꼴이 됐다.
검찰은 또 수정본에 대해서도 노 전 대통령이 국가기록원에 이관하지 않도록 지시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국정원에 남겨둔 이유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사초를 폐기하려 했다면 국정원에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란 상식적인 물음에 대한 답도 내놓지 못한 상태에서 '고의적으로 폐기ㆍ미이관했다'는 결론만 도출한 셈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검찰이 '고의성'에 대해 납득할 만한 증거와 설명을 내놓지 못하면서 '고의적 폐기'라는 논리적 비약을 하고 있다"며 "무리한 수사결론이 결국 '역사 은폐'로 규정한 대통령의 언급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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