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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눈 감은 자들의 나라 /한국일보20131114

by 마리산인1324 2013. 11. 19.

<한국일보> 2013.11.13 21:03:59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311/h2013111321035924380.htm

 

[메아리/11월 14일] 눈 감은 자들의 나라

 

독재체제 움직이려면 최고지도자 설득해야
노무현 진의, NLL 포기 아니라 서해평화지대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2000년 2월9일 오후 청와대 기자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도쿄방송(TBS) 인터뷰 자료가 전달됐다. 한 기자가 "시끄럽겠구먼"이라고 했다. 다들 자료를 들여다봤다. 술렁거렸다. 김 대통령이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 판단력과 식견을 갖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한 대목이 있었다. 평생 색깔론 시비에 시달린 DJ가 김정일을 호평하다니!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난리가 났다. "그릇된 안보의식으로 국민을 혼란케 한다"(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군 통수권자가 주적으로까지 규정되는 김정일을 고무 찬양했다"(하순봉 한나라당 사무총장) 등 정치권과 보수언론의 비난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그로부터 4개월여가 지나 6ㆍ15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식견 있는 지도자'라는 평가는 '김정일, 당신을 신뢰하니 직접 만나서 문제를 풀자'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당시 막후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북측 창구가 김정일에 가감 없이 보고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DJ가 직접 '고공(高空)의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고공의 대화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있었다. 핵 전쟁의 목전까지 간 상황에서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시초프 소련 서기장에게 가장 중시한 것은 정확한 메시지였다. 흐루시초프가 강경파에 의해 실각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케네디도 군부의 쿠바 폭격 주장에 시달리고 있는 불확실한 긴장국면에서 잘못 전달된 정보 하나가 곧바로 전쟁을 촉발시킬 수 있었다. 다행히 케네디와 흐루시초프는 상호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내세워 정확한 메시지를 주고 받아 타협을 이뤄냈다.

 

이 두 사례는 북한이나 소련처럼 폐쇄적 독재체제를 움직이려면 최고지도자를 설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 설득의 화법이 보편적 정서에 어긋나거나 과하더라도,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 굳이 통치행위를 들먹이지 않고서도 받아들일 수 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던졌던 NLL(서해북방한계선) 발언도 그랬다.

 

2007년 10월3일의 평양으로 가보자. 유시민 전 의원의 저서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 등 증언과 보도를 종합해보면, 회담의 시작은 어두웠다. 노 대통령은 전날 오후 5시 김영남 상임위원장과의 회담에서 김영남으로부터 우리 정부의 자주성 부족을 힐난하는 45분의 장광설을 듣고 무척 불쾌했다. 노 대통령은 "내일도 이런 식이면 보따리를 싸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우울한 분위기는 3일 오전의 노무현ㆍ김정일 회담에 그대로 이어졌다. 오후 회담도 예정돼 있지 않았고, 노 대통령의 제안에 김정일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반전은 북한의 절대적 가치인 자주에 대한 토론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김정일이 남측의 자주성 결여를 지적하자 노 대통령이 자주의 상대성, 점진적 자주 등 온갖 논리를 내세워 설명하고 "자주를 너무 세게 하면 고립이 된다"고 반박했다. 이 논쟁 후 오후 회담이 잡혔고 그 자리에서 문제의 NLL 발언이 있었다. 대화록에는 거두절미하면 오해를 초래할 대목도 있지만, 그가 추구했던 바가 NLL 포기가 아니라 남북을 아우르는 서해평화지대 구축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김정일도 북측 요충인 해주를 내주겠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화답했다. 10ㆍ4 공동선언은 서방 정상회담처럼 사전 실무접촉으로 마련된 게 아니라 두 지도자간 난상토론과 힘겨루기를 통해 나온 것이다.

 

대화록을 보면서 노무현 화법에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NLL을 팔아먹으려 했다는 식의 해석은 난독증(難讀症)에 다름 아니다. 야당 시절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그토록 비난했지만 집권 후 계승, 발전시켜 결국 통일을 이룬 헬무트 콜 독일 총리의 지혜를 따르지는 못할지언정 본질에 눈을 감아서야 되겠는가. 눈 감으면 보기 싫은 것을 안 볼 수는 있지만 결국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눈 감은 자들의 나라는 앞으로 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