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326호] 승인 2013.12.12 00: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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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 편집증 그리고 정신줄 놓기
정부와 여당의 종북몰이가 임계점을 넘어섰다. 대북 편집증, 내부의 적 만들기, 행동대원의 과속이 어우러져 지독한 종북 중독을 낳았다. 효과를 내기는커녕 ‘빨갱이’처럼 역풍을 불러올 지경이다.
11월28일. 온라인 매체 <슬로우 뉴스>는 ‘종북 셀프 테스트’라는 게시물을 올렸다. “촛불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는가?”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민주항쟁인가?” “국정원은 개혁되어야 하는가?” 등등 모두 34개 질문을 제시하고, 정부와 새누리당의 입맛에 어긋나는 답을 하면 즉각 종북으로 판정하는 풍자물이다. 북한 문제와 관련 없어 보이는 이슈에도 앞뒤 가리지 않고 종북 딱지를 붙이는 세태를 비꼬았다.
12월1일. 보수 진영으로부터 지속적인 종북 공세를 당했던 방송인 김제동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제 고향에 관한 잘못된 정보가 많아 바로잡습니다. 저는 종북이 아니라 경북입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12월4일. 가수 백자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종북 예술제 DaJaBaGaRa(다자바가라)’ 개최를 예고했다. ‘종북몰이에는 종북놀이로’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 예술제는 12월7일 종북 콘서트, 13일 종북의 밤, 21일 종북 연극제로 이어지는 일정이다. 예술가 열다섯 팀이 참가를 확정했다.
정부 여당의 전방위 종북몰이가 임계점을 넘어섰다. 정부 여당이 규정하는 ‘종북’이 늘어날수록 기대하는 효과를 내기는커녕 말의 무게만 가벼워지는 형국이다. 종북몰이가 공포와 자기검열 대신 조롱과 패러디를 낳는다는 것은 정부 여당에 적신호다. 조롱은 종북몰이의 취약한 기반이 무너진다는 징후다.
전방위 종북몰이에 대한 여론의 피로증도 읽힌다. 12월3일자 <내일신문>은 의미심장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여론조사기관 디오피니언이 전국 성인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념 논쟁을 촉발해 편 가르는 용어는 사용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 64.7%였다. ‘자유민주질서 침해에 대한 개념으로 사용이 무관하다’는 의견은 29.5%에 그쳤다. 보수층, 국정운영 긍정평가층, 새누리당 지지층에서도 종북 용어 반대 의견이 절반을 넘겼다.
새누리당, 거의 매일 종북 공세 펼쳐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대선 평가를 담아 최근 발간한 책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박근혜 후보의 종북 프레임이 성공한 것이 대선 결과를 갈랐다고 썼다. 종북 공세가 대선 결과를 좌우할 정도로 위력이 있었다는 것이 후보 본인의 평가다. 하지만 대선 1년이 지난 지금, 종북몰이의 절대량은 늘어났으되 무게는 그때만 못하다.
정치권의 관찰자들은 정부 여당이 종북 카드를 너무 난사했다고 본다. 11월 한 달 동안 새누리당이 최고위원회의와 각종 논평 등에서 ‘종북’을 언급한 것이 27회에 이른다. 한 회의에서 여러 명이 종북 발언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실제 언급 횟수는 이보다도 많다. 사실상 매일 종북몰이를 펼친 꼴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 흥미롭다. 새누리당의 종북몰이가 가장 거셌던 시기는 올해 9월이다. 이때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사건이 터진 직후여서, 이래저래 종북 딱지를 붙이기 편한 이슈라도 있었다. 하지만 11월과 12월 들어 쏟아내는 종북몰이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민주당, 문재인 의원 등이 주된 타깃이다. 두 시기를 비교해보면 ‘정부 여당에 반대하면 곧 종북’이라는, 종북 개념의 인플레이션이 확연히 두드러진다. 11월27일자 <중앙일보>는 종북 인플레이션을 꼬집어 “그렇다면 나도 ‘종북’일까”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들고 나왔을 때, 김태흠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이 “종북구현사제단”이라고 즉각 맞받아친 장면은 상징적이었다. ‘종북 종교인’이라는 도발적인 조합을 꺼내들면서도 역풍을 걱정하거나 과속을 점검하는 기색이 없었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도 박근혜 대통령 서유럽 순방길에 만난 반정부 시위대를 종북으로 규정했다가 거센 여론의 역풍을 맞은 바 있다.
‘종북 의존증’이 심해지고, 갈수록 ‘종북 투여량’을 늘리려 하고,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고 탐닉한다. 종북몰이에 빠져들면 들수록 종북 카드의 수명이 빨리 닳는다는 점에서 자기 파괴적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전형적인 ‘중독 증세’다. 종북몰이가 잘 계산되고 관리된 전략의 궤도를 이탈해, 정부 여당에 오히려 불리할 수 있는 중독 단계에 이르렀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분출한다.
정부 여당은 어쩌다 종북 중독에 빠졌을까. 정치권 안팎의 관찰을 종합하면, 종북 중독은 세 단계의 증식 과정을 거쳤다. 국가정보원, 김기춘 비서실장이 이끄는 청와대, 그리고 새누리당의 초·재선 행동대원들이 세 축이다.
정부 여당은 어쩌다 종북 중독에 빠졌나
첫째, 국정원은 종북몰이의 발원지다. 국정원 대선 개입 댓글들의 내용을 분석해보니 ‘기승전종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모든 내용이 종북으로 귀결되다시피 했다(<시사IN> 제317호 커버스토리 참조). 올해 들어서는 남북 정상회의록을 무단 공개하고 이석기 사건을 터뜨리는 등, 궁지에 몰릴 때마다 대형 북한 이슈를 동원해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등 보수단체 회원들은 11월2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규탄 기자회견에서정의구현사제단이 종북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
국정원의 ‘북한 편집증’은 악명이 높다. 국회를 담당하는 국정원 요원 중에는, 통진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에도 상당수가 북한의 지령을 받는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한 언론사 기자는 이명박 정부 시절 “김대중도 간첩이었다”라는 국정원 요원의 말을 듣고 아연실색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편집증은 특히 정보기관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정보기관으로서는 ‘적’의 능력과 침투 범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상대를 최대한 강력하고 유능하다고 간주하는 편이 안전하다. 그래야 덤으로 자신들의 존재 가치도 올라간다. 우리 국정원만의 문제도 아니다. <뉴욕 타임스>의 안보 문제 전문기자 팀 와이너의 저서 <잿더미의 유산>을 보면, 1960년대 CIA는 소련이 미국의 모든 정보기관에 침투했다고 확신했으며(현실은 비슷하지도 않았다), 소련과 중국의 갈등도 자유 진영을 혼란시키려는 거짓 정보라고 대형 헛다리를 짚는다.
편집증은 안보기관의 숙명이다. 경계의 수준을 높이므로 어느 정도는 안보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편집증의 결과물을 그대로 국내 정치에 적용할 때다. 국정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고, 고로 정상회의록이 공개되면 여론이 압도적으로 노무현 정부 규탄으로 쏠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여론은 정반대였다. 종북몰이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흐름이 관찰된다. 국정원의 대북 인식이 한국 사회의 평균적인 인식 수준과 제법 거리가 있는 탓에, 국정원발 종북몰이는 평균적인 여론의 눈에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역효과를 내기 쉽다.
둘째, 정치권의 많은 관찰자들은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본격 종북몰이 국면으로 접어든 시점이 김기춘 비서실장 임명 이후부터라고 본다. 종북 세력과 같은 ‘내부의 적’을 설정하고 중산층의 공포를 자극해 상대를 소수파로 고립시키는 통치술(<시사IN> 제322호 커버스토리 참조)이야말로 김기춘 비서실장의 특기라는 평이다. 김 비서실장을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던 1992년 초원복집 사건에서 그가 내놓은 전략도 지역감정 자극이라는 ‘내부의 적 갈라치기’였다.
하지만 이런 갈라치기와 내부의 적 만들기는 집권 1년차 전략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가장 힘이 센 집권 1년차에 정권이 내세우는 핵심 의제를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파를 자극해 정국을 관리하는 수세적인 전략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궁여지책이다. 출판사 후마니타스의 박상훈 대표(정치학 박사)는 “종북은 ‘가짜 이슈’다. 박근혜 정부가 대선 과정에서 추인받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집행하지 못하는 허약한 정부라는 것이 위기의 핵심인데, 이를 종북 공세로 잠시 덮어두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여론과의 허니문 기간이 꽤 짧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위기의 본질은 절차적(대선 불공정 의혹)·내용적(경제민주화 대선 공약 포기) 정당성 위기인데, 원인을 치료하는 대신 종북몰이라는 진통제만 투여하는 꼴이라는 얘기다. 위기의 원인이 치유될 리 없으니 진통제 투여량만 계속 늘어난다. 그럴수록 효과는 떨어진다. 종북 중독으로 가는 길이다.
셋째, 종북몰이를 앞장서서 주도하는 행동대원들이 과속의 유혹을 느끼는 구조다. 새누리당 내에서 종북 공세를 가장 즐겨 펴는 인물로는 초선의 김태흠·김진태 의원과 재선의 윤상현 의원이 꼽힌다. 김태흠 의원은 “종북구현사제단” 발언으로 과속한 바 있고, 김진태 의원은 프랑스의 반정부 시위대를 종북으로 낙인찍다가 역풍을 맞았다. 청와대와의 교감을 과시하며 새누리당 핵심 실세로 꼽히는 윤상현 의원은 ‘종북 의원 세비지급 중단법’을 발의했다. 윤 의원은 “종북몰이라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종북 세력은 엄연한 실체 세력이다”라며, 종북몰이 피로증을 반박하기도 했다.
이들의 과속은 몸담은 세력을 곤란하게 만드는 ‘개인적 일탈’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특히 초선급 의원들에게는 전방위 종북몰이가 ‘합리적’인 생존전략이 될 수도 있다. 지난 8월23일, 김진태 의원은 한 보수 단체가 주관한 ‘자유통일 토크 콘서트’에 참석해 “새누리당에서 제가 오른쪽에서 1등이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김 의원은, 올해 4월 ‘국회 내 종북 세력 고발’ 발언 이후에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을 소개한다. “하루 5~6명이 방문하던 강원도 초선 의원 홈페이지에 1500여 명이 들어왔다, ‘이제 열심히 해야겠다, 새누리당의 체질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빨갱이’의 궤적을 압축적으로 따라가
광역단체장 후보나 대선 후보처럼 큰 선거를 준비해야 한다면 이념적 극단성은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하지만 ‘보수색 짙은 지역구를 가진,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초선 의원’ 처지에서는, 오른쪽 극단에 서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존재감이 높아지고(“오른쪽에서 1등”), 강력한 마니아 그룹이 생긴다(“하루 1500명이 들어왔다”). 너무 과하지만 않다면, 공천 눈도장을 찍는 데도 유리해진다. 의원이 재선이라는 목표를 추구한다면, 몸담은 세력에 어느 정도 부담을 주면서라도 이념적 극단성을 추구하는 전략도 가능하다.
국정원 특유의 대북 편집증, 김기춘 비서실장의 특기인 ‘내부의 적’ 만들기, 그리고 집권당 행동대원들의 ‘합리적 과속’이 어우러진 결과는 지독한 종북 인플레이션이었다. 세 주체 모두 나름의 판단 근거를 갖고 움직였지만, 세 흐름이 한데 모이니 ‘새누리당에 반대하면 모두 종북’이라고 주장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종북 중독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종북’은 과거 ‘빨갱이’가 거쳐갔던 궤적을 압축적으로 따라가고 있다. 한때 공포의 낙인이었던 ‘빨갱이’였지만, 임계점을 넘은 어느 순간부터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이 단어를 꺼내는 사람이 오히려 ‘색깔론자’로 욕을 먹는 구도가 정착되었다. 정부 여당의 종북몰이는 전략적인 수위 관리에 실패하고 중독 단계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종북 개념의 수명을 단축시키기 시작했다는 평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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