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리산인 이야기/마리산인 마음

네명의 친구들의 길

by 마리산인1324 2014. 1. 17.

네명의 친구들의 길

 

네명의 친구들이 사진을 찍습니다.

 

간도 용정의 광명중학교 친구들입니다.

왼쪽부터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와 앞에 앉아있는 정일권.

나중에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던 그들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듭니다.

친한 친구들이라 함께 사진을 찍었을 텐데...

사람의 앞날은 그 누구도 모르는가 봅니다.

 

여기에서 우선 정일권은 당시의 학교 분위기대로 학교의 추천을 받아 봉천군관학교에 들어가 일본군 장교가 됨으로써 일찌감치 자기의 양지쪽 자리를 잡아갑니다. 일제 패망시 헌병 대위였던 정일권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재빨리 변신하여,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만주교민보안대'(후에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와 '신경보안사령부'를 만들어 사령관을 맡습니다. 후에 국군에 들어와 1950년에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함으로써(34살) 승승장구하는데, 나중에는 박정희정권의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역임합니다.

 

윤동주는 194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立教大学을 거쳐 교토 同志社대학에서 공부합니다. 그러다가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년 7월 14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1944년 3월) 복역하다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합니다(1945년 2월 16일).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습니다.

 

장준하는 194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東洋大学을 거쳐 장로교 계통인 일본신학교에 입학합니다(1942년 4월). 그러다가 장준하는 일본 육군에 학도병으로 입소하여(1944년 1월) 중국 주둔 일본군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속되었고, 그 해 7월 7일 중국 江蘇省 徐州에서 탈출하여 重慶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됩니다.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23일 김구 등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여 얼마간 김구의 비서로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그후에는 잡지 '사상계'를 창간하여 시대와 사회를 깨우는 언론인으로서 활동하였고, 반독재투쟁에 앞장서다가 1975년에 박정희 정권에 의해 타살됩니다(58세).

 

마지막으로 문익환. 그는 도쿄의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1938년 입학),  나중에 학병을 피하여 만주 봉천신학교로 전학하였고(1943년), 만주 만보산한인교회, 신경중앙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던 중 해방을 맞아 1946년에 귀국하여 목사안수를 받습니다(1947년). 평범한 목사와 학자로 활동하다가 친구 장준하의 의문사를 목도하면서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에 헌신합니다. 그 가시밭길의 역사가 우리의 민족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습니다.

 

10대 어느 시절에 함께 찍은 사진을 뒤로 하고 그들의 인생은 각기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20대의 젊음을 간직한 채 일찍 세상을 떠난 윤동주를 제외하면 문익환 장준하는 정일권과 대척점에 서있었습니다.

특히 1989년 1월 18일,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난 문익환과 정일권은 매우 대조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들의 장례식도 상반되었습니다.

국립묘지에서 정치인들이 참가한 정일권의 영결식과 달리 문익환의 영결식은 한신대에서 시작하여 대학로, 동대문에 이르기까지 수십만명의 시민이 참여한 노제로 치뤄졌습니다. 우리 시대의 민중과 민족과 함께 한 큰 사람을 홀로 보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당시 광명중학교는, 기독교계 영신중학교 부속 영신소학교로 설립됐다가(1912) 재정난으로 히다카 헤이고로라는 일본인 낭인에게 넘어가서(1924년말)  은진(기독교), 대성(연길 공교회·유림), 동흥(대종교) 등과 달리 친일계 학교로 변해갔습니다. 1936년 봄 윤동주와 함께 대학진학 자격을 얻고자 유일한 5년제였던 광명중학교에 편입했던 문익환은 “일본인 선생들이 학생들을 일본 외무성 순사나 만주육군사관학교에 보내려고 혈안이 된 그런 학교였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정일권은 학교측의 추천으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