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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미안해요 베트남" -한국군 민간인 학살지역 위령제 참가기 /전쟁없는세상37호

by 마리산인1324 2014. 2. 5.

<전쟁없는 세상> 37호(20130430)

http://www.withoutwar.org/?p=7352

 

 

37호: |다녀왔습니다| "미안해요 베트남" -한국군 민간인 학살지역 위령제 참가기

조은 | 평화박물관 활동가

 

 

내가 일하는 평화박물관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죄운동으로부터 만들어졌다. 1999년 9월, 한겨레21에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들의 학살 의혹을 보도했고, 지속적인 진상 규명과 사과촉구 활동을 위해 베트남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회단체와 개인들이 모여 ‘베트남전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연대체에 위안부 할머니 두 분이 전쟁피해자를 위해 쓰라며 기탁하신 돈을 기반으로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후 평화박물관은 다양한 평화운동과 더불어 베트남에 대한 사죄운동을 꾸준히 벌여왔다.

 

2012년 겨울, 평화박물관은 회원들과 함께 베트남 평화기행을 떠났다. 그 길에서 하미 학살의 유일한 생존자 팜 티 호아 할머니를 만났다. 다섯 명의 가족을 잃고 수류탄에 두 발목이 잘려 나간 할머니 앞에서 평화기행 참가자들은 울며 손을 잡아드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한다. 한국군에 의해 하미학살이 일어난 지 45년이 지났지만 한국 사람들은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다. 그 날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올해도 평화기행을 갔다. 3월 1일부터 7일까지 5박 7일 일정으로 일본의 시민모임 KAJA의 회원, 평화박물관 회원, 평화박물관 상임이사인 한홍구 교수, 실무자인 나까지 총 30여 명이 하미 학살 45년 위령제에 참가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두 번째 평화기행을 떠났다.

 

전쟁증적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전쟁증적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하미학살 위령제에 참가하기 전에 평화기행 일정 동안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다른 마을, 박물관들을 방문했다. ‘전쟁증적박물관’에서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고엽제 피해 등 전쟁의 참상이 사진과 유물들로 적나라하게 전시되어 있고, 미군의 편에 가담해 그 전쟁에 참가했던 한국군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꽝아이성 ‘밀라이(선미)박물관’에서 전 세계에 베트남 전쟁의 더러움을 폭로하는 반전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밀라이학살을 기록을 봤다. 학살과 관련한 자료를 보며 느낀 참담함을 몇 마디 글로 차마 적을 수가 없다.

 

“.. 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적(한국군)들이 우리를 폭탄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커서도 꼭 이 말을 기억하거라...” 우리가 방문한 꽝아이성 빈호아 마을에 구전되어 불리는 자장가다. 1966년 12월 한국군에 의해 빈호아 마을주민 430명이 학살당했다. 빈호아 마을에서 만난 학살의 생존자 도안응이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학살 당시 생후 6개월 된 아기였던 그는 총탄에 쓰러진 어머니의 배 밑에 깔려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빗물에 흘러든 탄약에 눈이 멀다. 살아남은 자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피투성이 아기가 죽은 어미의 빈 젖을 빨고 있었다고 한다. 도안응이아를 포함해 빈호아 마을의 사람들은 한국군에 대한 처절한 증오가 담긴 자장가를 듣고 자란다.

빈호아 마을에는 “하늘에 가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새겨진 한국군 증오비도 서 있다. 평화기행 참가자들과 한국군 증오비 참배하고, 빈호아 초등학교에 방문해 아이들을 만났다. 전교생 400명 중 54명이 민간인학살 희생자 직계 자녀들이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에게 선물을 건네주며 웃고 뛰어놀았다. 하지만 이 아이들도 듣고 자랐을 증오가 담긴 자장가, 아이들이 커서 자녀들에게 들려줄지 모르는 자장가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하미마을학살 45년 위령제


“이딴 거 필요 없어. 다 필요 없어! 우리 엄마 살려내!”

 

당 티 코아와 KAJA의 김경남 선생님

당 티 코아와 KAJA의 김경남 선생님

 

차마 빈손으로 갈 수 없어 준비한 선물이었지만 그녀는 선물을 받지 않았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하염없이 울었다. 선물이 든 종이백은 여전히 평화기행 참가자의 손에 들린 채 갈 곳을 잃었다. 곁에 있던 주민이 도닥였지만 그녀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모두 어찌해야 할지 모르던 그 순간. KAJA의 김경남 선생님이 그녀에게 말없이 다가가 그녀를 꼬옥 안았다. 그리고. 그 둘은, 같이 울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위령제의 사람들 모두 조용히 울었다. 울음은 공명했고, 사람도 비석도 하늘도 땅도,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존재가 우는 것만 같았다. 하미학살 위령제에서 있었던 일이다.

 

1968년 1월 12일. 한 살에서 여든 여덟 살까지 모두 135명의 하미마을 사람들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했다. 희생자는 주로 노인, 여성, 어린 아이였다. 마을 사람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총을 쏘아 죽이고 매장했다. 2012년 평화기행단이 만났던 하미마을의 팜 티 호아 할머니 또한 학살의 생존자다. 전쟁 당시 할머니는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로 자신의 가족을 모두 잃고 당신도 수류탄에 두 다리를 잃었다. 사건 당시 마을을 떠나 있어 화를 면한 할머니의 큰 아드님은 전쟁 이후 농사를 짓다 잘못 건드린 지뢰에 두 눈의 시력을 잃어버렸다. 이런 식으로 학살당하거나 다치고, 고통 받은 사람들이 하미마을에는 너무나 많았다.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100명이 넘는 사람이 학살을 당했으니 학살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없었다.

 

"1968년 음력 1월 24일 학살당한 135명의 동포들을 기리다"라고 시작하는 비문은 지금 저렇게 연꽃 문양에 덮여 있다.

"1968년 음력 1월 24일 학살당한 135명의 동포들을 기리다"라고 시작하는 비문은 지금 저렇게 연꽃 문양에 덮여 있다.

 

마을에는 큰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2001년 한국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지원으로 건립된 하미 위령비다. 학살의 가해자인 한국 참전군인들의 지원으로 세워지는 위령비는 건립 당시 대내외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위령비의 완공을 눈앞에 두고 학살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비문에 대해 위령비 건립을 지원한 한국 참전군인들이 반발을 했다. 비문 수정을 강하게 요구한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비문건립의 경제권은 한국 참전군인에게 있었다. 결국 학살의 참상을 담은 비문 위에 연꽃그림이 덮여졌다. 한국 참전군인이 피해자들과 그들의 가족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대못을 박은 셈이다.

 

이 위령비 앞에서 위령제를 지냈다. 200여 명의 마을사람과 평화기행단 30여 명이 한국군에 의해 희생당한 135명의 민간인을 추모하는 45년 위령제에 참가했다. 지난 수십 년간 하미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고 ‘따이한 제사’를 올려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희생자들을 추모했지만 그 동안 한국인들은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참여하게 된 하미학살 위령제였다. 한국의 제사와는 다른 옷, 다른 형식이었지만 숙연한 분위기는 같았다. 절차에 맞춰 천천히 제사를 지내고, 사람들이 돌아가며 위령비 앞에서 향을 피웠다. 나도 향을 들고 위령제 앞에 섰다. 마을에 세워진 위령비의 전면에는 135명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출생년도가 모두 새겨져 있다. 희생자 명단의 1968년 학살이 일어난 바로 그 해에 태어난 갓난아기들도 있다. 눈을 감고 향을 들어올린다. 내린다. 올린다. 내린다. 향을 향대에 꽂으며 위령비를 바라본다. 눈앞의 위령비가 아득하다.

 

하미 학살 45주기 위령제-평화기행 한국 참가자들이 분향하고 있다.

하미 학살 45주기 위령제-평화기행 한국 참가자들이 분향하고 있다.

 

위령제가 끝나고 마을주민들이 준비해 온 음식을 다 같이 먹으며 음복연을 했다. 위령제 때의 엄숙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시끌벅적한 음복연이었지만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주민들이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 외에 어떤 위로도 건네기 힘들었다. 옆 테이블에 위령제 중간에 선물을 건네다가 받지 않고 오열했던 주민이 있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화사하게 웃던 그녀는 그 자리에 있는 한국 참가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미안해. 안 울려고 하는데… 울어서 미안해” 그녀의 이름은 당 티 코아. 학살당시 세 살이었던 그녀는 한국군에 의한 학살로 일곱 명의 가족을 다 잃고 홀로 남았다.

 

하미마을 위령제 이후 남은 일정을 어떻게 소화했는지 모르겠다. 머리를 둔탁한 것으로 맞은 느낌이 지워지질 않았다. 마음이 무겁고 몸은 아팠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책과 기사로 접했을 때도 슬픈 기분이 들었지만 몸이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민간인 학살마을을 방문하고 생존자분들을 직접 만났던 경험이 내 몸 어딘가에 아프게 각인됐다.

 

일본이 한국에 침략과 만행을 저질렀듯이 한국 또한 베트남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에게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기 이전에 한국은 베트남 민간인학살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사죄해야 한다. 하지만 베트남 학살사건이 한국에 공론화됐을 때 참전군인은 학살사건을 보도한 한겨레 사옥에 쳐들어가 말 그대로 ‘쑥대밭’을 만들었고, 한국 정부 또한 베트남 학살지역에 별다른 관심과 지원을 갖지 않았다. 시민들이 모금을 하고 슬퍼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관심은 줄어들고 잊혔다. 나 또한 평화기행을 가기 전까지 잊고 있었다.

 

잊힌 전쟁은 반복된다. 한국에서 베트남전쟁은 잊히지 않아야 한다. 연꽃에 갇힌 비문이 다시 세상에 드러날 때까지 베트남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

 

- 박치음 작곡 「미안해요 베트남」-
아름답게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신과 마주선 곳은 서글픈 아시아의 전쟁터

우리는 가해자로 당신은 피해자로

역사의 그늘에 내일의 꿈을 던지고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베트남

어둠 속에서 당신이 흘린 눈물 자욱마다

어둠 속에서 우리가 남긴 부끄런 흔적마다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베트남

어떤 변명도 어떤 위로의 말로도
당신의 아픈 상처를 씻을 수 없다는 거 알아요
그러나 두 손 모아 진정 바라는 것은
상처의 깊은 골 따라 평화의 강물 흐르길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베트남
어둠 속에서 당신이 흘린 눈물 자욱마다
어둠 속에서 우리가 남긴 부끄런 흔적마다
미안해요 배트남 미안해요 베트남

 

* 베트남 평화기행은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의 구수정 선생님이 안내를 해주셨다. 구수정 선생님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을 밝히고 공론화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힘써왔다. 아맙 홈페이지(http://cafe.daum.net/doanhnhanxahoi)에 가면 베트남 민간인 학살지역과 관련한 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