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14.01.17 19:17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20251.html
읽지 말라. 대한민국 메가와티
- 정문태 -
2001년 7월23일 밤 9시30분, 정적인 압둘라만 와히드 대통령을 탄핵하고 부통령에서 대통령 자리를 승계한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는 대통령 취임 정견 발표장에서 5분 동안 연설문만 뚝딱 읽고는 자리를 떴다. 로이터 뉴스1 |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⑮ 대통령과 기자회견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을 놓고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대통령이 되고 열달 동안 기자회견 한 번 않던 불통 대통령이 장관 참모들을 줄줄이 거느리고 등장했다는데, 미리 질문자를 정해놓고 질문지를 받아 간 뒤 회견 내내 만들어 온 모범답안을 봐가면서 읽었다고도 한다. 대통령이 좋아한다는 그 원칙을 따지자면 눈꼴사나운 일이긴 한데 사실은 청와대뿐 아니라 다른 나라 대통령실도 심심찮게 그렇게들 해왔다.
그렇더라도 대통령 태도는 문제다. 미리 짰다면 죽어라고 예행연습이라도 해서 적어도 기자회견에서 답안지를 읽는 남세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말았어야 옳다. 외신까지 붙었으니까 나라 안팎으로 부끄러운 꼴을 보인 셈이다. 한 나라 대통령이 자신의 철학과 국정을, 그것도 기껏 80분짜리 짜놓은 기자회견을 답안지 없이는 끌어가지 못한다? 자질과 능력 같은 건 따질 것도 없고 이건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다. 대통령이 시민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집무 시간이 끝나고 관사로 돌아가서도 국정을 챙기고 국민을 생각한다”고? 근데, 국민에게 국정을 밝히는 그 기자회견 준비마저 제대로 못해 답안지를 읽었는데? 그것도 매일 하는 기자회견이 아니라 10개월 만에 나타나서는.
압둘라 바다위를 닮은 인해전술
외신판에서 20년 넘도록 온갖 기자회견을 봐왔지만 답안지 읽는 대통령이나 총리를 본 적은 없다. 대통령이 뭔가? 시민들이 먹고살기 바쁘니까 월급 줘가면서 대신 정부라는 조직을 운영하라고 고용한 5년짜리 비정규직 대리인이다. 그런 대통령이 시민을 향한 기자회견에서 답안지를 읽었다는 건 주인들 앞에서 태업을 한 꼴이다. 불통의 아주 새로운 유형이다. 우린 너무 오랫동안 대통령을 너무 관대하게 대접해 왔다.
대통령의 소통, 아주 간단하다. 기자들과 말문을 트면 된다. 이 세상 대통령과 시민사회는 모두 기자들을 가운데 놓고 거뜬히 의사를 주고받아 왔다. 내가 봐온 대통령과 총리들도 다들 그렇게 애썼다. 내키지 않아도 흉내만큼은 열심히들 내는 걸 봤다. 심지어 독재자 반열에 오른 캄보디아 총리 훈 센도 기자들이 동선을 쫓아 어디서든 매복 인터뷰로 붙들어 세울 수 있을 정도다. 말이 난 김에 오늘은 내가 마주 앉아본 대통령이나 총리나 야당 최고위급 정치인들을 놓고 청와대 불통과 비교해 볼까 한다. 미리 밝히지만 여전히 논란거리인 그 대상들의 정치적 이념이나 공과는 해당 시민사회가 판단할 몫으로 넘겨 두고 여기서는 언론관이나 소통법 같은 걸 따져 보기로.
불통부터 보자. 언론을 패대기친 최악 불통으로 나는 2001년 7월23일 자카르타의 밤 9시30분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날 정적인 압둘라만 와히드(압두라만 와힛) 대통령을 탄핵하고 부통령에서 대통령 자리를 승계한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는 대통령 취임 정견 발표장에서 5분 동안 연설문만 뚝딱 읽고는 자리를 떴다. 그 탄핵정국 일주일 동안 국민협의회(국가 최고의사결정기구) 바닥에서 먹고 자며 지새웠던 내외신 기자들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메가와티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사라졌다. 세계적인 불통 대통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첫날부터 언론과 담을 쌓았던 메가와티는 임기를 마치고 1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기자들 사이에 우스개 감이 되고 있다. 대통령이 그러니 인도네시아 정부조차 조롱거리가 되었던 시절이다. 아버지 수카르노 대통령 후광에 매달렸던 그 메가와티와 함께 이미 불통 쌍벽으로 외신판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는 대통령 박근혜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파키스탄 전 총리 베나지르 부토나 버마 야당을 이끄는 아웅산 수찌도 불통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들이다. 다만, 불통에도 종류는 있다.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두 불통 대통령이 답안지 없이는 언론 앞에 나설 수 없다면, 그 둘은 연설이든 기자회견이든 외신 인터뷰든 고개를 박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이들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사회·경제 관련 복잡한 데이터를 줄줄줄 풀어내며 냉정한 눈길로 기자들을 쏘아붙이는 태도는 평소에 그만큼 치열하게 공부해 왔다는 신호다. 그게 바로 그이들이 지닌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나는 그런 능력을 타고난다고 보지 않는다. 무지를 침묵으로 위장한 허튼 카리스마를 내세우는 불통들과는 다른 까닭이기도 하다.
최악 불통으로 기억되는
인도네시아 대통령 메가와티
대통령 취임 정견 발표장에서
5분 동안 연설문만 읽고 퇴장
외신 기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해박한 지식, 도도한 자신감의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
소통의 진수 인도네시아 와히드
촌철살인의 타이 추안 릭파이
불통과는 정반대 인물들
여기서 또 하나 짚어볼 대목이 나온다. 이번 신년 기자회견 때 대통령이 참모들을 수두룩 끼고 나타난 행태다. 혼자서는 겁이 났거나 아니면 세를 과시하고 싶었거나 아무튼, 대통령 속내야 알 길이 없지만 뭐가 됐건 결국 자신감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폭로한 꼴이다. 그런 건 대통령 기자회견치고는 아주 낯선 풍경이다. 지금껏 그런 희한한 풍경과 딱 한번 마주친 경험이 있다. 2004년 말레이시아 전 총리 압둘라 바다위 단독인터뷰 자리에서다. 시민들 사이에 온화한 미소로 소문난 바다위는 총리실 특보와 외교부 관련자 10여명을 낀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와서 시종 굳은 표정을 지었고 대답 때마다 참모들에게 눈길로 데이터를 확인하는 통에 가장 재미없던 인터뷰 기억으로 남아 있다. 대통령이나 총리 단독인터뷰 자리란 건 대개 비서나 특보 한 명쯤에다 공식 사진사와 기록원이 멀찍이 앉는 게 다다. 오히려 바다위의 전임 총리이자 독선과 독설로 이름 날린 마하티르 모하맛은 인터뷰 자리에 앉아 보면 진가가 드러나는 경우였다. 동서고금을 꿰뚫는 해박한 지식과 정연한 논리에다 비판적인 질문에도 미소로 받아치며 분위기를 끌어가는 그이와 마주 앉아본 외신기자들은 저마다 마하티르의 그 도도한 자신감이 말레이시아라는 나라를 다시 보게 만든다고 입을 모았다. 국가대표 정치인으로서 얼마나 지독하게 공부하고 준비했는지 좋은 본보기가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마주 앉아본 정치인들 가운데 불통들은 공통점을 지녔던 것 같다. 인터뷰에서 비판적인 질문에 삐치거나 흥분했던 이들이다. 그게 타이 전 총리 탁신 친나왓이었고 아피싯 웨차치와였고 메가와티였고 아웅산 수찌였다. 그 인물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 언론을 하찮게 여기거나 통제 대상쯤으로 다뤘다는 점이다.
‘대통령출입기자단’이라는 한솥밥
소통, 이 분야에서는 인도네시아 전 대통령 압둘라만 와히드가 단연 돋보였다. 독재자 수하르토의 32년 침묵에 신물 났던 시민사회는 첫 민주 선거로 대통령이 된 와히드를 향해 “정부가 오늘은 뭐 하는지 내일은 뭘 할지 알려주는 게 가장 속 시원한 업적”이라며 열광했다. 의전이나 형식을 제쳐놓고 늘 시민사회에 직접 정보를 전달하고자 애썼던 와히드는 비록 수하르토 잔당들과 기득권층에 밀린 소수당 한계를 넘지 못해 임기 중 탄핵당한 대통령으로 끝났지만 그이가 보여주었던 소통 의지만큼은 아시아 현대정치사에 소중한 경험으로 기록할 만하다. 그 무렵 정적들은 와히드가 대통령 권위에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지나치게 쏟아낸다며 그것도 탄핵 사유 가운데 하나라고 몰아붙였다. 비슷한 시기 노무현 탄핵 정국에서 야당과 한국 언론들이 써먹었던 무기와 어쩌면 그렇게 빼닮았던지.
촌철살인 연설로 이름난 타이 전 총리 추안 릭파이도 소통에서만큼은 일가견을 보였다. 언제 어디서든 기자들이 질문을 던지면 가던 길을 멈추고 대꾸해온 추안은 긴 정치 여정에서 누구보다 우호적인 언론을 달고 다닌 정치인이다. 내외신을 통틀어 웬만해선 추안을 해코지하는 기사가 뜨지 않았던 까닭이다. 외신판에서는 20년 전 야당 대표 시절 인터뷰했던 외신기자들에게 대통령이 되고도 연하장을 띄웠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그런 작은 정성이 바로 소통법이고 그게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김대중을 각인시킨 동력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쯤에서 불통 대통령만 탓할 게 아니라 우리 언론판도 되돌아볼 때가 됐다. 출입처 제도다. 나는 이 제도가 대통령을 시민으로부터 격리시켜온 주범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출입처 제도란 건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뿌리를 두고 독재정부들에서 언론통제 도구로 무럭무럭 자라난 아주 전근대적인 폐습이다. 그동안 나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쪽 수많은 정부를 취재해 왔지만 어디서도 출입처 제도에 발목 잡힌 적이 없었다. 시민을 대신해 정부 감시 기능을 지닌 언론과 정부는 필연적으로 적대관계여야 정상이다. 근데 출입처 제도 아래서는 그런 기능도 관계도 온전히 작동할 수 없다. 기자들 앞에 ‘청와대출입기자단’ 같은 이름이 붙는 순간 독립적인 취재는 끝장나고 만다. 그 ‘단’ 속에서 기자와 취재원이 한솥밥을 먹고 한 술잔을 돌리는 패거리의식에 사로잡힌 채 정보를 주고받는 아주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져 왔다. 그 ‘단’을 배신하면 동료 기자들 사이에 외톨이가 되거나 취재원으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없거나 심지어 출입 자격까지 박탈당하는 조폭문화와 다를 바 없는 제도 밑에서 일탈을 노릴 만큼 간 큰 기자는 흔치 않다. 그러니 청와대기자단에게 “자유로운 질의응답이 아니면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을 거부하겠다며 왜 달려들지 못했냐?”고 묻는 건 너무 가혹한 짓이다. 대통령은 바로 그런 제도 아래 숨어 마음껏 불통을 부릴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언론이 잃은 건 개성이고 남은 건 담합뿐이다. 그 많은 신문과 방송이 똑같은 뉴스로 매일 도배해온 까닭이다.
우리는 왜 다른 나라 신문이나 방송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대통령이 말하기를…,” “대통령 말에 따르면…,” 같은 뉴스를 받을 수 없는가? 왜 우리는 허구한 날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익명을 요구한 청와대 참모는…,” 같은 희한한 말로 대통령 심사와 국정을 읽어야 하는가? 대통령이 벙어리가 아니듯이 시민은 점쟁이가 아니다. 근데 왜 우리는 늘 아무개 심복들이 흘리는 말을 통해 골치 아프게 대통령 심중을 짐작해야만 하는가?
정부와 언론이 제 손으로 풀지 못할 문제라면 주인인 시민이 나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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