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신문> [1223호] 승인 2014.02.14 11:33:00
http://www.ok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2168
120년 전 갑오동학농민혁명 주역은 '마을'
사상적 기반 동학 있었지만 30만 민중 봉기는
강한 자생력·자치력 지닌 '마을조직' 있었기에 가능
<편집자주> 올해는 반봉건ㆍ반외세를 기치로 일어선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주년, 60갑자가 두 번 돌아 다시 갑오년이 된 해입니다. 지난 10일에는 동학농민혁명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들려 줄 한 역사학자가 우리고장을 찾았습니다. 바로 한겨레신문에 '역설'(歷說)'이라는 역사칼럼을 오랫동안 연재한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가 그 주인공입니다. 옥천은 동학과도 각별한 인연을 지닌 고장입니다. 동학 제2대 교주이자 1894년 당시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 선생이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촉구하며 재기포령을 내린 곳이 바로 우리고장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 일대이기 때문입니다. 2014년, 옥천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에 옥천을 찾아 120년 전 그 때의 이야기를 들려 준 백승종 교수의 강연내용을 간추려 독자들에게 전합니다.
▲ 10일 안남면을 찾아 '동학농민혁명 120주년과 농업'을 주제로 강연을 펼친 역사학자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대우교수 |
중요한 것은 조병갑의 부패 정도에 대한 조정의 인식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같은 '부패에 대한 조정의 인식 수준'에 매우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부패지수가 높은 편이지만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9세기 말 역시 부패에 대한 인식 수준이 굉장히 낮았다. 그러니 혁명 당시 처벌받은 사람도 혁명이 진압된 후에는 승승장구해 관료 생활을 마무리하지 않았나. 함양군에 가면 고부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군수 생활을 한 조병갑의 송덕비가 아직도 서 있다. 게다가 조병갑은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는 비를 만든다고 고부 농민들에게 논 100마지기에 해당하는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그 아버지의 비조차 아직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에 탐관오리가 고부에 와서 한 행동이 문제가 되었다면 왜 온 호남 지역뿐만 아닌 경상도, 황해도까지 들썩였겠는가? 부패관료 한 명의 학정 때문이라면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그럼 진짜 이유는 무엇이냐? 19세기 당시에는 워낙 문제가 많았다. 특히 가렴주구, 농민수탈이 극에 달해 있었다. 게다가 전라도 경우는 그 피해가 특히 컸다. 문헌을 살펴보면 국가 전체 세입의 50%가 약간 넘게 전라도에서 나왔다. 사실상 조선이라는 국가는 전라도에 의지해 유지됐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을 정도다.
국가가 세수를 늘리면 늘릴수록 죽어나는 것이 전라도 농민이었다. 그곳 농민이 훨씬 저항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백했던 것이다. 중앙정부에선 전라도 양반들의 세를 약화시키고 각개 격파하는데도 관심이 컸다. 왜냐하면 전라도 양반의 힘이 약해져야 수탈이 쉬워지기 때문이다. (조선 선조 때 전라도 지역 양반이던) 정여립의 난에 가담하지 않은 양반도 많았지만 그 난을 빌미로 전라도 양반을 집단 체벌하기 시작했고 영조 때가 되면 경상도 지역 양반을 집단 체벌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전라도는 특히 심했다. 어쨌든 전라도 양반들은 다른 지역보다 조정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앞서 말했듯 농민들도 불만이 많았다. 그런 만큼 양반과 농민이 짝짜꿍 할(농민혁명을 일으킬 동력을 함께 마련할) 가능성이 많아지는 것이다.
제가 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조정의 섣부른 개방정책이었다는 점이다. 현재도 한국 농촌의 문제는 우리의 식량자급률이 낮다는 것과 가장 직접적 관계가 있을 듯하다. 우리나라 농민들의 능력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다. 다른 외부적 요인, 바로 무분별한 시장개방에 있다. 예전에는 제주도의 경우 귤나무 한 그루면 자식 대학도 보낸다고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다 뽑아내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오늘날 한국정부가 잘못된 개방정책, 농민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개방정책을 취했기 때문이다.
▲ 10일 안남면을 찾아 '동학농민혁명 120주년과 농업'을 주제로 강연을 펼친 역사학자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대우교수 |
한 가지 사례만 들자면, 1920년대가 되면 국가적인 대지주가 한 명 나온다. 바로 김성수 일가다. 김성수 일가의 경우 (19세기 말) 쌀 수출이 시작되기 전에는 재산규모가 200석 정도였는데 1908년이 되면 8만석이 된다, 한 세대 만에 재산이 400배로 확대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나? 쌀 수출이란 것이 일종의 투기종목임을 보여준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가장 큰 진원지는 전라도였다. 왜냐하면 개방정책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고종과 명성왕후는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그들은 부국강병을 위해서 개방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리고 개방을 위해서는 국고가 비어선 안 되기 때문에 세금은 계속 늘려야 했고 그것에 고통 받은 것이 농민이었다. 국가 자체가 오직 농민을 수탈하기만 할 뿐, 농민의 생산수단과 소비능력을 보호하거나 하지 않았다. 자신들만의 부국강병을 위한 개방뿐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농민들이 외친 갑오농민혁명의 구호가 바로 '척왜척양(斥倭斥洋)'이었다. 당시 농민들 입장에선 경제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선 외세를 배척할 수밖에 없었고 서울 양반들, 부자들을 혼내줘야겠다 생각했다. 그들 양반이 외세와 한 통속이고, 그놈들이 우리를 팔아먹고 배신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빼앗아 가고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120년 전 우리 할아버지들은 안녕하지 못했고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은 동의하지 않으면 모이지 않는다. 농민혁명에 그 많은 농민들이 모인 것은 '동의'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리어 나빠지는(약화되는) 것이 되게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소농중심사회'이다.
18~19세기 당시의 농민들은, 적어도 제 판단에는 지금의 농민 삶보다 훨씬 나았다. 못하지가 않았다. 심지어 1894년 당시에도 소농들은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처지가 나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는 것이 '오죽이나 못 먹고 못 먹었음 들고 일어났겠는가?'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 아주 상황이 나쁠 때 사람들은 가만히 있게 된다. 굶어 죽을까봐.
문제는 그럴 때가 아니라 '기대 수준과 현실의 차이'가 혁명을 만드는 것이다. 기대 수준은 높은데 현실이 그것만 못하면 사람들은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조직이다. 조직 없이 되는 것은 없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직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완강한 조직력이 깔려 있었다. 그 조직 중에선 마을조직이 가장 중요했고 마을조직은 노동조직과 오락조직이 결합된 '두레'와 마을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결합된 것이었다. 표현은 동학조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의 실체는 '마을조직'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조직적 기반이 아무 마을에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한국에 있었고 평야 지역을 중심으로 있었다. 마을조직은 18~19세기가 전성기였다, 그 전에는 감히 양반들과 분리된 별도의 조직을 만들지 못했지만 18~19세기에는 양반의 장악력이 떨어졌고 농민들은 집단노동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것과 함께 평민 중에도 지식인이 생겨나면서 좋은 조건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라도가 먼저였고 충청도와 경상도도 결국 그런 추세를 띄기 시작했다.
그런 풀뿌리 자치력, 소농들의 자치력이 가장 강했던 때가 18~19세기였고 그 증거로 마을의 평민조직들이 남긴 문서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가령 마을조직이 비단으로 만들어진 마을 깃발을 마련한다거나 마을 토지와 같은 공동 재산을 마련했다는 것 등이 그 근거다. 사실 소농 중심의 마을들이 자치력을 갖게 된 것은 정부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당시엔 마을단위로 세금을 납부하다보니 국가에서도 그런 평민조직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평민도 양반들에게 무작정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세를 늘려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가 반칙을 할 때 발생한다. 이 국가가 세금을 슬금슬금 높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농민들도 어느 정도까진 감당하다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폭발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19세기 후반 들어, 가령 1860년대 임술민란과 같은 대규모 농민항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다. 마을의 조직이 성장했고 처음엔 국가도 그 조직을 인정했지만 나중에 이를 국가가 착취 하려하자 마을이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후반부로 갈수록 해마다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가적 수탈을 견디는데도 한계가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고 농민조직의 전성기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조직의 전성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인 것이다.
30만 농민봉기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철저히 소농중심의 마을조직이 건재했고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항의 조직적 유지가 가능했다. 당시엔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 도와주고 없는 사람도 있는 사람 앞에서 크게 굴욕감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마을 주민 사이의 계도 많았고 부자들의 베풂도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당시 부자들의 집 구조만 봐도 안다. 한국 양반들의 집은 그것이 아흔아홉 칸 일지언정 개방적이고 외부 침략을 고려하지 않은 집 구조이다. 바로 (나눔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요즘 사회에선 도둑놈들(편집자주_부자들)이 감시카메라 다 설치하고 산다.(웃음)
당시의 한국 사회는 빈부 차는 있었지만 공존할 수 있는 사회였고 자급자족중심의 소농중심 사회였다. 한국에선 상업과 공업의 발달이 대단히 느린 속도로 진행된다. 이웃 중국ㆍ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느린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우리 사회가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운 것이 절대 아니다. 그것이 우리사회의 자랑이다.
18~19세기의 한국 사회는 비록 지주제 하에 있었지만 중국이나 일본과는 아주 다른 형태의 지주제가 유지되었다. 소농들은 지주의 땅을 붙여먹다 소작료를 못 내면 도망가서 딴 동네 가서 살면 됐다. 그렇다고 그것을 끝까지 붙들어 처벌하거나 하지 않았다. 한국사회는 그런, 나름의 평화와 공존ㆍ공생의 사회였다. 높은 인구밀도가 그것을 증명한다. 한반도의 인구밀도는 지금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도 높았다. 이 말은 조선사회가 지속가능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소농중심이지만 소농이 자치권을 가진, 중앙정부와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저항 할 수도 있었고 비록 신분제 사회였지만 그들의 신분이 소농들에게 폭력으로까지 다가오진 않았다. 19세기 전반까지 큰 민란이 없었던 것이 이를 증명하고 그것은 성리학적 가치가 우리 사회를 운영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부터 이러한 사회적 합의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 개방정책이 수행되면서 사회가 완전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시간을 150년, 200년 전으로 돌려 돌아가고 싶다.
지금 우리는 조직이 없다. 우리는 철저한 개인, 모두가 소수자가 되어버렸다. 지금 정부 관료의 머릿속에는 소농이 없다. 소농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가 계속되었지만 해방 이후 빠르게 문화적, 언어적 정체성을 복구할 수 있었다. 바로 소농 중심의 농촌사회 덕분이다.
일제가 그렇게 오래 지배했어도 그 시대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일본인들은 유령과 같았다. 국민의 8% 정도만이 일본말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나머지는 한국말만 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촌에 살았고 '우리 마을에서 우리 식으로 우리말'을 하고 살았다. 제 말의 핵심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정책도 마을의 벽을 뛰어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처럼 마을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은 굉장히 강한 자생력을 가진 집단력을 마을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 자생력, 자치력을 일본은 면사무소를 설치하면 깰 수 있으리라 봤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마을이 지금 우리에겐 있는가? 이장은 있는데 마을이 없다. 마을이 마을이기 위해서는 '순환'이 있어야 한다. 연령별로 정상적인 분포곡선이 있어야 하는데 다 늙어 죽어가기만 한다면 그것은 마을이 아니다.
그런 자치력을 가진 마을을 누가 없앴나? 바로 산업주의자들이다. 과잉산업화를 외쳤던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지배 세력들이 철저하게 마을을 말아먹은 것이다. 이것을 살려야 한다. 1894년 일어난 농민들에겐 마을이 있었고 (사상적, 정치적) 대안이 있었다. 바로 '동학'이다.
그렇다. 19세기 말 우리의 소농들에게는 동학이라는 대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총체적 대안이 있는가? 당시 자발적으로 동학의 문을 두드린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고 동학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성공할 가능성이 컸다. 그들은 전략이 있었다. 그러니까 관군으로는 동학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당시의 왕인 고종은 외세를 불러일으켜 동학군을 때려잡은 것이다. 고종이나 명성왕후, 그들이야말로 망국의 장본인이 아닐까. 임오군란으로 이 땅 한반도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떠나자 일본군이 들어오고 그들이 나가니 미군이 들어온 것 아닌가. 헌 단추는 완전히 뜯어내고 새 단추를 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1960년 이후 산업화를 거치며 정권은 자치력을 가진 마을은 중앙정부의 하수조직으로 만들었고 자치의 수장인 마을이장을 정부의 말단일꾼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하지 않겠나.(끝)
▶백승종: 역사가, 전 서강대학교 교수, 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대우교수, 독일 튀빙겐대학교 철학박사
▲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 근처에 세워져있는 동학 유적지 안내판 |
◆ 우리고장 청산과 동학농민혁명 |
▲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각지에서 몰려 든 농민군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해지는 청산면 한곡리 문바우골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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