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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 262호, 2009년 11월호

http://www.dhamul.co.kr/buksori/news_view.php?type=2003111618064600&ho=2009110315493160&ind=3074

 

 

 

 다시보는 안중근의 사상(思想)

러일전쟁을 인종 전쟁으로 파악…동학 봉기도 폭도로 이해

 

장석흥 (국민대 사학과 교수)

 

 

안중근의 사상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다. 안태훈은 해주의 수천석지기 집안으로 일찍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서세동점의 격변기에서 전통 유학(儒學)에만 머물지 않고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에도 앞장섰던 인사였다.

 

그는 박영효(朴泳涍) 등 갑신정변 개화파들이 추진한 일본 유학생 선발에 뽑힐 만큼 개화 성향을 지녔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극심한 탄압을 피해 1885년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의 청계동으로 이주하였다. 안중근의 소년 시절 삶의 터전이었던 청계동은 백범 김구가 안태훈의 배려로 일시 우거했던 곳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소년 접장이던 백범과 달리 안태훈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던 갑오의려를 일으켜 반대편에 섰던 인물이다. 안중근 역시 16세의 어린 나이에 갑오의려의 선봉에 섰다. 그럼에도 안태훈은 백범과 백범의 부모까지 보살피는 넓은 아량을 지니기도 했다. 안태훈의 반동학적(反東學的) 태도와 인식은 개화적 성향과 기득권층과 피지배층과의 사회경제적 관계가 복합된 것으로 이해된다. 개화와 동학의 상반된 입장은 이념적 지향의 차이에서 오는 피치 못할 갈등이기도 했다.

 

개화가 서구의 논리를 수용, 추구하였던 것에 비해 동학은 외세를 배척하고 전통논리에 의해 반봉건의 구현을 모색했던 점이 달랐다. 때문에 양자의 현실적 대응은 상반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개화의 입장에서는 동학군의 봉기를 민란 내지는 폭도 이상으로 보지 않았으며, 이같은 인식은 안중근이 훗날 저술한 자서전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안중근의 문명개화론적 지향은 천주교와의 만남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그의 천주교 입교는 역시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안태훈은 1897년 1월 프랑스인 빌렘 신부를 초빙하여 안중근과 가족 등 36명을 영세받게 하니 이때 안중근의 나이 19세였다. 안태훈 부자의 천주교에 대한 열의는 지극하여 청계동은 곧 황해도 포교사업의 지휘부가 되었다.

 

●‘일본의 근대화’ 긍정적으로 수용

 

전도활동에 열중하던 안중근은 1900년경 인재 양성 및 포교를 위해 ‘천주교 대학’을 서울에 설립할 뜻을 가졌다. 그러나 안중근이 구상한 대학 설립의 계획은 뮈텔 주교를 비롯한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 단호하게 거절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한국인이 학문을 하게 되면 믿음이 좋지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대학 설립의 승낙을 얻고자 계속 설득해 보았지만 끝내 외국인 신부들이 반대함으로써 대학 설립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한국인들의 근대화 내지 변화에 대하여 프랑스 신부들의 부정적 시각을 확인한 안중근은 이후 외국인 신부들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외세의 침략 가운데 러시아를 가장 경계하였다. 그것은 그의 표현대로 ‘백색인종’에 대한 경계심이기도 하지만 러시아가 한반도를 침략하게 되면 한국의 처지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간직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족사진, 부인 김아려씨와 장녀 현생(오른쪽),차남 준생의 모습이다.

 

사실 안중근은 러일전쟁 때까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과 본질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러시아가 남하하여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여순항을 군항으로 삼아 한반도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그는 한국이 자력으로 러시아의 침략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보았다.

 

때문에 그는 러일전쟁을 일본이 한국을 대신하여 러시아와 싸운 것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한국분할을 제의하게 되고 또 그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러시아에 대한 위기 의식은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러시아가 의화단 토벌을 이유로 한국 북부지방에 침투를 기도하자 한국 지식층에서는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고자 한일 양국의 제휴 내지 연대를 통한 방어를 적극 모색해 갔다.

 

그는 러시아를 도덕을 잃고 무력으로 경쟁하는 서양 세력의 대표로 인식하였으며 부동항을 얻기 위하여 동양을 넘보는 침략세력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러일전쟁의 본질을 황인종과 백인종의 싸움으로 또 한국을 침략하는 러시아에 대항하여 동양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본이 대행하여 전쟁에 참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러일전쟁 때 일본이 동으로 블라디보스토크와 남으로 하얼빈까지 혁파하여 러시아를 완전히 굴복시켰어야 했다고 할 정도로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였고 일본에 대해서는 굳은 신뢰마저 가지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백인종 대 황인종의 대결로 부각되면서 인종주의적 전쟁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비단 안중근의 경우뿐 아니라 당시 계몽주의 계열의 지식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 성향이기도 했다.

 

●한때 상하이 망명도 계획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본질을 인식한 그는 구국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하였다. 러일전쟁이 마무리되던 1905년 4월 일본은 각의에서 ‘한국보호권확립’을 결의하였고 그해 8월 2차 영일동맹과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한국의 보호국화가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제의 한국 침략 야욕은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다.

 

안중근은 이 무렵 서울에 머물면서 일본의 노골적 침략 만행을 분명하게 목도하였다. 그리고 국제질서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 세상이고 만국공법은 실력이 없는 나라에는 무력한 것임을 통감하였다. 그리고 안중근의 행동하는 지성은 문명개화적 지향에서 탈피하여 강렬한 구국의식으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이때 그는 ‘시기는 늦었으나 열심히 하면 다른 사람보다 앞설 수 있다’는 신념하에 구국의 적극적 방도를 모색하였다. 잠시 상하이 망명도 계획했지만, 안중근은 상하이에서 귀국한 뒤 1906년 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우며 교육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서북학회에도 가입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이 무렵 접한 안창호의 연설은 안중근의 구국의식에 불을 댕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07년경 안중근의 의식은 계몽운동으로는 스러져가는 국운을 바로 잡을 수 없다는 수준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국외 망명의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여러 달 머무는 동안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안창호를 비롯한 유동열, 노백린, 이동휘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면서 국권회복운동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때 그가 구상한 독립전쟁론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팽창주의로 말미암아 5년 후면 러시아나 청, 미국 등 3국 중 어느 나라와 개전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그때를 독립의 호기회로 보았다. 지금부터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 아무런 준비없이 그때를 맞이하게 된다면 일본이 패전하여도 한국은 또 다시 외국의 손에 들어가게 되므로 의병을 계속 일으켜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의병 전쟁을 통하여 당장에 독립달성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병 전쟁이 ‘송곳으로 큰산을 뚫는 것과 같은’ 형상임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 길만이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길이고 또 정의를 지키기 위한 길이었으므로 택한 것이다.

 

●의병 부대 창설해 국내 진입 시도

 

노령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의병 부대를 창설한 후 여러 차례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독립전쟁 과정에서 생포한 일본군 및 일본인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 석방한 사실이다. 당시 부대원들은 포로 석방에 대해 강렬하게 반대했으나 국제공법에 의거하여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 보내주게 되어있다’면서 포로를 석방했다. 독립전쟁의 치열한 와중에서도 안중근의 대일본 인식은 감정적 원한에 얽매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정의 인도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도 도(道)의 규준에 따라 포로를 석방하였으며 그것은 높은 수준의 인도주의적 실천이기도 했다.

 


▲ 안중근 의사(중앙)의 빌렘 신부(안 의사 맞은편 등진 사람)의 옥중 면회 장면

 

혹 이상주의에 의한 비현실적 태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전투 중의 적군 사살과 포로의 사살을 분별하였던 안중근의 면모는 후일 이등박문 포살 의거가 어떠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는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전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제국주의의 침략은 배척해도 일본인을 미워하지 않는 자유와 정의를 향한 높은 정신 세계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고 그같은 기반위에서 동양 평화를 구상하였다. 당시 서양세력의 침략이라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된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동양 삼국이 각기 독립의 상태를 유지한 가운데 단결을 이루는 것을 핵심으로 삼았다.

 

그러나 동양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의 침략성을 막는 것이 전제되어야 했고 그런 점에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의 포살 의거는 한국의 독립뿐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한 염원에서 결행된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이등박문이 죽었을 때 세계 각국이 애도의 뜻을 표하고 동양 평화의 주창자로 치켜세웠다. 이때 안중근은 외롭게 법정에서 이등박문의 죄과를 지적하면서 의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한 세기가 흐르고 제국주의의 허물을 씻어버린 오늘날에 볼 때, 이등박문은 과연 동양 평화, 세계 평화를 수호한 자였나 아니면 파괴한 자였던가? 동양 평화를 지키기 위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이러한 물음에 무엇보다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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