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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기고-김민수 교수] 소위 '재능론·상황론·전국민 친일론'을 반박함 /오마이뉴스20040905

by 마리산인1324 2013. 9. 24.

<오마이뉴스> 04.09.05 11:2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7960

 

"당시 친일 안한 사람은 실력이 없었어"

[기고-김민수 교수] 소위 '재능론·상황론·전국민 친일론'을 반박함

 

선배 교수들의 친일행적을 논문에 언급했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려 재임용에 탈락한 후 6년째 서울대 교정에서 천막생활을 하고 있는 김민수 전 서울대 미대교수가 '친일미술'의 개념과 범위, 업보와 유산, 그리고 이 시점에서 친일청산이 필요한 이유 등을 담은 글을 보내왔다. <오마이뉴스>는 김 전 교수의 조속한 강단 복귀와 명예회복을 바라며, 그의 글 전문을 소개한다. 이 글은 월간 <민족예술> 9월호에 실린 것을 필자가 재구성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1. 친일청산이 절실한 이유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신종아편을 투약한 후 심각한 환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고대중국의 소수민족 정권"이라는 둥 패권주의 행보가 도를 넘어선다. 이에 한국정부는 신중론의 차원에서 고구려사의 연구역량을 축적해 국제사회에서 '고구려사는 한국사의 불가분한 일부분'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킬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텐노제(天皇制) 파시즘과 대동아공영권을 잊지 못한 일본은 왜곡, 망발, 신사참배 등 제국주의 야욕을 아직도 꿈꾼다.

이 와중에 며칠 전 국내에선 한 '국립' 서울대 교수의 주장이 논란이 되고 있다. 과거사 진상규명에 관한 TV토론에서, 그는 내부의 자성을 지적하면서도, 일본 학자들이 전후에 치밀하게 짜놓은 범죄의 재구성 자료에 근거해 일본식으로 정신대 문제를 주장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패망 후 철수하면서 일제는 반인륜적 범죄와 수탈의 증거자료를 대부분 없애버리지 않았던가. 설상가상 해방공간에서 친일파가 장악한 권력의 비호 아래 과거사 진상규명도 무산되었다. 아직도 대학에서 친일문제 언급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도 같아서 말했다가는 왕따에 파문까지 당한다.

이런 피해·은폐국 학자가 가해국 일본의 주장을 대변하듯 "정신대 관련해 일본에는 2000점의 자료가 있고 그런 일본학자들이 존경스럽다"고 한 것은 큰 오해를 살수도 있다. 한가지만 물어보자. 일본 측 연구와 사료는 그토록 감탄하고 존경하면서, 실제 정신대 피해 당사자들부터 나온 '피를 토하는 실증' 인터뷰와 사료는 왜 말하지 않는가?

이처럼 불과 60여년 전의 친일문제를 논의하는데도 장애가 많은 나라에서 어떻게 천년도 넘은 고대사 왜곡에 맞설 수 있을지 의문이다. 친일파 비호론자들의 방식대로라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따지는 것은 국력과 시간의 낭비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늘 이렇게 말해왔기 때문이다. "지난 일을 따져서 무엇 하나? 이제 와서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가 뭐냐. 국가관이 의심스럽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국가와 민족은 근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사에 대해 논할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정말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라다.

역설적으로 이런 풍경 때문에 현재는 역사문제에 발목 잡히고 삶이 혼란스럽다. 그래서 역사문제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미래를 담보한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오늘, 한국 미술계 내 친일미술과 일제잔재가 "청산이냐 정리냐"라는 말장난을 떠나 완전히 사라지게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운보 김기창의 '화필보국'

▲ 1944년 <회심>에 실린 운보 김기창(1914~2001)의 '총후병사(銃後兵士)'

▲ 1944년 <소국민>에 실린 운보 김기창의 '적진육박(敵陣肉薄)'
혹자는 완전군장한 병사가 접이의자에 앉아 있는 '총후병사'(위)에 대해 단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자세라서 멸사봉공의 의지가 약해 친일경향성이 희박한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오른쪽 그림을 보라. 김기창의 이 '적진육박'(敵陣肉薄)은 1944년 '결전(決戰)미술전'에 출품한 그림으로 '조선군 보도부장상'을 수상했다.

<소국민>의 주독자층은 아이들이었다. 황국신민으로서 아이들의 전투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붓 가는데 마음 가고, 마음 가는대로 붓 간다. 이런 그림은 철저한 내선일체의 마음이 없이 절대로 그릴 수 없다. 창검을 꼽고 육박전을 치르러 돌진하는 황군의 살기가 마치 표범과 같아 서늘하다.

그의 친일행적은 다채롭다. 대표적인 것만 예로 들면, 1942년에서 1944년까지 개최된 반도총후미술전 초대작가를 비롯해, 1943년 8월 7일자 매일신보에 징병제 축하 시화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로 화필보국했다.

2. 유산과 업보

그동안 한국 미술계에서 친일미술과 일제잔재 청산에 대한 주장과 연구는 소수의 뜻있는 연구자들에 의해 이어져왔다. 해방 이후 작은 목소리들이 있었지만, 대표적으로 1983년 미술잡지<계간미술>의 특별기획 '한국미술의 일제식민 잔재를 청산하는 길'에 참여한 9인의 연구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김윤수·문명대·박용숙·안휘준·이경성·이구열·임종국·정양모·최순우. '한국미술의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 <계간미술>. 25. 1983 봄호).

그 후 친일미술의 범위를 잡지 삽화와 표지 일러스트레이션까지 확장하고 김은호·김기창·심형구·김인승·윤효중·김경승의 친일 행적을 심층 조명한 1990년대 초 이태호의 연구를 거쳐, 방대한 친일미술 사료를 '전시체제 미술활동'으로 분류해 연대기적 서술방식으로 집대성한 최열의 <한국근대미술의 역사>(1998)와 같은 굵은 족적들이 있었다.

이외에도 몇몇 연구자들의 노력이 점과 점을 연결하며 미약하게나마 '친일미술 연구사'라는 흐름을 형성해왔다(친일미술 연구의 역사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해방 후에서 1990년대까지 연구사를 정리한 다음 문헌을 참고바람. 최열. '친일미술 연구의 역사와 개념, 범주' <광복 57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발표문>. 2002.8.14.).

그러나 아쉽게도 해방 후 59년이 지난 현재까지 미술계에서 친일미술의 용어와 개념조차도 합의된 적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명백한 사료를 눈앞에 두고도 친일미술가를 규정하는데 늘 논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친일미술을 '일제잔재' 혹은 '식민잔재'라는 말과 뒤섞어 사용하고, 설상가상 혹자는 그것이 특정 양식과 주제만의 문제인양 감각과 기법차원에서 논의하자고 초점을 흐렸다. 이 결과 처리해야할 친일미술의 쓰레기더미는 거대하게 쌓여갔다.

여기엔 두 가지 큰 원인이 있다. 첫째는 청산을 가로막는 친일미술인들과 그 후예들이 용어의 초점을 계속 흐려놓았다는 점이다. 다른 문화예술계처럼 미술계 역시 친일세력이 해방공간에서 지배구조의 기득권을 장악했다. 곧이어 친일미술의 더미위로 은폐·엄호용 독버섯들이 피기 시작했다.

예컨대 아무리 친일을 했어도 재능과 업적이 뛰어나 문화예술에 공헌했다는 '재능론과 기여론'에서부터, 친일은 강압에 의한 부득이한 결과였다는 '상황론', 따지고 보면 일제 때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친일한 것이 아니냐는 '전국민친일론' 등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임헌영. '정신사적 측면에서 본 친일예술'. <친일음악의 진상展 기획특집: 굴욕의 노래, 친일음악>. 민족문제연구소. 2003).

특히 논란이 되는 것은 '재능론과 기여론'이다. 대표적인 예가 친일미술을 가리는데 있어 만일 어떤 화가가 초기 일본화풍을 버리고 훗날 새로운화풍을 모색했다면 친일잔재 극복에 노력한 바가 있기에 과거 행위에 대해서는 묵인할 필요가 있다는 식의 주장이다(원동석. '민족미술의 정립문제'. <마당>. 1983.6.).

혹자는 "미술에 있어 친일행위란 어느 미술가의 개인적 친일 언동이나 일제부역보다는 그의 특정 작품의 주제와 내용상의 일제정책 협력형태가 지적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이구열. '역사 규명과 특정인 매도의 차이'. <월간미술>. 1993.8).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친일미술을 소위 '순수미술'을 논의할 때처럼 마치 자치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미학적 논쟁거리로 분리시킴으로써, 의도에 상관없이 친일미술가를 슬그머니 안개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둘째는 친일미술이 '일제잔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유전자가 복제되어 일상 삶과 시각문화를 지배할 만큼 자가증식했다는 점이다. 은폐된 친일미술은 일제잔재의 형태로 교육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정신과 철학이 부재한 이 복제과정은 형식주의에 사로잡힌 후진양성과 시각문화를 조장했다. 그러나 빈껍데기 문화보다도 더 큰 폐해는 일제잔재의 형태로 남겨진 미술가들의 반사회·반문화적 기회주의 삶의 가치관이다.

이는 정신사적으로 죽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한국의 주류 미술가들이 '순수미술'의 미명하에 현실문제와 무관한 삶을 살고, 일제에 화필보국했듯이 독재권력에 아부해 미술을 환경치장술로 격하시키고, 심지어 친일의 마음과 손으로 안중근, 유관순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동상과 영정을 도맡아 제작해 민족정기를 능욕한 이유이다.

또한 천황제 가족주의 파시즘으로부터 학습한 일제잔재로서, 학맥·인맥 중심의 미술계는 자신의 이익만을 집단적으로 보호하는 파벌형성에 주력한 못된 전통을 세습시켰다. 이때 '순수'미술이란 온갖 속세의 죄를 스스로 씻기 위한 면죄부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이런 업보로 오늘날 한국 미술계에는 '친일미술과 일제잔재'를 동시에 수술해야하는 병원 수술방과 같은 막중한 스트레스가 남겨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은 다르며, 치료방식도 달라야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미술계의 일제잔재란 친일미술이 청산되지 않은 결과 남겨진 산물로, 친일미술의 유전자를 보유한 미술계의 제도적 습성·미학적 태도·형식·기법 등을 망라한 용어인 것이다. 달리말해 일제잔재를 해방 이후에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시킨 장본인들이 바로 친일미술가들인 것이다.

치료의학 차원에서, 고질적 종양에 해당하는 친일미술을 먼저 수술해야 일제잔재라는 증세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치료시기를 놓쳐버렸기에 친일미술과 일제잔재는 한데 뒤엉켜 돌연변이와 온갖 합병증을 유발한다.

따라서 한편으로 친일미술 종양제거 수술을 진행하고, 다른 한편에서 일제잔재의 여러 합병증에 대한 입체적이고 보다 섬세한 치료가 강구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개념적 혼란이 해방 후 친일미술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해 야기된 결과라고 본다. 그 자체가 시급히 청산해야할 일제잔재인 것이다.

친일 과오를 부끄러워하지 않던 월전 장우성

▲ 1944년 '결전미술전람회 목록' (김복기 소장)

이 사료를 보면, 운보 김기창의 '적진육박'(敵陣肉薄)을 위시해 출품작 제목 거의가 전투적 의미로 가득 차 있다. 결전미술전람회는 양화(洋畵), 조소(彫塑), 일본화(동양화) 3부로 나뉘어 경성일보사와 조선군 보도부가 주최하고 조선총독부 정보과,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미술가협회가 후원한 대표적 친일미술전이었다.

이 목록에 의해 조병덕, 한홍택, 배운성, 박영선, 김영선, 윤효중, 장우성 등 20여명의 부일협력자들의 행적이 밝혀진다. 창씨개명을 해서 확인 작업이 요청되는 인물들도 다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위 사진에서 붉은 선으로 표시한) 월전 장우성은 유관순 열사의 영정을 심하게 왜곡·능욕하고도 또 다시 영정 제작을 맡아 최근까지도 논란을 빚고 있어 주목하게 한다. 그는 1983년 <계간미술>(봄호)에 친일미술 청산 기획특집이 나가자 다른 친일미술가들과 함께 신문지면에 반박 광고문을 게재해 실력행사도 불사하는 등 과오를 부인해 왔다.

3. 개념과 범위

친일미술을 단지 시늉만이 아니라 진정 청산해야할 대상으로 여긴다면 이제 그 의미는 분명해져야 한다. 친일미술은 '아르누보'나 '팝아트'와 같이 진리, 미, 자유를 추구하는 일반적인 예술활동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제의 침략주의와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시책을 수행할 목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미술단체, 시책 선전을 위한 미술품 제작, 저작 및 기타 방법의 활동을 뜻한다. 이러한 영역에서 현저한 활동을 한 미술계 인물을 '친일미술가'라 한다.

이는 법률적으로 이미 합의된 사항에 기초해 내린 정의이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친일미술가를 규정할 수 있는 법적토대를 이미 마련해 놓았다. 1947년 7월 2일 제정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 등에 대한 특별조례'와 이 조례를 토대로 1948년 9월 29일 법률3호로 공포된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으로 약칭)이 그것이다.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 등에 대한 특별조례에는 민족반역자에 대한 정의와 함께 부일협력자를 "일본통치 시대에 일본세력에 아부하여 비적행위로 동포에게 해를 가한 자를 부일협력자로 함"이라 규정하면서, 협력자에 해당하는 죄를 적시하고 있다.

친일미술 정의를 위해 관련 사항만 추리면, "일본통치의 부·도 이상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나-1항),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각 단체 및 언론기관의 지도적 간부"(나-3항) 조항이 있다.

또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4조10항은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 제11항은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진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로 명시하고 있다(법조항 인용은 무크·친일문제연구(3). <반민특위: 발족에서 와해까지>. 가람기획. 1995. 350~357쪽에 근거함).

만일 반민법에 의해 출범한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활동이 친일세력에 의해 무산되지 않았더라면, 동법 제4조11항이 명시한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부문"의 조사활동 영역에 근거해 친일미술가에 대한 처벌과 단죄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친일미술 청산작업은 관념적 차원이 아니라 일제와 그 협력자들이 저지른 '광기의 추억'이 생생하던 시기에 국가적으로 합의한 반민법의 토대 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친일미술은 일제 침략주의가 추구하는 군국주의 파시즘을 선전했다는 점에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 (NSDAP)이 의도한 전체계획 속의 한 구성요소인 '나치미술'혹은 '제3제국의 미술'과 유사한 성격을 띤다. 그러나 반민법에 의거할 때 친일미술이 나치미술과 다른 점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미술가의 '부일협력의 적극성'에 초점이 맞춰진 용어라는 사실이다.

전체 일제강점기 중에 민족반역자와 부일협력자들은 한일합방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친일미술가들의 적극성이 집중적으로 현저해진 시기는 일제 말기 1937년 중일전쟁부터 해방 전까지 소위 '전시체제 미술활동시기'로 분류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미술사가 최열은 친일미술을 전기와 후기 친일 시기로 구분한다. 그는 말하길, 전기친일 시기는 "개화파, 개화자강 노선 따위 안에 자리잡은 친일사상과 의식에 이어져있는 미술행위"를 뜻하고, 후기 친일시기는 해방이후 식민성의 청산을 과제로 삼은 시기를 말한다면서, 전기를 다시 1차와 2차 친일시기로 구분했다. 이중 2차 친일시기가 바로 "1937년 또는 1940년부터 행해진 전시체제 미술활동을 대상으로"한 시기이다).

내선일체를 위한 치밀한 세부묘사

▲ 단광회 회원의 '조선징병제시행기념 기록화'. 1943년
오른쪽 그림은 친일미술단체 단광회 소속 19명의 화가들이 4개월에 걸쳐 공동제작한 대작이다. 여기에 일본인 화가들과 함께 김인승·박영선·김만형·손응성·심형구·이봉상·임응구가 참여했다.

이 그림은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쌍스의 화가 마사치오가 세속적인 '납세의 의무'를 설득하기 위해 그린 <세금을 바치는 예수. 1426~7>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화면 중앙의 학도병을 둘러싼 인물들의 자세와 표정에 주목하기 바란다. 징병제가 조선의 자식을 황군으로 내선일체하는 '영광된 의식'임을 암시한다.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자식의 어깨에 살포시 얹은 왼손에서 광기의 의식은 거의 종교적 수준의 절정에 달한다.

여기에 그림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또 다른 보조 장치가 있다. 서로 다른 필체의 세부 인물묘사이다. 이를 통해 일억일심의 마음과 상황적 신뢰감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것이 공동제작한 진짜 이유였다. 그림은 조선인들에게 징병제 시행에 따른 '육체헌납의 의무'를 여러 시각적 장치로 교묘히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친일미술품은 단순 심리를 이용한 선동에서부터 종교와 신화까지도 동원하는 고단수 선전물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따라서 이미지의 맥락이 지닌 의미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중일전쟁 발발 다음해인 1938년에 일제는 조선을 전시동원체제로 개편했다. 이는 조선인을 총알받이로 전장에 내몰고 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체제로서, 바로 이 체제유지를 위해 고안된 시책이 '내선일체 황국신민화'였다. 일제는 신사참배 및 창씨개명을 통해 조선인과 일본인(내지인) 사이의 차별을 없애는 것처럼 선전했다.

사실은 1938년 시행한 지원병제도가 여의치 않자 1942년 징병제로 전환하기 위한 위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시 차별 없이 일본인이 된다는 내선일체 전략에 저항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감격한 나머지 자발적으로 시책 선동에 발 벗고 나선 조선인 지식인들과 예술가들도 많았다.

이 시기에 친일미술가들의 심리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대표적으로 구본웅과 심형구의 예를 보자. 예컨대 구본웅은 1939년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유채수채화 분야에 대해 평하면서 "내선일체의 현하에 있어 조선미전을 일 변방이 아니라 중앙화단의 연장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양화 참견기'. <조선일보>. 1939.6.13~16)고 주장하고, 1940년 5월에 이르러 "신동아 건설에 있어 화단의 역할" ('신동아 건설에 있어 화단적 역할'. <동아일보>. 1940.5.1)을 강조하더니, 마침내 같은 해 7월 "신동아 건설을 위하여 미술의 무기화에 힘쓸 것"('사변과 미술인'. <매일신보>. 1940.7.9)을 힘차게 외쳐댄다. 또한 심형구는 신체제 아래에서 신문삽화, 포스터 등을 그려 생산미술에 힘써서 멸사봉공하자는 식으로 진지하게 요구하기도 한다('시국과 미술'. <신시대>. 1941.10월호).

이들의 생각은 흔히 친일미술가를 옹호할 때 감초처럼 쓰이는 '상황론'으론 더이상 설명이 불가능하다. 즉 "친일은 강압에 의한 부득이한 결과였다"는 변명의 약발이 더이상 먹히질 않는다. 이는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1941년 태평양전쟁에 항공모함과 비행기를 띄우는 승승장구를 보고 내선일체 황국신민으로서 친일미술가의 삶을 살겠다는 노골적인 신앙고백과도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친일미술가들의 내면 풍경과 행동은 훗날 자서전에서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줄 몰랐다는 식의 고백을 한 미당 '서정주의 마음'(김재용. <협력과 저항: 일제 말 사회와 문학>. 소명출판. 2004. 122~125쪽)과도 통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제강점기 친일미술 진상규명은 최열이 주장하듯 1차와 2차 시기로 구분하되, 2차 시기인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해방 전까지의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뤄야한다고 본다. 이 시기 동안 경성미술가협회(후에 조선미술가협회로 개칭)를 비롯해 단광회 등의 친일성격이 현저한 단체 및 기관 소속의 간부급 위원들과 각종 관제 전시회와 친일 전람회의 심사위원과 추천작가 및 출품 작가들이 집중검토 대상에 속한다.

미술계에서는 앞서 언급한 반민법 제4조10항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관제 단체전과 전람회의 경우, 심사위원을 맡은 자와 연 4회 특선 이상을 수상해 추천작가의 지위를 획득한 미술가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다음은 회화, 신문 삽화, 만화, 포스터, 책표지 등의 매체구분 없이 군국주의 파시즘의 경향과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시책 수행에 공헌한 미술가들이 포함될 것이다. 혹자는 순수회화 외에 삽화 등을 친일미술의 공식적 논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소위 대동아공영권 신체제는 전시동원이 국책이었기에 주력 선전매체는 회화보다 오히려 삽화와 포스터였다. 다음의 심형구의 말은 이를 입증한다. "민족의 근본적 요청이라는 것이 예술을 위한 예술은 용허치 않게 되었다. 하등의 목적이 없이 민족이상도 국가의식도 가지지 않은 예술이요, 미술이라면 무가치한 물건이다."(심형구, 위의 글)

기존의 연구 성과에 근거해 현재까지 밝혀진 친일미술가의 수는 대략 43~50여명 선으로 알려져 있다. 1983년 계간미술 특집기획에서 다뤄진 43명, 이태호의 연구를 통해 대략 50여명 이상의 인물이 거론되었다.

이태호는 고 임종국(<계간미술> 1983년) 선생과 원동석(<실천문학> 1985년 여름호), 최석태(<역사산책> 1990년 12월호)에 기초해 52명과 추가적인 명단을 정리한 바 있다(이태호. '1940년대 초반 친일미술의 군국주의적 경향성'. <근대한국미술논총>. 학고재. 1992. 322쪽 참고바람).

이 명단은 앞서 말한 부일협력의 적극성과 해방 후 미술계에 끼친 '인물의 영향력'에 가중치를 두어 면밀히 재검토되어야할 것이다. 그동안 이 땅에서 친일미술가들은 반성과 참회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가 불리하면 은폐하고, 업적홍보 때는 내놓고 활용하며 기득권을 강화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의 해방 후 영향력 평가'는 친일미술가를 판단하는 또다른 중요변수가 되어야한다. 그들의 생존전략은 해방공간에서 보리쌀 2되를 얻어먹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영문도 모르고 처형당한 수많은 생계형 부역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기회주의 일신영달형이기 때문이다.

심산 노수현의 '아주 특별한' 만화

▲ 왼쪽은 노수현의 만화 멍텅구리 '운전수편' <신시대> 1941.1. 오른쪽은 같은 만화 '라디오체조편' <신시대> 1941.3

심산 노수현(1899~1978)이 1940년 1월부터 그린 이 연작만화는 내용이 매우 특별하다. 형식만 만화일 뿐 내용은 일제의 '전시체제 국민요강 홍보물'에 해당한다.

'운전수편'에서는 "국력총동원하는 때에 운전이라도 배워 전선에 나가자"는 선동을, '라디오체조편'에서는 아이들을 미루꾸로 꾀어서 라디오체조에 동원한다는 내용이다. 이외에도 1941년 2월호 <신시대>에는 "알뜰하게 사는 머리를 써서 신체제 시대에 국민된 도리를 다하자"는 취지의 '알뜰살림편'이 나온다.

이 내용들은 모두 일제가 전쟁 지지열을 고양할 목적으로 창안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핵심 요강들이었다. 심산의 <신시대> 멍텅구리는 1940년 천황의 최측근 고노에 수상이 개념화한 '신체제' 하에서 총독부가 1940년 9월부터 벌인 <전시국민생활체제 확립기준안>의 홍보를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 심산은 이외에도 황군장병 위문용 부채 그림을 그려 일제에 헌납했다.

4. 남기는 말

앞서 논의했듯이 친일미술은 일제강점기 미술가의 '부일협력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용어이다. 필자는 이러한 접근이 한국 미술계가 시민사회의 일원이 되어 건강해지는 길이라고 믿는다. 친일미술의 예술사적·미학적 논의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았다. 지면도 부족하고 더이상 논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남농 허건은 남제(南齊)의 사혁(謝赫)을 인용해 "회화의 원리가 세워지기 전, 동양의 화단에서는 우수한 작품을 가늠하는 최고의 기준이 오직 작가의 인격"이라고 했다(허건. <南宗繪畵史>. 서문당. 1994. 23~25쪽). 사혁이 주장한 기운생동, 골법용필, 응물상형, 수류부채 등의 소위 '육법론'(六法論)에 앞서 작품의 제1성분은 인격론이고, 제2성분이 작품의 성질이므로 작품을 따지기 이전에 작가의 인격이 우선한다는 말이다. 친일미술은 작가론의 차원에서 다뤄져야한다.

프랑스의 경우, 파리해방 후 당시 전국미술가연맹 회장이었던 파블로 피카소는 반역자 숙청재판에 회부해야할 미술인 명단을 파리 경시청과 검찰에 전달했는데, 이때 블랙리스트에는 오통 프리즈, 폴 벨몽도, 폴 랑도프스키 등의 유명 미술인들이 포함돼 있었다. 숙청위원회가 주목한 화가들 중에는 점령기간 중에 독일여행을 하면서 나치협력을 한 것으로 보이는 화가와 화상들도 다수 포함되었을 만큼 단호히 진행되었다.

이 결과 숙청작업은 1946년 6월 미술가 23명을 친나치부역미술가로 낙인찍음으로써 숙청이 마무리되었던 것이다(주섭일. <프랑스의 대숙청: 드골의 나치협력 반역자 처단 진상>. 중심. 1999. 264~265쪽). 당시 드골 대통령은 예술가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임헌영. 앞의 글. 21쪽).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는 프랑스에 예술을 위대하게 여기는 사회문화적 풍토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반면 대한민국에서 예술을 위대하게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짐승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고 하건만 철학자 탁석산의 말처럼 한국문화에선 "거장이 죽으면 작품도 함께 잊혀 진다"(탁석산. '한국문화의 정체성'. <디자인문화비평 05: 디자인과 정체성>. 안그라픽스. 2001. 206쪽).

그는 이 특이현상을 한국문화의 천박한 풍토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는 뻔뻔한 영웅들 자신의 업보 탓이다. 그들은 처벌하자는 것도 아니고 단지 반성하고 자숙하라는 요청에 대해 참회는커녕 집단적 실력행사도 불사했다.

대표적 예가 1983년 <계간미술> 봄호 특집기획 '한국미술의 일제식민 잔재를 청산하는 길'에서 거론된 미술가들이다. 이들은 일간지 지면 광고에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조선일보·동아일보. 1983.4.21일자)라는 성명서를 내고, <계간미술> 발행사인 중앙일보사에 대해 공개사과문 발표를 요구했다.

때론 스스로 '높은 나무의 의연함'을 과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예컨대 운보 김기창은 1993년 충북 청원에 건립하려던 자신의 기념관 계획에 대해 시민단체 등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나자 다음과 같이 의연하게 주장했다.

"…(당시) 친일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실력이 없었어. 당시 뽑힌 사람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인데 높은 나무가 바람을 많이 받는 것처럼 나는 지금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것…."

사실 모든 인간은 잘못과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행위에 대한 관용과 용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칠 때나 가능하다. 그때 비로소 '불신과 불화'의 근본 원인을 해소하고 화합해,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역량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