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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4.02.14 19:0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24213.html

 

다시 김남주

 

서해성 /소설가

 

아비는 머슴이었다. 애꿎은 비유가 아니다. 어미는 외눈이였다. 어설픈 풍자가 아니다. 주인은 한 눈 딸을 일꾼과 맺어주었다. 아비는 평생 그 아기씨의 신발을 깨끗이 닦아서 아침이면 토방 끝에 세워 놓곤 했다. 아들은, 속이 없었다. 시인이 되어 서슴없이 혁명을 맹세하고 살다, 가버렸다.

 

1994, 그 이월, 시와 혁명의 심장 김남주가 떠났다. 복잡하지 않았다. 혁명은 두 시대를 살 수 없다고들 했다. 6월항쟁도, 1991년 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던 죽음의 행렬도, 저 광주마저도 그의 고통과 함께 암전되었다. 혁명이란 이름으로 포복해오던 민주주의는 길을 더듬거리더니 그의 몸을 타고 병으로 솟아올랐다. 적어도 그가 앓고 또 죽어가는 동안을 그리 믿어야 했다. 장사를 치르는 서대문 밖 경기대학교 새벽 교정 담벼락에서 그 뜨거운 시와 혁명이 얼어붙고 있었다. 시를 그리워한 혁명도, 혁명을 사모한 시도 그의 췌장에서 막힌 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마흔아홉이었다. 그 죽음으로 나머지는 죄다 이미 너무 오래 산 자들이 되었다.

 

김남주는 저 1980년 이래 간격 없는 치열한 시어로, 살아서 싸우는 금남로 끝 도청이었고 십년 옥살이와 함께 나타난 반백의 모습은 모두의 인격적 부채였다. 집필 허가가 나질 않는 옥에서 그가 우유갑 안쪽 은박지를 뜯어내 못 끝으로 눌러 새긴 시들은 고난을 거름으로 삼아 창조해낸 양심의 지문이자 벽화였다. 그 김남주는 출옥 뒤 햇수로 5년 조금 넘게 세속에 거처했달 뿐이다. 짧았지만 그는 늘 가장 생동하는 현재였다. 옥에서나 옥 밖에서나 그는 결코 회고조인 적이 없었다. 달콤한 미래 따위 또한 함부로 매매하지 않았다. 그의 언어는 내일을 오늘로 가져오기 위한 쓰라린 노정에서 한시도 잠들지 않았다. 언 들을 깨우는 봄바람처럼. 모순과 맞선 그의 혁명적 삶은 매순간 시였고 낫을 닮은 시어는 늘 벼리어낸 혁명이었다.

 

시가 품어내는 곧고 팽팽한 기세와 달리 정작 사람은 한 치도 모진 데가 없어 별호가 물봉이었다. 이는 지지리도 한량없이 무른 이를 이르는 남돗말이다. 그는 누구와도 다투어서 이길 수 없었지만 가장 강한 적에게는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유신독재도 광주학살자도 감옥도 38선도 어떤 시장의 우상도 그의 무릎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아무것에도 탐욕을 품지 않은 그의 삶과 시에는 신산스런 정의로움이 휘감고 돌았다. 그 김남주와 함께 두메를 일으키고 들을 베던 언어들은 사라져갔다. 땀과 눈물에 착종한 불땀 좋은 인화성 높은 시가 식어가는 언저리로 후일담이라는 언설이 모욕처럼 찾아들었다. 혁명은 문득 어제 일이 되어 있었다.

 

달포 앞서 병실로 찾아와 ‘우리 남주’에게 기운을 불어넣곤 하던 문익환이 문득 먼저 길을 갔다. 난해하지 않았다. 통일은 반드시 두 시대를 건너야 하지만 통일인간은 한 생에 갇힐 수밖에 없다고들 했다. 고은은 대학로 노제에서 쉰 목소리로 문익환을 수십번 불렀다. 그 장구한 초혼은 그의 벗 문익환만이 아니라 문익환네들과 시대에 관한 외마디 조사였다. 그 일월과 이월, 긴 장례를 거쳐 봄은 겨우 상복 차림으로 질컥이는 황토 대지를 넘어오고 있었다.

 

김남주는 대중의 고통에 영감의 뿌리를 내리고 시대의 맨 척후에서 이름 없는 자들의 이름으로 노래했다. 대지는 그의 악보였고 독재권력과 자본은 그에게 악의 뮤즈였다. 그 시와 삶이 오늘을 부르고 있다. 순치된 적 없는 그 끓는 몸짓이야말로 시대의 겨울을 녹일 수 있는 열정에 찬 지혜인 까닭이리라. 봄과 새벽을 여는 정의의 적자로서 김남주는 시를 닮은 혁명을 거침없이 꿈꾸었다. 시와 민주주의가 일치를 향해 내닫던 목소리, 그 김남주를 다시 읽는다. 한시도 종으로 살지 않기 위하여. 김남주뿐이랴. 이 땅에는 고난을 기꺼이 앞서 헤쳐간 뼈저리도록 거룩한 인간 교과서들이 있다. 인간보다 정확한 노선은 없다.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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