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61호] 2013년 10월 12일 (토) 00: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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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젝을 사유해야 하는 이유
이택광
2013년 9월 23일 슬라보예 지젝이 다시 한국을 찾았다. 2012년 두 번째 방문에 이은 세 번째 방문이었다. 그에게 작은 변화가 있었다. 지난여름 그는 경희대에 석좌교수로 취임했고, 네 번째 결혼을 했다. 2012년 방문 때와 달리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농담은 여전했다. 인천공항을 빠져나올 때 보이는 조형물에 대해 ‘히틀러의 거시기’라며 유쾌하게 낄낄거리기도 했다. 이런 지젝의 모습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뉜다. 어떤 이들에게는 경박하고 저속한 농담이나 일삼는 지젝의 처신이 신뢰를 주기 어려운 사기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지젝의 농담은 때때로 예사롭지 않기도 하다. 그는 “내가 왜 말을 쉴 새 없이 하는 줄 아는가? 내가 말을 멈추면 다른 사람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남이 말하면 그에게 지배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고 말한다. 농담 같지만 사실은 뼈 있는 이야기이다.
반공주의에 포섭된 국가, 상상력이 필요해
지젝의 지론에 따르면 이런 농담은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을 드러낸다. 지젝은 라캉을 비틀어 “무신론자만이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데,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을 허용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신론자라면 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다. 테러는 물론이고 인신공양도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신을 믿는 행위라기보다 신을 직접 대행하는 것에 가깝다. 신에게 진실을 물어보는 순간, 신앙인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지젝 자신의 신상을 이용한 농담에 비해 훨씬 진지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물론 지젝이 농담만 늘어놓는 것은 아니지만, 농담 없는 지젝을 상상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철학 논의는 언제나 농담과 뒤섞여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지점에서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은 지젝만의 특유한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들뢰즈 같은 철학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젝은 시간강사를 하면서 겪는 애환 등을 슬쩍 집어넣어 철학적 논의가 만들어내는 딱딱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곤 한다. 철학과 농담을 뒤섞는 측면에서 단연 지젝이 앞선다. 지젝에 대한 환호는 많은 부분 바로 이러한 촌철살인의 농담과 철학적 논의가 어우러지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번과 달리 지젝은 서울에서 개최되는 공산주의의 이념 컨퍼런스를 위해 방한했다. 이 컨퍼런스는 런던, 베를린, 뉴욕을 거쳐 서울에서 네 번째로 열리는 것이었다. 바디우와 지젝이 공동으로 조직하는 이번 행사의 핵심은 역사적 공산주의의 소멸 이후에도 여전히 정치이념으로서 의미를 갖는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었다. 이미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공산주의를 다시 들고 나온 것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북한과 대치 상황에 있는 남한의 수도 서울에서 공산주의를 논의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울 것도 같다. 그런데 정작 서울에서 이 컨퍼런스를 개최할 것을 제의한 이는 지젝이었다. 중국과 북한이라는, 아직도 형식적이나마 공산주의를 표명하고 있는 국가 사이에 놓여 있는 서울이라는 상징적 장소가 지젝을 매료시킨 모양이었다. 이런 결정이 다소 자의적이고 우발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과거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획을 그었지만 이후 냉전의 직접 피해자로 반공주의에 포섭 당해버린 아시아에서 국가를 우회하는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분명 이채로웠기 때문이다. 처음에 지젝은 이 행사를 소수정예로 꾸려서 이론적인 논의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디우가 대중적으로 이끌자고 제안을 하면서 방향이 수정되었다.
이론 논의보다 아시아의 다양한 ‘경험’을 나누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자는 것도 바디우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지젝은 여기에 대해 다소 불만을 내비쳤다. 자신에게 이 컨퍼런스는 무엇보다도 ‘철학적인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철학적인 방식으로 공산주의의 이념을 사유하는 것이 목표라는 뜻이었다. 지젝이 말하는 ‘철학적인 것’은 이론적인 관점을 의미한다. 지젝은 가끔 “다시 이론의 시대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을 흘리곤 했는데, 공산주의라는 자본주의의 가능성에서 배제된 불가능성을 사유하거나 현실화하기 위한 이론 작업이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지젝은 컨퍼런스 기간 동안 시종일관 이런 입장을 견지했다. 거의 모든 발표자에게 코멘트를 해주는 열성을 보였다. 그가 마이크를 잡는 순간, 눈치 보던 패널이나 관객은 과감해졌다.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발표에 대한 의견을 열정적으로 표명했다. 그가 마이크를 한 번 잡으면 청중석이 술렁거렸다. 퍼포먼스가 무엇인지 아는 선동가였다. “나는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안다.”며 너스레를 떠는 지젝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레닌이 꿈꾼 공산주의는 실패로 끝나
그가 왜 이러는 것인지 많은 이들은 궁금해 한다. 그러나 이런 지젝의 행위는 자신의 철학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젝은 헤겔을 따라서 역사적 행위자의 역할에 의문을 품는다. 역사적 행위자는 판을 깔아주고 소멸하는 ‘사라지는 매개자’일 뿐이다. 이처럼 지혜라는 것이 황혼녘에야 날아오르는 올빼미라면, 역사적 행위자가 역사적 사건에 개입하는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적 행위자는 그 사건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안다. 개입하되, 그 결과를 모른다는 사실에 역사적 행위자의 비극이 있다. 혁명에 동참하지만, 그 혁명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분명 문제다. 역사가 ‘자비’를 베풀어서 조그마한 성공이나마 보장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이 지점에서 ‘논리적 전복’을 시도한다.
그는 묻는다. 만일 그렇게 결과를 알 수 없는 그 상황 자체가 자유의 제한이라기보다 자유의 조건이라면, 확실히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역사적 행위자는 결과를 모르더라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사뮈엘 베케트가 말하는 ‘더 낫게 실패하라’는 정언명령은 이 사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 공산주의가 실패했더라도, 공산주의의 이념을 사유하는 것을 그만두지 말라는 요구가 가능해진다.
지젝은 공산주의의 가설에 관해 바디우의 입장을 지지한다. 바디우가 제시하는 공산주의의 문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가설을 세우고, 국가를 통해 레닌이 실천하려고 했던 공산주의가 실질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이제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공산주의의 이념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요지이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다. 지젝과 바디우가 공통적으로 북한을 지칭해서 ‘공산주의를 포기한 군사적 민족국가’라고 규정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젝은 공산주의에 대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의식하지 않지만 공산주의를 이루는 토대라고 할 공통적인 것은 도처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젝은 지식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공통적인 것에 대해 논의하곤 한다. 지식은 나눌수록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해진다. 이런 원리에서 생산력이 발달할수록 공통적인 것은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고, 자본은 이런 공통적인 것을 사유화하려고 획책한다는 것이 지젝의 진단이다.
공산주의의 이념은 평등에 대한 사유
이런 의미에서 공통적인 영역은 언제나 사유화에 직면하고 그것을 저지하고자 하는 투쟁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사유화라는 것은 특정한 개인의 이해관계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한국처럼 국가 폭력의 문제로 드러나기도 한다.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지역주민과 한국전력공사의 대립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 문제는 겉으로 보기에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지역주민과 공적인 영역에 속하는 한국전력공사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기라는 국가권력이 공공재를 장악하기 위해 특정 지역주민을 배제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도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공익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사실은 공통적인 것의 독점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젝의 말처럼, 이런 투쟁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투쟁이 그냥 우발적으로 일어나서 흘러가버린다면, 아무런 지속성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지젝의 문제의식도 여기에 있다. 어떻게 대중의 정치라는 상황을 운동으로 가능하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지젝의 생각에 묻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 문제는 앞서 논의한 대로, 개입하는 역사적 행위자가 그 행동의 결과를 알 수 없다는 부정의 조건과 결합한다. 이 조건에서 어떻게 지속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이념이 필요한 것이다.
공산주의의 이념은 단도직입해서 말하자면, 평등에 대한 사유다. 이 과정은 주체의 변용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역사적 조건과 주체가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것이 출현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은 가능성의 영역에서 배제된 불가능성이 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집합에서 셈해지지 않는 수가 셈해지기를 요구한다. 지젝은 이 문제에서 항상 ‘다른 꿈’을 주문해왔다. ‘다른 꿈’을 꾸지 않으면 다른 세계도 없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세계 없음’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세계 없음’이란 말 그대로 세계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를 뜻한다. 이 상황은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의 부재를 지칭한다. 지젝은 라캉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다”는 명제로써 이 문제를 돌파하고자 한다.
지젝은 최근 BBC 채널4와 함께 이 주제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다. 이 영화에서 지젝은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야말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하면서, 직접 <죠스>나 <타이타닉>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분석해 보인다. 이런 지젝의 사유방식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다. 상동성의 논리로 엄연히 다른 영역에 속하는 범주를 하나로 묶어버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젝의 대답은 무엇일까. 역시 동어 반복처럼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다”고 말할 것 같다. 주체가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 전에 존재하는 물질은 세계라기보다 ‘세계 없음’이다. 판타지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대신 그것을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분석하면서 지젝은 “혐오하는 것 자체를 즐긴다”고 말했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에 숨어 있는 틈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도처에 있지만 매끄러운 표면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 틈에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얼마나 그의 생각이 옳은지 논하는 것은 이제부터이다. 그를 ‘연구’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와 토론할 때가 된 것이다.
글·이택광
영국 셰필드대학 영문학 박사. 계간 <미래와 희망> 편집위원. 저서로 <마녀 프레임> <임박한 파국> <당신들의 대통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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