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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붉은 심장을 가진 여인에게 /한겨레21 20151209

by 마리산인1324 2015. 12. 23.

<한겨레21> 제1090호 /2015-12-09 20:46

http://h21.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40805.html

 

[이상헌의 理想한 경제학]

 

붉은 심장을 가진 여인에게

역사보다 빨리 세상을 읽으며 제국주의와 대기업의 횡포를 경계한 배우 버네사 레드그레이브의 운동은 진행 중

 

 

영화제의 계절이다. 영화에는 여전히 까막눈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그간 영화 만드느라고 고생한 이들을 모아서 상도 주고 격려하는 잔칫날에는 자연스레 관심이 간다. 말하자면 잿밥에만 관심 있는 셈인데, 그래도 섭섭한 게 있다.

 

세간의 관심은 늘 누가 상을 받는지, 또 누가 예쁘거나 파격적인 드레스를 입었는지에 온통 쏠린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고용계약서 하나 없이 오로지 '열정'으로만 일하는 '영화노동자'에게도 따뜻한 국수 한 그릇 대접하는 날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커지는 날이다. 화려한 행사장은 스크린에서 빛나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옆에 널찍한 공간 하나 마련해서 '스태프'로 궂은일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이 시상식을 보면서 술도 한잔 곁들이면서 식사 한 끼 대접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그런 마음 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잘못 계산되거나 체불된 임금이 있으면 제대로 계산해서 주고, 대박 난 영화라면 보너스 봉투 하나 안겨주면 금상첨화이겠다. 기뻐할 일은 기뻐하고 묵은 빚은 털고 가는 것이 한국의 잔치 문화가 아니던가

 

오스카 역사상 가장 긴 기립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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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정치적 성향이 문제가 되어 변변한 상을 받지 못했던 찰리 채플린(오른쪽)은 1972년, 20여 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와 오스카상을 받았다.

어두운 역사를 뒤로하고, 그는 화해와 용서의 아름다운 인사를 전했다. 위키피디아


영화제는 때로 영화 이상의 무엇인지라, 그 때문에 나의 영화제 기억도 여러 갈래다. 오랫동안 가슴에 남은 장면도 있다. 찰리 채플린은 1972년에 오스카상을 받았다. 이미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어느 누구도 그의 공헌을 부인하지 못했지만, 그의 정치적 성향이 늘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변변한 상을 받지 못했다. 1922년 오스카상을 받은 적이 있지만, 그것도 특정 영화를 두고 준 것이 아니라 그저 어정쩡한 '명예상'이었다. 그는 요즘 식으로 하자면 '종북몰이'인 매카시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어 1950년대 초 미국에서 쫓겨나 스위스로 망명을 떠났다.

 

이제 20년의 세월이 지나, 채플린은 미국으로 당당히 초대받아 오스카상을 받게 되었다. 개인적 감회를 어찌 표현할 수 있었을까마는 시상식에 자리한 영화인들의 소회도 컸다. 어두운 긴 역사가 마무리되고, 화해와 용서의 시간이 왔다. 채플린이 쩔뚝거리며 시상대를 향해 걸어갈 때, 영화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스카 역사상 가장 긴 기립박수를 보냈다. 무려 12분 동안 박수는 계속됐다. 채플린은 감격스러워하며 짧은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이런 감동적인 순간에 말이란 쓸모없고 미약할 뿐이지요. ...여러분 모두 놀랍고 감미로운 분들입니다." 그동안 섭섭했다는 말 한마디 덧붙일 법했는데, 그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모든 공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영화인에게 돌렸다. 그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시상대에서 천천히 걸어나갔다. 아름다운 퇴장이었다. 3년 뒤 그는 세상을 그렇게 떠났다.

 

또 당혹스러운 장면도 있다. 처음에는 모두를 불편하게 했지만, 결국에는 역사의 작은 줄기를 만들어낸 장면이다. 2006년 루마니아의 한 도시에서 국제 영화제가 열렸다. 평생공로상 수상자는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영국 여배우였다. 평생을 바쳐 이룬 성취인 만큼, 그의 소회가 궁금했다. 무려 50년의 세월이 아닌가. 모두들 백발의 여인을 바라보며 감동적인 한마디를 기대했다. 좀체 흥분하지 않는 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늘 정교하지만 더디다. 이번에는 그 말마저 짧았다.

 

"나는 이 상을 알부르누스 마이오르(Alburnus Maior)에게 바칩니다. 우리의 지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환경 체계를 파괴할 권리는 없습니다."

 

시상식장은 순식간에 얼음장 같은 침묵에 빠졌다. '알부르누스 마이오르'는 당시 루마니아 중앙 산간 지역의 노천 금광 개발 사업에 반대하는 지역 시민사회 조직이었다. 그리고 그 개발 사업을 몰아붙이는 기업 '가브리엘 리소스'(Gabriel Resources)는 이 영화제의 재정적 후원자였다. 당연히 시상식장에 있었다. 해당 기업은 격노했다. 지역 동네 사람들의 서명을 받아다가 영국 신문에 광고를 실었다. 우리는 개발 사업에 찬성하니까, 당신은 런던에서 편안하게 푹 쉬라는 비아냥이었다. 그들은 모두 가브리엘 리소스로부터 돈을 받았다. 대대손손 살았던 땅을 팔고 이주비까지 받았으나 마땅히 살 곳을 찾지 못해, 다시 이 회사가 만들어준 일자리를 받아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 광고를 본 여배우는 괘념치 않았다. "일부 주민들이 돈을 받은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을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오염될 마을을 구하지는 못한다." 세계 최고의 노천 금광이 될 수 있는 곳이지만, 그러려면 마을을 온통 뒤집어엎고 시안화물(cyanide)이라는 독성물을 사용해야 했다. 땅은 파헤쳐지고, 강과 지하수는 오염될 것이다. 기업은 최첨단 기법을 이용하면 문제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그런 기법을 사용했다는 댐이 어이없이 무너지는 바람에 최악의 환경 사고를 겪은 게 불과 몇 년 전 일이었다. 개발 사업과 관련해서 정치인들에게 돈이 오갔다는 소문도 흉흉하게 나돌았다. 소문이라 했지만, 이를 소문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 당찬 여배우의 이름은 버네사 레드그레이브(Vanessa Redgrave)다. 그의 이름을 굳이 직역하자면 '붉은 무덤'인데, 이게 곧 그의 운명이었다. 그는 살아오는 내내 붉었고, 그 때문에 눈부실 수도 있었던 인생은 무덤 같은 구덩이였다. 젊은 시절 오스카 조연상까지 받으면서 붉은 카펫을 수놓았던 그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최근 <버틀러>(Butler)라는 영화에 농장 관리인으로 잠시 나온 것으로도 그녀의 삶은 마치 복권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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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 중인 버네사 레드그레이브가 물을 긷는 이라크 어린이의 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그는 인권과 환경보호 운동에 앞장서왔다.


그녀가 무대에 오르자 야유가 쏟아졌다

 

그가 세상에 나온 방식은 붉었다. 그의 집안은 온통 배우였다. 그런 점에서 집안의 전통을 이었지만, 동시에 돌연변이였다. 그는 한없이 젊었던 1960년대에 '혁명'을 기치로 내건 정당에 가입해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다행히 영화배우로서도 성공적이었고 돈벌이도 꽤 괜찮았다. 그는 그렇게 번 돈을 아낌없이 썼고 그때마다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유대인이 장악한 영화계에 큰 파열음을 냈다. 1970년대에 테러 집단으로 인식되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사비를 들여 다큐멘터리영화도 만들었다. 곧 사달이 났다.

 

찰리 채플린을 복권시킨 1970년대 오스카상은 '열린 사회'였다. 1978년 오스카는 레드그레이브에게 여우조연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쓴 힘든 결정이었다. 그가 시상대에 오르는 순간, 모두들 긴장했고 일부는 벌써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갓 마흔에 접어든 그는 거침없었다. 평소 신중한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수상 소감을 정교한 정치적 발언으로 대체했다. 그에게 오스카상을 주기로 한 아카데미의 결연함을 칭송하면서 영화인들이 힘을 모아 파시즘에 맞서 싸워나가자고 했다.

 

곧 문제적 발언이 나왔다. "몇몇 유대근본주의자들이 지난 몇 주 동안 협박해왔지만 여러분이 모두 결연하게 대처해온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전세계 유대인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파시즘과 압제와 맞서 위대하게 싸워온 영웅적 기록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뒤이어 그는 모든 반유대주의에 싸우겠다고 사족을 달았지만, 유대주의자에 대한 날선 발언을 덮지는 못했다. 그의 발언은 순식간에 반이스라엘적이고 반유대인적인 것으로 인식됐다. 그의 험난한 생활은 다시 시작됐다. 일자리가 줄어들고, 늘 비판과 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다. 그에 대한 의심은 PLO가 국제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계속됐다.

 

루마니아 영화제의 반란 씨앗이 되어

 

그는 강했고,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활동 반경을 넓혔다. 모든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대했고, 전쟁터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 찾았다. 그때마다 그에게는 붉은 딱지가 붙여졌지만 세월이 지나 모든 '애국적인' 전쟁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그는 복권됐다. 러시아가 체첸 독립주의자를 무자비하게 공격할 때, 그리고 온 세상이 TV 화면을 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있을 때, 그는 체첸 지도자의 정치적 망명을 돕기 위해 몰래 거금을 내놓았다. 이라크 전쟁에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악명 높은 관타나모 수용소에 억울하게 갇혀 있던 영국인을 자유롭게 한 이는 영국 정부가 아니라 '붉은 여인' 레드그레이브였다. 그는 역사보다 빨리 보았고, 세상의 정치권력보다 빨리 움직였다. 그 대가는 혹독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시 눈을 돌려, 그는 아프리카를 찾았다. 늘그막의 그는 말 한마디 없이 침묵하며 아프리카의 붉은 땅에서 아이들을 보살폈다.

 

루마니아 영화제에서 일으킨 그의 반란은 작은 씨앗이 되었다. 수년간에 걸친 국내외의 노력 끝에 광산 개발의 환경문제는 사회적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지속된 정치적 불안은 시민들을 무기력과 냉소에 빠뜨렸는데, 이 문제를 계기로 시민들은 조직하고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시민운동이 살아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2013년 마침내 광산 개발 계획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10년 만의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시민들은 '붉은 여인'을 기억해냈다.

 

그뿐만 아니었다. 시민들은 자신감을 회복했고, 자연 파괴를 막는 환경운동에서 정치 파괴를 막는 정치운동으로 외연을 넓혀갔다. 환경 파괴적인 무차별한 개발 뒤에는 항상 부패한 정치인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몇 달 전,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 있는 나이트클럽에서 불이 나서 20명 이상이 죽었다. 허가를 내줄 수 없는 곳에 나이트클럽은 버젓이 허가를 받았고 건축 및 소방 검사는 다 피해갔다. 루마니아 시민들은 이를 곧 '부패의 상징'으로 보았다. 광산 개발 저지 운동으로 조직된 시민들이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3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나와서 "나는 그간 침묵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외친다" "루마니아를 개조하라"고 외쳤다. 국무총리가 물러나고 시장이 물러났다. 거기서 사람들은 희망을 보았다. 아직은 깨지기 쉬운 희망이지만, 청년이 무기력을 깨고 직접 나서 얻은 소중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이제 레드그레이브를 기억하는 이는 적었다. 세상이 바뀌면서 가장 먼저 그를 잊었다. 그는 앞서나갔기 때문에 외로웠고, 그리고 가장 먼저 잊혔다.

 

레드그레이브는 얼마 전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그나마 회복이 잘 되었다고 한다. 백발의 그는 여전히 건강하다. 40년 동안 옆에 있어준 친구와 결혼했다. 남의 일에는 둘러가는 법이 없는 그가 사랑 문제에는 뱅글뱅글 돌기만 했나보다. 그는 여전히 일한다. 어떤 기자가 물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려고 하는지.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아직 주택대출금을 갚는 중이라고 한다. 돈이 생길 때마다 자신의 신념이 있는 곳에 써버렸다. 덕분에 빚투성이 집 하나 달랑 가지고 있다. 늘 앞서가고 신념과 행동 사이에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은 그에게는 어쩔 수 없는 팔자다.

 

고맙다, 정말로

 

앨프리드 히치콕은 국제 영화제 역사상 가장 짧은 수상 소감을 남긴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의 면면을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의 소감은 단 한마디였다. 시상대에 있는 마이크를 향해 목만 쭉 내밀면서 "생큐". 그리고 돌아섰다. 내가 레드그레이브에게 하고 싶은 말도 이것뿐이다. 아, 히치콕이 생큐 뒤에 무언가 잊었는지, 뒤돌아와서 한마디 덧붙였다. "정말로."(Indeed) 나도 정말로 그 말을 덧붙이고 싶다. 고맙다, 정말로. 누구보다 붉은 심장을 가진 여인아, 사랑하며 오래 사시라. 쉽지는 않겠지만, 세상일은 잊으시고.

 

이상헌 경제학 박사·<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