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404호] 2015.06.16 08:5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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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수 틀린 한국의 ‘창조 농업’
유럽에서는 농촌 부가가치를 높이는 활동을 ‘제2의 다리’라고 부른다. 농사라는 ‘제1의 다리’를 보조한다는 의미다. 반면 한국은 가망 없는 농업 대신 부가가치를 높여 살아남으라는 식으로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유럽의 가족농이 사는 법
페터 스튀빙거 씨는 독일 중서부 와인 산지로 유명한 라인스바일러 마을에서 포도밭 13㏊를 경작하는 농부다. 그의 수입원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농지 면적에 따라 정부로부터 받는 직불금, 두 번째는 자기 집 양조장에서 직접 제조해 직거래로 파는 ‘스튀빙거 와인’, 세 번째는 양조장과 함께 운영 중인 와인 시음장과 농가 민박이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스튀빙거 씨 집 앞마당은 와인을 시음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농가 민박에서 며칠 쉬면서 인근 와이너리 여행을 즐기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농사로만 먹고살기 힘든 것은 유럽 농민들도 마찬가지다. 직불금이 소득을 일정하게 받쳐준다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유럽 농민들도 직접 기른 농산물을 가공하고, 민박이나 레스토랑, 직매장을 운영하는 일에 뛰어들곤 한다. 얼핏 보기에 6차 산업 열풍에 휩싸인 한국 농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산농촌재단 연수단에 참가해 유럽을 둘러본 농민 10여 명의 입에서도 6차 산업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르내렸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6차 산업이란 농산물이나 농촌의 자연·문화자원(1차 산업)을 바탕으로 이를 제조·가공(2차 산업)하거나 유통·서비스업(3차 산업)으로 연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1×2×3=6).
농촌 주부들이 스위스 인포라마에서 원예 수업을 듣고 있다.
유럽의 실상을 접하면 접할수록 한국의 6차 산업은 번지수가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고 연수에 참가한 농민들은 말했다. 이들이 지적하는 6차 산업의 문제점을 키워드로 정리해보자면, 첫째는 각자도생이다. 현행 6차 산업 추진 방식은 농민 각자가 CEO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 같다고 송일근씨(전남 담양)는 말했다. 농사도 버거운 농민들에게 체험관광이며 직매장을 기획하고 실행하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개별 농가가 아닌 마을 단위라도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고령농이 대다수인 농촌 현실에서 마땅한 인적자원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업자들만 배를 불리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고 김훈규씨(경남 거창)는 말했다. 정부 지원사업의 속성상 ‘서류 작성’에 능한 외부 컨설팅 업체를 끼어야 6차 산업 관련 예산을 따낼 수 있는 구조라는 것이다.
둘째는 중구난방이다. 6차 산업과 관련된 정책 지원 주체만 해도 농식품부·중소기업청·산림청·농협중앙회·한국농수산물유통공사 등 10여 군데에 달한다고 정예화씨(충남 홍성)는 말했다. 그러다 보니 농민 처지에서 정책을 파악하기 어렵거니와 중복 지원으로 예산이 낭비될 우려도 크다. 이와 달리 유럽은 농민교육부터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고 이지향씨(전북 익산)는 말했다. 한 예로 농업학교 겸 농업기술센터라 할 수 있는 스위스 인포라마는 산하에 700시간 과정의 농촌가정주부학교를 운영한다. 농가 민박이나 레스토랑을 운영하려는 여성들이 평소대로 대충 요리하고 세탁해서는 곤란하다는 판단에서다. 개설 과목은 세탁, 요리, 원예, 재단 등. 위생 관련 법규 등을 숙지하도록 법률정책도 의무적으로 이수하게끔 하고 있다고 인포라마 교사 지타 토마 씨는 말했다.
유럽 농민들도 민박·레스토랑·직매장을 운영하는 일에 뛰어들곤 한다. 독일 농민이 운영 중인 와인 시음장.
농가 민박의 아침상.
“농민에게도 월급을 지급해야”
셋째는 본말전도다. 황석중 박사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이런 2차·3차 산업으로 농촌의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활동을 ‘제2의 다리’라 부른다. 농사라는 ‘제1의 다리’를 보조한다는 뜻에서다. 그러나 한국의 6차 산업은 ‘제1의 다리’로는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제2의 다리’로 경쟁력을 높여 살아남으라는 식으로 전개되는 중이다. 이는 농업을 기업화·산업화하겠다는 발상이라고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은 지적한다(<농부의 나라>). 이명박 정부의 ‘농업 선진화 정책’이나 박근혜 정부의 ‘창조 농업’이나 핵심은 경쟁력 떨어지는 농민들을 농촌에서 몰아내겠다는 ‘살농(殺農) 정책’이라는 것이다.
쌀 개방에 이어 임박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으로 농업이 벼랑 끝에 몰린 오늘, 결국 필요한 것은 발상의 대전환이라는 데 농민들은 공감했다. 조원희씨(경북 상주)는 ‘농민에게 시혜를 준다’는 식의 사회적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농업이 무너지면 도시 소비자들의 발밑도 함께 무너진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영규씨(충남 홍성)는 한국도 유럽처럼 농가를 직접 지원하는 방식을 고려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쌀처럼 특정 작물에 대한 직불금을 지원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농민들에게 고정 직불금을 지원하는 일종의 ‘농민 월급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농민들만의 주장이 아니다. 안병일 고려대 교수는 현행 농업지원 정책을 직불제 형태로 일원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농정방식 개혁:EU CAP의 진화를 보라>). 수백 가지 형태로 진행되는 정책은 부작용과 비효율을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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