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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이야기/괴산 관광

벽초 홍명희와 충북 괴산(도종환)

by 마리산인1324 2007. 1. 10.

 

벽초 홍명희와 충북 괴산

 


 

 

 

 

 

 

 

도종환(시인·민족문학작가회의 충북지회장)


 

 

 

 

 

●아버지 홍범식 자결 후 상해에서 독립운동


북으로 멀리 보이는 백두대간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마치 진을 치듯 서 있고 남으로는 괴강의 푸른 물이 평평한 들 가운데 우뚝 선 산의 한쪽 절벽을 감싸 돌아 마치 태극의 형상을 한 충북 괴산의 제월대 한 모롱이에 벽초(壁初) 홍명희의 문학비가 있다.


일제치하에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애국자로 살아왔음에도 그의 행적과 사상을 문제삼아 해금되지 않은 채 분단시대를 살아온 벽초 홍명희.


그의 불후의 명작 <임꺽정>은 TV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지만 정작 작가 홍명희는 고향에서 제대로 평가받거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가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그곳에 남은 채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기시했던 탓도 있지만 더 큰 원인은 6·25라는 동족간의 전쟁을 치른 점과 그 이후 지속되어온 분단체제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독립운동가이며 개결한 지사요, 언론인이며 작가로서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이루어져야 한다.


벽초는 어떤 사람인가.


홍명희의 아버지는 경술국치 때 자결 순국한 금산 군수 홍범식이며 그의 할아버지는 참판 홍승목이다. 그는 1888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기미독립운동 당시 괴산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벽초는 유년시절부터 기억력과 글재주가 뛰어나 8세 때 이미 한시를 짓기도 하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서경(書經)을 7번 읽고 곧 암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14세 때인 1904년 상경하여 신학문을 공부하고 1906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문일평 최남선 이광수 등과 교분을 맺으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는 유학시절 민족차별을 경험한 데다가 조선이 식민지로 변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귀국하던 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그의 부친은 자결한다. 그는 부친의 3년상이 끝난 뒤인 1912년 말부터 중국 상해에 건너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때 여운형 조소앙 김규식 등과 교분을 맺고 특히 동향인 단재 신채호와는 평생지기로서 막역한 우정을 쌓았다.


1914년 그는 독립운동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남양으로 떠나 싱가폴 등지에서 활동하다 1918년 귀국했다.


벽초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향리 괴산에서 중부지방 최대의 만세운동이자 독립운동인 괴산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이로 인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출옥 후인 1924년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취임하고 1926년 《시대일보》 사장이 된다. 같은 해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 좌우 대립 우려해 중도파 규합


한편 그는 1923년 여름‘신사상연구회'를 만들고 다음해 이를 ‘화요회'로 개편·발족시킨다. 또한 1927년 안재홍, 신석우 등과 반일민족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결성을 주도하게 되고 창립대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조직부의 총무간사직을 맡아 활동하던 중 1929년 광주학생사건의 진상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 사전에 검거되어 주모자의 한사람으로 구속되어 3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 홍명희문학제와 시화전 장면.

1928년말부터 벽초는 자신의 유일한 소설인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함으로써 일약 인기작가로 부상하게 된다. 그 후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인한 투옥과 건강상의 문제로 몇 차례 중단을 겪으면서도 1940년에 이르기까지 10여년에 걸친 연재를 계속하였다. 그는 또한 해방의 공간 속에서 언론과 문필활동을 계속하면서 좌·우익의 대립을 우려하여 중간파 정치세력규합에 나서게 된다.


1947년 중도우파 정당들을 통합한 민주독립당을 창당하고 당대표로 취임한다. 그는 이러한 정당 사회단체를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를 위해 남·북연석회의를 적극 추진하였다. 그는 남·북연석회의 후 김 구, 김규식과는 달리 귀환하지 않고 북에 남게 된다. 이후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을 역임하였고 1968년 81세 되던 해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 

 

● <임꺽정> 민중을 현실주의로 탁월하게 형상화


홍명희의 대표작 <임꺽정>은 무엇보다도 그 민중성과 리얼리즘의 면에서 탁월한 작품이다. 우리 나라 역사소설의 대부분이 지배층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궁중비화나 권력의 투쟁을 다루어 통속적인 흥미를 자아낸 것이라면 벽초의 <임꺽정>은 주인공 임꺽정뿐만 아니라 박유복, 이봉학, 황천왕동이, 배돌석이, 곽유복, 길막봉 등 다양한 신분의 하층민들을 내세워 당시 민중생활을 폭넓게 묘사하고 있다.



 
 ◀ 홍명희 사진전.


‘더불어 주인공들을 미화하지 않고 그들의 약점까지도 그려낼 뿐만 아니라 세부 묘사가 정밀하고 조선시대의 풍속을 탁월하게 재현하고 있다'고 강영주교수는 평가한다. 또한 벽초의 이 소설은 조선시대의 풍속과 다양한 계층의 일상생활을 매우 풍족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어의 보고라 할 만큼 풍부한 어휘로 당대 민중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벽초는 <임꺽정>을 집필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조선정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벽초 홍명희는 <임꺽정>을 통해 식민시대 민중들의 자기각성과 조선적 정조의 복구를 통해 독립의지를 전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벽초가 신간회 운동을 통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간의 민족협동전선을 추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임꺽정>을 통해 프로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의 대립을 넘어선 진정한 민족문학을 제시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옛날 봉건사회에서 가장 학대받던 백정계급의 한 인물인 임꺽정을 통해 계급모순과 사회모순에 저항하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표현하였고 이를 포함한 민족공동체의 아름다운 전통을 적극 재현해냄으로써 <임꺽정>은 대립을 넘어선 진정한 민족문학, 양과 질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역사소설이란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벽초는 말년에 자녀들에게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다. 일생 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진정 평생 민족해방과 통일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애국자로서 살려고 노력하였다. 사회운동가로서나 작가로서 벽초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한 가장 중요한 의식은 민족의식이었던 것이다.

 

● 문학비 건립을 싸고 갈등 빚기도


1988년 수많은 납·월북 문인들이 해금이 되었고 비록 이 명단에 빠져 있기는 하나 벽초의 글을 접하기는 예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그러나 아직 벽초의 업적이나 문학적 성과를 논하는 것은 그리 만만치는 않다. 벽초의 문학비 하나 세워놓고 지켜나가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몇 해 전부터 벽초의 문학에 대한 연구와 그의 업적을 기리는 ‘홍명희문학제'가 고향인 충북의 작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올해로 다섯 번 째 홍명희문학제를 개최하였다. 해마다 소설 <임꺽정>의 문학, 언어학, 민속학, 지리학, 심리학적 측면에서 작품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정리, 축적해나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슬라이드 강의, 벽초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상물 상영, 연극적으로 접근한 가상 대담을 무대에 올리거나 벽초의 시 '눈물 섞인 노래'를 노래로 만들어 발표하기도 하고 자료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북한에서 그가 맡았던 직책으로 인해 소설 <임꺽정>까지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작가회의 충북지회 문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고 그것이 결국 통일에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 홍명희 문학비 앞에서.

이러한 노력으로 1998년 제3회 벽초 홍명희문학제 때는 전국의 문인들이 성금을 내어 만든 문학비가 그의 고향인 괴산의 제월대에 세워지게 되었다. 벽초의 문학비가 그의 고향 괴산 제월대에 세워진 뒤 괴산 지역의 보훈단체에서 문학비를 강제 철거하겠다고 나선 일이 있었지만 지역인사들과 보훈단체 그리고 문인들이 함께 만나 십여 차례의 논의를 거쳐 비의 존속에 합의를 하였다. 그것은 남북분단이 가져다준 우리 민족의 한과 아픔을 공유하고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용서와 화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벽초는 좌우대립을 극복하고 민족이 하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일관되게 갖고 있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 평생 민족의 통일과 화해를 위해 애쓰다가 간 벽초를 기리는 일이 아직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서, 역설적으로 벽초를 칠천만 겨레의 가슴 속에 널리 살려내는 일은 남북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는 것뿐만 아니라 통일을 위한 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머지 않아 벽초의 생애와 문학이 통일의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