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피세정(避世亭) - 소재지 : 충북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산 94번지. "避世亭은 淳昌趙氏 避世公 趙 神 이 1392년에 創建한 亭子로 趙 紳은 天性이 正直하고 文行이 卓越하여 그名聲이 顯著한 高麗末 國子 進士로서 壬申年(1392)李成桂가 恭讓王의 王位를 簒奪 하고 朝鮮을 開國하기에 이르자 忠臣과 烈士중 72인은 杜門洞으로 隱居하고 趙 紳은 槐山 松坪 으로 落鄕하여 文光面 光德里 五馬山 자락에 亭子를 짓고 一片丹心 亡國 高麗를 戀慕하며 不仕二君의 忠節을 지킨 由緖 깊은 亭子로 避世亭이란 懸板을 게시하고 避世를 자신의 號로삼아 한평생 隱遁 생활을 하던곳이다." 라고 괴산군에서 알려준다.
[괴산 칠충사 솟을대문인 사랑문...]
괴산 칠중사(槐山 七忠祠) 충청북도 기념물 제7호 - 소재지 :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이 곳은 순창조씨 가문에서 배출한 일곱 충절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집이다. '괴산삼강록'에 실려 있는 조신(趙神: 1324~1402), 조종(趙悰: 1437~1506), 조복(趙服: 1525~1592), 조반(趙반: 1528~1593), 조덕공(趙德恭: 1547~1597), 조덕용(趙德容: 1567~1638), 조은(趙垠: 1584~1661) 등 일곱 충신을 모시기 위해 1975년에 세운 것이다. 사당 아래에는 1973년에 세운 칠충각이 있으며, 일곱분의 정려현판이 걸려 있다."고 입구에서 알려준다.
[괴산 칠충사 사당...]
[괴산 칠충각 일곱분의 정려현판이 걸려있는...]
[건너편에서본 괴산 칠충사 전경...]
[괴산 문광면소재 김여성 효자각...]
김여성 효자각(金礖成 孝子閣) - 건립연대 : 1517년 (中宗 12年), 위치 : 괴산군 문광면 송평리. "자는 성청(聖淸), 호는 송암(松菴) 본관은 상산이며 예조 판서 김추의 현손이고 증, 승지, 승평의 아들로 1503년에 출생 하였다. 그는 벼슬이 주부에 이르고 증종조에 정국원종훈에 기록되었다. 여성은 아우 여신과 더불어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1533년에 아우와 함께 효로서 생정과 충현의 예에 의하여 상을 받았다.
느는 아우와 함께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조석으로 부모님의 잠자리를 보살피며 문안드리고 가세가 빈한함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술과 과일, 고기로 봉양하였고 병환이 나시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간화와 치병에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모진이 병이들자 그 병세를 알아보기 위하여 똥을 찍어 맛을 보아가며 간호하였다 한다. 그러나 모친이 먼저 돌아가시게 되자,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3년동안 무덤을 돌봐가며 살았으며, 3년을 마치자 부친이 이어 돌아 가시므로 계속하여 3년동안을 묘막살이를 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보모 생시에는 섬기기를 다하였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장례와 제례에 극진하였고 애곡이 끊이지 않았다 한다." 고 알려준다.
[문광면 광덕초등학교자리인데 지금은 공장으로...]
[괴산 문광면소재 김만협, 김익 효자각...]
김만협 효자각(金萬協 孝子閣) - 건립연대 : 1692년(숙종 18년) 소재지 :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 326. "이 각은 김만협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그의 본관은 안동 자는 세진이며 안렴사 오은 김사렴의 후손이며 천해의 아들이다. 그는 효행이 지극하여 부친이 중병에 걸려 생사를 헤매일 때 스스로 단지하여 주혈함으로써 생명을 5일간 연장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를 20리 떨어진 괴산읍 진골에 정하고 예법에 따라 3년간 복상하는데,
찬 바람 눈보라를 불문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성묘하였고 3년간 죽을 먹고 지냈으며 하루는 부친 묘소에 산불이 일어나자 놀란 만협은 옷을 벗어 물을 적셔 있는 힘을 다하여 불을 껐다. 만협은 이때 이비은 화상과 화기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라고 애뜻한 사연을 전해준다.
김익(金溢)효자각 - 위치 :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 326. "자는 익삼, 본관은 안동 김만협의 5대손이다. 효자 가문에 태어나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곁을 지키며 조석으로 잠자리를 살피고 문안드리며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지성으로 약을 달여드렸다. 나이 13세에 모친이 오랜 병환으로 신음하니 백약이 효험이 없어 마지막으로 산제를 베풀어 3개월동안 하루같이 험한 산길을 왕래하며 산신에게 기도를 드렸더니 지성이 감천하여 모친의 병환이 나았다고 한다.
가세가 청빈하여 어머니 봉양이 어려워서 마을의 제사집을 다니며 음식을 얻어다가 공양하는등 효성이 지극했다.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서울에서 수일간 머무르게 되었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병환이 들어 자기를 부르고 있는 꿈을 꾸어 심상치 않아 과거를 포기하고 황급히 돌아와 보니 과연 노모가 병석에 누워 있었다. 지성으로 간호하여 치유케하고, 천수를 다하여 죽으니 10리밖에 장사하고 궤연에서 잠을 자며 풍우한서를 무릅쓰고 3년동안을 하루같이 시묘하였다.
공의 증조 김만협의 효자각에 1985년 같이 배형하였다." 라고 쓰여저 있어 정말 동네가 효자동네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괴산면 문광저수지의 상류쪽...]
[괴산면 문광저수지의 하류쪽...]
[문광저수지 근처에 만들어진 의성김씨세거비...]
[심하게 꼬불거리는 굴티재 위에서 내려다본 문광저수지...]
굴티재에서 멀리 보이는 문광저수지를 내려다보면서 한참을 쉬며 허리운동과 심호흡을 하고 잠시 후 고개를 넘어서 내려가니 우측으로 심씨농예전이란 간판이 보인다. 잠시 들러 보니 지금은 농을 맞추러 오는 사람들이 없어 그냥 창고로 쓰고 있지만 전에는 이큰 공장이 밤을 새며 돌아갔다고 자랑을 하신다. 커다란 공장이 다섯 채나 되는 것으로 보아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첫 번째 건물안을 보여주시며 이곳이 장롱들을 전시해놓던 곳이라 일러주신다.
[심씨농예전...]
심씨농예전이 소재한 문광면 양곡리를 지나면 작은 하천다리가 있는데 이곳이 세면의 경계점이다. 이곳에서 청안면, 문광면, 청천면으로 갈리는 곳이다. 이곳에 전화 부스 뒤에 비석과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거사 박공량 공덕비인데 차를 잠깐 세우는데도 복잡하고 또 오가는 차들이 많지도 않는데 좁기 도해 위험해서 차안에서 대충 찍을 수밖에 없었다.
[거사 박공량 공덕비...]
[청안경찰서앞 4거리 이정표...]
한참을 내달렸다는 생각이 든다. 오는 동안에 이렇게 십리정도를 한번에 달려보긴 처음인 것 같다. 물론 넓은 평지의 논밭이 많은 시골풍경은 더할나위 없는 고향같은 길이지만 한참을 그냥 달리기만 하게 되면 무료해지기 십상이라 여느 곳이라도 찾아들어가는 법인데 이곳은 정말 찾아들어갈 만한 그런 곳이 별로 없는 평범한 곳이기도 하다. 이제 앞 표지판과 같이 4거리가 나온다. 19번 도로는 직진이지만 백봉초교가 안쪽에 있어 우회전해 34번도로를 잠깐 올랐다 다시 내려와야 한다.
[괴산군 청안면 백봉초등학교 교정...]
괴산군 청안면 부흥2리에 소재한 백봉초교는 옛건물과 우측으로 새건 물을 같이 보유하고 있다. 운동장이 굉장히 넓은 편이다. 백봉초교는 1934년 4월에 청안초등학교 부설 백봉간이학교로 시작을해 같은 해 백봉공립 국민 학교로 인가가 되었다. 백봉리에 있던 학교가 1955년에 지금 부흥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학생수는 총 70여명으로 되어있는데 교실이 많은 것 같은데... 지금도 인상에 남는 것은 밑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얼마나 시원하고 보기 좋은지 담아왔는데 이나무가 백봉의 의지의 상징이라 한다.
[백봉초등학교 교정 끝에 멋진 고목이...]
백봉초교가 있는 청안경찰서 4거리를 지나며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다. 좁은 길인데 웬 화물차들이 이렇게 많이 교차를 하나 하며 이상하게 생각을 하며 달려갔는데 조금 가니 구방리에서부터 차선을 넓히고 도로를 직선화하는 커다란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이곳 서부터는 그리 높지는 않은 고개인데 왜인지는 몰라도 모텔과 유흥점 들이 즐비한 것이 경찰항공대가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정말 이해가 안가는 그런 곳이었다. 지금도 많은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는 현장을 지나갔다.
[열티고개밑에 선녀탕 온천장이...]
선녀탕이 있는 열티 고개를 넘어서면 좌측으로 경찰항공대가 자리하고 있다. 언덕으로 길게 뻗은 입구가 눈에 선하다. 이제 도로 가에 집들이 많아지고 좌우로 도시화된 느낌을 갖을 수 있는 것이 미원면에 가까워 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반겨주는 미원중학교를 지나 서니 미원면이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면사무소 전에 미원초등학교가 있다. 새로 지은 건물이 아마도 미원면에 아이들이 많은 것으로 짐작을 할 수가 있다.
미원초교는 1919년 개교를 하였다 한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6월달에 미원공립 보통학교로 개교를 한 전통있는 학교임에 틀림없다. 이날은 행사가 있는 날 이었다. 교통 안전에 대한 마이크소리가 들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교통안전 백일장이 열렸었다 한다.
[청원군 미원면소재 미원초등학교 교정...]
[청원군 미원면 쌀안의 유래비...]
[청원군 미원면 소재 김정구 효자각...]
김정구 효자각(金鼎九 孝子閣) - 소재지 : 청원군 미원면 미원리. "이 건물은 효자 김정구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1729년(영조 5년)에 세운 정문이다. 김정구는 본관이 경주로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깊어 예절과 행실이 올바르고 타의 모범이 되었으며 형제간에는 우애가 돈독하여 주위로부터 칭찬이 자자 하였다. 어머님이 병환으로 고생하시자 몹시 안타가워하고 극진히 봉양 하였으며 생선이 드시고 싶다하자 아우들과 더불어 개울가로 그물을 가지고 나가 고기를 잡았는데,
갑자기 큰고기 한 마리가 잡혀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와 보니 마당에도 고기들이 튀어 올라와 있어 이를 잡아 봉양 하였다. 또한 아버님이 병환에 들자 세아우와 함께 쾌유를 알몸으로 하늘에 기원하였으며 병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고 아버님께 흘려넣어 드시게 하니 소생 하셨다. 그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몹시 슬퍼하고는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3년간을 조석으로 곡을 하며 부모님을 사모 하였다. 이러한 효성이 조정에 알려지자 영조임금이 정려를 명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도록 하였다." 고 전한다.
[6.25전쟁 참전기념비와 청파 남양홍공구균 사적비...]
[청원군 미원면 소재 남양홍씨(南陽洪氏) 충효각...]
남양홍씨 충효각중수기(南陽洪氏 忠孝閣重修記) "忠은 나라사랑의 표준이요 孝는 모든 행동의 근본이다. 조손 두분은 충효를 겸전하고 속부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이에 감동한 임금님은 각기 증직과 아울러 정려의 전을 내렸으니 곧 남양홍씨 충효각이다. 만계 홍석무선생(晩溪 洪錫武 1601~1667년) 은 세 살 때 아버님을 여의고 9세때 모부인 병환에 필요한 생선을 구하러 금강독류를 굽어보고 울고 있더니 갑자기 큰물고기가 튀어나오는 이적이 있었으니 이는 실로 저성이 감천이라. 17세 모부인상때는 피눈물로 초도의 예를 다했다." 고 전해준다.
[미원천변 둑길위에 벚꽃길이...]
미원농협에서 우회전해 미원천변으로 들어섰다. 넓은 미원천이 잘 정돈되어 있고 미원천 주변 둑방에는 양쪽으로 벚꽃나무가 심어져 있고 다행스럽게도 아직 꽃이 한창이라 멋진 벚꽃 터널길로 떨어지는 꽃잎을 맞으며 걸어볼 수가 있었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아도 싱그러움 속의 꽃들이 잔뜩 피어 있고 중간에는 자그마한 섶다리도 조성되어있다. 한동안 미원천을 건너왔다 건너 갔다 하며 구도를 잡아보았다. 올해 이렇게 넓은 유채밭을 처음보기 때문이다. 해마다 남쪽에서 유채를 보아왔는데 올해는 중부지방에서...
물론 한강변이나 또 중량천에가면 많이 심어놓은 곳이 있지만 벌써 다 지고 없다. 이곳은 이제막 피어오르는 덕분에 실컷 꽃 속에 파묻혀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미원천을 가로지르는 섶다리...]
[깨끗한 환경의 미원천변...]
[미원교 밑에는 오리배가...]
[미원천변에 심어놓은 유채꽃...]
[미원천변 섶다리 뒤로 멀리 아름다운 미원교회가 보인고...]
이번여행에서 제일 포근하고 또 넓은 남한강도 보아왔지만 충주에서의 날씨도 않좋았지만 공사 중인 곳이 많아서 인지 목계 나루나 또 탄금대 앞에서도 맑고 푸른 물빛을 못보아 풍광이 아쉽던 차에 이렇게 미원면에 와서 미원천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역시 꽃의 위력을 무시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다, 산, 강, 꽃...모두들 자기 나름대로의 멋이 있고 개성이 있겠지만 꽃의 색이나 어울림을 따를 것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허나 이제 여름이 닥아 오는데 시원한 물가를 찍은 사진이 더 시원해 보이지는 않을까 학 생각도 해본다. 이제 미원면을 좀더 돌아보고 미등산수목원과 옥화9경을 기대해보며 11구간의 여행은 여기서 마치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