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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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01월04일 제642호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입니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인조 14년(1636) 봄 후금(後金)은 청(淸)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를 칭하면서 마부대(馬夫大)를 사신으로 보내 양국 간의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다. 이에 분개한 척화론자, 즉 주전론자(主戰論者)들은 마부대를 죽이자고 주장했으나 전쟁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9년 전인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 때 불과 석 달을 못 버티고 항복했던 조선이었다. 마부대가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에게 “한(汗·청나라 황제)이 여러 왕자들과 항상, ‘조선은 아녀자의 나라인데 무엇을 믿고 저러는가’라고 말하면서 웃는다”라고 말한 것은 뼈아픈 사실이었다. 사신의 목을 벨 경우 속이야 시원하겠지만 그 후과는 불 보듯 환한 일이었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입으로는 복수를 외쳤지만 군사력은 기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척화론을 배격하고 주화론(主和論)을 주청한 인물이 대사헌이었던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다.
△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은신했던 남한산성(사진/ 권태균) |
대청황제공덕비 비문을 떠맡다
“척화 일사(一事)가 어찌 정대하고 명쾌하지 않겠는가마는 국사와 민심이 한 가지로 믿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사세를 돌아보지 않고 강적에게 분을 돋우는 것은 계책이 아니다.”(‘이경석 행장’)
척화론이 아니면 사대부 대접을 못 받던 때 주화론 주창은 용기였으나 현실적인 그의 주장은 척화론에 묻혀버렸다.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 정권의 한계이기도 했다. 광해군 폐위 교서의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00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는 구절이나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인조실록> 1년 3월14일)라는 구절이 이를 말해준다.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상국(上國)에 대한 배신이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 정권으로서는 척화론 외에 길이 없었다. 주화론은 광해군의 실리 외교가 옳은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반정(反正)의 자기 부정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조가 향명대의(向明大義)를 위해 후금과 화(和)를 끊는다고 사실상 선전(宣戰)의 교서를 내리자 그해 12월 청 태종은 여진군 7만, 몽골군 3만 등 도합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고, 인조는 정묘년에 그랬던 것처럼 강화도로 몽진(蒙塵)하려 했으나 이미 강화로 가는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겨울의 남한산성은 농성할 곳이 아니었다. 기다리던 명나라는 원군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고, 자초한 전란에 의병의 봉기도 찾기 어려웠다. 40여 일 뒤 성내의 양식이 떨어지고 수많은 군사가 얼어죽자 강화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 ‘삼전도의 치욕’뒤 청나라의 요구로 세워진 삼전도비.이경석은 그 비문을 쓰고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라고 한탄했다(사진/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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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1637) 1월30일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백관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지금의 송파구)로 나가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는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그리고 훗날 ‘삼전도의 치욕’이라고 불리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 자리가 수항단(受降壇)인데, 청나라는 여기에 ‘대청황제공덕비’ 건립을 요구했다. 이것이 세칭 ‘삼전도비’(三田渡碑)인데, 누가 비문을 짓느냐가 문제였다. 사실 항복한 이상 비문 찬술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이런 외교 비문은 예문관(藝文館) 대제학이 짓는 법이었으나 마침 대제학이 궐위였다. 그래서 인조는 비변사의 추천을 받아 몇 명에게 비문 찬술을 명했다.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를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인조실록> 15년 11월25일)
이경석의 글이 채택된 내막은 좀더 복잡하다. 인조는 세 글 중 일부러 조잡하게 쓴 조희일은 배제하고 장유와 이경석의 글을 조선에 와 있던 청나라 사신 편에 심양(瀋陽)으로 보냈다. 심양에는 명(明)나라 학사였던 범문정(范文程)이 있었는데, 그가 이경석의 글을 일부 개찬할 것을 조건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인조는 이때 이경석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명나라 선박 때문에 청나라에 구금돼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向背)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의해서 판가름나는 것이다. 월(越)나라 구천(句踐)은 회계산(會稽山)에서 오(吳)나라의 신첩(臣妾) 노릇을 했지만 끝내는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이루었다. 훗날 나라가 일어서는 것은 오직 내게 있는데, 오늘 할 일은 다만 문자로서 그들의 마음을 맞추어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연려실기술> ‘현종조고사본말’)
국왕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이경석은 비문의 일부를 개찬하고는 공부를 가르쳐준 형 이경직(李景稷)에게 편지를 보내,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라고 썼다. “수치스런 마음 등에 업고 백 길이나 되는 어계강(語溪江)에 몸을 던지고 싶다”라는 시는 그의 고통을 잘 말해준다. 그 당시에는 누구도 그를 비문의 찬술자로 비판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훗날 이경석은 비문 찬술을 이유로 송시열과 그 제자들로부터 수많은 수모와 공격을 당했으니, 그야말로 소절(小節)이 대의(大義)를 꾸짖는 격이었다.
이경석이라고 청나라가 좋아서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이조판서 최명길과 승려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밀파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인조실록>(19년 8월25일)에 따르면 조정에서 독보를 밀파한 이유는 ‘조선의 세력이 곤궁해서 청국의 통제를 받는 이유를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경석 행장’은 이때 그가 두문불출하면서 찾아오는 사람도 물리치고 하루 종일 울었는데 가족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고 전한다. 만약 밀사 파견 사실이 청나라에 감지되면 국체가 흔들거릴 사건이었다. 게다가 명나라는 “이전의 허물은 거론치 않을 것이니 기어코 함께 협공하자”는 답서를 보냈다. <인조실록>은 “그 일이 비밀에 붙여져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고 전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 현종이 이경석에게 궤장을 하사할 때의 모습을 그린 사궤장연회도.이경석에 대한 현종의 신임은 매우 두터웠다(사진/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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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1595~1671)은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6대손으로서 부친의 임지인 제천 관아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10년(1618) 문과 별시에 급제했으나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고, 인조 1년(1623) 다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왔다. 그가 평소에 지키려 한 덕목 중에 검덕(儉德), 불편부당(不偏不黨)과 함께 무무출(無廡出)이 있는 것이 그의 인격을 잘 말해준다. 무무출은 후실(後室), 즉 축첩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축첩이 일반화된 사대부 사회에서 특이한 일이었다.
그는 전란의 시대를 산 선비답게 국가와 고난을 함께했다. 인조 19년(1641)에는 세자 이사(貳師)가 되어 소현세자가 있는 심양으로 가서 병자호란 포로 석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가 잠시 귀국한 뒤 인조 20년(1642) 다시 심양으로 갔는데 이때 사건이 발생했다. 명나라 선박이 선천(宣川)에 정박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청나라에서 수사에 나선 것이다. 그는 명나라의 잠상(潛商)이 우연히 정박한 것이라며 시종 조정의 연관 사실을 부인했으나 구금되었다. 만주 봉황성 등에 갇혀 있던 그는 8개월 만에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永不敍用)는 조건으로 겨우 석방되어 귀국했다. “이제 살아서 돌아오긴 하였으나 복명하지 못하며 다시 용안을 뵙는다는 것도 기약할 수 없으니, 신의 죄과가 더욱 무겁습니다. …종이를 앞에 대하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인조실록> 20년 12월17일)라는 글은 그의 심정을 잘 대변한다. <선조실록> 개수(改修) 작업 등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을 하던 그는 인조 23년(1645) 영불서용 조처가 풀림에 따라 이조판서로 임용되었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같은 사림들을 대거 등용해 한때는 그들의 주인(主人)으로 불렸다.
북벌계획의 책임을 모두 짊어지고…
효종 즉위년 김육의 대동법 확대 실시 상소 때 영의정이었던 이경석은 “신의 뜻으로는 먼저 홍청도(洪淸道·충청도)부터 시행하여 그 이해를 안 연후에 다른 도에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효종실록> 즉위년 12월13일)라고 충청도 확대 실시를 지지했는데, 대다수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를 감안한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 <백헌 필적>(위)과 이경석이 효자임을 표창하는 효자 장려 문구.이경석은 불편부당과 무비방을 신조로 삼았고 첩을 두지 않았다(사진/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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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1년(1650) 산림의 공세로 권력을 빼앗긴 김자점(金自點)이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북벌 계획을 밀고하면서 청나라 사문사(査問使) 6명이 조사차 의주로 나왔다. 북벌 계획이 밝혀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효종이 밤새 자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사대부 집안에서 이삿짐을 싸는 등 인심이 흉흉할 때 나선 인물이 이경석이었다. 이경석이 “저들이 만일 무리한 일로 힐책할 경우 신이 직접 담당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몸 하나를 아끼겠습니까”라고 말하자 효종은 “경의 나라를 위한 정성이 간절하다 할 만하다”(<효종실록> 1년 2월8일)라고 칭찬했다. 청천강을 건너며 지은 “한밤에 충신한 마음으로 강을 건너니/ 이 마음 오직 귀신만 알 뿐이로다”(半夜直將忠信涉/ 此心惟有鬼神知)라는 시에 그의 심정이 잘 담겨 있다. 청나라 사신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이경석을 ‘대국을 속인 죄’로 몰아 극형에 처하려 했다. 효종이 그의 구명을 간청하며 막대한 뇌물을 전달한 덕분에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의주의 백마산성(白馬山城)에 갇혀 앞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이경석은 다시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투옥 1년 만에 석방되었는데, 귀국길에 사민(士民)들이 길가에 몰려들어 환호했다는 데서 그의 신망을 알 수 있다. 귀국 뒤 이경석은 광주(廣州)에 은거하고 금강산 유람을 하는 등 정사에서는 한발 떨어져 지냈으나 효종이 자문하면 정성껏 도왔다. 효종 6년(1655) 청나라 사신이 이경석이 서울에 있는 것을 질책함에 따라 아들의 임지인 안협(安峽)으로 피했다가 철원으로 이주하는 등 다시 시골을 전전했으나 효종은 그의 건의는 무조건 들어줄 정도로 그를 높였다.
청나라의 감시 때문에 명예직에 가까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같은 자리만 맡아 국사에 자문하는 것이 정치 활동의 거의 전부였으나 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국가 원로가 되었다. 74살이었던 현종 9년(1668)에는 궤장(?杖)과 잔치가 내려졌는데,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이후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듬해 현종은 온양 온천에 거동하면서 이경석을 유도(留都)대신으로 삼았는데, 국왕이 없는 서울을 맡길 정도로 신임한다는 뜻이었다. 이때 온양 행궁에 있는 현종에게 올린 상소가 뜻밖에도 송시열과 분쟁이 되면서 그는 시비에 휩싸인다.
“지난날 조정에는 급히 물러나려는 신하들이 이어지더니, 오늘날 행궁에는 달려가 문안한 신하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군부가 병이 있어 궁을 떠나 멀리 초야에 있으면 사고가 있거나 늙고 병들었거나 먼 곳에 있는 자가 아니라면 도리에 있어서 이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된 것입니다.”(<현종실록> 10년 4월3일)
상소를 공격으로 오인한 송시열
당시 직산에 있던 송시열은 이 상소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오해해 이경석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옛날 송(宋)나라의 손적(孫?)은 ‘오랫동안 편하게 살아서(壽而康)’ 한 세상의 부러움을 샀지만 그가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시켰다는 명성은 사지 못했으므로 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손적은 송의 흠종(欽宗)이 금(金)에 포로로 잡혀가는 정강(靖康)의 변(變·1127년) 때 금나라의 비위에 맞는 글을 써준 대가로 ‘오랫동안 편하게 살았다’(壽而康)고 주희(朱熹)가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비난한 인물인데, 그를 이경석에 빗대어 공격한 것이다. 이경석이 삼전도 비문을 지은 것에 대한 야유였다. 그러나 이경석은 송시열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며 일절 대꾸하지 않았다.
이경석은 현종 12년(1671) 취현동(聚賢洞) 자택에서 사망했는데, 숙종 28년(1702)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이 이경석의 신도비를 쓰면서 이경석을 옹호하고 송시열을 비판한 것을 계기로 논란이 재연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노론은 아직 발표도 되지 않은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에 주희와 다른 경전 해석이 있다면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삭탈관작했다. 이 때문에 이경석의 신도비는 50여 년 뒤인 영조 30년(1754)에야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받아 겨우 세워졌으나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은 신도비를 갈아서 없애버렸다. 불편부당과 무비방(無誹謗)을 신조로 삼은 이경석도 노론의 당심(黨心)을 비켜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집안에서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렴 검소하였다. 아래 관리에게도 겸공(謙恭)하였고 옛 친구들에게 돈독하였다. …수상으로서 앞장서서 일을 맡아 먼 변방에 유배되었으므로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겼다”(<현종개수실록> 24권 12년 9월23일)”라는 졸기가 그의 일생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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