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17454§ion=section9 2006/10/16 [08:37]
'생태계 살해'에 대한 대안은 ‘생태적 민주주의’ | |||
[책동네] 프란츠 브로스위머 <문명과 대량멸종의 역사>, 환경파괴 다뤄 | |||
"우리는 겨우 200년 전만 해도 여행비둘기 수십 억 마리가 현재 미국이라고 불리는 땅의 풍경을 장식했음을 벌써 잊어버렸다. 여행비둘기는 한때 지구에서 가장 개체수가 많은 새였다. 우리는 들소 6000만 마리가 북아메리카의 평원을 거닐었다는 사실도, 노바스코샤 연안에서 바다코끼리들이 짝짓기를 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카리브 해에서는 몸무게가 230㎏이나 되는 거대한 바다거북들이 3000만∼5000만 마리나 번성했다. 겨우 100년 전만 해도 뉴잉글랜드와 캐나다의 매리타임 지방 숲에는 흰곰들이 살았다. 지금은 흰곰들이 북극에서 겨우 버티고 있기 때문에 '북극곰'이라고 불린다. 중세에 지어진 성의 잔해처럼 오늘날 '자연'은 찬란하던 과거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18쪽) 생태서적 한 권을 출간하기가 가뭄에 콩나기인 출판계에 얼마 전 프란츠 브로스위머의 <문명과 대량멸종의 역사>를 펴낸 출판사 에코리브르의 결정에 박수부터 보낸다. 앞서 인용한 3000만, 6000만 등의 숫자들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류로서는 들소를 떠올릴 수 없는 빈약한 상상력이 형해화된 바로 우리 자신을 상징하는 듯하다. 생태계 학살의 심각성은 폐부를 찌르지 못하고 있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는 원시시대에 곡식을 수확할 때 낫에 잘려나가는 곡식들의 비명을 인간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엔 최소한 곡식을 베었을지언정 최소한 자연에 대한 미안함 마음 정도는 있었다고 보아야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오만해진 인간은 신의 영역마저 정복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아갔고, 결국 탑이 무너지면서 '아담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바벨의 언어' 속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사고뭉치가 돼버렸다.
저자는 서론에서 "사회과학자들이 왜 대규모 멸종 사태와 생태계 다양성 상실에 신경을 써야 할까? 생태계 살해의 사회적, 역사적 뿌리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하려 애쓸 이유가 무엇인가?"는 저자 자신을 향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인류는 다양한 생물 가운데 일부일 뿐만 아니라, 그 생물에게도 크게 의존"(19쪽)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브로스위머가 지적했던 사회과학의 자연과학에 대한 접근은 왜 중요한가. 일례로 조절주의를 공부하는 경제학도에게 익숙한 알랭 리피에츠는 조절이론의 한계를 생태담론에서 찾았고, 녹색당으로 정치적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조명래, 최병두의 경우에 각자 조절이론과 맑스이론의 한계를 절감하고 생태담론에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이러한 전환에 대해서 여전히 조절주의와 맑스주의라는 구조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이들은 생태주의로의 전환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보는 뒷담화도 술자리에서 들려온다. 최소한 자신의 학문적 토대를 생태담론으로의 전면적 변환까지는 (그 각자의 학문적 추구의 경로의존성이 있는 만큼) 존중한다 치더라도 체계 심지어 생활세계에서조차도 생태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뒤에서 본서를 다루면서 언급하겠지만 가히 문제적이다고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책의 구성부터 들어가 보자. 출판사의 홍보문구에서도 밝혔지만 저자는 인류학, 생물학, 지리학, 사회학 등의 광범위한 문헌을 재조합하여서 도도새, 들소, 북극곰이 사라지는 대량멸종 위기를 본서의 열쇠말인 '생태계 살해(ecocide)'라고 명명한다. 생태계 살해의 시초는 인류의 출현부터 시작된다. 1장은 인류가 사피엔스 단계로의 진화과정에서 대형동물(매머드 등)의 멸종을 짚으며, 2장은 익히 알고 있듯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의 고대 문명의 멸망에 대해서 이동생활에서 정착생활로 바뀌고 관개농업을 하게 되면서 문명발달과 더불어 어떻게 생태계가 파괴되는지를 3장에서는 앞서 1, 2장의 파괴를 초월하는 현대사회의 과학기술발달에 의한 생태계 살해 전적을 밝히고 있다. 나머지 4, 5장은 현대사회의 반생태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국내 학계에서 고대문명에서의 관개농업에 있어서 결국 염화작용으로 멸망했다는 의견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 대중들에게는 생소한 학설이다. 또한 이 생소한 학설은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는 익숙해져야 하는 학설이기도 하다. 국내 상황을 포개어 본다면 고대농업의 관개농업의 실패는 관개용수에서 쌓이게 되는 염분을 없애기 위해서 더 많은 관개용수를 사용하는 바람에 이렇게 사용된 물은 다시 지하수의 수위를 높이게 되고 염분도 높이게 된다. 가령 관개용수는 아니지만 국내에 온천개발을 위해서 뚫었다가 남겨진 폐공만도 100만 개 정도로 추측되는 데 지하수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고대문명의 관개농업 실패를 되풀이가 되는 가가 걸려있다. 지표수의 오염과 부족에 대한 대안으로 지하수가 부각되고 있는 현재(우리나라의 총 지하수 부존량은 1조 5000억인데 이는 국내 총 물소비량의 50배에 이른다.) 2011년이면 한국이 세계 8위의 물부족국가로 부상할 것으로 예측되는 등 오늘에 앞선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의 멸망은 우리에겐 충분히 반면교서가 될 부분이다. 또한 본서에서도 토양침식에 대한 생태계 파괴에 대해서 지면 곳곳에서 비중 있게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경작을 위한 땅의 개간을 통한 침식의 속도와는 차원이 다르게 도로, 건물 등을 짓는 오늘날의 무분별한 개발은 토양침식을 가히 초가속화시킨다. 특히 올해 수해에서도 목격했지만 경희대 지리학과 다나카 유키야 교수에 주장에 의하면(세계일보 2006년 7월 20일자 기사참조) 한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화강암 지형으로 인하여 수해와 산사태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되새겨본다면 본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토양침식 관련 문헌들의고는 바로 한반도를 겨누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저자는 언어 능력의 발달이 생태계 살해를 촉진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부분이다. 언어의 발달이 어떻게 생태계 살해와 관련이 있을까.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의외로 쉬운 사례 제시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네 번째 나무에서 곧바로 오른쪽으로 꺾어서 저 수컷 영양을 불그스름한 바위 쪽으로 몰아, 내가 창을 들고 거기 숨어 있을 테니'라고 하면 되었으니까. 언어가 없었다면 이런 뜻을 전달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어떤 대상을 설명하는 언어 능력이 강화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더 나은 도구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생각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63쪽) 그러나 언어의 발달이 생태계 살해를 촉진했다는 연관성이 단순히 사냥감을 잡기 위한 단순한 의사소통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언어를 통해서 뇌에 주름이 늘기 시작한 인류는 이후에 언어를 재료로 삼아서 자본주의 등의 이념을 만들어냈다. 본서의 본문이 끝나면 '용어 설명'이라는 코너가 있는데 저자는 "용어 설명은 중립적이 아니며, 항상 필자의 견해를 포함하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념에 대한 풀이도 적시했다. 이념이란 "(1)거짓이고, (2)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으며, (3)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 신념체계가 이념이다."(222쪽) 자연으로부터 단절된 언어를 사용하는 인류가 세운 미완의 바벨탑이 이념인 것을 볼 때 저자가 자신만의 용어 설명이라면서 이념의 첫 번째 의미로 '이념은 거짓'이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5장에서는 저자는 현대사회의 생태계 살해의 주범은 이러한 자본주의라는 이념을 먹고살아서 태어난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경제분야에 민주적 참여가 부족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미 FTA를 통해서 외부의 충격으로 혁신이 가능하다는 '참여정부' 노무현 정권의 오만과 엘리트 정치 앞에서 사패산이 지율스님이 그리고 새만금이 어떻게 나락으로 치닫고 있는 지를 감안한다면 저자가 주장하는 생태계 살해에 대한 대안으로 생태적 민주주의의 주창은 한국사회에서도 대비되어 생각해볼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 <문명과 대량멸종의 역사>에서 본문은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용어설명과 여러 최신 도표, 통계자료가 실려 있다.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편집이 돋보인다. 다만 본문에서는 시기 구분에서 플라이스토세와 홀로세를 홍적세와 충적세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두 용어는 이미 학계에서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사어임을 언급해야겠다. 이들 용어가 사어가 된 이유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이들 시대적 구분이 오늘날에 와서는 불명확하고 맞지 않기 때문이다. 추후에 수정이 필요하겠다. 얼마 전 <교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최병두 교수는 "'나의문화유산답사기'처럼 '생태답사기'가 가장 필요한 책이라고 본다. 주위에 이런 경험을 가진 필자를 찾아보면 꽤 있을 텐데 "출판기획자들이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게 아쉽다"라는 얘기도 빼놓지 않는다. 최 교수는 또한 "백화점 나열식 책은 이제 그만!"이라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기자는 최병두 교수야 말로 이러한 '생태답사기'를 쓸 수 있는 적임자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도시 속의 환경 열두 달>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대중과의 소통 시도를 부탁드리고 싶다. 책이 그 나라의 문화의식을 드러낸다는 혹자의 말은 너무나 정확한 지적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향한 목적달성의 매뉴얼인 자기계발서가 불티나게 팔리고, 생태서적 한 권 출간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나라의 천박한 생태의식은 후세의 미래를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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