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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유신 장기집권 부인못해” 법복 벗긴 소신 판결문(한겨레신문 070131)

by 마리산인1324 2007. 1. 31.

 

<한겨레신문> 2007-01-31 오전 07:01:40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87598.html

“유신 장기집권 부인못해” 법복 벗긴 소신 판결문
‘긴급조치’ 무죄판결 두 법관의 불이익 사례
이영구 변호사, 한달만에 사표 “다들 그랬을 것”
양영태 변호사, 1심 유죄 뒤집어 “청와대서 뒷조사”
한겨레 전종휘 기자
» 1975년 4월 8일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사형 등을 확정하는 판결문을 읽고 있다. 자료사진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한 판사들에게 닥친 불이익과 위협의 실상이 드러나고 있다. 당시 판사들이 양심껏 판결하는 게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무죄 판결을 내린 뒤 진급에서 탈락한 양영태 변호사(당시 고등법원 판사)는 청와대에서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폭압적 시대 분위기에서 나온 무죄 판결이 돋보이는 이유다.

 

» ‘긴급조치’ 무죄판결한 이영구 변호사
판결문에 “박정희 정권은 장기 집권”=이영구 변호사는 1976년 서울지법 영등포지원 형사 부장판사였다. 그때 담당한 사건은 여고 교사가 수업 중 “북한에 우리보다 1년 먼저 지하철이 생겼다” “일인정권” “마르고 닳도록 해먹는다” 등의 발언으로 정권을 비판해 긴급조치 9호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변호사는 ‘박정희 정권이 장기 집권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어서 장기 집권에서 오는 지루한 안정에 대해 자유 국민이 가지는 염증 감상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요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 변호사는 “당시 합의부 배석판사들과 충분히 협의해 건실한 결론에 도달한 판결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 함께 판결에 참여한 조홍은 변호사는 “이 부장판사가 판결 전날 판결문 초고를 써 옆방의 동료 부장판사에게 보여줬더니 ‘어쩌자고 이런 판결을 쓰려고 하느냐’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며 “이 판결은 ‘법관사’에 주목할 만한 판결로 언급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결국 전주지법으로 발령받았고 한달 뒤 법복을 벗었다. 그는 “보통 법관이라도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라며 “다른 법관들이라고 해서 당시 정부나 기관의 눈치를 본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법제 안에서 모든 법관들이 국민 인권을 존중하는 ‘최대한 완화된 판결’을 내렸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조 변호사는 “당시 그런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데, 대개 그런 판결을 내린 재판부는 모두 ‘날아갔지만’ 우리 재판부는 이 부장이 모든 것을 짊어졌다”며 “정치적인 억압 상황에서 재판장이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린 셈”이라고 평가했다.

 

» ‘긴급조치’ 무죄판결한 양영태 변호사
“난 눈치 안 봤다”=양영태 변호사가 1975년에 맡은 사건은 농민 김아무개씨가 동네 사람들과 대화하던 도중 “공산주의 정치도 사람이 하니까 무조건 죽이는 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무력으로 집권했다”는 발언 때문에 반공법과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주심을 맡은 양 변호사는 1심에서 유죄로 인정됐던 이 사건에 대해 과감히 무죄를 선고했다.



양 변호사는 “당시 피의자가 한 말을 들었다는 사람들보다 듣지 않았다고 증언한 사람들의 진술이 객관적이었다고 판단했다”며 “내 소신껏 정황을 보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다른 긴급조치 위반 사건들에 대해서도 절대 3년 이상은 선고하지 않았는데, 그 형을 준 것도 지금은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가는 혹독했다. 진급이 2∼3년 늦춰지면서 후배들과 같은 직급을 달아야 했다. 그는 “해당 재판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무죄 판결 뒤 청와대에서 감사가 내려와 나를 조사하고 올라갔다는 얘기를 나석호 국회의원에게 들었다”는 게 양 변호사의 증언이다. 결국 그는 1984년 광주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관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나는 무죄 판결을 많이 내려 별명이 ‘무죄 판사’였다”고 말했다.

 

전종휘 기자, 김외현 김명진 수습기자 symbio@hani.co.kr

 

기사등록 : 2007-01-31 오전 07:01:40 기사수정 : 2007-01-31 오전 07:3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