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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4월 8일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사형 등을 확정하는 판결문을 읽고 있다.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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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한 판사들에게 닥친 불이익과 위협의 실상이 드러나고 있다. 당시 판사들이 양심껏 판결하는 게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무죄 판결을 내린 뒤 진급에서 탈락한 양영태 변호사(당시 고등법원 판사)는 청와대에서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폭압적 시대 분위기에서 나온 무죄 판결이 돋보이는 이유다.
판결문에 “박정희 정권은 장기 집권”=이영구 변호사는 1976년 서울지법 영등포지원 형사 부장판사였다. 그때 담당한 사건은 여고 교사가 수업 중 “북한에 우리보다 1년 먼저 지하철이 생겼다” “일인정권” “마르고 닳도록 해먹는다” 등의 발언으로 정권을 비판해 긴급조치 9호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변호사는 ‘박정희 정권이 장기 집권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어서 장기 집권에서 오는 지루한 안정에 대해 자유 국민이 가지는 염증 감상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요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 변호사는 “당시 합의부 배석판사들과 충분히 협의해 건실한 결론에 도달한 판결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 함께 판결에 참여한 조홍은 변호사는 “이 부장판사가 판결 전날 판결문 초고를 써 옆방의 동료 부장판사에게 보여줬더니 ‘어쩌자고 이런 판결을 쓰려고 하느냐’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며 “이 판결은 ‘법관사’에 주목할 만한 판결로 언급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결국 전주지법으로 발령받았고 한달 뒤 법복을 벗었다. 그는 “보통 법관이라도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라며 “다른 법관들이라고 해서 당시 정부나 기관의 눈치를 본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법제 안에서 모든 법관들이 국민 인권을 존중하는 ‘최대한 완화된 판결’을 내렸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조 변호사는 “당시 그런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데, 대개 그런 판결을 내린 재판부는 모두 ‘날아갔지만’ 우리 재판부는 이 부장이 모든 것을 짊어졌다”며 “정치적인 억압 상황에서 재판장이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린 셈”이라고 평가했다.
“난 눈치 안 봤다”=양영태 변호사가 1975년에 맡은 사건은 농민 김아무개씨가 동네 사람들과 대화하던 도중 “공산주의 정치도 사람이 하니까 무조건 죽이는 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무력으로 집권했다”는 발언 때문에 반공법과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주심을 맡은 양 변호사는 1심에서 유죄로 인정됐던 이 사건에 대해 과감히 무죄를 선고했다.
양 변호사는 “당시 피의자가 한 말을 들었다는 사람들보다 듣지 않았다고 증언한 사람들의 진술이 객관적이었다고 판단했다”며 “내 소신껏 정황을 보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다른 긴급조치 위반 사건들에 대해서도 절대 3년 이상은 선고하지 않았는데, 그 형을 준 것도 지금은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가는 혹독했다. 진급이 2∼3년 늦춰지면서 후배들과 같은 직급을 달아야 했다. 그는 “해당 재판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무죄 판결 뒤 청와대에서 감사가 내려와 나를 조사하고 올라갔다는 얘기를 나석호 국회의원에게 들었다”는 게 양 변호사의 증언이다. 결국 그는 1984년 광주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관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나는 무죄 판결을 많이 내려 별명이 ‘무죄 판사’였다”고 말했다.
전종휘 기자, 김외현 김명진 수습기자 symbi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