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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인혁당 사건…왜 법관됐나 후회도 했다”(경향신문 070129)

by 마리산인1324 2007. 1. 29.

 

<경향신문> 2007년 01월 29일 07:39: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1290739211&code=940100

 

 

 

“인혁당 사건…왜 법관됐나 후회도 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의 재심에서 피고인 8명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다. 32년전인 1975년 당시 대법원은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선고 뒤 18시간 만에 형이 전격 집행됐다. 인혁당 사건 재판이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 이유다.

당시 대법원은 대법원장과 판사 12명 등 모두 13명으로 구성됐다. 그중 한 명인 이일규 전 대법원 판사(87)는 “재심 판결을 봤다. (당시) 대법원의 잘못을 인정한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인터뷰는 지난 26일 경기 용인 자택에서 이뤄졌다. 바깥엔 진눈깨비가 내렸다. 이전판사는 귀가 어두웠다. 또박또박 큰 소리로 질문하면 그는 느릿느릿하게 답했다. 13명의 판관 가운데 그는 유일하게 ‘소수의견(반대)’을 냈던 인사다.

이전판사는 ‘긴급조치 시절 법관으로서 일하기 어땠는지’를 묻는 질문에 “법률을 왜 배웠나 회의도 들었다. (판사가) 집권자의 보조역할이나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라며 말을 흐렸다.

“당시엔 (법관도) 관료주의 분위기가 있었다. 위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아래서는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 말이다. 법관들은 독립정신이 필요하다. 상사가 시킨다고 해도 ‘예, 예’ 하지 않는 것이다. 당시 (독립정신이 부족한 판사들이) 조금 있지 않았나 싶다.”

유족들에 대한 사과 여부를 묻자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라고 했다. 사법부의 책임이나 뒤늦은 사과에 대해서는 과거는 과거로 놔두자고 했다.

“이미 지난 제도 아래서 내려진 판결이다. 이번 재심판결 역시 이번 제도 아래서 내려진 판결이다. 제도가 바뀌고 나서 판결이 달라졌다고 사과한다면, 제도 바뀔 때마다 예전 판결을 가지고 일일이 사과해야 하는가.”

당시 인혁당 피고인들은 군법회의 1·2심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사형을 받았다. 이전판사는 “2심 군사법정에서는 공개 변론이 아닌 서면으로만 재판이 진행됐다. 더구나 형이 가볍다는 이유로 1심형을 깨고 사형을 선고했다. 공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할 만한 양형 사정이 나왔을 때에만 가능한데도 이를 무시했다”고 말했다.

이전판사는 항소심에서 사실심리를 하지 않아 위법성이 있다고 봤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는 이전판사만 홀로 반대, 결국 ‘12대 1’로 사형이 확정됐다.

“(인혁당 사건이) 내가 있던 3부로 배당됐다. 3부 구성원은 주심이 이병호 판사였고 주재황·김영세 판사, 그리고 나였다. 나 혼자 소수의견을 내서 전원합의체로 갔다. 통상 막내 판사가 먼저 의견을 말하는데 내가 의견을 말하자 일순 침묵이 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민복기 대법원장 주재로 다수결을 통해 2심 판결이 확정됐다. 피고인들의 ‘고문으로 그렇게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고 이유에 대해 ‘그렇게 볼 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상고기각했다.”

그는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질 때 ‘아이고, 이렇게 생명이 사라지는구나’ 싶었다.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우리 대법원이 군법회의가 내린 1심, 2심의 ‘잘못된 판결을 잘한 재판’으로 잘못 판단한 책임이 있다”고 거듭 말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당시 13명의 판사 중 7명은 세상을 떴다.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과 주재황 판사는 투병 중이라고 한다. 임항준·안병수·한환진 판사는 변호사로 활동하다 은퇴했다.

〈송윤경기자 kyung@kyunghyang.com


-이일규 전 판사-

1920년 경남 통영 출생. 43년 일본 간사이(關西)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고 51년 부산지법 통영지원 판사로 법관생활을 시작했다. 법관시절 곧은 성품으로 ‘통영 대꼬챙이’로 불렸다. 57년 대구지법 부장판사, 59년 대구고법 부장판사, 64년 전주지법원장, 73년 대법원 판사에 올라 85년 정년 퇴임했다. 88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가 여소야대 국회에서 거부당한 뒤 대안으로 제10대 대법원장에 올라 90년까지 사법부 수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