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우리대학 사학과에서 통과된 박사학위 논문 한 편이 중앙일간지에 대서특필됐다. 소장 동양사학자인 윤은숙박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系 몽골 군벌세력이 었으며, 북방 유목 전통을 기반으로 건국한 국가 였다’는 새로운 해석으로 국내 학계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윤박사는 “조선왕조의 역사가 몽골사의 일부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며 조선왕조의 창업을 동아시아의 큰 시각에서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 이해 할 필요가 있음을 밝힌 것으로 피상적으로 해석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몽골군벌이었다’는 주장 하나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하다. 윤은숙 박사를 만나 이 흥미로운 주장의 모든 것을 들어 보고 작은 오해도 풀었다. <편집자 주>
# 논문 요약
- 고려·조선 왕조 교체를 재해석하다 -
동방왕가의 수장인 옷치긴家(Ulus)의 기반이 되는 쿨룬 부이르에서 동북 만주에 이르는 지역은 半건조의 스텝 초원지대에서 습윤한 수렵지대, 초원과 산림이 교차하는 목·농지대, 온대의 농업지대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지리적 경제적 환경을 가진 곳이다. 이러한 기반을 배경으로 옷치긴家에는 유목·목농·농업 등의 다양한 경제 형태가 혼재돼 있었기 때문에, 蒙·元제국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력을 소유할 수 있었다. 또한 옷치긴家가 소유한 군대는 서북부 만주의, 기마사술에 능숙한 기병은 물론 동북부 만주의 삼림전투 및 동남북 만주의 산악전투에 익숙한 인력이 두루 포괄 돼 있었다. 이러한 옷치긴家의 경제적·군사적 배경은 옷치긴家가 황금씨족 최고의 권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강화시킴은 물론이고, 蒙·元 중앙정부에 대항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1328년에 옷치긴家의 톡타가 양도내전에서 실패한 후에도 옷치긴家의 야나스리가 遼王이 돼 울루스를 통치할 정도로 옷치긴家는 국가의 중앙권력이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독립 역량을 끝내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옷치긴家가 蒙·元 제국과 고려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위치하는 지정학적 특수성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칭기스칸 서방 원정기간 옷치긴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해 대규모의 공물을 징수했고, 이후 세력을 동쪽으로 확장한 옷치긴家는 고려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쿠빌라이 카안에게 옷치긴家는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두려움에 대상이 됐을 수도 있다. 따라서 옷치긴家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고, 이후 칸들은 忠宣王을 심왕으로 삼아 옷치긴家의 남하를 방지하고 날로 확대되는 옷치긴家를 고려와 분리해 견제하려 했다. 이성계 가문은 옷치긴家의 통치지역에서 옷치긴家의 신임을 바탕으로 천호장 및 다루가치 직을 하사 받으며 세력기반을 다져왔다. 이성계 가문은 1287년 나얀반란으로 옷치긴家가 송화강 남쪽 지역에서 세력을 상실한 이후에는 함흥지역으로 남하해 쌍성총관부 산하 高麗軍民 다루가치에 임명돼 몽·원 제국에서 입지를 확실히 했다. 이성계 가문은 옷치긴家에 예속된 부민들 중 대다수를 차지했던 여진인들을 주력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원말 명초 혼란기에 다수의 여진인들이 고려에 투항하는 과정을 통해 더욱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옷치긴家가 독립적 세력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던 동북 만주지역의 목농·농업의 경제기반을 계승한 이성계 가문은 원말 명초 급변하는 동북아시아 정세 속에서 조선을 창업했다. 1387년 北元의 기본 무력인 나가추 군의 투항에 이은 1388년 4월의 북원의 토구스 테무르 칸의 결정적인 궤멸과 이와 같은 해 5월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및 11월의 옷치긴家 최후 주자 아자스리의 투항 후인 1389년 5월의 우량카이 3衛의 설치 및 1392년 7월 이성계의 조선조 창업은 원555명 혁명기 명의 對옷치긴家 관계 정립과정의 일환으로 상호 조정된 일련의 동북아 신질서 형성과정의 소산이라 하겠다. 따라서 옷치긴家 고려계 몽골 군벌 家門 출신 이성계의 조선왕조 창업은 동북만주를 지역적 기반으로 몽·원제국 최고의 독립적 세력을 형성한 옷치긴家의 역사를 태반으로 삼고 고려를 그 무대로 이룩됐음이 분명하다. 옷치긴家는 북원 소멸 후 여전히 팍스몽골리카 체제에 직속되며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우량카이 3위를 통해 동·서 몽골을 연결하는 실세가 됐고, 옷치긴家 고려계 몽골군벌 이성계 가문은 그동안 개발돼온 세계적 수준의 역사적 세례를 직접 받아오면서 크게 증강된 군사력으로 원말ㆍ명초의 격동하는 한반도 판세를 주도하면서 조선조를 창업해내게 됐다. 그러니까 옷치긴 울루스 160년사의 한 결실로 고려의 역사배경을 무대로 삼아 이룩된 신왕조라는 성격도 갖는 조선왕조라고 할 수 있다.
# 특별 인터뷰 - 윤은숙 (사학·강사)
1. ‘이성계는 몽골군벌이었다’는 가설은 어떻게 나왔습니까?
- 이성계 가문과 옷치긴은 깊은 유착관계
13~14세기 동북 만주 지역을 칭기스칸의 말자인 옷치긴이 다스렸다. 영지를 분봉받은 옷치긴가는 유목과 농경, 수렵이라는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하고 또한 중앙정부와 떨어져 있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동북 만주 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는데 바로 이들의 지배영역 안에 이성계 가문의 본거지가 있었다. 한편 옷치긴家(Ulus)의 타가차르와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는데 이안사는 전주를 떠나 두만강 유역인 오동지역에 자리잡은 뒤인 1255년 5000戶所의 首千戶 겸 다루가치의 지위를 옷치긴家로부터 임명받았다. 이 당시 천호장은 몽골족이 아닌 사람이 임명되는 일이 매우 드문 1급 고위 관리이다 . 1290년 옷치긴家의 내분으로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는 오동의 기반을 상실하고 함흥평야로 이주했지만 천호장과 다루가치의 직위는 이행리의 증손자 이성계 때까지 5대에 걸쳐 세습됐다. 이로 보아 이성계 가문과 옷치긴은 깊은 유착관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옷치긴家로 부터 승인 받은 군벌 세력이 된 것이다. 한편 이 모든 관계에 대한 조사는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중국 측 사료 등을 수집하여 조사하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2. ‘이성계는 몽골군벌이었다’는 가설은 어떤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 조선왕조는 자생적인 산물임과 동시에 국제사회의 외부 영향과의 관계 속에서 건국
1388년의 위화도 회군은 몽골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이성계가 그 직전 원나라의 기본 무력이 무너졌음을 파악한 데서 나온 당시 14세기말 동북아시아 국제 정치 상황의 결과물로 보아야한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창업은 한반도의 ‘자생적’ 산물만 으로 볼 수는 없다. 조선왕조는 13~14세기 국제적 질서 속에서 만들어진 동북아 격변사의 총체적 열매로 태어난 왕조인 것이다. 즉, 동아시아 국제질서라는 큰 패러다임 속에서 조선 건국을 이해해야 한다. 친명 사대의 외형적 표방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팍스 몽골리카 체제의 중심인 북방 유목 제국적 전통을 조선왕조가 의연히 지켜낸 것에 큰 의의를 둔다.
3.그렇다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중국 동북공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중국‘동북공정’ 문제는 유목적으로 접근해야
중국‘동북공정’ 문제는 유목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고려와 발해’는 유목적 기반 위에 성립된 고대 유목제국으로 북방 유목국가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고대사는 한반도에 국한된 것 아니라 동북 만주 전체를 아우르는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큰 틀 속에서 보자면 북방 유목국가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은 자신들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거란이나 여진 몽골 등도 모두 자신들의 역사라는 이른바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와 필연적 관계 속에서 탄생한 북방 유목민족들의 역사를 살피는데 등한시 해 왔다. 이제부터라도 유목적 시각에서 동북만주의 고대 유목 국가들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살피는 작업을 통해 ‘동북공정’문제에 대항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한다.
4. 소장 동양사학자로서 앞으로의 바람과 목표는 무엇입니까?
-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공동 프로젝트 구상중
몽골(원)의 역사를 전공하고 있어서 이와 관련된 논문을 계속적으로 쓰고자 하며 조선왕조 창업과 관련한 답사 및 자료 보충을 통해 좀 더 치밀한 검증으로 논문의 주장을 보완하고자 한다. 더 완성도 있는 논문을 기대하기 위하여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손을 잡고 머리를 모아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하려고 구상 중이다.
<최수인 기자> suin@ka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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