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2007년02월14일 제6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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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신드롬은 아파트값이다
▣ 고원/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최근 한 여론조사기관의 대선 주자 지지도 조사에 따르면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53.3%로 2위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30%포인트 이상 앞지르고 있다. 이런 그의 지지율은 2002년 ‘노풍’을 능가하는 것이다. 그의 지지율 독주 현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대세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대세론 이상의 그 무엇을 표현하는 ‘사회 현상’이다. 이른바 ‘이명박 현상’인 것이다. 그의 높은 지지율의 비밀은 이명박 자신의 문제로 좁혀볼 때 결코 온전히 풀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정치 정세와 정치 균열 구조, 특히 사회심리적 특성들을 고려할 때 비로소 해독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정치전문가들은 지금까지 이명박에 대한 분석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 1월1일 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 해맞이 행사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팬클럽 회원들로부터 새끼돼지를 선물받고 있다. 그의 리더십은 정치 균열 구도를 수구 우파와 수구 좌파의 새로운 담론 구조로 형성시켰다.(사진/연합 심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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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지향’ 성향의 지지자와 개발주의
이명박 현상은 새로운 정치 상황을 표현한다. 첫째, 이명박씨는 보수정당인 한나라당 소속이지만 그의 중심적 지지 기반은 보수세력의 전통적 지지 기반과는 많이 다른, 수도권·중간층·중도개혁 성향의 유권자들을 포함한다. 이는 이명박씨가 과거 정주영-정몽준으로 이어지는 제3세력의 맥락에 서 있으면서 동시에 제3세력을 더욱 확장시켜 민주화 세력의 상당 부분까지도 보수정당의 울타리 안에 묶어냈음을 나타낸다. 둘째, 이명박씨의 정치 행태를 보면 냉전주의적 이념 성향과 권력정치적 속성을 강하게 드러냈던 기존의 보수 정치인들과는 달리 탈정치적이고 기술주의적이면서 포퓰리즘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이처럼 보수정당 안에서 출현한 새로운 리더십의 양상은 지금까지 ‘진보는 변화를 상징하고 보수는 수구를 상징한다’는 우리 사회의 정치균열 구도를 크게 바꿔냈다.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 리더십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냉전·부패·꼴통으로 상징되는 수구 우파가, 왼쪽으로는 혼란·태만·무능으로 상징되는 수구 좌파의 새로운 담론 구조가 형성됐다.
그렇다면 이명박씨 리더십의 본질은 무엇인가? 과연 기존 보수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보수정치’가 탄생하는 것인가? 그의 정치 리더십은 중도인가, 합리적 보수인가, 수구보수인가? 한국 사회에도 지금 1980년대 초반 영국과 미국, 1990년대 초반 일본에서 전개된 ‘보수혁명’(conservative revolution)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이명박 현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과거 민주화를 지지했던 중도개혁 성향의 30∼40대 유권자들이 그를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30∼40대 유권자들은 자아실현에 대한 지향이 강하고, 토론적 설득에 공감하며, 공공성의 구현에 적극적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만큼 ‘가치 지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명박씨의 리더십이 이들 30∼40대의 가치 지향에 부합하는 중도개혁 노선이란 것을 의미하는가?
이명박씨는 과거 박정희 개발시대의 적자이고 지금도 엄연한 개발주의자이다. 그가 비록 청계천 복원을 통해 개발시대의 음습하고 칙칙한 도시 환경을 일부 정화해낸 공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생태적 패러다임을 보여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이벤트에 불과했다. 청계천 복원이 진정 생태적 패러다임을 구현하는 것이었다면, 정보와 자료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풀뿌리 시민들의 자발적 토론과 사회 창안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도시의 지역사회와 문화를 생태적 삶으로 변화시켜나가는 과정이어야 했다. 그러나 청계천 복원은 더 포괄적이고 철저한 역사적·생태적 복원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주장이 묵살된 채 전문가와 관료들에 의해 초고속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복원된 청계천은 시민들의 땀과 고뇌가 녹아 있는 삶의 현장이기보다는 탄성과 오락을 제공하는 거대한 희귀 전시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씨는 생태가치를 ‘마케팅’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다.
△ 이명박은 정주영-정몽준으로 이어지는 제3세력을 확장시켰다. 사회의 불안 심리를 배경으로 그가 수행한 몇 가지 실적에서 생긴 막연한 기대감은 집단적 쏠림은 과도한 거품이 아닐까? 이 전 시장이 1984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기자회견장에 앉아 있다.(사진/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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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선택적인 윤리 잣대
이명박씨의 강연 내용들을 살펴보면 그는 분명히 전근대적 사고의 소유자이다. 그의 세계화와 시장 철학도 글로벌 스탠더드를 구현했다기보다는 한국적 개발주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정부가 본때를 보여야 노사가 협력”한다는 그의 노사관은 개발독재 시대의 전형적인 자본가의 입장을 대변한다. “농업에 그 많은 돈을 투입하고도 수입하면 4만원에 사먹을 수 있는 쌀을 15만원씩 주어야 한다”며 “농업의 기업화, 제조업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마치 김영삼 정부의 실패한 세계화 철학이 부활한 듯한 모습이다. 그의 담론은 ‘사물에 대한 극도의 단순화’와 ‘거침없는 내지르기’를 특징으로 한다. 가령 “내가 하면 정부 예산에서 매년 20조원은 남길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말은 너무 자신감이 넘친 나머지 별다른 논증 없이도 한순간에 현 정부를 바보로 만들면서 청중들을 사로잡는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그의 언술이 토론과 공감에 바탕을 둔 민주적 리더십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명박씨의 정치 철학과 리더십은 결코 중도도 아니고 합리적 보수도 아니다. 그의 리더십을 굳이 규정하자면 아마 개발주의를 주로 하고 시장주의가 부수적으로 결합된 그 무엇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민주화를 지지했던 30∼40대들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그토록 열렬히 이명박을 지지하는가? 어떻게 해서 개발주의자로 평생을 살아온 이명박씨가 가장 진보적이고 변화 개혁을 지향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가?
이명박 현상은 우리 사회의 내면적 심리 구조를 대변한다. 주지하다시피 이명박씨는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 박탈 전력, 황제 테니스 사건, 서울시 봉헌 발언, 히딩크 사진 사건 등 결코 적지 않은 윤리적 결함을 노출해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최고의 공적 시민(public citizen)이어야 할 대선 주자로서 그의 자질 평가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대학 사회에 매우 일반화된 논문 표절이나 수십 년 전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져 추풍낙엽처럼 쓰러진 많은 임명직 관료들의 운명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이는 우리 사회에 윤리의 이중 잣대가 엄연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윤리가 적용되는 범위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대단히 선택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2005년에 일어났던 황우석 사태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국익을 빙자한 한 과학자의 천박한 마술쇼 앞에 ‘진실’에 대한 최소한의 토론을 요구하는 주장을 몰매질했던 우리 사회의 성과 지상주의, 타인의 거짓말에는 매우 엄격하지만 ‘나의 이익’과 관련된 거짓말에는 한없이 관대해지는 맹목적 온정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 같은 우리 내면의 에토스(관습)는 오늘날 극도의 사회적 불확실성에 대응해 확산되는 개인과 가족 중심주의에 의해 더욱 증폭되고 있다.
△ 청계천 복원은 역사적·생태적 복원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주장이 묵살된 채 전문가와 관료들에 의해 초고속으로 이뤄졌다. 2005년 10월 이명박 당시 시장이 청계천 복원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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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씨의 리더십은 일종의 ‘정치적 기업가’(political entrepreneur) 내지 ‘보수적 최고경영자(CEO)’ 모델이다. 이런 리더십 모델의 약점은 일관된 철학·비전이 무엇인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인지, 중도주의인지, 진보개혁주의인지 도무지 알 수 없고, 표가 되면 그 어느 것도 될 수 있고, 표가 안 되면 어느 것도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만히 따져보면 이명박씨는 지금까지 도대체 어떤 철학과 비전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겠다는 것인지에 대해 거의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명박씨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데, 이것은 명백한 패러독스(역설)이다.
중요한 변수 ‘욱 민주주의’
이명박씨는 규범적 평가를 떠나서 정치적으로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그는 기업에서 익힌 단기적 수익창출 모형을 정치에 적용하는 데서 세계적으로도 탁월한 프로임을 입증했다. 우리 사회의 보수언론들이 CEO 정치 리더십을 극찬하고 있음에도 세계적으로 기업가 모델의 정치인이 정치에서 성공한 사례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기껏해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공한 기업가 모델 정치인은 돈세탁, 탈세, 매수 혐의로 감옥까지 들락거렸으면서도 두 번씩이나 집권에 성공한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이명박씨는 꽤 유능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높은 지지율은 그가 청계천 복원 등 몇 가지 단편적 실적을 통해 보여준 정치적 능력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과도하다.
이명박 현상은 대중의 불안정한 사회심리적 조건들이 함께 결합돼야 설명된다. 그런 사회심리적 조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심리학자가 아닌 필자로서는 딱히 꼭 집어 정의 내릴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최근 한국 사회에 빈번하게 출몰하는 ‘집단적 스윙’ ‘쏠림’ 현상과 관련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명박 현상은 문제들을 종합적이고 내부적으로 따져보고 점검하지 않은 채 단기적 수익을 향해 끊임없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묻지마 투자’의 패턴(양상)을 따른다. 사회의 불안 심리를 배경으로 그가 수행한 몇 가지 실적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집단적 쏠림을 통해 과도한 버블(거품)을 형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강준만 교수는 한국민주주의를 ‘욱’ 민주주의로 정의한 바 있다. 이론이나 토론보다는 욱하는 기질이 훨씬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정치를 일컫는 표현이다. 그에 따르면 ‘욱’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기회주의를 양산한다. ‘욱’이라는 바람 속에서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검증되기도 전에 새로운 바람에 의해 밀려날 것이기 때문에 정교하고 완벽하다는 것은 별로 효율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한국 사회에 성행하는 ‘묻지마 투자’도 한탕주의의 기회주의와 관련된다. 이는 한국 사회의 역동성이 갖는 부정적 측면의 특성이다.
한국 사회의 정치적 불합리성을 대중의 정서적 불안정성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부적절할 수도 있다. 합리적 정치 선택이 불가능한 한국 사회의 정치 구조 속에서 대중들은 최장집 교수의 말처럼 ‘열망-실망’의 사이클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런 구조 속에서 대중은 항상 반대적인 것들을 통해서만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절망, 분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우리 사회의 대중은 이명박을 통해 일종의 정치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버블링은 투표장으로 이어질까
이명박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이명박에 대한 유권자들의 높은 지지가 상당히 유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이명박 현상이 한국 사회의 ‘스윙’과 ‘쏠림’의 일부분이라면 이 역시 실제와 과도한 기대감 사이의 괴리가 누적됨에 따라 또 다른 반동을 불러올 수 있다. 게다가 합리적 계산에 밝고 높은 유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중심 지지 기반인 30∼40대 민주화 세대 집단이 실제 대선 투표장에 가서도 원래의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위험한 버블링(bubbling)을 계속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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