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지에서 도법스님을 인터뷰 했습니다. 99년 8월호에서 얻어왔습니다. 실상사에 계시며 귀농운동본부와 함께 귀농운동을 펼치시는 분인데 세계에 대한 남다른(우리 중생들의 상식과 비교할 때..) 시각과 타협하지 않는 원칙에 충실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중간중간 논쟁이 될 만한 화두도 던져 두시고...
한 여름에 만난 사람│도법 스님
-부처님 식으로 공동체 꾸리는 귀농학교 교장스님-
90년대 초반에는 불교 결사체 ‘선우도량’을 만들어 청정불교 운동을 이끌었고, 현재는 귀농학교를 열어 도농공동체 운동을 펼치고 있는 도법 스님. 지난 겨울 조계종 총무원장 대행에 천거되어 종란을 수습한 이후 표표히 낙향해 버렸던 그를 지리산 실상사로 찾아가 만났다. (글 안철흥│사진 박여선 기자│미술 윤 영)
목탁 두드리는 소리를 꿈결에 들은 듯 싶은데,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40분. 정적. 멀리서부터 목탁소리가 다시 가까워져 온다. 절주에 맞춰 금강경을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싶다. 간신히 몸 수습을 하고서 밖으로 나오니, 가사장삼을 차려입은 스님들이 보광전 앞으로 모여드는 모습이 보인다. 절집에서 맞이하는 새벽. 사위는 온통 안개 속이다. 지리산 봉우리들이 지척에 있건만 안개에 가려 전혀 분간이 되지 않는다. 팔뚝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공기가 차갑다.
도법(道法, 51) 스님은 새벽예불에도 나오지 않았다. 하루 전 저녁예불 때부터 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요사채 맨 갓방, 도법 스님이 기거하는 다섯 평 남짓한 방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다.
전날 낮에 본 스님의 얼굴 한쪽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기 직전 논에서 김을 매다가 미끄러졌다고 한다. 뜻밖의 사고로 크게 다친데다 몸살 기운까지 있다며 전날 저녁에 하기로 한 인터뷰 약속을 한 차례 미룬 터라 은근히 걱정이 들었다.
죽으로 아침 공양을 마친 다음 절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실상사는 지리산 깊숙이 자리하고 있으나 평평한 분지에 있는 탓에 주위 삼면이 논밭이다. 실상사가 귀농운동의 실습장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지형 덕분이다. 귀농운동본부에서 이론교육을 마친 이들이 이 곳에 모여 3개월간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떠난다. 도법 스님은 몇 년 전부터 절을 둘러싸고 있는 3만여 평에 달하는 논밭을 귀농자들의 현장체험 학습장으로 내놓고 있다.
논두렁을 지나, 유기농사를 짓느라 농약을 뿌리지 않아서 풀 반 채소 반인 배추밭, 고추밭을 한바퀴 돈 다음 절집 마당에 다시 들어서니 원주 스님이 급하게 다가왔다. 도법 스님이 지금 보자고 하신다며. 시계를 보니 6시 40분. 지체없이 가방을 둘러메고 스님 방으로 향했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버려야
스님은 먹물 들인 동방을 입은 채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룻밤새 얼굴의 상처는 색깔이 더 진해진 듯했다.
―예불 때도 뵙지 못한 것 같은데, 몸은 괜찮으신지요.
“아직 농사꾼은 못 돼…. 그나저나 이런 얼굴 사진 찍어 내면 욕먹지 않을까?”
스님이 능숙한 자세로 차를 따라내며 농담을 걸어왔다. 웃을 때 보니 가선이 길게 늘어지고 법령이 깊이 패이는 것이 참 선하게 생긴 얼굴이다.
―이렇게 새벽에 인터뷰를 해보기는 처음입니다.
“절집에선 지금이 한낮이지요.”
―방금도 한바퀴 돌아보고 왔습니다만, 스님이 절에 귀농학교를 여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귀농학교 하려던 생각은 아니었어요. 고려시대 불교사를 연구한 책을 보면 한 절에 승도 수가 3천이니 4천이니 하는 말이 나와요. 그게 다 머리 깍은 스님만 일컫는 것은 아니었고, 사찰과 그 주변 마을 사람들의 자립적인 신앙 교육 문화 경제 공동체였어요. 후대에 오면서 그 정신이 왜곡되어 마치 절이 지주 행세를 하는 폐단이 나타났죠. 그걸 바로잡아 새로운 자립적 공동체 정신을 되찾을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시작한 거지요. 그게 귀농운동본부와 만나면서 귀농학교로 발전했어요.”
―종교운동으로 시작한 것이 결국은 대안적인 공동체운동으로 발전했군요.
“생태계 파괴나 환경문제 같은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공존할 수 있는 문화를 일으켜야 하고, 그 핵심이 농촌을 살리는 것이지요. 또한 경쟁논리나 소유와 독점의 사고방식들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대안을 불교 사상이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봐요.”
―귀농학교에서 배우는 가장 큰 가르침은 농사기술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이겠군요.
“세계관과 가치관을 바로잡지 않고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죠. 너 죽고 나 살자는 경쟁논리야말로 가장 야만적인 사고방식이죠. 경쟁이 아닌 공존을 배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눈이 필요합니다. 불교적인 말로 하자면 관계가 곧 생명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평등하며 불가분의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물과 흙과 산천초목이 살아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인간 중심의 사고를 버리고 모두 함께 새로운 세계관을 세워야 합니다. 유기농법은 그런 세계관의 하나죠.”
―공동체가 왜 중요합니까. 불교에선 인간은 본디 홀로 존재한다고 가르치지 않나요.
“그것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불교에선 개인이 없어요. 무아사상은 나라는 건 없다는 걸 말하는 거잖아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온통 다 나인데…. 그런데 왜 불교가 개인 중심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냐면 그런 자각의 출발점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 때문이지요.”
―저는 ‘공동체 이데올로기가 과연 절대선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 세계를 보면 민족이나 혈연, 지역이라는 공동체 이념 때문에 생겨나는 폭력이 오히려 난무하지 않습니까.
“공동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과 삶의 철학에 바탕하고 있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예를 들자면 마하트마 간디나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나 모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까. 영국의 국권과 인권이 존중되듯 인도의 국권과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하던 간디에게 민족의식이란 싸움의 논리, 힘의 논리는 아니었지요.”
호국불교 이념은 잘못된 것
스님의 입을 통해 독립운동에 대한 얘기를 듣자 문득 전부터 가지고 있던 궁금증 하나가 떠올랐다. 왜 우리나라 불교는 호국불교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위대한 선사보다는 위대한 의병장이었던 서산대사를 높이 추앙하는가.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 하더라도 스님들이 칼을 들고 나선 것은 옳은 일인가. 눈빛을 허공에 내맡기고 있던 스님이 잠시 후 석가모니 얘기로부터 말을 시작했다.
“부처님 생전에 그분의 모국이었던 가비라국이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아 망했지요. 정복군이 가비라국에 쳐들어온다는 말을 들은 부처님은 두 번씩이나 군대가 지나갈 길목에 있는 고목나무 밑 뙤약볕에 앉아 계시는 것으로서 이웃나라 군대의 진군을 막았지만 세 번째 침략이 있자 자리를 피하시죠. 두 번째 침략까지는 자기 민족이 망하는 것은 뙤약볕이 내리쪼이는 한낮 고목나무 아래 앉아 있는 것과 같다고 하시던 부처님이 세 번째 침략을 보고서는 인연은 피할 수 없는 법이라며 자리를 피하신 거죠. 이것이 민족과 나라를 바라보는 데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럼 서산대사의 활동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 민족적인 관점에서는 정당해 보이지만 불교적인 이상에선 안 맞다고 볼 수 있겠죠. 서산대사는 수행자로서도 대단한 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행위를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훗날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던 호국불교 이념에 대해 스님들이 깊이 고민하지 않고 쉽게 휘둘리는 것은 피해야 할 거라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만약 비폭력을 포기해야 한다면 차라리 인도의 독립을 포기하겠다던 간디의 말을 존중합니다. 민족과 국가보다 진리를 우선으로 삼았던 간디의 예가 현대 사회의 민족문제나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석가모니가 두 번에 걸쳐 고목나무 밑에 앉아 계셨다는 얘기는 아무리 출가했다고 하더라도 세속의 인연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스님은 출가 2년째 되던 해 어머니가 위독하단 말을 듣고서 ‘나는 속세와 인연을 끊었으니 모르는 일이다’고 말씀하시고는 문은 닫아 버리셨다지요. 스님에게 속세의 인연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습니까.
“그게 다 제 수행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이지요. 당시 함께 있던 도반 스님으로부터 비판을 받고서야 제 생각이 부족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부처님은 속세와 인연을 끊겠다는 말씀은 한번도 안 하셨거든요. 출가하면서 그 분은 나는 돌아온다고 얘기하셨어요. 나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 친구 아들딸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돌아오겠노라고요. 나는 죽음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길을 찾아서 돌아와 그걸 가르쳐 주겠노라, 그게 부처님이 출가하신 이유예요. 그런데 우리는 흔히 출가란 속세로부터 도망가는 걸로 생각하죠. 다 수행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지요.”
결국 그 일은 도법 스님으로 하여금 죽음과 삶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 고민이 지금껏 그를 외길 스님으로 살게 한 동력이 되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기는 모든 것이 수행
―스님이 쓴 책들을 보면 화엄 사상을 계속 강조하시는데, 화엄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균형과 조화죠.”
―그럼 깨달음과 실천은 같은 겁니까, 다른 겁니까.
“흔히 실천과 깨달음을 별개로 보지요. 그러나 모든 실천이란 보고 느끼고 이해하고 판단한 토대 위에서 나옵니다. 모든 사물을 총체적이고 통합적으로 보는 것, 이게 화엄의 정신입니다.”
―어떻게 수행해야 참된 수행 방법입니까.
“수행에 대한 우리의 관념 자체가 편협하고 왜곡되어 있는데, 참선하는 것만이 수행은 아니죠.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기는 모든 것이 수행입니다.”
열여덟 살에 출가한 그는 서른다섯 살까지는 선방에서 수행했고, 그 이후는 주로 강원에서 교학 경전을 공부하면서 보냈다. 고대 중국의 선승들 예를 주로 드는 여느 스님들과는 달리 그의 입에서는 늘 경전에 있는 석가모니의 말씀이 먼저 나온다. 흔히 스님들이 쓴 책이란 게 산사 생활의 고즈넉한 분위기나 고승들의 신비한 이야기를 담은 수필집인 데 비해 그가 쓴 3권의 책은 모두 불법과 구도의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파고든 책들이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선승의 이미지보다 학승, 근본불교주의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귀농운동을 통한 도농공동체를 꾸리는 일 외에 도법 스님이 진력하는 일은 또 있다. 청정불교 결사운동. 91년 학담(법성), 현봉, 혜담 등 40대 젊은 수행승들과 함께 만든 선우도량은 그 결사운동의 결집체다.
“88년 서울 봉은사에서 승려들 간에 폭력사태가 났는데, 그걸 보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중앙승가대생들이 깊이 개입해 있었거든요. 그 때 깨달았어요. 세월이 가고 사람이 바뀐다고 저절로 개혁이 되는 게 아니구나. 준비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겠구나. 그래서 결사운동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요.”
결사운동은 새로운 불교정화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사운동이 단지 종단 개혁만을 외치기 위해 모인 것은 물론 아니었다. 전통이나 순수성이라는 명분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흐름과 불교적 문제의식 없이 일반적인 방법으로 현실참여만을 외치는 흐름, 이 모두를 극복하고 불교적 철학과 방법론을 견지하면서 역사에 정면으로 대처하자. 이게 선우도량을 만든 젊은 스님들의 참뜻이었다.
불교는 떠남의 종교가 아닌 참여의 종교
―선우도량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불교가 우선 불교다워져야죠. 가장 권위적, 봉건적이고 비민주적인 곳이 지금의 한국 불교인데,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회적인 발언이나 역사에 책임을 지는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한국 불교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왜곡되어 있는 불교 사상의 문제를 바로잡고, 그를 토대로 실천방법론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선우도량의 실천방법론 중의 하나가 귀농학교 운동이고, 또 하나가 현재 실상사에 있는 화엄학림을 통한 불교사상 연구작업이다.
―지금은 사회적 실천을 상당히 강조하시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80년대의 민중불교 운동에 대해서 비판적이셨죠.
“보수냐 진보냐 하는 잣대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그 분들의 사회적 실천이 불교적 방법론에 맞느냐 아니냐를 따진 것이지요. 당시 민중불교운동을 벌이던 명진 스님은 금산사에서 화엄학림을 같이 하던 무척 친한 친구예요. 그런데 어느날 보니 감옥에 가 있어요. 언제는 참선하지 않으면 중도 아니라던 친구가 변화에 대한 아무런 자기 논리 없이 현실참여론자로 바뀌었어요. 전 그런 식으로, 불교적이고 철학적인 방법론 없이 현실참여에 뛰어드는 것이 못마땅했어요.”
―지금은 스님도 사회참여를 강조하시는데요, 불교적인 현실참여론은 어떤 겁니까.
“부처님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셨지요. 역사를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입니다. 불교의 기본 정신은 속세를 떠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역사에 참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문제지요. 부처님은 결코 평화롭고 순탄한 일생을 사신 분이 아니었어요. 자기 민족의 멸망을 지켜봐야 했고, 또 제자로부터 살해 위협을 당하기도 했어요. 당시 사성계급으로 나뉜 신분제도를 부정한다는 건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분은 그런 일을 아주 평화롭고 조용하게 실천하셨어요. 저는 그런 부처님의 삶에서 역사에 참여하는 불교도들의 문제의식과 방법론이 나온다고 믿어요.”
도법 스님은 94년과 지난 겨울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조계종 사태에서 총무원장 대행을 맡아 종란을 수습한 뒤 곧바로 낙향했다. 종단 개혁을 위해 좀더 일할 생각은 없었냐는 물음에 그는 “나는 종교에만 뜻이 있는 사람”이란 말로 종무행정에는 별 관심이 없음을 완곡하게 드러냈다. 실상사 주지를 맡은 것은 4년 전인 95년부터. 선우도량의 개혁사업을 대중적으로 펼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근본 도량이 필요해서였다. 그 전에는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는 수행승으로만 살았다.
―지금까지 수행 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빨리 도통 못하니까 힘들죠. 막상 해보니까 잘 안돼요. 흔히 사람들 상상처럼 술 생각, 여자생각 나는 건 별거 아냐.”
―고기는 한 번도 드셔 보지 않았습니까.
“살다보면 먹어야 할 자리도 있죠.”
―제가 알기로는 불교 경전에도 금지하는 계율은 없는 걸로 아는데, 사회에선 흔히 ‘못된 중이 고기 먹는다’는 말로 비난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세월이 흐르면 변질되고 왜곡되고 경직되는 법이지. 부처님은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분이었어요. 엄숙주의도 아니고 근본주의도 아냐. 부처님이 걸식을 한 분인데 얻어먹는 입장에서 ‘고기는 빼라’, ‘마늘은 넣지 마라’ 얘기할 수 없잖아. 부처님은 주어진 음식을 늘 감사히 드셨어요. 초기불교에서는 뭘 먹는지를 문제삼지 않고 어떤 마음으로 먹을 것인지를 문제삼았어요. 불교는 자유실현의 종교이기 때문에 얼마 만큼 자유로워지느냐가 중요하지, 뭘 먹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혹시 도법 스님이나 실상사의 수행승들이 고기나 먹는 스님들이라고 오해하는 독자들이 없기를! 이 부분은 오해를 피해 뺄까 하다가 도법 스님의 사상의 폭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알릴 필요가 있어서 삽입한 것이니까. 참고로 실상사에서 머문 이틀 동안 세끼를 먹었는데 한끼는 향신료 하나 넣지 않은 된장국에 채소반찬이 나왔고, 나머지 두끼는 쌀죽과 국수였다. 도법 스님의 말이 이어진다.
“담배도 마찬가지지. 피는 것 자체가 문제되는 게 아냐. 안 피면 못견디는 게, 담배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게 문제지. 사람은 주체적으로 자유로워져야 해요. 고기 들어가지 않은 음식 찾는다며 몇 만원짜리 음식 사먹느니 민중들이 쉽게 먹을 수 있는 걸 함께 먹는 것, 이게 훨씬 더 맞는 거지. 부처님은 엄숙주의자가 아니었어요. 경전을 보면 등 아프다, 누울란다, 자리 깔아다오, 이런 인간적인 모습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누워 있는 불상 하나 없어. 이게 얼마나 불교를 대중들과 멀어지게 하는 겁니까. 그래서 저는 늘 부처님식으로 가자고 말해요.”
“생명도 살리고 진실도 지키는 길을 가자”
―종교에는 어느 정도 엄숙하고 신비로운 부분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필요하지 않아요. 부처님은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초인적이고 신비적인 능력도 발휘하지 말라고 하셨어. 그게 주체적인 인간의 역량을 더 왜곡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초인적이고 신비로운 것만 바래. 저는 성철 스님이 권위주의적이고 신비로운 모습만 보이다가 가신 게 아쉬워요. 큰스님들이 그런 식으로만 자신을 드러내니까 사리 몇 개 나왔냐, 앉아서 죽었냐, 서서 죽었냐 하는 것에만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 아닙니까. 불교를 신비주의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부처님도 누워서 돌아가셨는데….”
―스님은 아직 득도를 못하셨습니까.
“나는 깨달은 사람이 아니고 아직도 배우고 익히는 사람이에요.”
―고승들의 약력을 보면 몇 살 때 득도했다고 적어놓았던데, 자신이 득도했는지를 어떻게 아는 겁니까.
“일단은 본인이 느끼는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이 검증하는 과정도 거치고 하는데… 사실 상당히 혼란스런 면이 있지. 전 득도했다는 분들에 대해 썩 동의가 안 돼요. 저는 부처님을 이상적인 수행자상으로 놓고 보는데 그에 견줘보면 시시비비거리가 많아요.”
―스님처럼 생각하면 평생 득도하기는 힘들겠는데요.
“저는 근본주의자도 아니고 득도한 사람도 아니지만, 오늘날 한국 불교를 보면 현실 사회로부터 너무 벗어나서 관념화되어 있어요. 전 득도란 게 그런 관념적인 건 아니라고 봐요.”
밖에서 목탁소리가 들렸다. 오전 11시 40분, 점심 공양을 알리는 소리다. 새벽부터 시작된 인터뷰를 끝마칠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점심 공양 이후, 다시 스님 방에서 차 한잔을 얻어마시고는 길을 나섰다.
도법 스님은 최근 펴낸 『화엄의 길, 생명의 길』 속에서 노루와 나무꾼 얘기를 마치 선문답하듯 적어놓았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가 나무꾼에게 달려와 구해 달라고 한다. 노루를 숨겨 준 나무꾼은 사냥꾼에게 거짓말을 하고는 노루의 목숨을 구한다. 과연 나무꾼의 행동은 올바른 것인가. 큰 것을 위해서는 작은 것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고는 과연 괜찮은 것인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괜찮은 것인가.
“거짓말을 해서라도 노루를 살려야 한다, 그건 적당주의입니다. 목적만 좋으면 과정이나 방법은 뭐든 상관없다는 그런 적당주의를 없애지 않고는 진리는 내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생명도 구하고 진실도 지키는 방법은 뭘까.
“간단하지요. 사냥꾼을 붙잡고 설득해야지요. 물론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면 그렇게 해야지요. 우리는 너무 쉬운 길로만 가고, 국면만 모면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치열하고 근원적인 태도만이 생명도 살리면서 진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내내 스님의 말이 길게 여운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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