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여름(5호)
▶새길에서 만난 사람
성찰의 문화를 가꾸는 도법 스님
정경일(새길기독사회문화원 간사)
산내에서 내려 마을 사람들이 알려준 길을 따라 걷다 삼거리를 만났다. 이정표가 없기에 무심코 산 쪽으로 난 길로 올랐지만 실상사는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올라가 산밭에서 만난 시골 아낙네는 "오매, 저 아랜디."라며 혀를 찬다. 그제야 돌아보니 산 아래 절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르는 길에 잠시 멈추어 서서 돌아보았더라면... 볕이 따사로운 오후, 차 향 은은한 화엄학림(華嚴學林) 작은 방에서 도법(道法) 스님을 만났다.
도법 스님은 한국불교 개혁의 상징적 인물이다. 1990년에 승가 결사체 선우도량을 만들어 조계종단 개혁에 앞장섰으며, 1995년부터 실상사 주지로 있으면서 작은학교, 귀농학교, 환경운동 등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화엄학림을 통해 불교사상과 전통을 재정립하고, 대안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불교 제대로 하자.”
경일: 불교를 새롭게 하려는 불자들을 만나면 자신들의 노력을 "부처님에게로 돌아가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도법: "불교 제대로 하자."는 뜻이겠죠. 벽에 부딪힌 한국불교 현실에서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흐름입니다.
경일: 한국불교의 부처님 이해에 어떤 결함이 있다는 것인가요?
도법: 부처님을 제대로 알려면 역사적·인간적·종교적 세 측면을 통일적으로 파악해야 하는데, 한국불교는 부처님의 종교적 측면만 강조해왔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현실과 유리된 초월적 존재, 인간의 복과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신비적 존재로만 여기게 되었습니다.
경일: 하지만 초월적 존재로서의 부처님을 신앙하는 것이 고단한 삶에 지친 신자들에게 위로를 주는 면도 있지 않을까요?
도법: 종교는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정확히 보고 그것을 개인적, 사회적으로 바르게 해결하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위로가 목적이라면 차라리 술이나 마약이 낫겠지요.
그는 존재의 실상을 가리는 신비주의적, 기복주의적 신앙 행태를 철저히 부정한다. 지난 해 우담바라꽃 사건에 대해서도 "포교와 경제의 이름으로 부처님 도량에서 비불교적 행위인 점·사주·관상 따위를 자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여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도법: 불교 경전들에도 신통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찻잔을 들어 보이며) 이런 찻잔 하나에도 온 우주가 참여하고 있는 것이 불가사의하다는 뜻입니다. 존재의 실상 자체가 신비라는 것이죠. 우담바라꽃이 인생의 안목을 밝히고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면 사기를 쳐서라도 꽃을 피워야겠죠. 하지만 그 반대라면 진짜 우담바라, 아니 부처님이라 해도 버려야 합니다.
“한국 불교의 문제는 출가자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경일: 출가자들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면서 대승불교를 재가자 운동으로 이해하려는 시각도 있습니다.
도법: 그렇게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인류의 이상을 위대하게 제시한 대승불교가 단지 출가자들에 대한 재가자들의 반발로 생겨났다는 것은 너무 피상적입니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독선과 권위주의가 아님을 깨달은 전문 수행자들이 불교를 새롭게 하려 했고, 그 흐름에 재가자들이 동조함으로써 탄생한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그는 전문 수행자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불평등 관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도법: 출가는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여러 가지 길의 하나일 뿐입니다. 출가자들은 종교적 측면에서 재가자들에게 법을 보시하는 것이고, 재가자들은 출가자들이 수행할 수 있도록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신성을 추구해도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듯이, 역할만 다를 뿐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철저히 조화와 균형의 관계입니다.
경일: 스님께서 출가자의 수행자세와 덕목, 자질 함양을 주로 강조해오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도법: 적어도 종교적 영역에서는 출가자의 책임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출가자들이 배고파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재가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과연 그런가요? 사상적, 윤리적 측면에서 한국불교가 직면한 문제들은 출가자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스님은 출가자의 수행 기풍을 정립하고 사상을 심화할 목적으로, 화엄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2년제 교육기관 화엄학림과 불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대안을 모색하는 연구기관인 화림원을 운영하고 있다.
경일: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는 그렇다 해도, 같은 출가자 신분이면서도 비구·비구니간에 불평등이 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도법: 부처님 생애를 보면 남녀 불평등으로 여겨지는 자취들도 있지만, 그분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보면 기본적으로 불평등관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인도의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차별을 점진적으로 극복하려던 시대적 한계였을 뿐입니다. 불교 내의 불평등한 관습적 요소는 그대로 따를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바꿔야 합니다.
경일: 하지만 선우도량조차도 비구니 스님들의 참여를 배제했는데요.
도법: 나는 선우도량에 비구니들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한국불교의 비구·비구니 관계가 너무 왜곡되어 있으므로, 바람직한 틀을 만들기 전에 섣불리 함께 하면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에 밀려 유보하고 말았습니다.
경일: 비구니 스님들의 불만이 무척 컸을텐데요.
도법: (웃음)왜 아니었겠어요. 내가 대표라고 전부 나한테만 싫은 소리를 했죠. (그는 잠시 문밖을 보며 침묵했다.) 선우도량이 그랬던 것은 사실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선적으로 실천했어야 할 것을 미루다 결국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용기가 없었어요...
현재 부처님의 생애에 비추어 본 수행 자세를 연구중인 그는 부처님의 여성관을 평등의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물질주의를 초래한 문명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경일: 도심의 포교원들은 나날이 대형화되고 있고, 산중 사찰들도 대형불사에 여념이 없습니다.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는 불교조차도 물질주의에 함몰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법: 대형화는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당할 만한 경제적 조건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넓게 보면 문명의 거대한 흐름이 물질주의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죠. 그러니 물질주의를 초래한 문명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는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고, 너 없이도 아니 "너 없어야 내가 더 가질 수 있다."는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소유, 독점, 지배의 물질주의를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경일: 그렇다면 올바른 세계관이란 무엇입니까?
도법: 실제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찻잔을 들고) 이게 왜 찻잔입니까? 온 우주의 정신, 물질, 시간이 참여하여 찻잔인 거죠.
경일: 연기(緣起)군요.
도법: 연기는 관계성의 진리입니다.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사랑, 유교의 인(仁)은 모두 이 관계성의 진리에 의존합니다.
그는 존재의 관계성을 깨달으면 자만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나만의 노력으로 살 수 없음을 알면 나를 있게 하는 무수한 조건과 상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법: 이러한 진리에 맞게 살려면 청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사랑이요 자비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이듯, 사랑과 자비는 지금 여기에서 행동하게 만듭니다.
경일: 그런 세계관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도법: 성찰입니다. 모든 것이 관계적 존재임을 성찰을 통해 깨닫지 않고서는 인류가 살아날 방도가 없습니다.
경일: 하지만 대중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성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도법: 맞습니다. 비장한 각오 없이는 성찰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은 우리의 관심과 시선을 밖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찰을 박탈당한 시대일수록 종교가 성찰의 흐름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폭력을 휘두른다면 이미 종교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경일: 사회와 마찬가지로 종교계의 폭력도 심각합니다. 그것이 종교적 명분을 취하면서 더욱 파괴적이기까지 합니다.
도법: 폭력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종교가 폭력을 휘두른다면 이미 종교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경일: 그렇다면 살생유택(殺生有擇)이나 조선시대의 승병(僧兵) 같은 호국불교 전통은 어떻게 봐야 하나요?
도법: 한국 역사에서 호국불교의 긍정적 측면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가종교화하면서 권력과 야합하고 폭력에 물든 것은 불교의 궁극적 이상에 비추어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부처님은 종단과 국가보다 진리를 더 중시하셨습니다. 자유·평화·평등을 실현하는 진리를 지키지 못하면 국가를 지키더라도 소용없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실상사 수경 스님이 해인사의 동양최대 청동좌불 조성 계획을 비판한 것을 문제삼아 하안거(夏安居)중이던 해인사 스님들이 찾아와 폭력을 휘둘렀을 때, 실상사 스님들은 힘으로 맞대응 하는 대신 불교계의 폭력심을 참회하는 단식을 결행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경일: 하지만 참회 단식이 불교계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는가 하는 점에서는 회의적입니다. 불교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도법: 냉담했죠... 그래도 몇 번 있었던 일촉즉발의 위기가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은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안타까워했던 것은 종단의 차가운 반응이 아니라 승단의 변화를 지속시키지 못한 우리의 무능이었습니다.
폭력이 불교만의 문제이겠는가? '사랑의 종교'임을 자처하는 기독교역시 권위주의적, 배타적 폭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말에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한다.
도법: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분의 메시지가 사랑이라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지 않나요?
경일: 그렇죠. ... 상식적인 것이죠. ...
도법: 종교의 이름으로 상식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도 제대로 하려면 모든 가치를 사랑에 둬야 하지 않을까요?
“본래 진리의 세계에는 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도법은 지난 해〈지리산 좌·우익 희생자 해원상생 천도재〉를 7개 종단과 함께 치러 내는 등 이웃종교인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경일: 종교간 대화와 화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법: 내가 만나는 분들은 보통 진보적이고 깨어있는 분들이어서 함께 하는데 어려움이 없어요. 하지만 더 깊이 이야기하다보면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경일: 한계라면...
도법: 우리 모두 종교에 대한 기본적 문제 의식이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간 갈등이 생길 때마다 대화로 풀자고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종의 처세술에 가깝습니다.
아니, 공존을 위한 '대화'가 새 천년 종교계의 미덕으로 수긍되는 마당에 '처세술'이라니...
도법: 종교의 말뜻이 '근본 가르침', '바탕이 되는 가르침'이듯, 본래 진리의 세계에는 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실현하는 종교가 자기 종교의 이름으로 이웃종교와 벽을 만든다는 것은 자기 종교에 대한 무지요 불성실일 것입니다. 이런 인식 없는 만남은 처세술에 불과합니다. 정치인들이야말로 얼마나 잘 만납니까? 먼저 자기 종교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해야 대화도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경일: 스님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그래도 서로를 알아 가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기독교는 그 동기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웃종교를 적극적으로 연구해 온 반면, 한국불교는 긴 역사에 출가수행자와 학승도 많은데도 이웃종교를 깊이 연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법: (웃음) 사실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죠. 자기 경전도 안 보는데 남의 경전을 보겠어요? 공부하지 않고 참선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풍토, 불교는 완벽하다는 맹목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공존을 요구하는 시대 인식만 있어도 생각을 달리 할텐데...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이 밖엔 길이 없으므로 하는 일입니다.”
실상사는 1998년 사찰 재산을 제공하여 시작한 불교귀농학교, 농장공동체, 생활협동조합, 작은학교 등 여러 가지 대안운동을 한데 묶은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경일: 대안운동을 시작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도법: 정직하게 말하면 그런 실천이 내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출가수행자인 내게 가장 절박한 과제는 승단의 개혁입니다. 오늘날 한국불교, 특히 조계종단이 자기와의 싸움을 정직하고 용기 있게 벌여야만 불교가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내 관심사는 그것을 위해 불교를 제대로 해보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요원하니까 우선 내가 처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그런 운동들입니다.
경일: 어떤 분들은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한국불교의 희망이 실상사에 있다."고 말하던데요.
도법: (웃음)갑갑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겠죠.
경일: 전망은 어떻습니까?
도법: 전망이야 불투명하고 비관적이죠.(웃음) 하지만 전망이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이 밖엔 길이 없으므로 하는 일입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잘 되는 편입니다.
수행자적 의식이 분명한 그는 대안운동의 중점을 관계성의 세계관만이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인식의 확립과,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자본과 기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에 두고 있다. 이는 방법과 기술에 천착하는 일반 환경운동을 극복하는 불교적 생명운동으로 이어진다.
도법: 관계성의 세계관에 근거한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운동은 부처든, 인간이든 그 무엇도 중심으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또한 대안적 성격을 중시하므로 구체적 실천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파괴는 불가피하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과정에서부터 상처와 파괴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죠.
“참선을 해도 세계관이 바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참선이 유행이다. 헬스클럽 다니듯 선방(禪房)에 들렀다가 출·퇴근하기도 하고 명상서적도 잘 팔리는 것을 보면 새로운 '문화산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참선이 왜 이렇게 유행하는 것일까?
도법: 그것도 헤맴의 한 현상입니다. 인류사에서 지금처럼 많이 소유한 적이 없음에도 자기 뿌리로부터 단절된 현대인은 공허와 불안에 시달립니다. 참선이나 명상이 유행하는 것은 그런 불행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입니다.
경일: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이군요.
도법: 선(禪)은 진실을 찾아가는 실천이요 자기 성찰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참 자기를 아는 것이죠.
경일: 그러면 참선의 유행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을까요?
도법: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참선을 해도 세계관이 바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국불교의 수행자들, 특히 선 수행자들은 평생 참선하는데도 맨 날 주먹 판이 벌어지잖아요. 전에 어떤 대화모임에 갔더니 여러 가지 수행법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체험하면 이런저런 효과들이 있다는 것만 강조하더군요. 하지만 체험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체험이 우리의 궁극적 이상을 체현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진실, 자유를 실현하지 않는 체험은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해롭습니다.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선정을 수행하면 마왕 파순이 될 따름입니다." 도법, 『내가 본 부처』
경일: 정신적 고요에 매혹되면서도 그 역시 또 다른 이기심에 이끌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반성할 때가 있습니다.
도법: 명상이나 참선이 이기적 욕구에 의해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겠죠. 종교가 극한 대립을 하는 것도 정신에 대한 이기적 집착 때문입니다. 물질을 추구하는 것은 나쁘지만 정신적 가치는 이기적으로 추구해도 괜찮다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이기적 욕구에 근거하는 한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똑같은 병입니다. 불을 피해 달아나려다 그만 물에 빠져 죽는 격이죠.
경일: 참회의 문제를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참선을 통해 자신의 죄와 윤리적 책임성을 자각하기보다는 개인의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평정에만 매달릴 수 있으니까요.
도법: 수면 위의 쓰레기를 거둬내면 우선 깨끗해 보이겠지만, 물결이 잔잔해지면 물 속에 잠겨 있는 더 많은 쓰레기가 드러납니다. 선은 자신의 좋은 것뿐만 아니라 나쁜 것까지도 나타나게 합니다. 그때 드러난 문제는 처리하지 않고 정신적 평화만을 얻는 것은 뿌리를 제거하지 않고 돌을 눌러 놓은 여석압초(如石壓草)의 형국이어서 언제든 다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인터뷰를 마친 스님은 '좌·우 이념갈등 해소를 위한 천일기도'를 위해 대웅전에 들었다. 작은 몸짓에 화해의 원대한 염원을 담아 기도하는 그를 조용히 지켜보다 문득 섬돌 위에 놓인 그의 겨울 털신을 보았다. 계절은 어느새 여름으로 향하는데, 그는 추운 겨울나무로 남아 우리네 삶의 근본 자리를 성찰하고 있었다.
걱정이에요. 모두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니... 자살행위지...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에 머물지 말고 성찰의 문화를 가꾸는 사람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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