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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한국 근현대사 논쟁, 어떻게 볼 것인가(신동아 569호)

by 마리산인1324 2007. 3. 3.

 

<신동아> 2007.02.01 통권 569 호 (p302 ~ 323)
http://shindonga.donga.com/

 

 

 

 

[신년 특별 좌담회]

한국 근현대사 논쟁, 어떻게 볼 것인가
“정치화·권력화한 역사는 폭탄만큼 위험천만”
일시·장소 : 2007년 1월10일 ‘신동아’ 회의실
참석자 : 이영훈 서울대 교수, 윤해동 성균관대 연구교수, 도진순 창원대 교수
사회 : 김형찬 고려대 철학과 교수
정리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2006년은 그 어느 때보다 지식인 논쟁이 뜨거웠던 해다. 연초, 1980년대 젊은이들의 한국근대사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전면 공격하고 나선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출간된 데 이어 뉴라이트 진영의 새 역사교과서 제작 움직임이 본격화하면서 논란을 낳았다. 연말에는‘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모두를 극복해야 한다며 ‘근대를 다시 읽는다’가 출간돼 관심을 모았다. 언론에서는 지난 한 해를 ‘백가쟁명’이라고까지 표현하지만, 논란의 당사자나 지식인사회 내에선 “감정 섞인 비난과 편 가르기만 있었을 뿐 제대로 된 논의가 없었다”고 말한다. 왜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 근현대사가 문제가 되는지, 지식인사회의 논의방식은 적절한지 등을 놓고 역사학자들이 모여 논쟁을 벌였다.

왼쪽부터 이영훈, 윤해동, 김형찬, 도진순 교수.

사회 : ‘한국 근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논쟁을 2007년 어떻게 생산적으로 이끌어갈 것인가’가 오늘 좌담의 큰 주제입니다. 이 논쟁은 꽤 오래 진행되어왔기에 다소 진부할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이 주제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라는 걸 재인식시켜준 게 지난해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인 것 같습니다. 일단 ‘재인식’이 2006년에 발간됐어야만 한 이유를 생각해보고, ‘재인식’의 공과(功過)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학계와 지식인 사회의 논의 방식이 적절한지에 대해 짚어보면 논의가 정리되면서 쟁점들이 부각될 것 같습니다. 민족주의 극복 문제, 근대와 국가도 극복 대상인지 여부, 과거사 청산과 새 역사교과서 집필 문제, 노무현 정권에 참여한 지식인들의 공과를 고려할 때 현실사회에서 역사가와 지식인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합니다.

 

도진순 : 각 진영이 토대로 삼는 현실적인 콘텍스트와 비전에 대해서도 얘기 해보면 좋을 것 같고,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역사 드라마를 소재로 민족주의 문제를 다루면 이야기를 좀 쉽게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회 : ‘재인식’이 왜 이 시기에 출간됐는가에 대해 ‘재인식’의 편자 가운데 한 분이신 이영훈 교수께서 먼저 말씀해 주시죠.

 

‘인식’, 역사를 정치화하다

 

이영훈 : 지난해 2월에 ‘재인식’이 출간됐는데, 제목에 명확히 드러나다시피 이 책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인식’)이란 책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책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인식’이 1989년에 마지막 편이 나왔는데, 최초로 나온 건 1979년입니다. 1985년부터 1989년 사이에 전체 6권이 출간됐고, 지난 20년간 ‘인식’이 한국 근현대사의 주류적 동향을 대변했습니다. ‘인식’의 문제의식은 점차 가열돼 역사를 정치화하는 데 큰 몫을 했죠. DJ 정권 때의 제2건국 이야기도 그러한 역사인식을 대변하고, 노무현 정부 들어 대통령이, 제가 기억하는 것만 3차례 정도 ‘우리의 과거사에서 정의가 패배했다’고 발언했어요.

 

노무현 정부는 ‘인식’을 출간한 분들과 협조해서 과거사 청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민족적 시대적 과제다 해서 2004년부터 과거사 청산 작업을 본격화해 현재 3년째 진행되고 있어요. 노무현 정부는 과거사를 청산하고자 했던 정부로 뚜렷한 인상을 남기게 됐죠. 그와 관련해 ‘인식’이라는 역사학이 크게 뒷받침했고, 이것이 지배적인 권력 담론으로 현실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면 ‘인식’이 기본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은 뭐냐. ‘마오쩌둥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근대민족국가 건설, 이것이 기본 패러다임입니다. 그런데 ‘마오쩌둥주의’ ‘신민주주의혁명’이라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아무런 현실성을 갖지 못하게 됐지만 민족주의라는 집단적 정서에 바탕을 둔 현대사 비판 의식만은 여전히 살아남아 한국 근대사, 특히 건국 60년사(史)를 부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렇게 부정적으로 평가해서 어떤 선진적인 대안이 제시되면 바람직하겠지만, 오히려 현실정치에 갈등을 유발하고, 사회적 분열을 촉발하고, 특히 북한과 연계하려는 조짐이 너무도 뚜렷했기에 역사학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으로서 뭔가 비판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재인식’을 출간한 겁니다.

사회 : ‘재인식’이 나오고 거기에 대응해 기획된 게 ‘근대를 다시 읽는다’(이하 ‘근대’)죠. ‘재인식’에서 어떤 문제점을 발견했기에 책을 기획하게 됐는지 윤해동 교수께서 들려주시죠.

 

윤해동 : ‘인식’은 1980년대 책이니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식’을 극복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재인식’이 우리 사회에 미친 효과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현실적인 면과 학문 내적인 면에서 그렇습니다.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재인식’이 나와야 할 역사적 필요성은 많은 사람이 느끼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재인식’이 현실적으로 뉴라이트에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인상을 풍겼고, 그럼으로써 낡은 이분법 논리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게 됐어요.

 

또한 ‘인식’을 대체하는 것으로 오로지 ‘재인식’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학문 내적인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재인식’의 1권은 식민지기, 2권은 해방 후를 다루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 학문 내적으로 논리의 분절이 있습니다. 1권에선 식민지기를 다루면서 식민지 근대화론과 탈민족주의 혹은 탈근대론의 논문이 공존하고, 2권에선 대한민국 중심의 ‘국가 건설(state building)’과 ‘인식’의 논리를 뒤집어놓은 듯한 우파 지향적, 대한민국 중심주의적 해석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책 자체에 분단성이 있다는 거죠. ‘인식’에 대한 역편향이 심해서 대중성을 갖기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죠.

 

‘식민지 근대’와 ‘국민 형성’

 

도진순 : 그러면 ‘근대’에서 하려 했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윤해동 : ‘근대’는 크게 1, 2권으로 나뉩니다. 새로운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가진 논문을 엮는 데 주력했어요. 학계엔 식민지 인식에 관해 기존의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만 저희가 내세우는 건 ‘식민지 근대론’이라는 새로운 개념입니다. 해방 후 시기에 대해서는, 이영훈 선생님이 ‘민족과 혁명의 이중주’라고 표현하셨지만, ‘인식’이 민족주의와 통일지상주의적 발상이 강하고 ‘재인식’은 대한민국 중심의 국가 건설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근대’는 해방 후 ‘국민 형성(nation building)’에 대해 집중적으로 따져보고자 합니다. 전쟁이 갖는 국민 형성의 성격과 그 후 남한에서 어떤 방식으로 국민 형성이 진행됐으며 부정적인 효과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뒀습니다. 방법론적으로는 최근의 문화연구, 담론비판, 구술사·일상사 연구 영역의 논문을 엮었습니다. 전체적으론 탈민족주의이고, 탈근대적 성향이죠.

 

사회 : ‘재인식’의 공과 과에 대해선 도진순 교수께서도 하실 말씀이 있으실 듯합니다.

 

도진순 : 제가 막 공부를 시작하던 1979∼89년에, ‘인식’으로부터 학문적 오리엔테이션을 받았죠. 당시 상당히 많이 배웠습니다. 부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 내용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한국현대사를 개척한 의미가 있다고 봐요. 당시엔 글 쓰는 것은 물론 책을 출간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려웠으니까요. ‘재인식’이 나온 뒤 저도 구입했는데,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역사를 오리엔테이션 했던 ‘인식’에 누락된 것이 많이 들어 있어요. ‘근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수긍이 가고요. 세 책 모두 기념비적인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온전한 역사를 수립해가는 행로가 단선 코스라야 하고, 하나의 역사상이 근대나 현대의 진실이라는 사고가 맞는지, 유용한지에 대해 저는 회의적이에요. 결국 세 책이 다 의미가 있지만 하나의 역사를 적시해놓고 어느 것에 가장 가까운지를 얘기하면 정치적으로 이용될 여지가 크다고 봐요. 가령 ‘재인식’을 읽으면서 거슬린 것은 ‘인식’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대목들이에요.

 

이영훈
1951년 대구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경제학)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現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교과서포럼 공동대표
“제가 민족주의를 비판하다 ‘재인식’을 출간하고 ‘교과서포럼’에 관여하게 된 것은 자칫 학문과 사상의 자유마저 구속당할 수 있겠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과거사청산법입니다. 과거사청산법은 식민지 수탈론에 입각한 겁니다.”

 

‘인식’이 역사교과서에 미친 영향

 

이영훈 : ‘재인식’은 이른바 보수언론으로부터 엄청난 환영을 받았어요. 그런 현상을 겪으면서 보수언론이 대변하는 한국의 중산층에게 그간 크게 결여된 것이 있지 않았나 생각했어요. 지난 20년간 ‘인식’이라는 역사학과 그것이 대변하는 민주화세력의 역사 지배력이나, 그 과도한 지배력에서 비롯된 일종의 횡포가 좀 심했다는 대중의 의식이 있었던 게 아닌가…. ‘우리에게 걸맞은, 우리를 역사의 주체로 평가하고 우리도 나름대로 역사에서 제대로 살았다고 평가하는 우리의 역사는 없는가’ 하는 기다림이 대중에게 있었는데, 20년 만에 이런 책이 나오니까 그런 반응이 쏟아진 게 아닐까요.

 

‘인식’이 나름대로 현대사를 개척했다는 점을 ‘재인식’에서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부분적으로 인정합니다. ‘재인식’은 여러 사람의 논문을 모은 책입니다. 저도 여러 필자 중 한 사람으로 ‘인식’을 비판하는 논문을 맡았습니다. 현대사를 어떻게 연구해왔는지를 총체적으로 살피는 게 아니라 ‘인식’을 표적으로 삼고 비판하기 위해 논문을 쓴 거죠. 그렇다보니 ‘인식’에 대한 비판이 과도했다는 지적은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이라는 큰 틀이 지금 구체적으로 역사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역사교과서 한국의 근현대사 시작 페이지엔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이 마오쩌둥 사진과 함께 서술됩니다. 그건 ‘인식’의 국제 인식을 명확하게 대변하죠.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이 긍정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5·10 총선에 대한 서술에 ‘온 국민의 열망을 누르고’ 하는 식의 표현이 있고,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소개하면서 마치 남한이 분단을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어요. 저는 ‘재인식’의 부족한 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도 현실의 역사학이 얼마나 권력화, 정치화했는지 반성하는 계기로 ‘재인식’이 읽히기를 바랍니다. ‘재인식’이 정치화한 게 아니라 현실의 역사학이 권력화, 정치화해 그것에 대한 비판이 오히려 역(逆)편향적이라거나, 정치적이라고 받아들여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회 : 현재 한국사회에서 ‘인식’의 영향력이 대단히 크고,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어 그것을 타깃으로 비판하다보니 윤해동 교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오히려 우편향됐다는 걸 인정하시는 겁니까.

 

이영훈 : 정치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여진 거죠. 더불어 ‘재인식’이나 ‘교과서포럼’을 일본의 우익이나 ‘새역모’와 동일시하는 비판에 대해선 정확한 독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곧 국가주의입니다. 국가를 유기체로 생각하고, ‘민족중흥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하는 건 민족 자체를 개인보다 우선으로 여기는 민족주의 곧 국가주의 사상이죠. ‘재인식’이나 교과서포럼은 그것을 비판하고 자유로운 개인을 중심으로 한 협동적 질서로서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식민지와 한국의 근대사를 재해석하자는 건데, 일본의 우익이나 ‘새역모’는 일본의 국가나 민족이 너무 흐트러져 있으니까 이것을 정비하자는 거잖아요. 그래서 애국 교육을 강화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해 장차 중국의 패권주의에 대응한다는 계획이죠. 일본의 청소년들이 개인주의로 흐트러져 있으니까 국가를 중심으로 다듬자는 거니 역사발전 단계라든가 지향하는 바가 우리와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재평가하자, 좀 존중하자고 하니 그것이 국가주의로 비치고 비판받은 겁니다. 그러나 그건 오해입니다. 그런 비판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인식’이 대한민국을 지나치게 허물어뜨렸기 때문에 성취한 역사를 밝게 보자는 게 역편향적으로 강하게 주장됐을 수도 있습니다만….

 

윤해동
1959년 대구 출생
서울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한국사)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강사, 일본 와세다대 외국인연구원
現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식민지는 지배당한 민족이 자기 결정권을 갖지 못한 상태인데, 근대화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온당한가. 그 시대 전체의 근대를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지 않나, 경제적 지표만으로 근대화를 얘기할 때 식민지를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

   

윤해동 : 그 점에 대해선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역사 해석이 과도하게 정치화했다는 지표를 이영훈 교수께선 교과서에서 확인하시는데 시간을 좀더 큰 스팬(span)으로 두고 보면, 조금 다른 얘기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1980년대, 저희가 근대사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 사실 근대사 연구라고 할 만한 체계적인 연구나 기술이 없었습니다. 식민지 연구나 식민지 기술이 관변적 연구에 국한되어 있었고, 교과서도 1980년대까지는 절대적으로 대한민국 중심주의로 서술됐어요. 예를 들어 신간회운동도 연구할 수 없었지요.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했다고 해서. 그게 해방 이후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현상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1980년대 처음으로 근대사 연구를 시작한 사람들은 그런 점에 대단히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인식’으로 대표되는 근현대사 연구의 초기 세대는 30년 이상의 근현대사 연구나 교과서 집필 상황을 바로 잡으려다 보니 오히려 거꾸로 굽어진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인식’ 출간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이고요. 기존의 관변 연구라는 것이 학문 이전·수준 이하의 연구였기 때문에 1980년대 후반 이후 비교적 체계를 가진 ‘인식’의 논리가 학계에 풍미하고, 교과서에도 반영된 건 어떤 면에선 필연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재인식’ 출간은 시의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인식’이 너무 많이 구부린 측면을 ‘재인식’이 반대로 너무 많이 구부린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거죠. 하지만 ‘재인식’이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1980년대 ‘인식’이 나오기 이전까지의 일반 연구와 교육체계를 이제 균형 잡힌 체계로 바꿀 수 있는 출발선상에 들어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재인식’의 출간은 용기 있는 작업이었고, 학계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고 봅니다. 다만 한 가지, 역사의 정치화 문제인데, ‘재인식’이 역사가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이해되는 데 기여한 바는 없는지 이영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역사의 다층성

 

사회 : 현실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일단 ‘인식’도 그렇고 ‘재인식’도 그렇고 그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하려다보니 한쪽으로 치우친 면이 있어 공과 과를 갖고 있다는 점에 선생님들이 공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간 역사를 보는 관점이 민족주의에 편향되어 있었기 때문에 역사를 제대로 못 봤다, 그러니 역사를 다시 봐야 한다는 점엔 대체로 공감하는데, 역사를 어떻게 다시 볼 것인가 하는 점에서 의견이 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럼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도진순 선생님이 먼저 말씀해주세요.

 

이영훈 : 제가 먼저 말씀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재인식’ 기고자들의 공통점은 지나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역사를 일원화해온 것에 대한 거부감이에요. 현실 정치에 대한 견해는 28명의 저자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역사 인식에서 민족주의가 압도적인 규정성을 갖는 것에 대해 비판하자는 데 공감했습니다. 민족주의라는 일원화된 잣대를 걷어내고 역사의 다층성(多層性)을 본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하면, 종전까지 수탈과 저항의 이분법이 압도적이었어요. 그러나 이젠 수탈과 저항의 층위와는 별도로 개발과 협력이라는 층위도 있다는 걸 보자는 거죠. 그래서 이광수의 친일론에는 친일민족주의라고 할 만한 점이 있고, 최경희의 친일문학론에는 순수한 인간으로 재탄생하고자 하는 자기 문명에 대한 비판이 있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논문이 ‘재인식’에 실려 있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근대

 

민족주의를 걷어내고 역사를 다층적으로 보자는 의도에서 ‘재인식’은 ‘근대’와 다를 바 없어요. 오히려 두 책을 합해서 편집해도 좋을 만큼 식민지나 근대의 다층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색깔을 같이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럼에도 식민지 인식에서 ‘재인식’과 ‘근대’가 어떻게 다른가, 식민지 인식에 관한 차이인가? 윤해동 선생은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근대’는 다르다고 하는데, 솔직히 뭐가 다른지 납득할 수가 없어요. 흔히 제가 식민지근대화론자의 한 명으로 얘기되는데, 수탈과 저항을 넘어서 객관적으로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졌고, 그 제도 위에서 경제적 변화가 있었다는 얘기를 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규정해버렸어요. 저항 속에 협력이 있고, 협력 속에도 저항이 있다는, 역사를 다층적으로 보자는 건데,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도진순
1958년 경북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한국사)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위 전문자문위원, 참여연대 운영위원,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
現 창원대 사학과 교수
“38선을 경계로 누가 먼저 사회주의적, 자본주의적 국가 만들기를 시작했는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큰 구도에서, 어떤 국제적인 거푸집이 한국 현대사를 찍어냈는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2005년 2월1일 과거사청산 범국민위가 국회 기자 브리핑룸에서 과거사 청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윤해동 :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근대는 어떻게 다른가. 저는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이름붙여진 논리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식민지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체가 아니던 식민지에서 국가건설을 위한 토대 구축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덧붙여 한국사회 전체가 일정한 수준에서 개발되고 그것이 통계 지표로 드러난다는 점에 대해선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근대화라고 보는 건 경제적인 면에 치우친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식민지는 지배당한 민족이 자기 결정권을 갖지 못한 상태인데, 근대화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온당한가, 그 시대 전체의 근대를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지 않나, 경제적 지표만으로 근대화를 얘기할 때 식민지를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 그렇게 되면 식민지의 다른 여러 면을 놓칠 수 있다고 보고 새로운 개념을 들고 나온 거죠. 식민지근대론은 근대를 재규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런 점에서 큰 차이가 있어요. 식민지란 피식민자에게는 억압적인 면이 있는데, 근대화라는 규명으로는 그것을 놓칠 수도 있는 거죠.

 

도진순 : ‘근대’에 윤 교수가 쓴 글을 보면 ‘모든 근대는 식민지근대’라고 했던데, 거기에 대해서 설명해주시겠어요?

 

윤해동 : 근대를 재규정하자는 취지에서 사용한 표현인데요. 근대를 지정학적 서구유럽의 전유물로 봐서는 곤란하다, 즉 우리가 근대의 지표로 간주해온 정치적 국민국가의 건설이나 자본주의사회 성립 같은 요소 이면에 식민지가 있다는 겁니다. 근대 자체를 지정학적 개념으로 두지 않고, 식민지를 시야에 넣을 때 비로소 근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근대는 식민지를 동반하지 않으면 정확히 해석하기 어렵고, 따라서 모든 근대는 식민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도진순 : 그러면 영국도 식민지근대이고, 우리도 식민지근대인가요?

 

윤해동 : 그런 면이 있죠.

 

도진순 : 그러면 두 나라 사이의 커다란 차이가 간과되지 않습니까?

 

윤해동 : 좀 과도하게 형식화된 면이 있는데요. 영국이 식민지근대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식민지가 없는 영국 자본주의를 상정할 수 없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영국 근대는 자기 내부에 식민성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도한지는 모르겠으나 식민지근대라고 보는 겁니다.

 

근대 비판에 대안은 있는가?

 

도진순 : 과도하다면 표현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영훈 선생님을 비판하면서 윤해동 교수가 식민지근대화론이 경제적 면만 보고 있기 때문에 식민지가 주권이 없는 상황이란 걸 몰각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러면서 ‘모든 근대는 식민지’라고 규정하면, 식민지를 가진 제국과 식민지 관계가 무차별적으로 개념화하는 문제가 발생하죠. 또 자본주의 발전 단계와 미래의 전망에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같은 맥락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곧 같은 것인가. 그렇다면 현재의 영국과 제국주의 영국의 차별성, 탈식민화된 세계에서 자본주의 내지 근대화는 조정할 수 없는가. 이렇게 되면 모든 세계는 근대이고, 근대화는 곧 식민지화라고 비칠 수 있습니다.

‘근대’를 상당히 좋아합니다만 뚜렷한 역사적 비전과 대안이 있는가 하는 점에서 ‘재인식’과 다른 것 같아요. ‘재인식’의 경우 식민지근대화론과 탈근대론적 요소들이 뒤섞여 있긴 해도 ‘재인식’을 하나로 결집하는 요소가 현대사 쪽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민족이나 민족통일보다는 세계화와 대한민국 선진화를 중시하는 거죠. 반면 ‘근대’에서는 근대를 총체적으로 비판하다보니 동아시아와 서구와의 차이, 일본 제국주의와의 차이, 일-중 관계, 근대에 포괄되는 일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적 요소, 포스트 콜로니얼(탈식민주의)적 요소, 에릭 홉스봄이 그 독특함을 보고 ‘역사의 국가(historic state)’라고 표현한 한-중-일 관계에 대한 부분들이 무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해동 : 이야기가 식민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근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저는 제국주의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탈제국주의, 문화적 제국주의, 탈냉전 이후의 전지구화시대를 관통하는 특징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형태를 달리한 식민주의죠. 전지구화, 곧 글로벌라이제이션은 결국 식민지와 관련돼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과도하게 단순화된 면이 있습니다만 근대가 가진 식민지적 특수성을 드러내는 데는 ‘모든 근대는 식민지근대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도진순 선생님의 대안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근대’에 논문을 기고한 분들이나 편자들의 생각이 각기 다르겠지만, 저의 관점에선 근대 이후의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두 가지는 문제를 삼고 싶었어요. 하나는 역사 해석이 압도적으로 민족이라는 범주에서 진행되어온 것, 다른 하나는 단선적인 진보 논리에 입각한 역사 해석, 이 두 가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어요.

 

사회과학자와 인문학자의 벽

 

사회 : 윤해동 선생님이 무리를 감수하고도 식민지근대화론과 구별되는 식민지근대라는 새 개념을 들고 나왔을 때는 식민지를 포함해 한 시대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점이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영훈 : 저는 차별과 억압과 폭력이 없는 역사는 없다고 봅니다. 조선시대엔 차별 억압 폭력이 없었나? 많이 있었습니다. 민족적인 차별이나 억압은 없었습니다만 양반의 상민과 노비에 대한 억압이 있지 않았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경제학자로서 판단할 때 이런 차별과 억압과 폭력을 보다 문명화된 형태로, 순화된 형태로, 간접적인 형태로 해소하는 게 근대 시장의 힘이라고 봅니다. 윤해동 교수는 ‘근대’에서 시장의 억압성과 폭력성을 반복해서 얘기했지만 자유주의자 시각에서 볼 때 시장은 인류가 발견한 통합적이고 협력적인 질서입니다. 근대의 억압과 차별과 폭력은 근본적으로 가난과 빈곤에서 비롯된 것인데, 시장주의가 발달하면 풍요로워져 가난과 차별과 억압과 폭력을 해소해가고, 그것이 곧 역사라고 봅니다.

 

근대의 억압성을 비판하고, 대안을 찾는 문제의식엔 공감합니다만 실제 시장 외에 무슨 대안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사회주의적 대안(계획과 재분배)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습니다. 시장이 주도해야 한다는 데는 대체로 공감합니다만 시장이 불완전한 것이니 얼마나 규제할 것인가 하는 정책 선택에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규제를 3으로 하는 사람을 자유주의자라고 한다면, 5로 하는 사람을 좌파적이고 진보적이라고 하는 그런 정도의 감각적인 차이가 오늘날의 현실일 겁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기본 정서엔 그런 것들이 깔려 있습니다. 식민지기 사유재산제도와 지금의 사유재산제도가 다를 게 없다는 겁니다. 제국주의가 사유재산이나 경제활동에서 조선인이라고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생산하고 소비하고, 수출하는 데 아무런 차별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이뤄진 경제적 확장이나 해방 후 경제적 확장이나 차별이 없다고 보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시장에 대한 기대가 있는데, 그 점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차이는 차이로 인정해야지, 그것을 정치적으로 반민족적이다, 친일적이다 하고 비판하니까 감정이 상하는 면이 있죠(웃음).

 

윤해동 : 말씀을 듣고보니 인문학자와 사회과학 전공자 사이의 큰 차이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아닌 자유주의 경제학을 하시는 분이니 이런 차이를 근본적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현존(現存)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장을 대안으로 삼기에는 현실이 너무 비참한 것 아니냐는 거죠. 그런데 그 차이는 차이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도진순 : 윤 교수님은 시장 자체가 근대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봅니까? 시장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니죠?

 

윤해동 : 아닙니다. 시장은 초역사적인 것이죠. 전, 시장을 아주 기능적으로 봅니다. 유토피아적이지도 않지만 시장을 없애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거라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한국사를 보는 폭넓은 시각

 

이영훈 : 국가 만들기와 국민 만들기의 차이에 대해 말씀하면서 ‘재인식’ 2권이 국가 만들기 중심으로 우편향됐다고 지적하셨는데, 국민 만들기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지적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국민 만들기라는 관점에서 대한민국 건설 과정을 더욱 총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봐야죠. 그런 점에서 ‘재인식’과 ‘근대’는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국가 만들기와 국민 만들기는 뭐가 다른가, 층위가 다릅니다. 국가 만들기가 국가를 구성하는 리더와 관료조직·군대·공공사회에 관심을 둔다면, 국민 만들기는 국민으로서 권리의식을 가짐과 더불어 맡겨진 책무를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인간집단이 성숙해오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국가 만들기 관점에서 ‘재인식’이 우편향적인가에 대해선, 나는 정치학자가 아니라 말할 능력이 없습니다만 ‘재인식’을 편집하면서 이정식 교수의 논문을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스탈린이 북한에 독자적인 국가를 세울 방침을 확실히 정하고, 지령을 내리고, 거기에 상응하는 사실상의 국가 만들기 작업이 1945년 9월 이후에 진행되어왔다는 내용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승만이 분단(分斷)에 앞장섰다고 얘기하는지, 그동안 좌편향이었던 걸 제대로 돌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 ‘재인식’의 편자 대담에 보면 엄정한 동서냉전을 극복할 유일한 길은 그야말로 민족의 단합인데 그간 한민족은 분열되어 있었다는 걸 반성해야 하지 않느냐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 면만 봐도 ‘재인식’이 우편향이라는 지적은 납득이 잘 안됩니다.

   

“세계의 고아 될 수 있다”

 

도진순 : ‘인식’은 식민지 민족문제를 기본 축으로 삼아 일제식민지기 피해와 분단을 집중적으로 다루니 통일 지향적이고, 남한에 대해 비판적이었죠. ‘재인식’은 냉전이 끝나고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난 뒤, 해방 후 국가건설사를 보는 데 통일 우선적인 사고가 옳은가 하는 문제의식을 던졌어요. ‘재인식’에서는 통일이나 민족 문제보다는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을 우선하고, 세계적으로 동서냉전에서 서구가 승리한 데서 보듯,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이 타당하고 옳다는 것인데, 통일과 세계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 때문에 우편향적이라는 얘기를 듣는 것 같아요.

 

‘재인식’도 그렇고 ‘근대’도 그렇고 제가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은 이런 겁니다. ‘인식’도 마찬가지고. 남과 북 중 누가 먼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과연 그렇게 중요한 질문인지 전 회의적입니다. 우리나라 역사 내지 한국인의 역사 기술에서 세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데, 세계가 한국사 내부에서 소화되는 점은 대체로 기술돼 있는데, 세계사의 구도에서 한국에 어떤 기회가 있었나 하는 점은 좌우 문제를 떠나 한국사에서 소외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예를 들면, 러일전쟁, 청일전쟁에 한국이란 글자는 들어 있지 않지만 두 전쟁이 사실상 한반도 분단을 결정짓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마찬가지로 분단 문제도 미시적으로 38선을 경계로 누가 먼저 사회주의적, 자본주의적 국가 만들기를 시작했는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큰 구도에서 어떤 국제적인 거푸집이 한국 현대사를 찍어냈는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6·25전쟁도 누가 먼저 총을 쐈는가도 중요하지만 크게 보면 스탈린과 워싱턴 등 국제적인 구도가 한반도에 끼친 영향이 보완되는 것이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개념과 별개의 것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회 : 그 점이 한국사 인식에서 부족했던 부분이죠. 한반도는 늘 세계사적 상황에서 규정되어온 면이 강한데도 말이죠. 그런 면이 보강되어야 할 텐데 한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그런 움직임이 있습니까.

 

도진순 : 역사학이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나눠져 있다보니 한국사는 한국에 직결되는 부분에 연구가 집중됐죠. 그렇게 나눌 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역기능이 있는 것 같아요. 민족주의 문제라든지 타자에 대한 이해 부재 등 자칫 한국사를 열심히 공부하면 세계의 고아가 될 수 있는 거죠. 다행히 다른 관점의 여러 책이 나와 서양사 연구자들이 한국사를 이야기하고, 역사가 아닌 사회과학, 문학에서도 그런 글들이 나와서 한국사를 다양하고 폭넓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얼마 전에 중국에 갔더니 쑹칭링(쑨원의 부인) 묘에 덩샤오핑이 ‘애국주의자, 공산주의자, 세계주의자’라고 써놨더라고요. 우리는 어느 하나를 택일해 세계냐, 민족이냐 해서 하나의 색깔로 규정하기 좋아하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문명, 세계 같은 것들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겁니다. 한국사도 안과 밖을 연결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국제적인 시각과 문명론

 

사회 :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도 역사를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보아온 것을 넘어서자는 것이겠지요. 예컨대 식민지 인식만 해도 수탈과 저항이라는 단순 구도로 보아온 틀을 깨고 좀더 큰 구도에서 보자는 맥락과 흐름을 같이하는 거겠죠.

 

도진순 : 그렇다면 해방 후 좌우 문제를 보는 데 있어서도, 누구에게 분단의 책임이 있는가를 따지기보다 더 큰 틀을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영훈 : 그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하는데요. 두 가지 시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먼저 윤해동 교수가 국민 만들기 얘기를 하셨는데,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으로 1945년과 해방 후 한반도에 거주한 주민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민족이 옛날부터 하나의 유기체, 통일체로 존재해왔다는 건 더는 실체가 없는 주장이고, 조선시대의 경우 하나의 왕조 밑에서 통합된 신민(臣民)으로서 정치적 통일감은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민족이라고 보긴 어려우니까요. 조선의 신민에서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천황의 적자로,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존재하던 주민 집단, 거기에 동일한 인종적 특징, 문화적 배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운데 해방이 되었을 때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슈퍼 파워를 극복하기에는 단일체제로서의 정체성이 너무나 부족했다는 겁니다.

 

식민지기(期)를 거치면서 한쪽에선 상공업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고, 다른 한쪽엔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빈민 계층이 있고, 독립운동은 또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어온 상황이 해방 후 바로 모순으로 나타났어요. 그래서 오스트리아와 같이 단합된 국민으로서 소련과 미국의 점령체제를 슬기롭게 조절하면서 한 10년의 과도기를 거친 후 양 슈퍼파워의 신뢰를 얻어 해방되는 하나의 통합력을 과시하기에는 한반도 주민집단의 근대 민족, 근대 국민으로서의 통합력이 약했다는 것을 역사적 시각으로 분명히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탈민족적이면서 근대국민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그 시대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도 선생이 말씀하신 대로 큰 전환입니다. 국사학이 세계적 학문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왕조와 중국과의 관계를 과감하게 얘기해야 합니다. 조선왕조는 독립적으로 존재한 게 아니라 중화(中華) 질서 안에서 독립하고 자주하고 번영했다는 걸 말이죠. 이 중화 질서는 공기와 같은 것이어서 있는 듯 없는 듯했지만 엄연한 질서였거든요. 그 질서가 깨어지고, 앵글로색슨 중심의 세력이 한반도에 들어오는데, 거기에 저항해 사회주의체제로 변한 러시아 문명이나 중화 문명이 반발한 게 크게 봤을 때 문명의 충돌이죠. 한반도는 그 경계에 걸려 있었던 건데, 그런 면에선 우리도 세계사적 대전환, 문명사적 대전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도, 이게 다 우리 힘으로 된 게 아니거든요. 수입하고, 정착했지요. 분단 문제도 중화세계 속에 있던 한반도가 서유럽 문명권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충돌과 반발로 바라봐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뜻에서 통일도 문명권이 그렇게 확대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불멸의 이순신’과 ‘왜 놈’

 

윤해동 : 한국사에 국제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도 선생님 얘기가 문명권 담론으로, 제가 보기엔 약간의 비약이 있는데요. 국제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한국사 인식에서 민족주의, 민족국가 중심의 시각을 벗어나야 한다는 면에서 방금 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전근대 질서하의 정치체제가 근대적인 독립국가로 간주되는 것은 치명적인 잘못입니다.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전근대와 근대의 가장 뚜렷한 차이는 주권을 가진 국민국가(nation state)가 최고의 주권을 바탕으로 국가간 체제(inter-state nation)에서 독립적인 행위자로 활동하는 것인데, 전근대 사회에선 그런 체제가 어디에도 없었죠. 중화질서도 마찬가지로 조선이 중화권 속에 위계적으로 편입되어 있었던 건데, 그것을 국가질서 속에서 독립적인 행위자로 간주하니 설명할 수 없는 게 많죠. 전체적인 질서 속에서 조선을 볼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런 측면을 문명논리로 치환하는 것은 저와 견해가 다릅니다. 근대세계 체제에선 국가 간 질서 속에서 독립된 행위자로서 국가를 설립하는 것이 최고 목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대 이행과정에서 식민지를 거치면서 분단되었는데, 이 과정에 슈퍼파워에 희생된 것을 문명의 질서로 해석하기보다는 미국 중심의 헤게모니가 동아시아의 변경에서 냉전에 의해 가로막혔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을 문명론적으로 해석해버리면, 전근대제국의 문명론과 근대의 문명론이 뒤섞일 위험성이 있습니다. 가령 근대 이후의 중국은 제국주의적 특성을 갖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주권국가 설립에 최고의 목표를 뒀습니다. 근대 주권국가 체제를 전근대 시기에 과도하게 투영하는 것도 문제지만, 근대 이후에 주권국가 간의 세계적인 시야를 잃어버리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도진순 : 민족주의 얘기가 나왔으니 말씀드리면, 큰 틀에선 두 분의 의견에 공감합니다만 전 우리 민족이 전근대에도 아이덴티티(민족적 정체성)가 아주 높았다고 봅니다. 한말에 외국인들이 펴낸 저작들에도 드러납니다만, 우리의 독특한 역사적 구조로 볼 때 이스라엘이나 프랑크는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에 비해 아이덴티티가 높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만 대외 세계관을 따지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보였습니다. 중국에 대해선 지나치게 후했죠. 한국사에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개념이 왜 나왔는지 연구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한국 사회는 대체로 대륙세력 속에서 패권 문명을 만났는데, 큰 차이라면 중화민족이냐 아니냐였죠. 그러다 임진왜란 이후로 일본을 통해 서구 문명을 만났는데, 서구가 일본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근대 세계에 대한 열린 자세를 협소하게 보려는 면이 있지 않나 싶어요. 일본을 여전히 작은 나라로 느낀다든지 하는.

 

가령 이런 겁니다.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이순신은 잘 다루었는데, 일본 장수들은 여전히 조총을 가진 선진적인 부대라기보다 전형적인 ‘왜놈’으로 다룹니다. 우리나라의 문명사적 전환에서 일본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하는 점들이 과제로 남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전반적으로 민족 내부적인 특성, 다른 민족과의 차이도 다뤄져야 하지만 한반도가 일관적으로 세계적인 대전환기 때마다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냈던 이유도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 : 현실적인 문제로 들어왔는데요. 민족주의가 과도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하지만 동북아 차원에서 보면 중국과 일본이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만 민족주의를 버릴 것인가 하는 점이 논란이 될 것 같고요. 역사를 바로 보자고 나서면 한편에선 좌파고, 또 한편에선 뉴라이트다 해서 정치적으로 얽혀들어가는 게 현실이란 말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보자는 게 결국 지금의 한국과 앞으로의 한국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와 연결되기 때문인 것 같은데, 피할 수 없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영훈 선생님은 새역사교과서 문제로 곤욕을 치르셨지요.

  

과거사청산 작업의 위험성

 

이영훈 : 민족주의는 해방 후 남북분단을 거쳐 남북이 체제경쟁을 하면서 국민을 만들어오는 과정에 국민을 동원하는 데 이용됐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했죠. 민족의 이름으로 유신을 하고, 조국 근대화를 했어요. 사람들은 민족의 이름으로 해외 상사요원으로 나갔고…. 민족은 너무나 일상화돼 공기와 같은 것이 됐죠. 북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옆엔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있고, 또 앞으로 일본 못지않게 성장할 중국이 있어요. 그러니 한국인에게 민족이라는 아이덴티티는 운명 같은 거예요. 민족주의를 극복하자고 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너무나 압도적이고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상대화하고, 지난 130년간의 근현대사를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보자는 취지로 민족주의 역사학을 비판하는 거죠. 그러나 앞으로 현실정치에서 민족주의 가 과연 동원력을 상실할 것인지에는 어떠한 확신도 없어요. 오히려 이 정부가 과거사청산 작업을 하고 있고, 단순히 그 권력뿐 아니라 거기에 협력하는 다수 국민의 얘기를 들어보면 상황이 상당히 비관적이에요. 민족주의의 마성적인 동원력, 그것에서 비롯될 어떤 비극적인 파국을 저는 불길하게 예감하고 있지요.

 

제가 민족주의를 비판하다 ‘재인식’을 출간하고 ‘교과서포럼’에 관여하게 된 이유는 자칫 학문과 사상의 자유마저 구속당할 수 있겠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과거사청산법입니다. 과거사청산법은 식민지 수탈론에 입각한 겁니다. 토지수탈에 협력한 자, 금융조합이나 식산은행에 종사한 자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규정한 22개 항목이 있습니다. 저처럼 경제사를 공부한 사람은 그 법에서 굉장한 위압을 느낍니다. 전 토지수탈에 협력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식산은행에 다닌 게 반민족행위라는 것을 납득 못하고 있는데, 법으로 그렇게 정해놓으면 앞으로 그 부분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지 못할 거 아닙니까? 그 시기에 원희룡 의원은 반민족 발언을 하는 사람을 규제하는 법을 만들자고도 했습니다. 386 정치인 중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어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식으로 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현실에 참여한 거죠.

 

과거사청산법은 과학적인 판단이 아니기 때문에 청산이 제대로 될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두 차례에 걸쳐 친일파 명단 200∼300명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일진회 사람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요. 일진회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억눌렸던 사람들이고, 대한제국이 신분차별과 억압을 해서 일제에 협력한 면도 있어요. 동학에서 비롯된 면도 있고. 최근 하버드대에서 나온 논문을 보니까 일진회를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최초로 실천한 대중운동 조직으로 평가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일진회 멤버를 친일파라고 법으로 규정하면 앞으로 그런 다양한 연구를 국내에 소개하기도 힘들어질 거 아닙니까? 따라서 청산되지도 않을뿐더러 사회를 굉장히 억압적인 구조로 만들어갈 거라고 우려됩니다.

 

사회 : 제가 이영훈 선생님에 대해 우려하는 건, 선생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대로 의견이나 시각의 차이는 인정하자 했을 때 학문적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막상 ‘교과서포럼’이나 ‘뉴라이트’에 직접 관여하시면 선생님 의도와 상관없이 어떤 색깔이 덧씌워진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활동을 계속하셔야 하는 건지, 한편으로 과거사청산 작업에도 여러 역사학자가 참여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미 순수한 학문적인 싸움이 아니라 정치적인 싸움이 되어버렸고, 그게 계속될 것 같은데요.

 

역사가의 의무와 권력

 

이영훈 : 먼저 정치화한 건 기존의 지배 권력으로 존재한 역사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비판하니까 비판하는 사람도 정치화하는 거고요. 일의 선후관계는 그렇습니다. 전 역사가는 정치화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정치가들이 대중의 과거사에 대한 기억을 조작하는 것에 대해 투쟁하는 게 역사가의 의무입니다. 역사가의 가장 큰 힘은 사료와 실증 속에서 나오고요. 역사가는 실증과 사료를 통해 대중이나 정치가에게 진실을 얘기하는 거죠.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대중과 정치가의 선택입니다. 끊임없이 그것을 얘기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성찰하게끔 화두를 제시하는 것으로 역사가의 임무는 끝나죠. 그런데 지금 과거사청산 작업은 역사가가 권력 속으로 들어가서 법률을 만들고 직접 역사의 질서를 잡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잘못됐다는 거죠.

 

윤해동 : 그런데 선생님께서 참여하고 계신 ‘교과서포럼’도 외연을 넓히면 정치의 범주에 들어가니까 그 점에 대해선 조금 신중하게 생각하실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영훈 : 그래서 저도 교과서포럼을 영원히 할 생각은 없고,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대안 교과서를 출간한 뒤에는 다시 역사가로서 연구실로 돌아갈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할 건데, 일의 선후관계는 분명히 하자는 겁니다. 역사가가 정치와 결탁해서 지금, 권력적으로 역사를 재단(裁斷)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잘못됐다는 거죠. 그걸 비판하기 위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모여서 운동을 하니 정치화된 겁니다. 그런 긴장 속에 제가 놓여있는 건 사실입니다.

   

윤해동 : 이영훈 선생님이 과거사청산과 민족주의를 직결했는데, 저는 그런 면이 일부 있고, 아닌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과거사청산위원회가 많은데, 대상 시기를 크게 식민지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식민지 이전 시기 역사에 대해선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친일민족반역자 및 강제동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위원회가 있는데, 강제 동원과 관련해선 제대로 작업하면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시작해 성과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조사위원회는 명백하게 탈냉전 이후 민족주의적 정서가 깊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건 제 경험과도 관련된 것인데, 제가 1991년에 ‘친일파 99인’이라는 책의 편집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후 제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당시엔 친일파에 대해 거론하는 게 금기시됐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이 그 책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피했어요. 그 후 대중적 민족주의가 분출되고 난 다음, 지금은 누구나 친일파를 당연히 조사하고 청산해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그런 식의 변화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방 후의 사안에 대해서도 여러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있는데, 4·3이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문제, 의문사 등에 관련한 조사위는 민족주의 감정과 직결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전쟁 및 권위주의 체제의 희생자에 대한 거죠. 넓게 보면, 권위주의 체제에 희생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국민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거사 청산 문제를 해방 전과 후를 구분해서 봐야 하는데, 제가 친일협력자조사위원회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그들이 잘못한 게 없다는 게 아니라 이제 다 죽고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금융조합 서기를 했다, 면서기를 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위안부를 연행하거나 강제 징용하는 데 협력했다면, 반인간적인, 실증적인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고, 만약 해방 직후라면 엄밀히 죄를 물었을 테지만 지금에 와서 역사학자들이 국가기구를 통해서 조사위원회를 가동하고, 친일파 딱지를 붙이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동북아에 고조되는 민족주의

 

얼마 전에 ‘동아일보’에서 이 시대를 ‘역사의 시대’라고 규정했는데, 그 점에 저도 동의합니다. ‘역사의 시대’를 저는 민족주의 과잉의 시대라고 읽었는데, 굉장히 위험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가 역사의 시대라고 규정된다면 빨리 끝장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도진순 : 동북아의 민족주의적인 갈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개항해 근대문명을 처음 만났을 때 일본은 제국주의로 나아가고, 중국은 반(半)식민지화되고 우리는 식민지화되고 동북아에 많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세계화시대, 냉전이 해소된 뒤 전면적인 개방의 시대를 맞아 동북아 전체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고 평화와 선린으로 나아가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동북아 3국의 지식인들이 나서 국가 혹은 대중이 가져올 충돌을 견제해야 합니다.

 

과거사 청산에 대해선 저도 관여하고 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선생님들과 생각이 같습니다. 과거사 청산은 과거에 대한 정리가 가능하냐 하는 원론적인 문제부터 여러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미래의 비전과 결합되면 과거냐 현재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지 않을 텐데 지금의 과거사 청산 방식은 거의 과거에 매몰되어 있어 대중의 동의를 얻어내기 어려운 구조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앞서 ‘국민 만들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그런 과정의 하나로 과거사 청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취지로 저도 관여하고 있습니다. 6·25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현장에 가보면 처참한 상태입니다. 가해자가 좌냐 우냐 하는 걸 넘어서 이건 인권의 문제이고, ‘국민 만들기’ 외연의 폭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어떤 형식으로든 처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학자가 권력이 되는 건 곤란합니다만 우리 사회에서 수습되지 못하고 그늘진 부분을 정리하는 데는 역사학자의 전문적 지식이 동원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윤해동 : 이번 조사위원회에 참여하고 계시면 좌파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도 똑같은 관점에서 다뤄야 합니다.

 

도진순 : 똑같은 관점에서 다뤄야죠. 공감합니다.

 

사회 :정리할 시간이 된 것 같은데요. 민족주의를 벗어나야 우리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선 대체로 동의하시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더 나아가 한국사를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의견도 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얘기하면서 한편으로 TV에선 역사물을 방영하면서 민족주의 시대, 과도한 역사주의 시대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도 마찬가지고요. 학자들은 민족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하는데, 현실은 정 반대로 가고 있고, 아마 일부 학자와 지식인들이 그걸 부추기고 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논의를 앞으로 어떻게 효율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전망이나 방법론을 제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윤해동 : 저는 지난해 ‘재인식’ 출간을 계기로 ‘근대’가 나올 수 있었고, 그래서 논의의 공간이 넓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런 작업을 더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서로 견해 차이를 인정하되, 적극적으로 논쟁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문·사회과학에 주어진 가장 큰 숙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고 하지만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해 공존하고 논쟁하는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절멸시켜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도 올 한 해는 한국 사회에 논쟁의 문화가 꽃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 : 논쟁의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근대’ 이후의 뭔가를 준비하고 계신 게 있습니까?

 

윤해동 : 그렇진 않고요, ‘근대’에 던져놓은 문제들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저희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후속 작업을 계속해 나가자고 편자 및 일부 필자들과 얘기하는 중입니다.

 

역사 일원주의를 극복하자

 

도진순 : 우리 사회는 역사는 하나라는 인식이 너무 강한 것 같아요. 역사는 기본적으로 복수의 역사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요. 자신의 약점이 뭐고, 상대방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동북아 역사학자들의 토론과 교류가 확대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일원주의가 상당히 강한데, 그렇게 해서 다양한 세계를 소화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심지어 해방이 돼도 잘 받아들이지 못했죠. 해방이 됐을 때도 엄청난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친일파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민족의식이 약했다고 볼 수 있지만 만약 그들이 일본 이외의 더 넓은 세계를 봤더라면 일본에 그렇게 절대적이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해방 후 들어온 미국과 소련을 감당할 독해력이 부족했던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우리 역사엔 세계적 격변기마다 큰 갭이 생기는데, 그런 걸 타개하기 위해선 일원주의가 극복되어야 합니다. 지나치게 한 가지 역사로 몰아가는 분위기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이영훈 : 저도 윤 교수 이야기대로 개방적인 논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논쟁이 잘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논쟁을 활발히 할 만한 ‘거리’가 없다는 겁니다. 연구가 부족한 상태예요. 근현대사와 관련해 역사관의 차이를 명확히 하고 논리적으로 다투는 일부터가 서툰 것 같아요. 역사 과잉의 시대를 살면서, 역사는 핵폭탄이 될 수 있다고 하신 도 교수의 말씀에 저는 동감합니다. 그럴수록 역사가의 시대적 역할이 중요합니다. 역사가는 기존의 지배적 기억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지식 활동을 하는 전문가 집단이어야 합니다.

 

사회 : 상당히 다른 견해를 가진 분들이 모인 자리라 격한 토론이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말씀을 나눠보니 아주 부드럽게 진행됐습니다. 오늘처럼 관점의 차이를 드러내놓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자리가 자주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