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06-12-21 오후 05:51:32 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179733.html
읽다가 죽어도 좋아, 루미의 연애시 | |
앗살람 알라이쿰 13세기 시인 루미(1207~1273) | |
나의 이슬람 순례 여행의 첫번째 나라는 터키였다. 터키가 순례여행의 출발점이 된 이유는 ‘루미’라고 불리는 13세기의 수피 시인 때문이다. 루미는 이슬람의, 특히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이슬람의 성자이며 시인이다. 유네스코는 2007년을 ‘세계 루미의 해’로 선포하였다. 내년 9월30일은 그의 탄생 8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서구의 미디어들이 이슬람에 대한 편향적이고 부정적인 보도를 일삼는 지금 유네스코가 내년을 루미의 해로 선포한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이스탄불에서 루미의 도시 코니아까지는 심야 버스로 13시간이 걸렸다. 내 가슴은 마냥 떨렸다. ‘드디어 그를 만나게 되는구나.’ 루미는 남자인 게 무엇인지를 재정의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의 순례가 돈, 전쟁 또는 심지어 나의 죽음 때문에 중단된다 하더라도 루미가 살았던 곳, 그의 학교와 묘지를 본 것만으로 나는 행복할 것 같았다.
여행 가방을 호텔에 내려놓자마자 루미의 묘로 향했다. 현재 루미의 묘는 터키의 엄격한 세속화 정책 하에 박물관이 되어 있지만 여전히 그를 느끼려는 순례자들이 전 세계에서 오고 있었다. 사당인 녹색 첨탑은 짙은 푸른빛 하늘 아래에서 마치 살아있는 나무처럼 보였고, 묘소엔 탄신일을 이틀 앞두고 찾은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이슬람 예술 최고의 고아함이 빛나는 곳이었다. 신비로운 향내와 명상음악이 있었고, 많은 신봉자들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울며 열심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 또한 울고 싶었다. 나 자신의 고통이나 슬픔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 있다는 순수한 기쁨으로.
나는 루미를 만나기 전에도 또 그 후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연애시’를 읽지 못했다. 그의 연애시가 신을 향한 사랑의 시건, 연인을 향한 연애시건 그건 중요치 않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그의 시들이 ‘사랑의 폭탄’들이라는 것이다. 그의 시들은 내 영혼의 골수까지 파고들어 존재를 폭파시켰다. “죽어도 좋아!”다. 그 존재의 폭파 후 아름다운 치유가 계속되었다. 지금도 나는 삶이 모든 빛을 잃고 물기를 잃고, 존재의 힘이 모두 빠져나가면 루미의 시집을 들고 골방으로 들어가거나 숲으로 간다. 그리고 소리를 내어 그의 시를 읽는다. 그러면 내 삶의 정원에 꽃이 피고 달이 뜬다. 님을 기다리는 밤, 정원의 테이블 위엔 촛불이 켜지고 와인잔이 차려진다. 간장을 끊는 음악과 노랫소리와 함께 우주의 춤이 시작되고 나는 다시 임과 함께 “죽어도 좋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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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와 같은 연애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신을 만난 사람이다. 신의 존재 속에서 완전히 녹기 전엔 이런 시는 나올 수가 없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계속 우리의 전 존재를 떨리게 하는 시를 잉태하고 태어나게 한 이슬람의 신비주의자 루미는 과연 누구인가?
메블라나 젤랄루딘 루미는 1207년 9월30일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인 발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 당시 ‘학자들의 술탄(왕)’으로 불리는 위대한 이슬람의 신학자였고 그의 어머니는 지역 지도자의 딸이었다. 루미가 12살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몽골족의 침략을 피해 고향땅을 떠난 뒤 1228년 셀주크의 술탄, 알라딘 카이코바드의 초대를 받아 수도인 코니아로 온다. 13세기 코니아는 실크로드의 서쪽 끝에 있던, 여러 문화가 만나는 장소였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그리고 불교의 세계가 공존하는 곳이었고 루미는 그 모든 현자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게 된다. 24살이란 젊은 나이에 신학교의 교수로 임명된 루미는 1244년 11월15일 그의 삶을 180도 바꿔버리는 사건과 만나게 된다. 이란의 타브리즈에서 온 방랑자, 춤추는 수피 신비주의자 셈스를 만난 것이다.
구전돼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루미는 셈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절해 버렸다고 한다. 그 뒤 두 사람 사이에 열정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루미와 셈스는 일주일씩 방안에서 나오지 않고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한다. 그때 루미의 나이는 37살이었고 셈스는 거의 60살이었다. 셈스를 만나기 전의 루미는 대대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자란 모범생이었다. 이런 모범생 루미의 영혼 속에 지금으로 말하자면 ‘히피 같은’ 셈스가 신의 불을 지른 것이다. 그때의 심정을 루미는 그의 시를 통해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전에 신이라고 생각했던 그것, 오늘 나는 한 사람 속에서 만나네.” 셈스는 루미의 책들을 우물 속에다 던져버린다. 그것은 이제 루미가 필요한 것은 그가 책에서 읽던 그 진리들을 온몸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셈스와의 만남은 루미를 철저히 변화시킨다. 이제 그는 전통적인 신학자, 학장, 법률가로서의 삶을 뒤로하고 춤추는 시인이 된다. 그 뒤 셈스와 루미는 많은 시간을 같이 지내며 존재와 엑스터시로 가득 찬 침묵과 대화 속에 머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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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의 묘 앞 돌에는 시구가 적혀있다. “오라, 그대가 누구든. 신을 버린 자, 이방인, 불을 경배하는 자, 누구든 오라. 우리들의 집은 절망의 집이 아니다. 그대가 비록 백번도 넘게 회개의 약속을 깨뜨렸다 할지라도. 오라….”
글·사진/미국 유니언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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