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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밀양에서-신유한과 그 평가(심경호 070704)

by 마리산인1324 2007. 7. 6.

 

<다산연구소> 07-07-04 08:00    

http://www.edasan.org/bbs/board.php?bo_table=board90&wr_id=106

 

 

밀양에서

 

- 심 경호 -

밀양역에 내리자, 한적한 역사 안에 최근 화제를 모은 영화 『밀양』의 스틸 들이 늘어서 있었다. 여배우가 감독과 함께 모니터를 하는 광경을 찍어둔 사진을 보니, 그 두 사람의 열성을 잘 느낄 수 있었다. KTX 안에서 읽을 생각으로 가지고 갔던 이청준의 원작 소설을 읽지 않은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논문 발표시간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기에,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가 콩나물 해장국을 시킨 뒤, 가방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창밖으로, 그 부근이 영화의 한 장면을 찍은 곳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보였다. 책에는 ‘밀양’이라는 글씨가 크게 흘림체로 가로로 적혀 있지만 오른쪽에는 조금 작은 글씨로 ‘원제 『벌레 이야기』’라는 글씨가 세로로 적혀 있었다.


논문발표를 갔다 들은, 영화 『밀양』에 대한 엇갈린 평가


밀양 사람들은 시사회를 보고 나오면서 입이 한참 부어 있었어요. 거기 어디 밀양을 아름답게 묘사한 것이 있습니까? 굳이 밀양이 아니어도 될 것을 우째 밀양에 갖다 붙였단 말입니까? 아, 그래요? 하지만 밀양 출신이 아닌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그 영화는 정말 잘 만들었다고들 할 겁니다.


논문 발표가 끝난 뒤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영화 『밀양』 이야기가 나왔다. 지방 유지는 흥분된 어조로 말씀하였다. 영남루가 굽어보는 강물 빛을 시작으로 이루다 손꼽을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고향 밀양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 영화는 하나도 제대로 담지 않았으며, 거꾸로 살인, 유괴, 섹스 등 갖은 폭력적 요소의 무대로 밀양을 그려보였기 때문에 도무지 달갑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산의 국립대학교에 재직하시는 교수님은, 영화의 완성도가 매우 높고 영화감독의 해석에 뛰어난 면이 있다고 변호하였다. 

 

사실 밀양은 고려 때 우리나라 시문학사상 매우 중요한 시선집 주석서인 『협주십초시』가 간행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송운대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밀양을 상징적인 공간으로 번전시켜 보는 것이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물에 대한 평가와 해석이라는 것은 하나의 고정된 관점에서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 기차 시간에 맞춰 서둘러 택시를 집어타고, 국도 1번의 고불고불한 도심을 빠져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이날 내가 논문에서 다룬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란 인물에 대한 평가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는 정통 교학의 틀에 머물지 않고 불가와 도가까지 통섭하였으며, 걸출한 시인 최성대(崔成大)와 골동서화 감평가 김광수(金光遂) 등과 교유하여 18세기 문화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고려 문인 임춘의 『서하집』 중각에 간여하는 등 문헌 편찬에도 공적을 남겼다. 그리고 군위 사람 정란(鄭瀾)이나 밀양 처사 안명담(安命聃) 같은 인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 여행록인 『해유록』과 사명당 유정의 활약을 기록한 『송운대사분충서난록』을 남긴 것은 새삼 그 공적을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사람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한미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당색이 주류에 속하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였다.


문화 공적 남긴 신유한과 그에 대한 정약용의 평가


그렇기에 1713년 증광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1718년 제술관으로서 통신사 홍치중(洪致中)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나, 지방관과 봉상시의 직을 전전하였을 뿐이다. 만년에는 가야초수(伽倻樵)를 자처하면서 “내 몸은 초목이나 깨어진 기와장과 같다.”라고 고독을 곱씹어야 하였다.


그런데 다른 어떤 분들보다도, 『해유록』을 읽기까지 하였던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이 분으로서는 매우 섭섭한 일이다.


신유한의 『해유록』은 한계가 없지 않지만, 일본 풍속과 정치제도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또한 일정을 적은 일기와는 별도로 ‘문견록(聞見錄)’을 두어 관찰 사실들을 조목조목 나열하였다. 이것은 다른 교수님의 논문에 의하면 당시까지의 사행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체제라고 한다.


뒷날 정약용은 신유한의 『문견록』이 산천과 풍속을 기록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일본의 관방(關防, 국경 수비)과 도리(道里)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의당 관찰해야 할 것은 오직 기물(器物)의 정교함과 여러 가지 조련(調鍊)하는 법인데, 이 책에서는 그 점이 생략되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더구나 정약용은 신유한이 일본 에도 지방의 기후에 대해 서술한 내용에 대해 신빙성을 의심하였다. 신유한은 이렇게 적었다. “대마도로부터 동북쪽으로 3천여 리를 가면 대판성(大坂城, 오사카)에 이르고, 또 다시 동북쪽으로 1천 6백 리를 가면 강호(江戶, 에도)에 이르는데, 강호의 북쪽은 바로 야인계(野人界)에 이르게 된다. 야인과 더불어 그 남북이 동대(同帶)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강호는 우리나라의 육진(六鎭)에 해당된다. 그러나 동방은 해와 달이 뜨는 곳이라 가장 따뜻하다. 그러므로 10월에도 춥지 않아 마치 우리나라 삼남(三南)의 9월 기후와 같다.”


정약용은 “그곳 10월 추위가 우리나라 남방 9월 기후와 같다면 분명 그 땅은 우리나라 남방에서 남쪽으로 1천여 리에 있음이 증명되니, 어찌 서수라(西水羅, 함경북도 경흥군에 있는 우리나라 동북쪽 항구)와 서로 대치될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는, 신유한이 “우삼동(雨森東, 아메노모리 호슈)의 말만 믿고 주장해서 남북의 진도(眞度)를 결정”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신유한이 일본의 에도가 우리나라 육진과 위도가 같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정약용이 에도가 우리나라 남방에서 남쪽으로 1천 여리에 있다고 한 것도 잘못이다. 에도는 부산과 위도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공은 시인이다. 오직 풍월이나 읊는 것으로 호기를 부리는 사람인데,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 육합(六合)이 서로 얽혀 운행하는 이치는 전혀 모르고 남에게 기만을 당하니, 아아! 참으로 통탄스러울 뿐이다”라고 덧붙였다. 정약용과 같은 해박한 지식과 공정한 안목을 지닌 분이 이렇게 논평했다는 것은 의아하기까지 하다.


평가, 완전무결할까마는 그래도 옳고 공정하기를


사물과 인간의 다양한 면을 어느 누구인들 완전무결하게 평가할 수 있을까. 신유한은 남산에 올라가 도성 안을 내려다보면서 인재 등용의 불균형, 부귀와 지식의 세습 현상을 지적한 바 있다. 서울에는 인재들이 많고도 풍요로워서, 덕업, 지능, 문장, 고을 수령들이 모두 여기서 나오지 다른 지방에서 나오는 법이 거의 없다. 그런데다가 서울에서 인재를 취하는 경우에도 당색에 따라 심하게 차별을 한다는 사실을 우려하였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냉소적인 어투로 논하였다. 


아아, 이것이 어찌, 지령(地靈)이 인재를 육성할 때에 도성 안에 대해서는 풍성하게 하고 바깥 지역에 대해서는 인색하여서 그런 것이겠는가. 아니면 『주관(周官)』에 따른 세록(世祿)이 제도가 인재를 작성한 것이 이미 오래되어서, 부형이 자제를 가르치는 규율을 단련할 겨를도 없이, 보고 듣는 것에 익숙하여서 집집마다 보불()의 높은 벼슬감이고 호호마다 경륜(經綸)의 감인데 비하여, 구구하고 비루한 곳에 거처하는 인사는 밭두둑 논둑 사이에서 몸을 일으켜 보아도 그 재주가 미관 하나에도 취직할 수 없을 정도여서, 발바닥에 물집이 생길 정도가 되어 천 리 먼 길을 와서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묵묵하게 아무 뜻도 얻지 못하고 황황하게 물러나야 하기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슬프다.

신유한이 정약용의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이러저러한 일로 심사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는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공정한 평가가 행해지기를 세상에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창끝보다 더 심한 해를 입는다면 어느 누구인들 슬프지 않겠는가. 가톨릭 연도문에 나오는 ‘심판에 휘지 않으시고’라는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깊이 느끼게 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작가 서문에서 이청준은, “졸작 『벌레 이야기』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이다. 작품을 쓰기 얼마 전 서울의 한 동네에서 어린이 유괴살해 사건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밀양 분의 말씀대로, 영화 『밀양』은 밀양같이 한적하고 풍광 좋은 곳을 무대로 하지 않았더라도 좋았을 듯하다. 하지만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루면서 신의 계시를 중시하는 관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표기 한자만을 보면 빛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밀양’이라는 지명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을 법도 하다.  
 

고장 분들이 말씀하듯, 정말로 밀양의 본 모습이 영화 『밀양』에서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밀양을 위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하였다.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