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2007-06-2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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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 도서출판 한길사가 공동으로 주최한 <로마인 이야기> 독후감 대회 응모작입니다. <편집자 주> |
로마는 지금도 이탈리아의 수도다. 로마는 그 옛날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해 지중해를 내해로 삼은 거대한 제국이며, 세계의 중심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문명을 이룬 도시의 이름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로마의 시작에서 몰락까지 1000여 년의 역사를 소재로 한 책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많은 독자를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책이 재미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를 역사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그 지혜를 일본이나 중국 등 가까운 나라뿐 아니라 먼 나라에서도 얻을 수 있다는 생각도 큰 이유일 것이다. E. 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고,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라고 했다. 역사 인식의 주관성을 강조한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러한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역사책 못지않게 주관적인 <로마인 이야기> "나는 그저 역사를 서술할 뿐입니다"라는 저자의 글 이면에는 "내가 쓰는 역사는 주관적인 면이 최대한 배제된 객관적인 사실을 엮고 있다"는 의미가 내포된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저자의 책 역시 다른 어떤 역사책 못지않게 주관적이며 편협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점은 '로마의 개방성'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장은 로마는 개방적이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고대 로마는 다른 국가나 민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면이 일부 있었을 뿐 기본적으로 개방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로마가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침략과 정복을 통해 제국으로 발전한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의 코린트를 완전히 말살시키고, 카르타고를 잿더미로 만든 로마인이 개방적이고 그들에게 포용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해상국가인 카르타고에 모든 항구와 도시를 파괴한 다음 내륙으로 들어가라고 로마가 요구한 것에 대해서도 저자는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요구가 부당하다고 쓴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제국주의적 요구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로마가 부당한 요구를 한다고 쓰지 않았다고 진정 그들은 로마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생각했을까? 중국을 정복할 길을 내어주지 않으면 침략하겠다는 일본의 임진왜란이나, 후세인이 대통령을 사퇴하고 망명하지 않으면 개전하겠다는 미국의 이라크전쟁이 부도덕하다는 것을 구태여 기록으로 남겨야만 알 수 있는 것인가? 두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로마 시대의 노예 등 약자에 대한 시선이다. 로마의 가장 유명한 노예반란인 스파르타쿠스의 난에 저자는 고작 몇 페이지를 할애하는 데 그친다. 그리고 이 책에는 노예의 사정이나 반란 이유에 대한 고찰은 거의 없다. 심지어 저자는 노예제가 있었던 시대에 존재한 주인과 노예의 강한 유대와 신뢰에 향수를 느끼며, 강한 유대감과 신분의 평등이 과연 병립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고 발언한다. 이러한 시각은 간디가 로마의 일원이었다면 탁월한 능력으로 로마 시민권은 물론 원로원 의석까지도 충분히 얻을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조국의 독립보다는 제국의 존속에 힘을 쏟았을 것이라고 언급한 또 다른 저서에서 한층 더 두드러진다. 한편으로 저자는 노예 사이에서도 해방노예와 같이 신분 차이가 생기는 것은 이들 사회가 능력을 중시하는 경쟁사회였기 때문이었고, 능력만 있다면 출신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는 로마의 개방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한다. 저자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읽고 소화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맞서 삼십여 년 동안 독립운동을 한 이유를 의심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인에게 축복이었다는 식의 망언을 비판할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승자에 대한 찬미와 강자에 대한 환호
이는 물론 저자가 저술 곳곳에도 밝혔듯이 로마인의 삶이 배어있는 사료를 찾기 힘들다는 고대사의 난점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끔은 그 멋진 서술로 인해 수없는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큰 전쟁마저 어느 영웅의 로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역사를 몇몇 위인들이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너무나 위험한 생각이 아닐까? 5권 '율리우스 카이사스(하)'편에서 "역사는 이따금 하나의 인물 속에 자신을 응축시키고 그 후 세계는 이 인물이 지시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이런 위인들의 존재는 세계사의 수수께끼다"라는 부르크하르트의 책을 발췌하는 데서 저자의 영웅주의적 역사인식을 느낄 수 있다. 저자의 주장을 관통하는 생각은 승자에 대한 찬미이자 강자에 대한 환호다. 저자의 책에는 패자에 대한 연민이나 약자에 대한 이해는 거의 없다. 노예뿐 아니라 로마의 기층 민중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중간계층이 어땠는지, 여성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저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물론 역사를 표면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위인들의 역할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도 곤란하지 않을까? 영웅 중심의 역사인식이 현실에 투영되었을 때 어떤 비극이 생겨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하지 않을까? 국가 간 관계에서도 저자의 시각은 지나치게 로마중심적이다. 예를 들어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가 단순히 보호자와 피보호자로 번역될 수 없는 것이라는 내용을 읽다 보면, 로마가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지배한 것이 아니라 주변 국가들을 도와준 것처럼 이해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로마가 완전히 이타적인 국가가 아니었다면, 그 외교관계나 경제관계도 주변 국가들을 상대로 어떤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며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미국인이 쓴 20세기 세계사 책을 읽으면서 미국을 너무나 존경스러운 나라로 이해한다면, 그 역사인식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을까? 패권국가의 의무는 패권 아래에 있는 나라나 사람을 보호하고, 패권 아래에 있는 나라나 민족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것이며, 당사자를 납득시킬 만한 권위와 권력이 있는 제3자가 조정해주는 편이 문제 해결에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는 구절은 너무나 제국주의적이다. 그리고 그 주장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은 현실에서 너무나 위험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역사인식이 지나치게 팍스 로마나 시대의 로마를 하나의 이상적인 틀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있다.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이 성립한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자기 개혁노력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마찬가지로 초기의 제정이 계속 변모하는 것도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거쳐 아우구스투스 때 확립된 로마의 제도들을 후세를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로마인 이야기> 13권을 읽다 보면 자주 나오는 구절이 아우구스투스 때 확립한 제도를 디오클레티아누스(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러저러하게 고치면서 로마 고유의 특성이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로마의 이상적인 특성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제도 자체가 더 이상 4세기 로마에는 맞지 않았고 그 때문에 개혁을 실시했지만 근본적인 체제변화에는 실패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지 않을까? 저자는 자신이 '아마추어 역사가'이므로 강단 사학자들이 할 수 없는 과감한 해석과 서술을 시도할 수 있으며 '역사는 엔터테인먼트'라고 강조한다. 물론 저자가 로마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서술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저자의 자유다. 그리고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재미있게 읽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작가의 견해를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저 저자가 평생을 바쳐 공부한 로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모든 면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서술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이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 세계의 평화와 안전이라는 미명 아래 지금 이 시간에도 사실상 침략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 세계에서 강자의 시선을 벗어나 균형감 있게 사회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선 자리에서 역사를 읽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아가 역사를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강단에 서 있는 학자들의 주장이라고 해서 시오노 나나미보다 무조건 나은 내용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고대 로마의 사료를 직접 접하고 역사의 현장을 두 발로 답사하며 자신의 관점에서 로마인의 이야기를 쓴 저자의 노고는 생각의 다름을 뛰어넘어 존경의 대상이다. 나는 지금 평범한 직장인이다. 매일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가서 맡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어린 딸을 돌본다. 대학 시절 품었던 학자의 길과는 다른 하루를 살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틈틈이 읽으면서, 학창 시절 이루지 못한 꿈을 다시 생각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고 어떤 공식기관에도 적을 두지 않은 작가가 두 발로 걷고 혼자 읽고 생각하며 이 노작을 쓸 수 있듯이, 나도 아마추어 역사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 작가가 자신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인물을 묘사하듯이, 나도 내가 선 자리에서 역사를 읽고 이야기하고 싶다. 프로와 반대되는 뜻으로서 아마추어가 아니라 문자 원래의 의미 그대로의 '아마토래', 즉 사랑하는 자가 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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