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대 일본학연구소> 2005/05/02
http://www.hufsjapan.com/data.html
일본연구소 책임연구원 김후련
1. 일본신화의 특징
신화는 고대인의 역사, 종교, 사상, 의례, 철학 등을 반영한 민족문학으로서 상징체계에 의해 표현되며, 신화는 그 민족의 원형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인류공통의 원본적 사고와도 연결되어 있다. 신화는 태초의 신화적 시간에 일어난 일들의 신성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신화는 그것이 초자연적인 행위이든, 특정의 인간행동이나 제도와 같은 실제적인 것이든, 그것이 어떻게 유래되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화는 항상 창조에 관한 설명이며, 어떤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존재하기 시작했는지 이야기하기 때문에, 신화는 실제로 일어났거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따라서 신화의 주역은 초자연이며, 그것들은 원래 태초의 초월적인 행위에 의해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일본신화라고 하면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에 극히 체계적으로 정리된 『고지키(古事記』(712년) 『니혼쇼키(日本書紀)』(720년)의 神代巻에 수록되어 있는 신화를 말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체계화되기 이전의 일본신화의 모습을 그대로 전하고 있지는 않다. 일본신화의 특징은 대개 세 가지로 크게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신들의 계보가 단순히 신들의 세계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현실의 천황과 여러 씨족과의 관련 하에 통합되고 정리되어 황실의 계보와 유력 씨족의 계보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둘째, 신들의 행동이 현실의 일본국토와 밀착된 형태로 전승되고 극히 국토성이 풍부한 신화라는 점이다. 신화에 등장하는 국토가 야마토(大和), 이즈모(出雲), 즈쿠시(筑紫)를 무대로 하여 구현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셋째, 천상계인 타카마가하라(高天原)의 신들에 의한 지상의 아시하라노나카츠노쿠니(葦原中国)의 평정이라는 구상을 주축으로 한 대단히 정치성을 띠고 있다는 신화라는 점이다.
일본신화는 크게 ①타카마노하라(高天原)신화 ②이즈모(出雲)신화 ③휴우가(日向)신화로 나눌 수 있는데, 문화사적으로 가장 후대에 속하는 벼농사 및 고분문화를 배경으로 한 타카마노하라신화가 제일 먼저 등장하고, 밭농사 및 제철문화를 배경으로 한 이즈모신화가 그 다음에, 그리고 수렵채취 및 어로문화를 배경으로 한 휴우가신화가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신화의 진행과 문화사적 발전단계가 역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마지막의 타카마노하라(高天原) 신화가 그 전단계의 이즈모 신화와 휴우가 신화를 흡수 통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신화는 대개 그 발전단계에 따라 ①원시신화 단계 ②의례신화 단계 ③정치신화 단계 ④지적신화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원시신화 단계의 신화는 이른바 신화의 맹아 형태이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절대연대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문화적 상대연대가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의례신화 단계의 신화는 제의적으로 신화가 재현되는 것을 말하며, 천손강림 신화가 강림할 때 동반한 신들이 궁정에서 여러 가지 의례를 담당하는 씨족들의 조상신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테라스가 천손 니니기노미코토에게 하사하는 3종의 神器는 궁정제사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신화의 내용을 의례화하여 천황의 즉위식에 거행되는 '다이죠사이(大嘗祭)'나, 매년 거행되는 수확제인 '니이나메사이(新嘗祭)'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정치신화 단계의 신화는 천손(天孫)의 황위계승의 절대성을 선언하는 천손강림신화가 대표적인 것이다. 일본신화가 타이카개신(大化改新) 이후에 확립된 천황신권(天皇神権)의 절대성을 역사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한, 신화가 정치신화 단계로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지적신화 단계의 신화는 고대의 전승을 토대로 해서 상당히 고도화된 사색의 결과로 윤색되기도 하고 때로는 구상되기도 한다. 요컨대 『古事記』『日本書紀』가 편찬되던 당시 궁정 주변의 지식인의 사색과 구상에 의한 요소를 일괄해서 지적신화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신화는 개개의 신화소에 있어서는 원시신화 단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러한 개개의 신화소는 의례신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제식화하고, 또 천황의 절대권력을 신화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정치성을 띠며, 이를 위해 원시신화를 해체하거나 재구성하는 윤색과 통합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것이 일본신화의 특성이며, 일본신화는 신도(神道)라는 종교에 의해서 그리고 마츠리(祭り)를 통해서 변함 없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지적신화 단계를 통해서 문헌으로 정착된 신화라는 점에서는 죽은 신화이지만, 제의와 마츠리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계속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살아있는 신화라고 볼 수 있다.
2. 『고지키(古事記)』상표문(上表文)
『古事記』는 현존하는 일본최고의 서적으로서, 712년 정월 28일 겐메이(元明) 천황에게 헌상된 것이다. 『古事記』 편찬에 관한 사정은 『日本書紀』나 『쇼쿠니혼기(続日本紀)』에는 아무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편집사정에 관한 것도 서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텐무(天武)천황은 아래와 같이 전대의 기록에 대한 수정과 통합을 명한다.
그리하여 천황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들은 바로는 ‘제가(諸家)가 가지고 있는 제기(帝紀) 및 본사(本辞)가 이미 사실과 달라 허위가 많이 들어있다’고 들었다. 오늘날에 있어서 그 잘못된 것을 고치지 아니하면, 몇 년의 세월이 채 흐르기도 전에 그 본지는 없어져 버릴 것이다. 이는 곧 나라의 골격이며, 천황의 덕으로 감화시키는데 있어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기(帝紀)를 정리하고, 구사(旧辞)를 자세히 검토하여, 잘못된 것은 버리고 사실을 바로잡아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681년에 시작된 편수사업은 686년 텐무천황(天武天皇)이 붕어 하는 바람에 중단되어 완결을 보지는 못했지만, 편수사업의 기본방향과 골격은 이미 그의 치세 중에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상표문에 밝힌 바와 같이 각각의 씨족들이 가지고 있는 제기(帝紀) 및 본사(本辞)가 사실과 달라 허위가 많이 들어있다고 단정하면서 그대로 두면 본지는 없어져 버릴 것이라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古事記』는 전래의 제기(帝紀)와 본사(本辞)를 그대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은 버리고 사실을 바로잡아 후세에 전할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허위와 진실을 정하는 기준이 천황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유년(酉年) 2월에 키요미하라(清原)의 큰 궁궐에서 천황으로 즉위하셨습니다. 그 도(道)는 헌후(軒后)를 능가하셨고, 덕(徳) 또한 주왕(周王)을 앞질렀습니다. 그리고 건부(乾符)를 손에 쥐시고 천하를 통일하셨고, 하늘의 계통을 얻으시어 팔방의 아주 먼 곳까지 병합하셨습니다. 이기(二気)의 올바름에 따라, 오행(五行)의 차례를 정비하시고, 신(神)의 이치를 갖추어 이를 세속에 장려하시고, 뛰어난 덕풍(徳風)을 베품으로써 나라를 크게 넓히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지식의 바다는 매우 넓어 아주 오래된 상고의 것을 탐구하시어, 마음의 거울은 밝게 빛이 나서 앞 시대의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의 문식(文飾)을 빌려서 키요미하라궁(浄御原宮)에서 천황으로 즉위한 텐무천황을 찬양하고 있는 상기의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古事記』는 텐무천황 체제하의 정치적 이념, 즉 진신의 난(壬申の乱) 이후 재편된 사회질서, 천황 친정체제, 그리고 황위의 부자상속 등의 새로운 질서를 합리화하고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목적 하에 당시 전해져 오던 각 씨족의 고유한 전승은 위의 원칙에 따라 내용 그 자체가 수정되어 재구성된다. 그리고 천황제 국가의 절대성을 신화를 통해 보장하기 위하여 천황의 계보를 주축으로 하여 일체의 질서체계는 천황과 예속관계로 수정되어 통합된다.
《천지개벽 신화》
『古事記』상표문에 간단히 요약되어 있는 천지개벽 신화는, 다음과 같이 태초의 혼돈상태에서 하늘과 땅이 분리되고 그 속에서 세 명의 시조가 나타나고 다시 음양이 나누어져 만물이 형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무릇 태초에 혼돈된 근원이 이미 굳어졌으나, 그 기상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름도 없었고 움직임도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 형태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나누어지자, 세 명의 신이 만물창조의 시조가 되시었고, 또 음과 양이 나누어지자 두 명의 신이 만물을 생성하는 부모가 되시었습니다. 그리하여 유현(幽玄)의 세계에 다녀오신 후, 눈을 씻었을 때 해와 달이 나타났고 바닷물에 몸을 담그시어 목욕을 하셨을 때 많은 신들이 출현하셨습니다. 이처럼 태초의 것은 명확하지 않아 잘 알 수는 없지만, 옛 전승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신들이 국토를 낳고 섬들을 낳으신 때를 알며, 원시의 것이 아주 먼 태고의 것이긴 하나 옛 성현으로 말미암아 신들을 낳고 사람을 세우신 시기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본문에는 천지가 처음으로 생겨날 때부터, 천상계인 타카마가하라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지상의 국토는 아직 생성되지 안아서 물에 떠 있는 기름처럼 또 해파리처럼 떠있다고 되어 있다. 상표문의 천지개벽 신화는 음양론의 논리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데 반하여, 본문은 타카마가하라 신학에 의해 일관되고 있다.
『古事記』의 서문은 본문과는 다른 논리로 전개되고 있고, 오히려 후대의 <日本書紀>의 천지개벽 신화와 관련이 있다.
옛날 옛적에, 천지가 아직 갈라지지 않고 음양(陰陽)도 아직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 이 세계는 혼돈(混沌)하여 닭의 卵子와 같이 모양도 결정되어 있지 아니하였으며, 또 그것은 명행(溟涬:아직 해가 뜨지 않아 컴컴함)하고 광활하여 만물의 싹은 아직 그 속에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맑고 밝은 부분은 얇게 흐트러져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부분은 쌓여 땅이 되었다. 그러나 정묘(精妙)한 것은 모으기 쉽고, 무겁고 탁한 것은 굳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먼저 이루어지고 땅은 그 뒤에 정해졌다. 그리고 뒤에 신성(神聖)이 그 가운데에서 태어났다. 그 상황은 개벽(開闢)의 처음에 토양(土壤)이 둥둥 떠돌아다니는 것이 흡사 물고기가 물에 떠 있는 것 같았으나, 그때 하늘과 땅의 중간에 하나의 물체가 생기었다. 그 형상은 갈대 싹(葦芽)과 같았다. 곧 神으로 화하였다. 이가 쿠니노토코다치노미코도(國常立尊)라 하는 神이 된 것이다.
상기와 같이 『日本書紀』는 천지개벽을 음양론에 입각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초월적인 창조주도 없으며 물론 국가양위 신화와 천손강림 신화 등에서 보이는 사령신(司令神)도 없다. 그리고 천상계인 타카마가하라라고 하는 초월적인 세계도 없다. 어디까지나 음양의 코스모로지(Cosmology)에 의해 신화가 전개되고 있다.
3. 타카마가하라(高天原)신화
『古事記』신화의 첫머리에 나오는 타카마가하라는 지상세계인 아시하라노나카츠노쿠니의 바로 위 천상에 설정된 상상의 천상세계이다. 타카마가하라에는 야마토(大和) 왕권의 상징인 카구야마(天香山)와 같은 이름의 아메노카구야마(天香久山)가 있고, 천신(天神)들이 농경, 베 짜기, 대장간 일을 하는 등 인간사회의 복사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타카마가하라라는 신화관념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는 것은 『古事記』뿐이며, 타카마가하라 관념의 성립시기도 7세기 후반 덴무(天武)․지토(持統)조정 무렵이다.
《국토창성신화 - 관념적인 신들의 세계》
일반적으로 국토생성에 대한 관념이 신화적인 형식을 취하는 것은 고대사회의 특유한 양식이다. 일본에 있어서도 국토생성 신화는 『古事記』『日本書紀』등의 문헌사료에 수록되어 있으나, 일본의 국토생성의 신화는 일반적인 고대신화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지적이 많다.
천지가 처음으로 생겨났을 때, 천상계인 타카마가하라는 이미 존재하고 있고 지상의 국토는 아직 생성되지 않아서 물에 떠 있는 기름처럼 또 해파리처럼 떠 있을 때, 그 사이로 국토의 생성의 원천이 갈대의 싹처럼 돋아나는데 이것을 신격화한 것이 우마시아시카비코지노카미(宇摩志阿斯訶備比古遲神)이다. 그리고 이어서 대지의 기초가 형성되었음을 상징하는 신격인 아메노도코다치노카미(天之常立神)가 다음과 같이 탄생한다.
천지가 처음으로 생겨났을 때, 타카마가하라(高天原)에 나타난 신의 이름은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天之御中主神)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신은 다카미무스히노카미(高御産巢日神)이고, 그 다음으로 나타난 신의 이름은 카미무스히노카미(神産巢日神)이었다. 이 세 명의 신은 모두 단독의 신으로 있다가 몸을 감추었다. 그리고 이 때는 국토가 아직 제대로 생성되지 않아, 물에 떠있는 기름처럼, 또 해파리처럼 떠 있었을 때 갈대의 싹과 같이 돋아나는 것에 의해 생겨난 신의 이름은 우마시아시카비코지노카미(宇摩志阿斯訶備比古遲神)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생겨난 신의 이름은 아메노도코다치노카미(天之常立神)였다.
이상과 같이 타카마가하라(高天原)에 최초로 나타난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天之御中主神), 다카미무스히노카미(高御産巣日神), 카미무스히노카미(神産巣日神), 우마시아시카비코지노카미(宇摩志阿斯訶備比古遅神), 아메노도코다치노카미(天之常立神) 등의 다섯 天神을 특별하다는 의미로 코토아마츠카미(別天神)라고 한다.
이 신들 중에서 실제로 활동하는 신은 생성의 신격(産霊)을 상징하는 다카미무스히노카미(高御産巣日神), 카미무스히노카미(神産巣日神) 이외의 나머지 신들은 관념적인 신들로서 실제로는 활동하지 않으며 그냥 사라진다. 그런데 신화의 무대에서 사라진 이들 관념적인 신들을 제신(祭神)으로 모시는 진자(神社)는 한 곳도 없으며, 일본신화에서는 이들 신들을 대신하는 직능신(職能神)들이 이어서 탄생한다. 이른바 카미요나나요(神世七代)라고 불리우는 열두 명의 신격들이다.
이 중에서 일본국가의 토대를 표상하는 신격인 쿠니노토코타치노카미(国常立神)와 풍요를 상징하는 신격인 토요쿠모노카미(豊雲野神)가 単独神으로 나타난다. 이어서 진흙의 응결과정을 표상화한 우히지니노카미(宇比地迩神)와 그의 누이인 스히지니노카미(須比智迩神), 싹트는 나무를 표상화한 츠노쿠이노카미(角杙神)와 그의 누이인 이쿠구이노카미(活杙神), 남녀의 생식기능을 신격화한 남신 오오토노지노카미(意富斗能地神)와 여신 오오토노베노카미(大斗乃辨神)가 나타난다. 그리고 만물의 형상화 기능을 신격화한 오모다루노카미(於母陀琉神)와 그의 누이인 아야카시코네노카미(阿夜訶志古泥神)가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음양의 밀고 당기는 기능을 신격화한 이자나키노카미(伊邪那岐神)와 그의 누이인 이자나미노카미((伊邪那美神)는 天父神과 地母神에 해당된다.
이들 배우자 신들은 모두 남매 사이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러한 근친상간의 테마는 세계적으로 공통되는 요소이며, 창조신화 내지 홍수신화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인류기원 신화 등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원형적 사고이다.
카미요나나요(神世七代)라고 불리는 신들 중 마지막에 나타난 이자나키와 이자나미는 아직 생성되지 안아서 물에 떠 있는 기름처럼, 또 해파리처럼 표류하는 일본국토를 단단하게 만들어 고정시키라는 천신들의 명령을 받고, 두 신은 천신들이 하사한 아메노누보코(天之沼矛)라는 창을 가지고 아메노우키하시(天浮橋)라는 천상의 다리 위에 서서 바닷물을 휘젓기 시작한다.
그런데 일본의 국토생성 신화를 잘 검토하여 보면, 태초에 두 명의 신이 강림해서 창으로 바닷물을 끌어올려 오노고로시마를 만들고, 그 다음에 이자나키와 이자나미가 그 섬에 내려와 성교를 함으로써, 오오야시마구니(大八島国)의 섬과 신들을 출산하는 두 단계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러 천신들은 이자나키노미코토(伊邪那岐命)과 이자나미노미코토(伊邪那美命)의 두 신에게 명하여, “이처럼 떠 있는 국토를 고정시켜 단단하게 만들라!” 하였다. 그리고 아메노누보코(天沼矛)라는 창을 내려주며 모든 것을 위임하였다. 그리하여 두 신은 아메노우키하시(天浮橋)라는 다리에 서서 그 창을 밑으로 찔러 바닷물이 부글부글 소리나도록 휘저어 들어 올렸을 때, 그 창 끝에서 떨어지는 바닷물이 쌓여 섬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노고로시마(淤能碁呂嶋)라는 섬이다.
이 때 그 거대한 창 끝에서 소금물이 떨어져 굳어서 작은 섬이 되는데, 이 섬이 곧 저절로 굳어서 생긴 섬이라는 뜻의 오노고로시마섬이다. 이윽고 두 신은 오노고로시마섬에 내려와서 아메노미하시라(天之御柱)라는 큰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을 돌면서 국토를 낳고 이어서 여러 신들을 낳는다. 이 기둥은 엘리아데가 말하는 우주목 또는 세계수인데,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이러한 세계축을 중심으로 우주만물과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신화소는 유라시아 대륙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신화이다.
두 신은 이 섬으로 내려와 신성한 기둥을 세워 매우 넓은 궁전을 지었다. 그런데 이자나키노미코토에게 묻기를, “너의 몸은 어떻게 생겼느냐?”하자, 여신이 대답하기를, “나의 몸은 차츰차츰 생겨 이루어졌으나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자나키노미코토가 말하기를, “나의 몸은 차츰차츰 생겨 이루어졌으나 남은 곳이 한 군데 있다. 그렇다면 나의 여분의 것으로 완전히 이루어져 있지 않은 너의 몸에다 끼워 넣어 국토를 낳고자 한다.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라고 하자, 이자나미노미코토 또한 “좋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이자나키노미코토는 “그렇다면 우리 둘이 서로 이 기둥을 돌면서 만나 결혼을 하기로 하자.”라고 말하셨다. 이와 같이 약속을 한 다음, 곧 아자나키노미코토가 말하기를, “너는 오른쪽으로 돌아서 만나고, 나는 왼쪽으로 돌아서 만나기로 하자.”라고 했다. 이렇게 약속을 한 후, 그 기둥을 돌 때 이자나미노미코토가 먼저 “정말 잘생긴 남자구나!”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자나키노미코토도 “정말 사랑스럽고 어여쁜 여자구나!”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서로의 말을 마친 후 이자나키노미코토가 여신에게 말하기를, “여자가 먼저 말을 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두 신은 결혼을 하여 낳은 자식이 히루코(水蛭子)였다. 이 아이는 갈대로 만든 배(葦船)에 태워 떠내려보내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아와시마(淡島)라는 섬을 낳았다. 이 아이 또한 자식의 수에는 넣지 않았다.
두 신이 남녀 생식기의 차이점에 관심을 보이는 장면과 두 신의 성교에 의해서 국토와 다른 신들이 태어난다는 발상은 세계의 그 어느 신화에서도 보기 힘든 원초적인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자나키와 이자나미가 새들이 교미하는 장면을 보고 성교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日本書紀』)처럼, 태초에 태어난 인류의 시조들이 성교를 하는 방법을 몰라서 새들이나 동물의 교미장면을 보고 따라한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다른 나라의 신화에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낳는 것은 인간이지 국토가 아니며, 신들이 성교를 통하여 현실의 국토를 낳는다는 발상의 신화는 유라시아 대륙의 다른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신이 창으로 바닷물을 휘저어서 섬을 만든 다음에, 그 섬에 시조신이 내려와 인간의 조상을 낳는다는 신화는 오키나와를 비롯해서 동남아시아나 하와이 등의 폴리네시아 지역에서만 보이기 때문에 이 신화를 폴리네시아 계통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이것은 이러한 신화의 원형이 국토생성 신화로 전화(轉化)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시조를 낳는 부분이 국토와 만물(山, 海, 木草, 水, 土, 火, 金屬 등)의 신격을 출산하는 형태로 바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의 국토생성 신화는 이들 폴리네시아 계통의 신화와는 달리 자연발생적인 우주창성 및 인류의 기원신화가 변형되어, 야마토(大和)의 영토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국토생성 신화로 변형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우주창조나 인류기원 신화와는 다르다.
그리하여 두 신은 다시 내려와 이 앞에서 했던 것처럼 아메노미하시라(天之御柱)를 돌았다. 이번에는 이자나키노미코토가 먼저, “정말 사랑스럽고 어여쁜 여인이구나.”하고 말을 했다. 그리고 나서 여신인 이자나미노미코토가, “정말 훌륭한 남자이구나!”하고 말을 했다. 이와 같이 말을 한 다음, 결혼하여 낳은 자식은 아와지노호노사와케노시마(淡道之穂之狭別嶋)였다. 그 다음으로는 이요노후타나노시마(伊予之二名嶋)를 낳았다. 이 섬은 몸 하나에 얼굴이 네 개가 있다. 그리고 얼굴마다 이름이 있다. 따라서 이요노쿠니(伊予国)는 에히메(愛比売)라 하고, 사누키노쿠니(讃岐国)는 이히요리히코(飯依比古)라 하며, 아와노쿠니(粟国)는 오오게츠히메(大宜都比売)라 하고, 토사노쿠니(土佐国)는 타케요리와케(建依別)라 한다. 다음에는 오키노미츠고노시마(隠伎之三子之嶋)를 낳았다. 이 섬의 다른 이름은 아메노오시고로와케(天之忍許呂別)이다. 다음에 츠쿠시노시마(筑紫嶋)를 낳았다. 이 섬 또한 몸 하나에 얼굴이 네 개이다. 그리고 얼굴마다 이름이 있다. 따라서 츠쿠시노쿠니(筑紫嶋)는 시라히와케(白日別)라 하고, 토요노쿠니(豊国)는 토요히와케(豊日別)라 하며, 또 히노쿠니(肥国)는 타케히무카히토요쿠지히네와케(建日向日豊久士比泥別)라 하고 쿠마소노쿠니(態曾国)는 타케히와케(建日別)라 한다. 다음에 이키노시마(伊岐嶋)를 낳았다. 이 섬의 다른 이름은 아메노히토츠하시라(天比登都柱)라고 한다. 다음에 츠시마(津嶋)를 낳았다. 이 섬의 다른 이름은 아메노사데요리히메(天之狭手依比売)라 한다. 다음에 사도노시마(佐度嶋)를 낳았다. 다음에 오오야마토토요아키츠시마(大倭豊秋津嶋)를 낳았다. 이 섬의 다른 이름은 아마츠미소라토요아키츠네와케(天御虚空豊秋津根別)라 한다. 따라서 이 여덟 개의 섬을 먼저 낳으셨기 때문에 이 나라를 오오야시마구니(大八嶋国)라고 하는 것이다.
일본신화는 당시의 국토를 표상하는 오오야시마구니라는 고대 야마토 조정의 통치영역을 중심으로 성립되어 있다. 게다가 당시의 야마토 조정의 통치영역 밖에 있던 쿠마소(態襲) 지역은 독립되어 있고, 에미시(蝦夷) 지역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한해협을 경계로 한반도와는 분명히 구분된 국토 및 영토의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宋書』「倭国伝」에 보이는 왜왕 무(武)의 상표문(上表文)에는 명확한 영토의식이 나타나 있지 않는 것과는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전후의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국토창성 신화의 원형이 타이카 개신이 일어나기 이전에 성립된 것은 거의 확실하다.
《요미노쿠니(黄泉国) 방문신화》
이자나키와 이자나미는 국토를 낳는 일이 끝나자, 이어서 신들을 낳기 시작한다. 천지만물의 자연신을 먼저 낳고 그 다음에 각종의 문화에 관련된 신을 낳는 과정에서 불의 신인 히노가구츠치(火之迦具土)신을 낳다가 이자나미는 죽게 된다.
이 자식을 낳게 됨으로써 음부가 타버리는 바람에 그만 몸져눕게 되었다. 그 때 이자나미의 구토에서 생겨난 신의 이름은 카나야마비코노카미(金山毗古神) 다음에 카나야마비메노카미(金山毗賣神)였다. 그리고 대변에서 생겨난 신의 이름은 하니야스비코노카미(波邇夜須毗古神), 다음에 하니야스비메노카미(波邇須毗賣神)였다. 그리고 소변에서 생겨난 신의 이름은 미츠하노메노카미(彌都波能賣神), 다음에 와쿠무스히노카미(和久産巢日神)였다. 이 신의 자식은 토요우케비메노카미(豊宇氣毗賣神)라 한다. 그리하여 이자나미신은 불의 신을 낳음으로써 끝내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불의 신을 출산하다가 죽은 이자나미를 잊지 못해서 저승세계인 요미노쿠니(黃泉國)를 방문한다. 요미노쿠니는 사후세계를 나타내는 황천(黃泉)이라는 말을 차용하여 표기한 것으로, 황천은 중국에 있어서 지하의 명계(冥界)를 의미하는 말이다.
저승세계 방문신화는 세계의 다른 신화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요소로서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도 죽은 아내를 찾아 하데스가 지배하는 저승세계로 내려가나, 뒤를 보아서는 안된다는 금기를 어기는 바람에 아내를 이승세계로 데려오는 데 실패한다. 이자나키도 이자나미의 모습을 엿보아서는 안된다는 금기를 어기고, 구더기가 우글거리고 뇌신(雷神)들이 들끓는 아내의 부패한 모습을 보는 바람에 저승에서 아내를 데리고 나오는데 실패하고 만다.
그리하여 이자나키노미코토는 여신인 이자나미노미코토를 보고 싶어 황천국(黃泉國)으로 갔다. 그곳에서 여신이 출입문으로부터 마중을 나왔을 때, 이자나키노미코토가 말하기를, “사랑하는 나의 아내여, 우리가 만들었던 나라는 아직도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같이 돌아가기로 하자!”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이자나미노미코토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실로 애석한 일이옵니다. 조금만 일찍 오셨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이미 요미노쿠니의 음식을 먹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나의 남편께서 와주신 것은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므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을 잠시 요미노쿠니의 신과 서로 의논을 해 보겠습니다. 그 동안 나의 모습을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라 말한 뒤, 여신이 문 안쪽으로 들어가 있을 동안, 그 시간이 너무 길어 기다리기가 힘이 들었다.
상기의 요미노쿠니에 관한 묘사는 후기 고분인 횡혈식 석실(橫穴式石室)의 장제(葬制)를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본 고고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다. 즉 요미노쿠니의 대신에게 지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기 위하여 여신이 들어간 토노(殿)는 고분의 현실(玄室), 그리고 금기를 어기고 자신의 부패되어 가는 모습을 본 이자나키를 이자나미가 뒤쫓아가서 부부이별의 선언을 하는 요모츠히라사카(黃泉比良坂)라는 언덕은 선도(羨道), 둘 사이를 가로막은 천인석(天引石)은 선도를 폐쇄하는 바위로 비정(比定)한 것이다.
그러나 日本書紀 일서(一書) 제9(第九)에는 빈검지처(殯歛之處)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빈소를 뜻한다. 그것이 횡혈식석실의 묘사와 결부되어 요미노쿠니 방문신화가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자나키가 부패한 이자나미 여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장면은 오키나와의 장례습속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는데, 오키나와에서는 시체가 부패할 때까지 가까운 친척과 친지들이 매일 다니면서 사자(死者) 얼굴을 보는 풍습이 있다. 이자나키가 이자나미의 모습을 보고 도망치는 신화는 실제로 죽은 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민속적인 관습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松村武雄)고 하는 설이 있으며, 빈소에서 행해지는 의례는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주술과 관련이 있다(松前健)고 하는 설도 있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여신인 이자나미노미코토가 직접 뒤를 쫓아왔다. 그리하여 남신은 거대한 천인석(天引石)을 들어다 그 요모츠히라사카(黄泉比良坂)라는 언덕에 가로막아 놓고, 그 바위를 사이에다 두고 서로 대치하여 부부 이별의 말을 주고받을 때, 이자나미노미코토가 말하기를, “사랑하는 나의 남편께서 이와 같은 짓을 하시면, 당신 나라 사람들을 하루에 천 명을 죽일 것입니다.”라 하였다. 그러자 이자나키노미코토가 말하기를, “사랑하는 나의 아내여, 네가 정녕 그렇게 한다면, 나는 하루에 천 오백 개의 산실(産室)을 짓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하루에 반드시 천 명이 죽는 한편, 하루에 반드시 천 오백 명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는 죽는 자보다 왜 태어나는 자가 많은지를 설명하는 생사의 기원신화이다. 부부절연의 말을 주고받는 요모츠히라사카는 오늘날의 이즈모라고 하고 있으며, 또 요미노쿠니의 신이 된 이자나미의 무덤은 이즈모의 경계 지점인 히바노야마(比婆山)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즈모노쿠니 후도키(出雲風土記)에도 요모츠노사카(黃泉之坂)․요모츠노아나(黃泉之穴)라고 하는 동굴이 있어서 그 근처에만 가도 죽는다고 하는 동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요미노쿠니를 이즈모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사고에 의한 산물일 것이다.
《三貴子의 탄생- 통치영역의 분화》
이자나키는 가까스로 요미노쿠니에서 도망쳐서 나온 뒤 츠쿠시(筑紫)의 히무카(日向)의 타치바나노오도(橘小門)라는 강가로 달려가서 요미노쿠니의 케가레(穢れ:不浄)를 물로 씻어내면서 정화한다. 이것이 바로 신도 정화의례의 기본을 이루는 이른바 미소기하라에(禊祓)의 기원이다. 이자나키가 벗어 던진 의복들에서 재앙과 악을 바로잡는 나호비(直毘)와 같은 많은 신들이 태어나고, 이어서 이자나키가 자신의 몸을 씻자 신체의 각 부분에서도 많은 신들이 태어난다. 이러한 이자나키의 정화의례를 통하여 많은 신들이 태어나고, 마지막에 미하시라노우즈노미코토(三貴子)라 불리는 세 명의 신이 다음과 같이 태어난다.
그리고 남신이 왼쪽 눈을 씻었을 때 태어난 신의 이름은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 다음에 오른쪽의 눈을 씻었을 때 생겨난 신의 이름은 츠쿠요미노미코토(月読命), 다음에 코를 씻었을 때 태어난 신의 이름은 타케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建速須佐之男命)이다. 이상의 야소마가츠히노카미(八十禍津日神)로부터 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까지의 10명의 신은 몸을 씻음으로써 생겨난 신이다. 이 때 이자나키노미코토는 크게 기뻐하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이를 차례 차례로 낳았는데 맨 마지막에는 세 명의 존귀한 자식을 얻었다.”라고 하며,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의 구슬을 흔들면서 벗은 후 또다시 흔들면서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너는 다카마노하라(高天原)를 다스려라.”하며 그 일을 위임하셨다. 그런 까닭으로 그 목걸이의 구슬의 이름을 미쿠라타나노카미(御倉板挙之神)라 한다. 다음에 츠쿠요미노미코토에게 말하기를, “너는 요루노오스쿠니(夜之食国)를 다스려라.”라고 하며 그 일을 위임하셨다. 다음에 타케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에게 말하기를, “너는 우나바라(海原)를 다스려라.”하며 그 일을 위임하셨다.
이와 같은 三貴子의 탄생신화는 죽은 반고(盤古)神의 신체부위에서 우주만물이 생겨났다는 중국의 우주기원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중국의 반고신화에서도 왼쪽 눈이 태양신이 되고 오른쪽 눈이 달의 신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일본신화에서는 왼쪽 눈을 씻었을 때는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 다음에 오른쪽 눈을 씻었을 때는 츠쿠요미노미코토(月讀命), 다음에 코를 씻었을 때 타케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建速須佐之男命)가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왼쪽 눈에서 태양의 신인 天照大御神가 태어나는 것은 왼쪽이 오른쪽보다 존엄하고 우월하다는 사고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서문에는 유현(幽玄)의 세계에 다녀오신 후, 눈을 씻었을 때 해와 달이 나타났다고 되어있을 뿐으로 스사노오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또한 <日本書紀>의 一書 第一에는 다른 전승이 실려 있다. 아마테라스와 츠쿠요미는 좌우 손에 가지고 있던 백동경(白銅鏡)으로부터 태어나고, 스사노오는 과거를 회고하는 순간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해와 달의 신인 아마테라스와 츠쿠요미가 왼쪽 눈과 오른쪽 눈, 혹은 좌우의 백동경에서 태어나는 데 반하여, 스사노오노미코토의 탄생방법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세 신이 한 조(組)로 되어 있는 것은 본래의 내용이 아니고, 스사노오는 후세에 첨가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것은 아마테라스를 主神으로 하는 타가마가하라 신화와 오오쿠니누시노카미(大國主神:스사노오의 자손으로 스사노오의 딸인 쿠시나다히메와 결혼하는 신)를 主神으로 하는 이즈모 신화를 연결짓기 위해서 덧붙인 후대의 개작으로, 그 원형은 일월(日月)신의 탄생설화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하여 각각 위임받은 명에 따라 통치하였으나, 그 중 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만은 위임받은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고 수염이 가슴까지 자랄 만큼 오랫동안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그 우는 모습이 나무가 말라죽어 푸른 산이 메마른 산이 될 정도로 울었고 강과 바다는 모두 말라버릴 만큼 울었다. 그 때문에 악신들이 내는 소리는 모기처럼 온통 들끓었고, 모든 일의 재앙이 일제히 생겨났다. 그리하여 이자나키 대신(大神)은 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에게 묻기를, “너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위임된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고 소리내어 울고 있느냐?”고 했다. 이에 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가 대답하기를, “저는 어머니의 나라인 네노카다스쿠니(根之堅州國)에 가고 싶어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자나키노오오미카미는 크게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는 이 나라에 살 필요가 없다.”하면서 곧 스사노오노미코토를 추방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이자나키는 아마테라스에게는 천상계인 타카마가하라를, 츠쿠요미에게는 밤의 세계인 요루노오스쿠니(夜之食国)를, 그리고 스사노오에게는 바다의 세계인 우나바라(海原)를 다스리도록 각각 통치영역을 위임한다. 그러나 스사노오는 위임받은 곳을 통치하지 않고 재앙을 일으키다가 이자나키에게 추방을 당한다.
《타카마가하라에서의 스사노오의 난동》
추방당한 스사노오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타카마가하라에 올라가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내기를 한다. 내기에서 이긴 스사노오는 기쁨에 겨워서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특기할 만한 것은 천상에서 스사노오가 저지른 죄는 거의 농경이나 제의와 관련된 죄이며, 일본의 고대문헌에 수록된 아마츠츠미(天つ罪: 하늘에 지은 죄)는 거의 스사노오가 타카마가하라에서 지은 죄에 해당된다. 이것은 고대일본에 있어서 농경과 관련된 제사의례가 얼마나 중요시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에 속한다.
그리하여 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가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에게 말하기를, “나의 마음은 결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낳은 자식은 모두 부드럽고 연약한 여자였습니다. 이 같은 결과를 가지고 말씀을 드린다면 분명히 우리들의 서약에서 내가 이긴 것입니다.”라고 말한 후 승리의 기쁨에 못 이겨,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가 경작하는 논두렁을 부수고, 그 논에 들어갈 물이 흐르는 개천도 메워 버렸다. 그리고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가 제물로 바쳐진 햇곡식을 먹는 신전에다 똥을 뿌렸다. 이와 같이 스사노오노미코토가 난폭하게 굴었지만,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는 이를 책망하지 않고 말하기를, “똥과 같이 보이는 그것은 술에 취해 내놓은 것일 게다. 내 동생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논두렁을 부수고, 물이 흐르는 개천을 메운 것은 토지가 모자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내 동생이 그러한 짓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를 선의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같은 스사노오노미코토의 난폭한 행동은 그치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가기만 했다.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가 이미하타야(忌服屋)라는 건물로 들어가 신에게 바칠 옷을 짜게 하고 있었을 때, 스사노오노미코토는 그 건물의 용마루에 구멍을 내어, 얼룩말의 가죽을 거꾸로 벗겨 이를 그 곳에 떨어뜨렸다. 그 때 베 짜는 여인(服織女)이 이를 보고 놀라는 바람에 베틀의 북에 음부가 찔려 그녀는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러자 아마테라스가 이를 보고 두려워하여, 아메노이와야토(天石屋戶)라는 석굴의 문을 열고 그 속에 들어가 숨는다. 그러자 천상계인 타가마가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지상계인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도 완전히 암흑의 세계가 된다. 이로 말미암아 항상 밤만 계속되어 많은 악신들의 내는 소리는 파리가 들끓듯이 가득 차고, 갖가지 재앙 또한 일제히 일어난다.
이에 당황한 신들은 의논 끝에 아마테라스가 숨어있는 거대한 굴 앞에서 야오요로즈노카미(八百万神: 무수히 많은 신)들이 모인 가운데, 성스러운 비추기 나무를 세우고 수 백 개의 구슬로 장식한 다음 가운데 가지에 야타노카가미(八尺鏡)라는 대형거울을 건다. 그리고는 여신인 아메노우즈노히메(天宇受賣)가 유방과 성기를 드러낸 채 춤을 추자, 그 모습을 본 신들이 한꺼번에 웃어댄다. 아마테라스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아메노이와야토의 문을 조금 열고서는 안에서 말하기를,
“내가 숨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늘(高天原)은 당연히 어둡고, 또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도 완전히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메노우즈메(天宇受賣)는 어찌된 일인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놀고 또 여러 신들은 모두 웃고 있는 것일까?”
라고 한다. 이 때 동굴 옆에 숨어있던 괴력의 신인 아메노타지카라오노카미(天手力男神)가 아마테라스를 동굴 밖으로 끌어내자, 신들은 아마테라스가 다시 숨지 못하도록 동굴 앞에 구슬을 둘러서 금역(禁域)으로 만든다.
아마테라스(天照)는 하늘에서 밝게 빛난다는 의미이고 오오미카미(大御神)는 위대하고 신성한 신이라는 뜻이므로, 이 신의 이름은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위대하고 신성한 신이라는 의미이다. 이 신이 태양신인 것은 여러 문헌에서 일신(日神)으로 표기되고 있으며, 또 이 신이 석실 안으로 숨자, 천상뿐만 아니라 지상도 모두 암흑의 세계로 되었다는 전승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래는 태양신이 아니라 태양신을 받드는 신처(神妻)가 나중에 태양신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또한 아마테라스는 천황가의 시조인 황조신(皇祖神)으로서 타카무스히노카미(또는 타카키노카미)와 더불어 타카마가하라의 사령신(司令神)으로서 일본신화 체계에 있어서 최고의 정점에 있는 신이다.
아메노이와야도 신화는 그리스의 데메테르 신화와 많은 점에서 일치를 보인다고 일본의 신화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으나, 오히려 한국신화와의 유사성을 먼저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데메테르 신화의 경우 에레우시스산의 암굴에 제사지내지고 있는 여신 테메테르가 왕자에게 보리의 종자를 준 것처럼, 아마테라스도 천손의 강림에 즈음해서 벼이삭(稲穂)을 주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 수도 동쪽의 수변(水邊) 동굴에서 제사지내지고 있는 주몽의 모친 유화부인도 주몽의 건국에 즈음하여 오곡의 종자(보리)를 아들에게 준다. 게다가 주몽신화의 경우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의 강림 모티브와 수신의 딸 유화와의 성혼(聖婚), 그리고 천신인 아들에게 곡물 종자를 주는 화소 등을 보면, 알타이계통의 산상강림과 데메테르 신화로 이어지는 곡물 수여의 요소는 고구려신화에서 이미 결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신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고구려의 주몽 신화라고 볼 수 있다.
《스사노오의 추방과 곡물신의 죽음》
아마테라스가 밖으로 나오자 타가마가하라와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가 모두 저절로 밝아진다. 그러자 신들은 서로 의논하여 스사노오에게 많은 속죄의 물건을 내게 하고, 또 수염과 손발톱을 모두 잘라 죄를 씻게 한 후 추방한다. 고대인들은 어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악령이 깃들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선 그 악령을 내쫓은 다음, 머리카락 등을 자르거나 지니고 있는 물건 등을 내놓는 것으로 그 죄를 대신했는데, 이 신화에서도 그와 같은 발상을 엿 볼 수 있다.
천상에서 추방당한 스사노오는 지상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오오케츠히메노카미(大氣都比賣神)에게 먹을 음식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스사노오노미코토가 음식을 오오케츠히메노카미(大気都比売神)에게 달라고 했다. 그러자 오오케츠히메는 코와 입, 그리고 엉덩이에서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끄집어내어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어 바칠 때, 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가 그 모습을 엿보고 음식을 더럽힌 후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즉시 그 오오케츠히메노카미를 죽이고 말았다. 그런데 살해당한 신의 몸에서 생겨난 물건은 머리에서 누에가 생겼고, 두 눈에서는 볍씨가 생겼으며, 두 귀에서는 조가 생겼고, 코에서는 팥이 생겨났으며, 음부에서는 보리가 생겨났고, 엉덩이에서는 콩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카미무스히노미오야노미코토(神産巣日御祖命)가 이것들을 모아서 각기 그것들의 씨앗으로 했다.
이처럼 살해당한 여신의 몸에서 곡물의 종자가 생겼다는 신화는 인도네시아의 하이누엘레형 신화를 비롯하여 세계의 여러 문화권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신화이다.
일본각지에 몸통이 따로따로 절단된 채 묻혀 있는 여성의 모습을 한 토우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구근작물을 절단해서 땅에 묻는 농경법을 상징화한 신화로 보이며, 스사오노에 의해 살해당한 곡령신에 관한 신화도 이와 같은 사유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살해당하는 곡령신의 몸에서 곡물의 종자가 나온다는 신화는 일반적으로 많이 있지만, 살아 있는 여신의 코와 입, 그리고 엉덩이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꺼냈다고 하는 것은 일본신화에서 독특하게 보이는 발상이다.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신체의 각 부위와 곡물의 종자 이름이 고대 한국어의 발음에 대응된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서 이 전승에 관계한 사람이나 혹은 기록한 사람이 한반도 계통의 도래인일 가능성이 높다.
4. 이즈모(出雲)신화
『古事記』신화의 중심무대는 천상계인 타카마가하라에서 지상의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의 이즈모로 바뀐다. 이즈모 신화는 지상에 내려온 스사노오와 그의 자손인 오오나무지의 국가건설에 관한 신화이다. 하지만 이즈모 지방에는 타카마가하라신화와 관련 없이 독자적인 신화전승이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이즈모 지방의 국토개척신화, 강림신화, 타계에서의 성년식 내지 샤만의 입문식과 관련된 통과의례, 곡령신의 해상내림신화, 농경 및 온천의 기원에 관한 전승, 국토 헌상 의례 등의 다양한 신화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야마타노오로치 퇴치신화》
스사노오의 성격은 매우 복잡해서 천상에서는 문화의 파계자로 서술되어 있는 한편, 지상인 이즈모에서의 스사노오는 지상에 농경 및 문화를 가져다 주는 문화신이자 괴물을 퇴치하는 영웅신이다.
타카마가하라에서 쫓겨난 스사노오는 이즈모의 히노가와(肥河)에 이르게 된다. 히노가와 지역에는 여덟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뱀인 야마타노오로치(八俣大蛇)가 있어서 매년 처녀를 한 사람씩 잡아먹는다. 国神인 아시나즈치(足名椎)에게는 여덟 명의 딸이 있었는데, 야마타노오로치에게 매년 한 명 씩 잡아먹히고 이제 마지막으로 쿠시나다히메(櫛名田比売)의 차례가 된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스사노오는 쿠시나다히메를 아내로 삼기로 하고 야마타노오로치를 처치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가 즉시 신성한 참빗으로 그 딸을 변신시켜 미즈라(美豆良)에 꽂고, 아시나즈치(足名椎)와 테나즈치(手名椎)의 두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아주 독한 술을 빚고, 울타리를 만들어 친 다음, 그 울타리에 여덟 개의 입구를 만들고, 그 입구마다 여덟 개의 선반을 만든 후 그 선반마다 술통을 놓고, 그 술통마다 그 독한 술을 가득 채워 놓고 기다려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아시나즈치와 테나즈치 두 신은 스사노오노미코토가 말한 그대로 준비하고 기다렸을 때, 그 야마타노오로치(八俣大蛇)라는 뱀이 정말 나타나 곧 술통에 자신의 머리를 쳐 넣고 그 술을 마셨다. 그리하여 술에 취해 그만 엎드려 잠이 들어 버렸다. 하야스사노오노미코토는 차고 있던 토츠카츠루기(十拳釰)라는 칼을 뽑아서 그 뱀을 갈기갈기 잘랐기 때문에 히노가와(肥河)라는 강물은 핏빛으로 변하여 흘러갔다. 그런데 그 뱀의 중간 부분의 꼬리를 자를 때 칼날이 상했다. 그리하여 이를 이상히 여겨 칼의 끝으로 갈라 보니, 그 곳에는 매우 훌륭한 큰칼이 있었다.
스사노오는 뱀이 몸통에서 쿠사나기(草那芸)라는 칼을 끄집어내어 특이한 물건으로 생각하여 아마테라스에게 이와 같은 사정을 아뢴 다음 그 칼을 바친다. 바로 이 칼이 천황가의 삼종(三種)의 신기(神器)에 속하는 보물 중의 하나이다.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한 스사노오는 스가(須賀)라는 곳에 궁궐을 짓고 많은 자손을 둔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특히 스사노오는 한반도와도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 일서(一書) 제4에는 이 신이 천상에서 아들인 이타케루노카미(十猛神)를 데리고 신라의 소시모리(曾尸茂利)라는 곳으로 내려와, 그 곳에서 배로 일본의 키이(紀伊) 지방으로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一書 第五에는 쿠마나리노타케(態成峯)라는 곳에서 네노쿠니(根国)로 건너갔다는 전승도 있다. 그리고 스사노오에게는 카라노카미(韓神)와 소호리노카미(曾富利神:曾富利는 한국어의 서울을 말함)라는 자손들도 있다고 되어 있다. 실제 이 신들은 한반도에서 이주한 씨족인 야마시로(山城) 지방의 하타(奏)氏들에 의해 모셔졌던 것이다. 이처럼 이 신은 한국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야마타노오로치 신화는 중국의 양자강 하류의 전승, 베트남 북부의 뮤온족, 또는 캄보디아나 보루네오 신화 등과 대단히 유사하다. 예를 들면, 뮤온족의 신화에는 영웅, 뱀, 신검(神剣), 희생양인 왕녀의 구제(救済), 영웅과 왕녀의 결혼 등의 모티브가 전부 일본의 야마타노오로치 신화에 대응된다. 문화사적으로 보면 신화 속에 신검이 종종 등장하는 것은 금속문화와 관계가 깊다.
《오오나무지(大穴牟遅)의 네노카타스노쿠니(根之堅洲国) 방문신화》
스사노오의 후손인 오오나무지에게는 형들이 많았는데, 이나바(稲羽)의 야카미히메(八上比売)에게 청혼하기 위해 길을 떠나면서 막내인 오오나무지에게는 짐보따리를 지고 가게 한다. 도중에 형들의 거짓말에 속아 곤경에 처한 토끼를 도와주자, 토끼는 오오나무지가 그녀와 혼인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토끼의 예언대로 야카미히메가 오오나무지에게 시집가겠다고 하자, 화가 난 형들은 오오나무지를 죽인다. 어머니와 카미무스비의 도움으로 살아난 오오나무지는 계속되는 야소카미(八十神)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오오야비코(大屋毗古)신의 도움으로 스사노오가 있는 네노카다스노쿠니(根堅州国)로 도피한다.
거기서 오오나무지는 스사노오의 딸인 스세리비메(須勢理毗売)와 몰래 정을 통한다. 이를 눈치챈 스사노오가 오오나무지를 죽이려 들지만, 오오나무지는 매번 스세리비메의 도움으로 죽일 고비를 넘기고 스사노오가 잠든 틈에 주술적인 보물을 훔쳐서 스세리비메를 업고 도망친다. 대신(大神)은 요모츠히라사카(黄泉比良坂)라는 언덕까지 쫓아와 멀리 도망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큰 소리로 오오나무지에게,
“네가 갖고 있는 이쿠타치(生大刀)라는 칼과 이쿠유미야(生弓矢)라는 활로써 너의 이복 형제들을 언덕 아래로 쫓고 또 강으로 쫓아내어 너 자신이 오오쿠니누시노카미(大國主神)가 되고, 또 우츠시쿠니타마노카미(宇都志國玉神)가 되어 나의 딸 스세리비메(須世理毗賣)를 적실로 맞아들이고 우카(宇迦)라는 산의 기슭에다 아주 굵고 커다란 기둥을 세우고 천상계를 향해 치기(千木)를 높이 세우고 살아라! 이 녀석아!”
라고 축복을 해준다.
네노카타스노쿠니에서 오오나무지가 겪는 시련은 세계의 여러 신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성년식 내지는 샤만의 입문식에서 볼 수 있는 통과의례이다. 이 때 받는 시련 및 육체적 고통은 일종의 제의적인 죽음을 의미하고 이를 통하여 성년으로 재생해야만 공통체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게 된다.
실제로 네노카타스노쿠니에서 이러한 통과의례를 거친 오오나무지는 아시하라노나카츠노쿠니의 통치자라는 의미의 오오쿠니누시노카미(大国主神)란 이름을 스사노오에게서 부여받게 된다.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로 돌아온 오오나무지는 이쿠타치(生大刀)라는 칼과 이쿠유미야(生弓矢)라는 활로 형들을 몰아내고 스사노오가 축복해준 대로 오오쿠니누시노카미(大国主神)가 된다.
古事記 신화에서는 네노카타스노쿠니가 요미노쿠니와 겹쳐져서 지하세계의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国男)에 의하면 네노쿠니(根国)의 네(根)라고 하는 말은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곳은 조령(祖霊) 또는 사령(死霊)이 가는 곳일 뿐만 아니라 지상에 생명과 부를 가져다 주는 원천이며, 원래는 지하가 아니라 바다 저편에 있다고 신앙되어 온 일본인의 원향(原郷)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계통의 원향에는 오키나와의 니라이카나이, 니루야 등으로 불리는 해상의 낙토(樂土) 신앙이 있다. 이러한 해상낙토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신이 찾아와 사람들에게 풍요와 행복을 주며 또 젊은이들에게는 성인식을 베푸는 것으로 믿었는데, 오늘날에도 오키나와 지방에는 여전히 그와 같은 신앙이 살아있다. 스사노오의 자손인 오오나무지가 네노카타스노쿠니를 방문하여 성년계(成年戒)적인 시련을 받은 후에, 아시하라노나카츠노쿠니의 왕권을 수립하고 오오쿠니누시노카미(大国主神)가 되는 것도 이와 동일한 성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오쿠니누시(大國神)의 국토창성》
한편 오오쿠니누시(大國神)의 신이 이즈모의 미호(御大)라는 곶(岬)에 있었을 때, 카카미(羅摩)의 배를 타고, 나방(蛾)의 껍질을 송두리째 벗겨 이것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다가오는 신이 있었다. 그리하여 오오쿠니누시는 그 이름을 물어 보았지만 모두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자 두꺼비가 말하기를, 이 문제는 쿠에비코(久延毗古)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쿠에비코를 불러 물어보자 카미무스히의 아들인 스쿠나비코나(少名毗古那)신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오오쿠니누시神이 어버이 신인 카미무스히에게 물어본즉 어버이 신이 대답하기를, “그 신은 정말 나의 자식이다. 많은 자식들 중에서 나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아이이다. 그러니 너는 아시하라노시코오노미코토(葦原色許男命)와 형제가 되어 그 나라를 만드는데 힘쓰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후 오오나무지(大穴牟遅)와 스쿠나비코나(少名毗古那)는 서로 협력하여 이 나라(葦原中国)를 만드는데 힘을 썼다. 얼마 후 스쿠나비코나神은 토코요노쿠니(常世国)로 건너가고 말았다.
오오나무지와 스쿠나비코나의 국토건설은 스쿠나비코나가 도중에 토코요노쿠니(常世国)에 건너가는 바람에 중단된다. 그러자 오오쿠니누시가 수심에 잠겨있는데, 바다를 비추면서 다가온 신이 말하기를 자신의 혼(魂)을 잘 모셔 주면 함께 이 나라를 만들 것이지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오오쿠니누시가 이 신을 야마토(倭)의 푸른 담장이 쳐져 있는 동쪽 산 위에 모신다. 국토건설을 마친 오오나무지는 오오쿠니누시가 되고 여러 지방의 여성들과 결혼해서 많은 자손을 낳고 번성한다.
《오오쿠니누시의 국토헌상 신화》
그런데 타카마가하라의 신들은 스사노오의 후손인 오오쿠니누시가 아니라, 아마테라스의 직계자손이 아시하라노나카츠노쿠니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러 번 지상에 사자를 파견하나 실패하고 마지막에 타케미카즈치노오(建御雷之男)신을 보낸다.
이즈모의 이자사(伊耶佐)의 오바마(小浜)라는 곳에 내려온 타케미카즈치노오와 아메노토리후네(天鳥神)는, 토츠카츠루기(十掬釰)라는 큰칼을 뽑아 그것을 거꾸로 파도 위에 꽂고서 그 칼의 끝에 앉아 오오쿠니누시에게 묻기를,
“우리들은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와 타카키(高木)神의 명을 받고 이 곳에 왔다. 네가 영유하고 있는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는 나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의 자식이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너의 의견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오오쿠니누시神이 대답하기를, “저는 대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나의 자식인 야에코토시로누시(八重言代主)神이 이에 대해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신은 새와 고기를 잡으러 미호 곶(御大岬)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아메노토리후네(天鳥船)神을 보내어 야에코토시로누시神을 불러 물어본즉 그의 아버지인 오오쿠니누시神에게 말하기를, “알겠습니다. 이 나라는 천신(天神)의 자손에게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야에코토시로누시에게서 국토를 헌상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타케미카즈치는 오오쿠니누시의 또 다른 자식인 타케미나카타와 힘 겨루기를 해서 이기고 국토헌상의 약속을 받아낸다. 이런 사실을 보고 받은 오오쿠니누시는 국토를 헌상하는 대신에 천손의 궁전과 같은 큰 궁전을 지어준다는 조건 하에 국토를 헌상하고 은거하기로 한다.
이 신화는 처음에는 이즈모의 해안을 무대로 한 이즈모 지방의 소국가 끼리의 국토 헌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古事記 신화에 편입되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지방에까지 그 무대가 확장되어 古事記 신화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양으로 확대되게 된다. 이것은 일본열도에 존재하던 소수의 부족국가들이 야마토 조정에 의해 복속되어 가는 과정을 일괄적으로 이즈모 신화에 통합해서 재구성한 결과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즈모의 신들은 정복되어야 될 대상으로 바뀌고 타가마가하라를 중심으로 한 종속관계로 신화의 내용이 개작된다. 하지만 <이즈모노쿠니 후도키(出雲国風土記)>에는, 국토가 좁아서 신라 땅의 일부를 포함해서 일본내의 다른 지방에서 국토를 끌어다 붙이는 국토개척 신화와 같은 독자적인 신화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즈모에서 활동하는 스사노오나 오오나무지 같은 신들도 수종을 가져다 국토를 푸르게 가꾸는 개척신, 곡물의 종자를 가져다 뿌리는 농경신, 용사신(龍蛇神), 온천을 개발하고 병을 치료하는 샤만 등의 소박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5. 휴우가(日向)신화
휴우가는 타카마가하라,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 요미노쿠니를 연결하는 접점에 위치하고 있다. 휴우가는 태양을 향해 있는 곳으로 해가 바로 비치는 ‘명(明)’의 나라를 상징하며, 해가 지는 ‘암(暗)’의 나라인 이즈모와 대립되는 세계로 인식되어 왔다. 즉 휴우가와 이즈모는 각각 양과 음의 대립되는 세계이지만, 동시에 그 어느 쪽도 야마토 측에서 보면 주변성 또는 타계성을 띠는 지역이다. 휴우가 신화는 천손 니니기노미코토, 그의 자손인 호데리노미코토,우가야후키아에즈노미코토까지의 3대에 걸친 신화이다. 우가야후키아에즈노미코토까지가 『古事記』상권(上巻) 신대(神代)에 해당되며, 그의 아들인 진무(神武)천황 때부터 중권(中巻) 역사시대로 넘어간다.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
그리하여 아마테라스와 타카키신이 아메노오시오미미노미코토(天忍穂耳命)에게 내려가서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라고 명한다. 그러자 오시오미미노미코토는 자신을 대신해서 아들인 아메니키시쿠니니키시아마츠히코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天迩岐志国迩岐志天津日高日子番能迩迩芸命)를 보내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아메노코야네노미코토(天兒屋命), 후토다마노미코토(布刀玉命), 아메노우즈메노미코토(天宇受賣命),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伊斯許理度賣命), 타마노야노미코토(玉祖命), 모두 합하여 다섯으로 나누어진 부족의 수장들을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때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를 석실에서 나오게 하였을 때 사용했던 야사카노마가타마(八尺句璁)라는 구슬과 거울(鏡)과 쿠사나기노츠루기(草那藝釰)라는 칼, 그리고 도코요(常世)의 오모히카네(思金)神, 타지카라오(手力男)神, 아메노이와토와케(天石門別)神도 함께 동행하게 하고는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가 니니기노미코토(邇邇藝命)에게 말하기를, “이 거울은 오로지 나의 혼으로 여기고, 내 자신을 모시는 것처럼 우러러 모시도록 하여라. 그리고 오모히카네의 신은 나의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서 하도록 하여라.”라고 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니니기노미코토는 3종의 신기를 가지고 다섯 부족을 거느리고 츠쿠시의 휴우가에 있는 타카치오의 쿠지후루 봉우리로 강림한다. 여기서 함께 강림하는 다섯 부족의 ‘5’라는 숫자는 퉁그스 등의 아시아의 유목민족의 군대조직에서 볼 수 있는 숫자이며, 고구려의 5부제도 이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러한 퉁그스 계통의 신화가 몽고지방에서 한반도를 거쳐서 일본 황실의 강림신화 화소로서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천신은 아마츠히고호노니니기노미코토(天津日子番能邇邇藝命)에게 명을 내려, 니니기노미 코토는 하늘의 바위자리(天之石位)를 떠나 여러 겹으로 쳐진 하늘의 구름을 가르고 위세 있게 길을 헤치고 헤치어, 천부교로부터 우키시마(浮島)섬에 위엄 있게 내려서서, 츠쿠시(竺紫)의 휴우가(日向) 타카치호(高千穗) 쿠지후루타케(久士布流多氣)로 내려왔다.
이 때 니니기노미코토가 “이 곳은 한국(韓国)을 바라보고 있고, 카사사(笠沙)의 곶과도 바로 통하고 있어 아침 해가 바로 비치는 나라, 저녁 해가 비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여기는 정말 좋은 곳이다.”라고 하며, 그 곳의 땅 밑 반석에 두터운 기둥을 세워서 궁궐을 짓고 하늘을 향해 치기를 높이 올리고 그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여기서 천손이 강림한 쿠지후루타게는 가야국의 수로왕이 강림한 귀지봉에 해당되는데, 쿠지후루는 귀지의 발음과 유사하며 일본어 타케(岳)는 한국어의 봉(우리)에 대응한다. 그리고 수로왕이 강림할 때 황금알 여섯 개가 붉은 천에 쌓여서 강림한 것(<삼국유사>의 가락국기)처럼, 니니기노미코토도 마토코오우후스마(真床覆衾: 어린애를 싸는 강보의 일종)에 쌓여서 강림했다(<日本書紀>)고 한다. 이러한 의식은 지금까지 역대천황의 즉위의례로서 거행되고 있다.
《천황가의 짧은 수명에 대한 기원신화》
강림한 니니기노미코토는 그곳에서 산신인 오오야마츠미(大山津見)신의 호의로 두 딸을 맞이하게 된다. 니니기노미코토는 언니 이와나가히메(石長比売)는 못생겼기 때문에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 동생인 코노하나노사쿠야비메(木花之佐久夜毗売)와 하룻밤 같이 정을 나누었다. 이 사실을 안 오오야마츠미는 이와나가히메를 돌려보낸 것에 대해 치욕감을 느끼고,
“나의 두 딸을 모두 천손에게 바친 연유는 이와나가히메를 거느리시면, 천신의 자손의 목숨은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언제나 바위처럼 항상 굳건하게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또 코노하나노사쿠야히메를 거느리시면, 나무의 꽃이 활짝 피어나듯이 번영을 이루시기를 기원하며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이와나가히메를 돌려보내고, 코노하나노사쿠야히메만을 머물게 하셨기 때문에 천신의 자손의 수명은 나무의 꽃처럼 그다지 길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리하여 니니기노미코토 이하 그의 자손인 천황가의 수명은 길지 않게 된다. 인간의 수명이 짧아진 유래에 대한 신화, 즉 죽음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는 다른 민족의 신화에도 많이 볼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이자나키와 이자나미의 부부절연의 대화 가운데서 나온 생사기원의 신화가 아시하라노나카츠노쿠니의 민초들의 생사기원에 관한 신화인데 반하여,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천황가의 수명에 관한 신화로 되어 있다.
한편 코노하나사쿠야비메는 니니기노미코토와의 하룻밤의 동침으로 임신을 하게 된다.
코노하나사쿠야비메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저는 임신을 하였습니다. 지금 낳을 때가 되었습니다. 이 천신의 자식을 남몰래 낳을 것이 아니기에 이와 같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니니기노미코토가 “사쿠야비메여, 단 하룻밤의 동침으로 아이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필시 그 아이는 나의 자식이 아니다. 국신(國神)의 아들일 것이다.” 그러자 코노하나사쿠야비메가 대답하기를,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가 만약 국신의 자식이라면 낳을 때 무사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그 아이가 천신(天神)의 자식이라면 무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곧 문이 없는 넓은 산실을 짓고 그 속으로 들어가 흙으로 모두 봉하고는 아이를 낳을 때 그 산실에다 불을 붙이고 낳았다.
이 불이 활활 타오를 때 낳은 자식의 이름이 호데리노미코토(火照命)인데, 이 사람이 곧 하야토(隼人)의 아타노키미(阿多君)의 시조이다. 다음에 낳은 자식의 이름은 호스세리노미코토(火須勢理命)이고, 그 다음에 낳은 자식이 호오리노미코토(火遠理命)이다.
《호오리노미코토의 해신궁(海神宮) 방문》
한편 형인 호데리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생활하는 우미사치비코(海佐知毗古)이고, 동생인 호오리는 산에서 짐승을 잡아 생활하는 야마사치비코(山佐知毗古)이다. 어느 날 호오리가 형인 호데리에게 서로의 도구를 바꾸자고 제안하자 형은 마지못해 승낙한다. 호오리는 낚시도구를 가지고 물고기를 잡아 보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형의 낚시 바늘을 바다에서 잃어버린다. 호오리가 형이 자신의 낚시 바늘을 돌려달라고 하자, 어찌할 바를 몰라서 바닷가에서 슬피 울고 있을 때, 시오츠치(塩椎)신의 도움으로 해신 와타츠미(綿津見)신의 궁궐에 도착한다.
거기서 호오리는 해신의 딸인 토요타마비메(豊玉毗売)와 결혼하여 3년 동안 지낸다. 호오리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된 해신은 잃어버린 낚시바늘을 찾아준다. 그리고 시오미츠타마(塩盈珠)와 시오후루타마(塩乾珠)라는 구슬과, 형을 저주하는 주문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면서 그를 지상으로 돌려보낸다.
와타츠미 대신이 일러 말하기를, “이 바늘을 형에게 돌려줄 때, ‘이 바늘은 마음을 어둡게 하는 바늘, 초조하게 만드는 바늘, 가난하게 하는 바늘, 바보같이 만드는 바늘.’이라고 하면서 손을 뒤로 돌려 건네주시오. 그리고 그 형이 높은 곳에 논을 만들면, 당신은 낮은 곳에다 논을 만드시오. 그리고 만약 형이 낮은 곳에다 논을 만들면, 당신은 높은 곳에다 논을 만드시오. 그렇게 한다면 나는 물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3년 동안 필히 그 형을 가난하게 만들 것이오. 만약 그러한 일에 대해 원한을 품고 공격해 오면 이 시오미츠타마(塩盈珠)라는 구슬을 내어 바닷물에 빠뜨리고, 만약 그 형이 괴로워하여 용서를 빌면 이 시오후루타마(塩乾珠)를 내어 목숨을 구해 주시오. 이와 같이 형을 곤궁에 빠뜨리면 됩니다.”
이리하여 지상의 아시하라노나카츠노쿠니에 귀환한 호오리는 해신이 일러준 대로 구슬을 사용하면서 주문을 외어 형을 물리치고 지상의 통치권을 확립한다.
이처럼 주인공이 잃어버린 낚시바늘을 찾아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물고기의 도움으로 지상으로 돌아와서는 도구를 빌려준 자에게 복수한다는 모티브, 즉잃어버린 낚시바늘(釣針)에 관한 신화는 남태평양제도나 북아시아, 북서아메리카 등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는 유형이다.
《우가야후키아에즈의 탄생》
그러던 어느 날 토요타마비메가 남편을 찾아와서 천신의 자손을 바다(海原)에서 낳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그 남편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기를 낳을 때가 되면, 자기 나라의 모습으로 아이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지금 원래의 모습으로 아이를 낳고자 합니다. 원하옵건대, 저의 모습을 보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호오리는 이자나기가 그랬던 것처럼 보지 말라는 금기를 깨고 토요타마비메의 해산 장면을 훔쳐본다.
이에 호오리노미코토(火遠理命)는 그 말을 이상히 여겨, 출산하는 모습을 몰래 들여다본즉, 토요타마비메가 아주 큰 상어가 되어 엉금엉금 기며 몸을 틀고 있었다. 이를 보고 깜짝 놀라 두려워하여 물러나 도망쳤다. 그리하여 토요타마비메노미코토는 자기의 남편인 호오리노미코토가 들여다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여 곧 아이를 낳고 말하기를, “저는 늘 바닷길을 통하여 이 나라를 다니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은 저로서는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하며 곧 바다로 통하는 길을 막고, 자기의 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호오리가 금기를 깨고 산실을 엿본 결과 토요타마비메는 해궁으로 돌아가게 되고 이후 바다로 통하는 길은 막히게 된다. 이것은 보지 말라는 금기를 깨고 이자나키가 빈소를 엿본 결과, 이자나미는 지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요미노쿠니와의 통로가 단절되는 화소에 대응된다.
이때 태어난 것이 우카야후키아에즈노미코토(天津日高日子波限建鵜葺草葺不合命)인데, 우카야후키아에즈는 그의 이모인 타마요리비메노미코토(玉依日子毗売命)와 혼인하여 이츠세노미코토(五瀬命), 이나히노미코토(稲氷命), 미케누노미코토(御毛沼命), 와카미케누노미코토(若御毛沼命)라는 신들을 낳는다. 막내인 와카미케누노미코토의 다른 이름이 칸야마토이와레비코노미코토(神倭伊波礼毗古命)이며, 그가 바로 일본의 초대천황인 진무(神武)이다.
이와 같은 유형의 신화는 이른바 ‘메르시나’형 신화의 화소에 속한다. 메르시아는 알바니아(발칸반도의 서남부에 있는 나라)왕 에리나스와 요정 플렛시나 사이에서 태어난 미인이다. 플렛시나가 출산 때 남편에게 산실을 엿보지 말라고 금했으나, 세 딸이 동시에 태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에리나스는 기쁨에 겨워 금기를 깨고 산실에 들어간다. 그러자 플렛시나는 노하여 세 딸을 데리고 사라진다.
이와 같은 터부의 침범에 대한 화소는 대단히 오래된 모티브이며, 주로 산실, 목욕, 수유(授乳) 등과 같은 여성의 성이나 나체에 관한 금기가 많다. 이와 유사한 화소는 중국신화를 수록한 『수신기(捜神記)』에도 있는데, 한(漢)의 영제(靈帝) 때 강하(江夏)의 황(黄)이라는 사람의 모친이 목욕을 하다 바다거북으로 변하여 사라진다. 또 위(魏)의 황초연간(黄初年間)에 청하(清河)의 송사종(宋士宗)의 모친은 목욕하다 가족이 엿보자 자라로 변해서 사라진다. 이와 같이 ‘메르시나’형 화소는 여성이 대체적으로 뱀, 상어, 거북 등 수계의 동물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특징 중에 하나다.
6. 야마토(大和)의 건국신화
천황가의 시조전승을 검토하다 보면, 천황가의 시조가 바다 건너 저편에서 내림한다는 해상내림과 하늘에서 강림한다는 산상강림의 두 가지 유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은 천황가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가 하는 기원을 밝히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천손강림 신화가 타카마가하라의 천상타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반하여, 해상내림 신화는 토코요노쿠니나 네노쿠니와 같은 해상타계관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두 유형 중에서 바다 저편에서 찾아오는 곡동신(穀童神)의 해상내림이 시기적으로 더 오래된 유형에 속하며 천황가 시조전승의 원형에 해당된다. 대표적인 산상강림 신화에 해당되는 천손 니니기노미코토의 강림 신화의 경우도, 그 이전(異伝)을 살펴보면 초기형태에는 해상내림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야마토의 건국신화에 해당되는 진무천황의 동정전승 역시 곡령신의 해상내림 유형에 해당되며, 신화시대의 호오리의 해신궁(海神宮) 방문신화이나 니니기노미코토의 천손강림 신화와 구조적인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진무천황의 동정전승》
초대천황인 진무(神武)의 동정전승(東征伝承)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진무 형제의 히무카(日向) 출발에서 나니와(難波:지금의 오사카) 도착까지의 전반부와 나니와에서 우회해서 야마토로 들어가는 진무의 야마토 평정까지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전반부와 후반부는 그 성격이 서로 전혀 다르며, 전반부의 히무카에서 나니와까지의 기술은 몇 가지 삽화만 제외한다면 단순히 그 지명을 나열하는 형식적인 동정의 코스를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무와 그의 형인 이츠세는 타카치호궁에서 어느 곳이면 천하를 편안히 다스릴 수 있을까 의논한 후, 히무카를 출발하여 츠쿠시(筑紫)에 도착해서 토요노쿠니(豊国)의 우사(宇沙)라는 곳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다시 그 곳에서 츠쿠시의 오카다(岡田)궁으로 옮겨 1년을 보낸 뒤, 그 곳을 출발하여 아키노쿠니(阿岐国)의 타케리(多祁理)궁으로 옮겨 8년을 보낸다. 그 후 다시 하야스미나토(速吸門)를 출발해서 나미하야노와타리(浪速渡)라는 곳을 거쳐서 사라카타츠(白吸肩)에 도착하여 머물게 된다. 이 때 토미노나가스네비코(登美能那賀須泥毘古)라는 자가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자 이들과 싸우다, 형 이츠세가 적이 쏜 화살에 맞아 그만 부상을 입고 만다. 그들은 남쪽에서 우회하여 치누마해(血沼海)를 거쳐 키노쿠니(紀国)의 오노미나토(男之水門)에 도착하는데, 이츠세는 그 곳에서 죽는다.
진무는 오노미나토에서 우회하여 쿠마노(態野)에 도착하는데, 큰곰이 나타나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이 때 타카쿠라지(高倉下)라는 자가 천신의 자손이 쓰러져 있는 곳에 나타나 칼 한 자루를 바친다. 천신의 자손이 그 칼을 받아들자마자 쿠마노의 거친 신들은 쓰러져 버리고 정신을 잃었던 군사들은 모두 깨어난다.
천신의 자손이 그 칼을 얻게 된 연유를 타카쿠라지에게 묻자,
“제가 꿈을 꾸었는데,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와 타카기노카미(高木神)라는 두 분의 신께서 타케미카즈치노카미(建御雷神)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葦原中国)는 매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구나. 나의 자손들이 평온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는 오로지 너만이 복종시켰던 나라이니라. 그러므로 너 타케미카즈치노카미가 내려가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타케미카즈치노카미가 대답하시기를, ‘제가 내려가지 않는 대신 나라를 평정할 때 사용했던 칼을 내려보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천손을 안내하라고 하늘에서 야타카라스(八咫烏)라는 큰 까마귀를 내려보낼 터이니 그 새가 안내하는 대로 뒤를 쫓아가도록 하라는 타카기神의 명령을 전한다. 이 야타카라스라는 세 발 달린 까마귀는 일본 쿠마노타이샤(熊野大社)의 사신이기도 하다.
까마귀가 태양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것은 일본에서는 후대의 일이나, 중국이나 고구려에서는 꽤 오래된 것이다. 고구려의 쌍영총, 무용총, 지신총, 각저총 등의 고분벽화를 비롯하여 관식금구(冠飾金具)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원 안에 다리가 세 개인 까마귀 도상(図像)이 있다. 다리가 세 개인 붉은 까마귀를 중국 한대(漢代)의 『회남자(淮南子)』에는 적오(赤烏) 또는 삼족오(三足烏)라 하였고, 한대의 와당(瓦当)에는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와 더불어 일월을 상징하고 있다. 다리가 셋인 까닭은 태양의 본질을 이루는 남성적 상징이 숫자 ‘3’이기 때문이다.
천황의 군대가 그러고 있는 동안에 니기하야히노미코토(迩芸速日命)가 찾아와 천황에게 아뢰기를, “천손께서 내려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저도 그 뒤를 쫓아 내려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천신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표식을 천황에게 바치고 복속하였다. 그리고 니기하야히노미코토는 토미비코(登美毘古)의 여동생인 토미야비메(登美夜毘売)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이 우마시마지노미코토(宇麻志麻遅命)이다. 우마시마지노미코토는 모노노베무라지(物部連), 호즈미노오이(穂積臣), 우네메노오미(婇臣)의 선조이다. 이상과 같이 천황은 거칠고 난폭한 신들을 평정하고 순화시켰으며 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우네비(畝火)의 카시하라궁(白檮宮)에 머물며 천하를 통치하였다.
그런데 8세기에 국사편찬에 관계한 사람들은 진무천황 즉위연대, 즉 건국연대를 중국의 참위(讖緯)사상에 준하여 辛酉年(기원전 660년)으로 정한다. 이는 중국보다는 새롭고 한반도의 제국보다는 오래되었다고 하는, 당시 일본인의 국제감각을 반영한 것이다.
7. 문학과 일본신화
텐무(天武)천황의 천황제 국가 이데올로기를 반영해서 윤색, 수정, 통합을 거쳐서 재구성된 일본신화는, 그때까지 존재하던 일본의 기층신화를 부정하면서 성립된 새로운 신화이다. 그 결과 개개의 신화소에 있어서는 신화본연의 문학적 요소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주제에 있어서는 세계초유의 강력한 정치성을 띠고 있는 일종의 정치신화이다.
한마디로 『古事記』는 결코 오래된 태고적 사실을 기록한 사서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사실, 아니 새롭게 실현되어야 할 사실을 기록한 사서라고 볼 수 있다.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엽에 걸쳐서 새로 성립된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당위성(Sollen)’을, 유규한 태고에 있어서의 ‘존재(Sein)’, 즉 신화로서 의고(擬古)적으로 기술하고자 한 것이다. 『古事記』는 이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는데, 에도(江戸)시대 대표적인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한다. 노리나가 이후 『古事記』는 ‘한나라 정서(카라고코로: 漢心)’를 배제한 ‘일본 정서(야마토고코로: 倭心)‘를 대변하는 오래된 국서로서, 그리고 일본정서를 대변하는 민족문학의 서로서 소중히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古事記』신화는 『日本書紀』신화보다도 훨씬 고도의 정치성을 띤 일본천황주의, 신국사상의 교전(教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작품이다.
신화의 본질에서 일탈해서 ‘있는 그대로의 역사’가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역사’를 신화화해 가는 방향으로 발전한 일본신화는, 문학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역사로서 간주될 수밖에 없는 자기모순을 스스로 노정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일본신화는 일본인의 심층심리에 각인되어 있다가 일본이 국가적 위기상황에 봉착할 때마다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 대표적인 시대가 메이지(明治) 시대이며, 그 촉매가 된 것은 러일전쟁이라는 사건이다.
평론가 타카야마 초규(高山樗牛: 1871~1902)가 활약하던 메이지 30년(1890) 전후는 국가적, 국민적 자각이 현저하게 고양된 시기였다. 그는 역사와 민족에 대해서 논하면서 신화나 신화적 세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의 역사나 민족에 대한 구체적 관심은 러일전쟁 무렵부터인데, 역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당연히 그 역사를 형성한 민족 내지 국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된다.
초규에 의하면 모든 민족의 특성은 그 민족의 ‘원적(原的)’상태에 명백히 드러나 있으며, 그것은 종교, 문학, 미술, 철학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일본민족의 특성과 문학미술」). 이와 같은 관심은 일본주의의 제창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 하나가 일본주의는 일본국민의 성정에 근거해서 황조(皇祖)건국의 정신을 발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적 도덕의 원리다라는 생각이다(「일본주의에 대한 세평을 개탄한다」). 다시 말해 ‘황조건국의 정신을 발휘하려고 하는 국가적 도덕의 원리가 일본주의’라고 하는 초규의 규정은, 메이지의 교육칙어로 상징되는 개국정신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또한 그는인생의 목적은 행복에 있고 국가지상주의는 이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다‘라는 논지의 평론(「국가지상주의에 관한 나의 견해」)을 발표한다. 이를 통하여 그의 역사, 민족, 국가에 대한 관심의 저변에 인생의 행복이라는 개인적 의식이 잠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개인적 의식이야말로 그의 신화적 세계인 것이다.
러일전쟁, 조선의 병합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시대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있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는, 초규의 개인주의의 파멸원인이 그의 사상 자체에 있다고 비판한다. 거기에는 인간의 위대성에 관한 맹신적 요소가 다량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와 청년의 관계에 대한 견해도 극히 국한적이기 때문이다(「시대폐색의 현상」).
당시는 기원전 660년의 진무천황의 개국신화를 ‘역사’로서 수용하도록 교육칙어에 명문화시켜 학교에서 가르치고, ‘대일본제국헌법’에도 성문화시켜서 국민에게 강요하는, 일종의 ‘시대폐색’의 상황이었다. 천황의 신화를 그 근저에서 부정하여 처형당하는 대역사건(1911년)이 발생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한편 일본신화와 국가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문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이러한 상황 하에서, 메이지를 대표하는 작가 모리 오가이(森鴎外)는 평론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소설의 주인공의 입을 빌려서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오가이의 「망상」이라는 작품의 주인공은 신이란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아라히토가미(現人神)인 천황의 절대성에 등을 돌리는 합리주의자이다. 그런데 「카노요우니(かのやうに)」이라는 작품에서는 오가이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천황제를 옹호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대로 내려오는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가하여 제국군인의 일원이 된 오가이와, 독일유학을 통해 모든 사물을 회의적인 눈으로 응시하도록 훈련된 지식인 오가이의 내적 자아(自我)분열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오가이는 아시아의 국가 중에서 일본만이 서양에 예속되지 않은 이유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하여 부심하고 있었다. 그는 그 해답을 일본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서구의 영향이 본격화되기 전에 일본인의 도덕을 규율해왔던 과거 일본의 정신 속에서 찾는다. 특히 그가 쓴 사전(史伝) 소설의 목적은 이미 지나가 버린 일본의 전통이지만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가능한 전통의 재현에 있었다. 이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못하고 사라져간 사람들의 생애를 ‘역사 그대로(歴史そのまま)’ 재현함으로서 그 근저에 깔려있는 일본 정신을 천착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천황의 신화가 아니라 일본인의 심층에 깔린 신화를 들여다보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후(1970년)에 일어난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할복자살은 미시마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일본문화 연구자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만년의 미시마는 평화국가로 변신한 일본 내에서 군사훈련을 옹호하고 천황제의 부활을 고취하는 발언 등으로 물의를 빚었으나, 실제 일본이 전쟁 중일 때는 오히려 냉담했었다. 그에게 천황이라는 존재는 단지 일본문화의 추상적인 본질에 지나지 않았으며, 개개의 천황에 대해서도 그다지 존경을 표하지 않았다. 천황숭배를 가장 명료히 한 「영령(英霊)의 소리」라는 작품에서조차, 만약 천황이 인간이라면 카미가제(神風) 특공대원의 죽음은 무의미하다고 하면서 천황의 신성(神聖) 포기를 탄핵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후작가들이 명치유신 이전의 문학과의 단절을 입에 담고 있을 때 미시마를 매료시킨 것은 중세문학이었다. 무로마치(室町)시대의 문학이나 역사에 대한 그의 강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 「중세」라는 작품이다. 결국 미시마가 사랑한 일본은 관념 속에 추상화된 일본이었으며, 그가 추구한 일본정신도 과거 일본의 이상이었다. 결국 그는 일본인의 심층에 각인된, 즉 신화화된 관념적인 일본과 일본 정신을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인의 심층심리에는 신화화된 ‘일본역사’내지 ‘일본정신’이라는 공동환상이 뿌리 깊게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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