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대 일본학연구소> 2005/03/17
일본 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
일본연구소 책임연구원 김후련
(1)일본신화
덴무(天武)천황의 천황제 국가 이데올로기를 반영해서 윤색, 수정, 통합을 거쳐서 재구성된 일본신화는, 그때까지 존재하던 일본의 기층신화를 부정하면서 성립된 새로운 신화이다. 그 결과 개개의 신화소에 있어서는 신화본연의 문학적 요소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주제에 있어서는 세계초유의 강력한 정치성을 띠고 있는 일종의 정치신화이다.
한마디로 <古事記>는 결코 오래된 태고적 사실을 기록한 사서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사실, 아니 새롭게 실현되어야 할 사실을 기록한 사서라고 볼 수 있다.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엽에 걸쳐서 새로 성립된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ꡐ당위성(Sollen)ꡑ을, 유규한 태고에 있어서의 ꡐ존재(Sein)ꡑ, 즉 신화로서 의고(擬古)적으로 기술하고자 한 것이다.
<古事記>는 이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는데, 에도(江戸)시대 대표적인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한다. 노리나가 이후 <古事記>는 ꡐ한나라 정서(카라고코로: 漢心)ꡑ를 배제한 ꡐ일본 정서(야마토고코로: 倭心)ꡑ를 대변하는 오래된 국서로서, 그리고 일본정서를 대변하는 민족문학의 서로서 소중히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古事記>신화는 <日本書紀> 신화보다도 훨씬 고도의 정치성을 띤 일본천황주의, 신국사상의 교전(教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작품이다. 신화의 본질에서 일탈해서 ꡐ있는 그대로의 역사ꡑ가 아니라 ꡐ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역사ꡑ를 신화화해 가는 방향으로 발전한 일본신화는 문학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역사로서 간주될 수밖에 없는 자기모순을 스스로 노정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일본신화는 일본인의 심층심리에 각인되어 있다가 일본이 국가적 위기상황에 봉착할 때마다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 대표적인 시대가 메이지(明治) 시대이며, 그 촉매가 된 것은 러일전쟁이라는 사건이다.
평론가 타카야마 초규(高山樗牛: 1871~1902)가 활약하던 메이지 30년(1890) 전후는 국가적, 국민적 자각이 현저하게 고양된 시기였다. 그의 역사나 민족에 대한 구체적 관심은 러일전쟁 무렵부터인데, 역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당연히 그 역사를 형성한 민족 내지 국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된다.
초규에 의하면 모든 민족의 특성은 그 민족의 ꡐ원적(原的)ꡑ상태에 명백히 드러나 있으며, 그것은 종교, 문학, 미술, 철학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일본민족의 특성과 문학미술>). 이와 같은 관심은 일본주의의 제창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 하나가 ꡐ일본주의는 일본국민의 성정에 근거해서 황조(皇祖)건국의 정신을 발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적 도덕의 원리다ꡑ라는 생각이다(<일본주의에 대한 세평을 개탄한다>). 다시 말해 ꡐ황조건국의 정신을 발휘하려고 하는 국가적 도덕의 원리가 일본주의ꡑ라고 하는 초규의 규정은, 메이지의 교육칙어로 상징되는 개국정신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한편 러일전쟁, 조선의 병합으로 이어지던 당시의 일본에서는 기원전 660년의 진무천황의 개국신화를 <역사>로서 수용하도록 교육칙어에 명문화시켜 학교에서 교육시키고, <대일본제국헌법>에도 성문화시켜서 국민에게 강요하는, 일종의 <시대폐색>의 상황이었다. 천황의 신화를 그 근저에서 부정하여 처형당하는 대역사건(1911년)이 발생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이러한 일본의 시대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있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는, 초규의 개인주의의 파멸원인이 그의 사상 자체에 있다고 비판한다. 거기에는 인간의 위대성에 관한 맹신적 요소가 다량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와 청년의 관계에 대한 견해도 극히 국한적이기 때문이다(<시대폐색의 현상>).
한편 일본신화와 국가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문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이러한 상황 하에서, 메이지를 대표하는 작가 모리 오가이(森鷗外)는 평론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소설의 주인공의 입을 빌려서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오가이의 <망상>이라는 작품의 주인공은 신이란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아라히토가미(現人神)인 천황의 절대성에 등을 돌리는 합리주의자이다. 그런데 <카노요우니(かのやうに)>이라는 작품에서는 오가이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천황제를 옹호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대로 내려오는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가하여 제국군인의 일원이 된 오가이와, 독일유학을 통해 모든 사물을 회의적인 눈으로 응시하도록 훈련된 지식인 오가이의 내적 자아(自我)분열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오가이는 아시아의 국가 중에서 일본만이 서양에 예속되지 않은 이유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하여 부심하고 있었다. 그는 그 해답을 일본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서구의 영향이 본격화되기 전에 일본인의 도덕을 규율해왔던 과거 일본의 정신 속에서 찾는다. 특히 그가 쓴 사전(史傳) 소설의 목적은 이미 지나가 버린 일본의 전통이지만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가능한 전통의 재현에 있었다. 이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못하고 사라져간 사람들의 생애를 <역사 그대로(歷史そのまま)> 재현함으로서 그 근저에 깔려있는 일본 정신을 천착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천황의 신화가 아니라 일본인의 심층에 깔린 신화를 들여다보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후(1970년)에 일어난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할복자살은 미시마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일본문화 연구자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만년의 미시마는 평화국가로 변신한 일본 내에서 군사훈련을 옹호하고 천황제의 부활을 고취하는 발언 등으로 물의를 빚었으나, 실제 일본이 전쟁 중일 때는 오히려 냉담했었다. 그에게 천황이라는 존재는 단지 일본문화의 추상적인 본질에 지나지 않았으며, 개개의 천황에 대해서도 그다지 존경을 표하지 않았다. 천황숭배를 가장 명료히 한 <영령(英靈)의 소리>라는 작품에서조차, 만약 천황이 인간이라면 카미가제(神風) 특공대원의 죽음은 무의미하다고 하면서 천황의 신성(神聖) 포기를 탄핵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후작가들이 명치유신 이전의 문학과의 단절을 입에 담고 있을 때 미시마를 매료시킨 것은 중세문학이었다. 무로마치(室町)시대의 문학이나 역사에 대한 그의 강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 <중세>라는 작품이다. 결국 미시마가 사랑한 일본은 관념 속에 추상화된 일본이었으며, 그가 추구한 일본정신도 과거 일본의 이상이었다. 결국 그는 일본인의 심층에 각인된, 즉 신화화된 관념적인 일본과 일본 정신을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인의 심층심리에는 신화화된 ꡐ일본역사ꡑ내지ꡐ일본정신ꡑ이라는 공동환상이 뿌리깊게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의 신화는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잘 정리되고 체계화 되어 있다. 마치 일본 천황이 정말 신의 자손이 것처럼 계보까지 만들어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직계자손으로 못 박아 놓고 있다. 이러한 태양의 자손이라는 일본 황실의 혈통은 곧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의 핵심이기도 하며, 신도라는 종교의 최고 지도자가 곧 천황이기도 하다.
일본의 제국주의 역시 이와 관련이 있다. 일본의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 섬기는 일본인들은 매일 천황이 사는 곳을 향해 합장하고 절을 하는 숭배 정신을 갖고 있기도 한다. 천황은 일본인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일본인들에게는 마음속에 살아 있는 신이다. 결국 일본인의 국가관에 있어서도 천황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일본의 정치적 정신적 기반인 천황제 국가관은 가마쿠라 말기부터 천황을 중심으로 하고 일본을 신국으로 하는 신국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의 신화는 과거에는 그저 신화로서의 의미를 지녔지만 <바쿠후(幕府)>라고 하는 군사 정권을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새 정권을 출범시킨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과거에 일본 민족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던 천황이 새로운 권력의 주인이 되었다. 천황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신도를 의도적으로 크게 일으켜 국교로 삼으면서 일본 황실의 신성화, 신격화를 위해 신화를 대대적으로 다듬고 정리했다. 초기 천황들 대부분이 신화로 윤색되어 있는 데다 오늘날까지 천황은 일본인들에게는 범접기 어려운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다. 천황제에는 역사나 문화적인 전통만이 아닌 종교 신화적인 요소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천황제의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 일본인의 압도적 다수 현재의 천황제를 지지며 이를 폐지자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사히신문이 3천명을 대상으로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2% 현재의 상징적 천황제 좋다고 응답했으며 천황제 폐지에는 8%, 천황의 권위를 높이자는 견해에는 6%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2)일선동조론과 임나일본부
한편 일본의 신화를 한국의 신화와 관련시키려는 적극적인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런 견해는 일찍이 일제 강점기의 어용학자들이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선동조론>이라는 논리를 개발하였고, 이 논리는 야마토 조정이 직접 관할하는 <미야케>가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이와 같은 논리가 제 2차 세계 대전 후에 재생된 것이 <에가미 나미오>가 주장한 <기마민족설>이다. 그는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신화들을 주요한 자료로 이용하여, 기마 민족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정복왕조를 세웠다고 주장했다.
<모리 마사오>는 에가미의 이러한 견해를 <일본신화에서 지신은 원주 민족-특히 왜인을, 그리고 천신은 동북 아시아계의 외래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니니기노미고토의 천손강림은 조선으로 남하한 북방계 기마 민족에 속하는 임나의 왕이 남부 조선의 가라를 작전 기지로 하여, 그곳의 왜인들과 협력하여 즈쿠시에 침입한 것의 신화적 표현>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일본신화는 천황에 의한 지배의 정통성의 근거로 천손이라는 핏줄의 신성함을 내세운 것으로서, 당대에는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에서는 신화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를 통해 일본역사와 문화의 원형에 접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3)<현인신>과 근대 천황제 국가
1889년 황실전범과 <대일본제국 헌법>이 제정되어 <근대 천황제 국가>가 확립되었다. 천황은 정치상의 주권자이고 군사상의 통수권자임과 동시에 <국가신도>의 제사를 행하는 신성불가침의 <현인신>으로 정립된다. 일본에서 천황 신격화는 이미 신화를 통해서 <살아있는 신>으로서 신격화되어 있다. 이렇게 천황을 신격화 시키는 과정은 『근대 일본의 천황제』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1935년 2월에 육군 중장 기쿠치 다케오가 귀족원 칙선의원이며 문관고등시험위원이었던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간설>를 공격했는데, 그 이유는 <국체를 부인하고 천황이 통치권의 주체임을 부정하는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미노베는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우리는 통치권의 권리주체는 단체로서의 국가라고 생각하며, 천황은 나라의 원수로서, 바꾸어 말해 나라의 최고기관으로서 국가의 모든 권리를 총괄하시며 국가의 모든 활동은 입법도 행정도 사법도 모두 천황을 그 최고의 근원으로 삼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가 통치의 대권을 천황 일신의 권리라고 이해한다면 통치권이 천황 일신상의 이익을 위하여, 일신상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힘이라고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러한 견해가 과연 우리들의 존귀한 국체에 걸맞은 것이겠습니까? 이로 인해 미노베는 결국 귀족원 의원을 사임하게 되고, 명치정부는 8월에 제 1차 국체명칭 성명을 발표하고 10월에는 제 2차 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서 <천황이 국가의 기관이라고 하는 이른바 천황기관설은 신성한 우리 국체에 위배되며, 그 본뜻을 그르치는 것으로서 엄격히 이를 배격해야 할 것이다>라고 표명하였다.
<천황기관설> 사건이 일어나자 육해군 군부는 신속한 반응을 보였다. 3월에 열린 각료회의 석상에서 육군대신은 <육군은 천황기관설에는 절대 반대>라고 했으며 해군대신도 해군이 같은 입장임을 밝혔다.
미노베는 <헌법촬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통수대권의 작용을 국무대신의 책임 밖에 두는 것은, 국무대신이 모든 국무에 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에 중요한 예외를 두는 것이므로 그 범위를 적당히 한정할 필요가 있다. 만약 부당하게 그 범위를 확장할 때는 법령의 일관성 결여로 이중정부 형태를 띠게 되고, 심할 경우 군대의 힘이 오히려 국정을 좌우해서 군국주의의 폐해가 한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노베는 <군령은 군대에 대한 대원수의 명령이지 국민에 대한 국가의 명령은 아니다. 따라서 그 효력은 오로지 군대 내부에 한하며, 일반 국민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군부가 미노베의 학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통수권 독립에 대한 확대해석으로 군부가 국무에 개입하는 것을 경고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메이지 헌법 제 3조의 <천황은 신성하고 침범할 수 없다>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미노베는 <헌법강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국에서 왕은 나쁜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격언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정말 나쁜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법률상 나쁜 일이라고 제재를 가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뿐입니다. 천황은 신성하고 침범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그 취지에서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신성불가침이란 단지 법률상으로 면책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국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주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과 국무대신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서로 연관된 원칙이다. 곧 군주는 국무대신의 보필을 얻지 않고서는 어떤 국무에 대해서도 대권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군주는 책임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에 반해 군주가 혼자서 마음대로 정치할 수 있다면 군주의 무책임이라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게 되므로 황실의 존엄을 해치는 결과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천황의 신성불가침은 메이지 헌법 제 55조에 <국무 각 대신은 천황을 보필하며 그 책임을 진다>는 조항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보장된다고 한 것이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군부가 주장하는 천황친정의 실질화는 천황에게 책임을 추궁할 소지를 낳게 되고 마는데, 이는 곧 천황의 권위를 절대화하려는 군부의 의도와 정면충돌하는 성격의 해석이었던 것이다.
군부로서는 천황의 신성불가침이 제 55조에 의해 보장되어 있다고 하는 연동성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천황자체를 본질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성>과 <불가침>은 같은 말의 반복이 아니라 <신성하므로 침범할 수 없다>는 논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제공한 것이 미노베의 논적인 <우에스기 신키치>였는데, 그는 <제국헌법 축조강의>에서 제 3조를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황은 천조혈통의 자손이시자 현인신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계신다. 본래 선성하시며 신민과는 태어나면서부터 그 격을 달리하신다. … 따라서 우리 헌법의 제 3조가 가 다른 나라의 헌법에 같은 규정이 있는 것과 완전히 그 의의를 달리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이노베의 해석과는 정반대의 견해로, 우에스기는 <천황은 현인신이므로 신성하며, 신성하기 때문에 본래 책임의 유무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천황의 권위를 절대화하고 그 절대적인 권위를 토대로 천황이 직접 통솔하는 군까지도 절대화함으로써 국정을 장악하려고 했던 군부로서는 <우에스기>적인 논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혼조> 시종무관장이 천황에게 말한 <군에서는 천황이 현인신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였던 것이다.
1936년 2,26사건은 국체명징 성명을 제출한 오카다 내각마저 와해시켰다. 이듬해 문부성은 『국체의 본의』를 출판하여, 20만 부를 학교 등에 전국적으로 배포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천황은 황조황종의 뜻에 따라 우리나라를 통치하시는 현인신이시다. …황조황종이 그 신의 후예이신 천황에 깃드심으로써 천황은 황조황종과 일체가 되시어, 영구히 신민과 국토가 생성․발전하는 근원으로서 한없이 높으신 분임을 나타내는 바이다.
<천황 신격화>는 군부가 국정을 장c악하고자 할 때 어떤 의미에서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천황과 국체의 정치적인 가치 상승은 군부에 의해 그 극점에 달하였다.
(4)<팔굉일우(八紘一宇)>와 대동아전쟁
일본역사 속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의 배후에는 언제나 신화적 발상이 깔려 있다. 이는 대동아전쟁을 일으키는 일왕의 조칙 첫 머리에 <팔굉일우(八紘一宇)>가 등장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일본 신화시대의 마지막 신의 아들이자 역사시대의 첫 번째 천왕인 진무(神武)가 일본을 통일한 후 반포했다는 <팔방을 덮어 집으로 삼는다>는 <팔굉일우>의 조칙은 전세계를 일본의 천황에게 귀속시켜야 한다는 사상의 바탕이 되어 일본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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