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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태환경

김종철의 생태학적 상상력,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교수신문 021207)

by 마리산인1324 2007. 7. 17.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263

 

 

[비판적 평가]

 

김종철의 생태학적 상상력,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값진 자생적 생태담론…다원성·개방성 부족
2002년 12월 07일 (토) 00:00:00 조명래 단국대 webmaster@kyosu.net
조명래/단국대 도시지역계획학과

생태사회주의, 사회생태주의, 심층생태주의, 에코페미니즘, 에코아나키즘, 래디컬 에콜로지 등은 대개가 서구의 근대적 경험에 대한 비판과 대안모색을 그려보는 상상력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근자에 들어 급속한 산업화가 가져온 삶의 해체와 결과를 주목하는 생태학적 성찰과 실천이 괄목할만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대개 서구의 것을 한국사회에 도입 적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 우리의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이 그려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적인 자생적인 생태담론의 장이 ‘녹색평론’이란 잡지를 통해 형성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이 잡지는 영문학자 김종철 교수가 개인적 소신과 노력으로 꾸려지고 있지만, 적지 않은 고정독자와 지역별로 독자모임의 활동을 통해 하나의 ‘생태담론의 공동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십여년 이상 잡지를 만들면서 이룩해 낸 이런 성과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생태담론의 공동체로서 ‘녹색평론’은 보통 사람들이 결여하기 십상인 생태학적 상상력을 불어넣는 데 적잖게 기여하고 있지만, 상상력의 샘은 온전히 편집자인 김종철이다. ‘녹색평론’은 결국 그의 생태학적 상상력을 담아내고 유포하는 담론공동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생태학적 상상력은 어떻게 등장하게 됐고, 어떤 사고와 인식틀과 어떤 긴장을 가지고 있을까. 그의 생태학적 상상력의 원형은 ‘녹색평론’의 창간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상황은 인류사에서 유래없는 전면적 위기…라는 것을…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이 생태학적 재난은 결국 인간이 발전과 진보의 이름 밑에서 이룩해온 이른바 문명, 그 중에서도 서구적 산업문명에 내재한 논리의 필연적 결과로…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못된 인간과 자연의 관계 교정에 역점

 

그에게 생태적 감수성의 맹아는 근대산업화의 반자연성과 반생명성에 대한 주목에서 싹트기 시작했지만, 그 해결은 잘못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교정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해결의 영역으로서 인간과 자연의 잘못된 관계란 문제는, 그 뿌리를 파고들면, 사람과 사람 사이, 더 나아가면 개인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의 문제와 근본적으로 일치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문제는 정치경제의 문제이자 동시에 철학과 도덕과 종교의 문제며, 그 해결은 이런 차원으로 접근해 갈 것을 주문한다.

오늘날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개인은 즉물적 이익추구에 매몰된 경제적 공간 밖으로 삶의 테두리를 넓혀 ‘거대한 우주적 생명활동에 스스로 참여해야 한다’고 한다. 김종철에게 있어 녹색운동은 이의 집합적 실천이며, 그러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작업을 통상적인 환경운동과 달리 ‘생명의 문화’를 복원하는 운동으로 부르길 바라고 있다.

요는 ‘자연이나 우주적 연관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을 굳이 생태학적인 상상력으로 부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나오는 삶의 최고형태, 즉 명상과 성찰을 통해 우주와 연관되는 삶의 양식’에 대한 상상력은 엄밀한 의미에서 생태학적 상상력이라기 보다 인문학적 상상력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생태학적 상상력은 긴장을 지닌 채 태어났다는 뜻이다.

‘녹색평론’의 출간 4년이 되는 해, 그는 어느 글에서 “내가 특별히 에콜로지 문제에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다른 체험이 있는 것도 아니다…나는 적어도 환경분야에 관한 한 무자격자임을 절감하면서…‘녹색평론’이 환경잡지가 아니라…또 다른 형태의 인문학적 노력”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실제 그는 ‘녹색평론’을 창간한 까닭을 인문학과 생태학의 접합을 꾀하기 위한 것이라 밝힌 바 있는 데, 여기서 접합의 방향은 ‘인문학’에서 ‘생태학’으로 설정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생태학은 글자 그대로 인문학적 생태학이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히 하기 위한 상상력이다.

그가 ‘녹색평론’에 매달리는 것은 “근원이 불확실한 충동”에서였다고 하면서, 그 밑바닥에는 자연에 대한 어린 시절의 경외감과 신비감이 깔려 있음을 내비치곤 했다. 하지만 그 충동은 그가 영문학자, 그것도 평론을 하는 학자로서의 ‘충동하는 방식’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의 두번째 책인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을 출간한 뒤 인터뷰에서 “나는 근년에 내가 열중해 온 생태학적 관심이 기왕에 문학 공부를 하면서 살아온 자신의 내면적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맥락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고 밝혔다.

이렇게 본다면, 환경이나 생태란 것은 그에게 있어, 평론가가 평론하는 대상, 즉 텍스트에 해당하는 것이다. 시를 평론하는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시의 다른 형태다. 자연과 시적 세계를 일체화시켜, 그가 얻는 것은 시적 세계의 풍부화다. 따라서 그의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보다 시적 세계로 환원돼 해석되고 재현된 자연인 것 같다. 생태학적 상상력은 결국 생태학적 미학을 풍부하게 하는 시적 상상력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시적 상상력이 일군 생태미학

 

그는 실제 “시적 언어의 본질은 메타포에 있는 것인 데, 그 메타포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생태적 감수성과 뿌리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오늘날 우리의 영혼마저 표준화, 상품화가 강요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래도 “생태학적 지혜를 희미하게 나마 감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공간은 시적 감수성의 세계”라고 강조하고 있다. 시적 사유의 본질에는 어떠한 인공적 조작물로 대체할 수 없는 세계의 근원적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이 있어,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싸움이 곧 그가 규정하는 녹색운동이다. 그의 녹색운동은 시적 사유의 운동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평론가로서의 상상력이 생태운동가로서의 상상력으로 바뀐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에 따르면, “갑상선 수술 이후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자연요법으로 섭생을 시작했을 때부터”다. 그 때,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 있던 아픈 몸이 환경문제를 발견했다”고 한다.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그의 이런 변신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더 이상 시적 평론의 대상이 아닐까. 그가 여전히 평론을 업으로 하는 대학선생이라는 사실로 미뤄 볼 때, 그의 변신은 여전히 미완인 것 같다. 그에게 있어서 생태적 인간으로의 변신은 문학하기 위한 한 방편이라는 심증을 버릴 수 없다. 실제, 그는 실천을 문학의 한 이론인 ‘리얼리즘’을 몸으로 옮기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언제나 문제는 실천(리얼리즘)이다. 물과 공기가 오염되고 숲이 사막화하고, 마음놓고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이제 거의 없다. 그런데 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까?.” 이에 대한 답으로 그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하나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 자각이다. 인문학자로 그는 두 번째를 실천 수단으로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삶의 모델을 노자와 불교사상, 간디의 비폭력과 북미 인디언의 전통적인 삶에서 찾고 있으며, 그것은 농업이 중심이 되는 자치적 공동체이고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삶”으로 규정하고 있다.

‘간디의 물레’는 김종철의 실천관을 보여주고 있다. “간디는 언제나 인간의 탐욕으로는 이 세상이 매우 궁핍한 곳일 수밖에 없지만,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는 이 세상이 더 없이 풍요한 곳이라고 말했다”면서, 그는 실제 ‘간디의 물레’를 돌리는 실천에 무던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그가 물레를 돌리는 장소는 ‘녹색평론’이란 담론의 공간이다. 그 곳에서 그는 언어로서 생태적 세계를 그려내고, 또한 언어로서 물레를 돌리는 실천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생태학적 상상력은 녹색평론적 상상력이며, 구체적으로는 ‘인문학적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 그의 생태학적 상상력은 어쩌면 가공적·심미적 상상력일지 모르고 진정성이 결여된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시적 세계와 생태적 세계는 동일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시적 사유를 통한 생태학적 상상력은 그 어느 방식의 생태적 상상력보다 자연의 모습과 성질을 더 정확히 읽어낸다고 한다. 인문학적 방식을 통한 생태적 세계의 재현은 그래서 보통사람들의 인문학적 심성을 자극해 자연에 반응하고 동화될 수 있도록 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녹색평론’이 많은 독자그룹을 거느리고 있는 것은 이의 효험을 보여주는 실례다.

요는 시적 세계에 반영된 생태적 세계에 대한 동화는 간접적이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생태학적 상상력 속에는 긴장이 늘 있다. 그는 언어로 생태학적 상상력을 그리고 불러내지만, 동시에 언어가 갖는 질곡과 배제의 힘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는 자연에 몰입하는 실천가의 상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거짓스러운 선생’이라고 규정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농촌 공동체 운동을 선호하면서, 그런 공동체를 옥죄우는 전체 사회경제 시스템을 읽고 개혁하는 상상력을 기피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그는 영문학자로서 서구문학적 상상력에 길들어 있으면서 동양적(우리식) 생태관에 그의 자화상을 내 비치고 있다.

사회과학적 상상력과도 교감 필요

 

이 긴장은 언젠가는 풀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시적 인간에서 생태적 인간으로 완전한 전이가 이뤄질 때 가능하리라 본다. 생태적 인간은 인간과 자연이 일체화되는 정체성을 특징으로 갖지만, 기실 그 내면에서 인간보다 자연을 더 닮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생태적 사유에서는 생태계가 갖는 호혜, 평등, 공존, 평등, 개방성, 다원성이 풍족해야 한다. 그의 생태학적 상상력 속에는 인문학적 상상력은 풍부할지 모르지만, 생태계가 가지는 다원성과 개방성을 닮은 상상력은 풍족하지 않는 듯하다. 주류의 환경담론에 대한 그의 혐오는 이를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생태학적 상상력은 앞으로 사회과학적 상상력과도 교감하고 소통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