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아나키스트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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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적 희망을 위하여
- 구 승회 -
1. 생태학적 반란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코노미(economy)와 사촌간인 이칼러지(ecology)에 의해 산업주의의 끝없는 자기확대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었다. 대지의 장엄함에 대한 경외를 주장했던 레오폴드(Aldo Leopold), 1964년 『침묵하는 봄』으로 많은 미국인들에게 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던 카슨(R. Carson), 시(詩)를 통해 환경파괴를 고발함으로써 환경적 관심의 대중화에 기여한 시인, 시나이더(Gary Snyder) 등이 선구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자극을 받아 <로마클럽>보고서로 출간된 『성장의 한계』, 슈마허의 에세이집, 『작은 것이 아름답다』등은 지난 세기 환경(자연)보존 '운동'을 촉발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환경문제가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충분히 무르익은 후에 학문적인 탐구가 등장하였는데, 후속하는 학술적인 연구는 세기말에 이르러 생태학적, 환경적 가치를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하는 정언명령의 위치에 올려 놓았으며, 과학탐구, 거래, 기업, 매체 등 모든 분야에서 호황을 누리는 '상품'으로 과소비 되기에 이르렀다.
2. 현대 생태사상의 반동적 경향
어떤 사람은 경제.사회적 지표로서, 어떤 사람은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경험적 사태.지표로서, 또 어떤 사람은 형이상학적 메시지와 존재론적 증거에 의지해서, 혹은 주술적, 신비주의적 경구와 잠언으로 '생태계 위기'의 원인과 처방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 결론은 언제나 동일하였다: '지구 생태계와 자연환경을 살리는 길은 소비를 줄이는 길 말고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통된 결론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인류가 인간다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생태효율적 비전제시는 사뭇 달랐다. 21세기 지구정치에서 인류에게 가장 화급한 문제는 물론 환경일 테지만, 생태학적 논변의 정당성은 현존 경제-사회적 질서 전반을 부인함으로써만 주어지는 것으로 오해되어 온 현대 생태사상은 심지어는 냉정하고, 남성적이고, 세련되고, 분석적이고, 고도로 추상화된 '근대적 이성' 대신에 따뜻하고, 여성적이며, 협동과 감정 이입이라는 새로운 '생태학적 이성'개념을 도입하고자 했다. 하여튼 이들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미래비전에 집착한 나머지 생태학적 현실을 외면하는 반동적 경향으로 나타났는데, 동양적 신비주의, 에코파시즘적 경향, 기술낙관주의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를 뭉뚱그려 나는 '환경주의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환경주의 이데올로기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이에 대한 기둥서방노릇을 해 온 근세철학을 그 원흉으로 설정하고, 생태계 위기와 환경오염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개인의 자연관, 세계관의 근본적인 변화에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몰고 갔다. 이는 사람들을 개인주의와 상대주의에 기울게 하였으며, 7~80년대 구미 사회에 급속하게 번져나갔다. 우리가 생각해 보건대 이는 미국의 종교적 전통과 뉴 에이지(신좌파)의 서브 컬처, 그리고 동양사상에 대한 캘리포니아식 해석―신비주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이 결합되어 나타난 새로운 이데올로기임에 틀림이 없다. 건강캠페인, 금연운동, 자전거타기 운동, 채식주의 운동, 금욕주의 운동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환경주의 이데올로기는 역사 속의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위험한 전체주의적(에코파시스트) 경향을 나타내는 바, 약간 과장하여 말하면 환경적으로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미국-중산층-백인-남자'의 자연관을 전지구적인 모범으로 삼으라는 강요와 협박에 다름 아닌, 명백한 생태학적 전체주의이다. 심층생태론(deep ecology)처럼 지나친 정적주의(quieticism)로 퇴보하든, 에코파시즘으로 되는 간에 환경주의 이데올로기는 생명권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공동체와 연대성이라는 인간의 사회성을 쇠퇴시키는 역효과를 낳았으며, 위계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기 위한 사회혁명에의 열정을 퇴화시켰다.
3. 21세기 생태사상의 현실적 기초
환경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이 정녕코 "소비를 줄이는 일"이라면, 오직 그 길밖에 없다면,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빌미로 무작정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거나, 동양적, 신비주의적 세계관을 원용하여 생태계 위기를 유사-종교적 주술로 해결하려 들거나, 환경문제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해석인 ESSD(지속가능한 발전) 논리로 제3세계, 여성, 유색인을 폄하하고, 억압하는 전지구적인 환경정책을 주창하는 등의 현대 생태사상으로는 현재의 시장경제체제 내에서 '생태학적 효율성의 혁명'을 수행할 수 없다.
생태효율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현재의 경제활동 방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것이 아니라, 에너지 문제의 경우 에너지 가격을 올려 에너지 절약 기술 개발을 유도하고, 기업과 소비자에게 환경세를 부과하며, 복지정책에서도 '풍요로운 삶'이라는 산업사회적 개념에서 '문명적 삶'이라는 생태사회적 복지개념을 도입하고, 거대-복합기술을 환경기술로 분산시키는 등 사회시장경제의 수정을 통해 문제해결을 의도해야 한다.
정치와 경제가 급속하게 지구화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여전히 제대로 작동할지 우려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시장 논리에 대항하는 민주적, 도덕적 균형 추를 강화하고, 세계시장으로부터 독립적인 생활영역을 보장함으로써 지구화의 부작용에 대항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더욱 견고한 연대성을 가지게 될 시민 네트워크는 민주주의의 잠식을 방어하는 좋은 기제이다. 그래서 전지구적인 통치가 보편화하더라도, 국민국가와 초국가적인 권력의 조화는 여전히 가능한 것이며, 지구인으로서의 삶의 영역과 국민, 시민으로서의 생활세계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21세기 생태사상의 현실적 기초이다.
4. 2000년 유토피아의 명암
생태계 위기는 20세기 문명의 남긴 흔적 중에서 가장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이는 전지구적, 심지어는 우주적인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새로운 세기 삶의 조건을 더욱 절망적으로 몰아가는 위기 시대에 우리는 도무지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까?
400만년전의 루시(lucy)에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원시적인 인간중심의 세계에서야 동물적인 절망과 불안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희망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원시 채집인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등장한 기독교는 인간도덕의 궁극적인 권능은 이승에서 파라다이스를 이룩하는 것이며, 만인 평등, 사후 구원, 금욕과 같은 강력한 유토피아적 희망의 카드를 내 보였다. 이 카드에는 '타락한 영혼을 인도하는 신의 섭리와 조화에 대한 확신'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그로부터 1500여년이 지난 후 종교개혁가의 희망은 '개인'과 '자기 확신'이라는 새로운 메시지를 선포하였고, 이 정신은 그 후 300여년간의 계몽주의적 희망으로 확장되었다. 무신론자 디드로, 자연신교주의자 볼테르, 변증론자 헤겔, 순수 유물론자 라메트리(Julien de La Mettrie) 이들은 모두 이성이 사회를 지배한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이견이 없었다. 세상은 오직 과학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인간은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공유한 이들은 '자유의 존재로서 인류의 진보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이는 단순히 영광된 미래에 대한 소박한 소망이 아니라, 볼떼르의 말로 하자면 '세상은 필연적으로 유용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확신에 찬 희망이었다.
계몽의 바다를 건너, 프랑스 대혁명의 질풍노도를 헤치고 등장한 사회주의는 기독교 이래로 가장 과격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으로 대표되는 조국이 없는 전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는 메시지는 프롤레타리아트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유토피아의 실천지침으로 모든 계급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희망이었다. 위계없는 공산사회에 대한 염원은 역사 속에 명멸해 간 다양한 유형의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꿈꾸었던 소비에트를 향한 볼셰비키 혁명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1919~21년 사이의 노동자-사회주의 운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왜곡으로 절망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에의 희망, 결국 미래에 올 공산사회에 대한 희망은 포기하지 않았다.
5. 유토피아 비판과 절망의 시대
그러나 맑스주의의 현실적 변용인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지난 세기말 이래로 아무도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는다. 어쩌면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CNT의 실패, 그리고 1968년 학생봉기의 실패는 그런 희망이 '어디에도 없음'을 알리는 예심공판이었다. 그 질풍노도와 더불어 등장한 허무적인 포스트모던(이는 우리 시대의 '희망 없음'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다), 신비적인 반인간주의(유사-종교적 영성에 호소하는 심층생태론), 아무래도 좋다(anything goes)라는 식의 인식론적 아나키의 경향 등으로 충분히 감지될 수 있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 질서에서 희망을 미덕으로 삼을 수 없을 때, 절망이 미덕인 양 둔갑시키려 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한치의 예외도 없다. 그것은 과격한 유토피아 다음에 오는 일종의 문화적 후유증이다. 엄청난 물질적 안녕과 자유시간, 육체적 행복, 자연계와의 조화로운 관계를 가져다 준 기술진보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삶과 자연세계의 통합이라는 기술의 최초 목표를 위반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술시대의 인간들은 '생각하고, 고안하는 인간의 저 권위가 얼마나 자기파괴적인지를 생각해보라!'는 구호(모더니티 비판)에 익숙해져 있으며, 이는 당연한 수준을 넘어, 현대인들의 필수 도덕으로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조건'에 무력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사회적 기약에 상실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사람들은 더욱 냉소적으로 되고, 현존 질서의 포로가 되는 것을 미덕인 양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유토피아의 패러독스이다. 기술진보는 전 인류의 희망이었지만, 산업혁명기 노동자계급에겐 처참한 절망이었다. 19세기 중엽 이후의 민족해방운동은 '인민주권자로서의 국민'이라는 희망을 주었지만, 그것은 오직 문화적 편협성, 인종적 증오를 통해서였다. 도시화, 무역과 거래의 확대는 자본주의가 내 보이는 희망이었지만, 자연과 대지의 약탈에 절망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적절한 이기심, 관용,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는 신의 눈밖에 난 '개인들'의 희망이었지만, 공동체적 연대와 결속이라는 '자연 미덕'의 상실은 절망이었다.
이토록 치명적인 절망은 뭐니 뭐니해도 20세기에 있었던 두 번의 전쟁 때문인 듯하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이런 절망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던 사람들이다. 서로 다른 논조로 자신의 정서를 표현했지만, 두 사람의 철학은 공히 이런 '시대의 절망'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에서, 자기 시대의 분열과 아노미, 진보에 대한 믿음의 상실을 문제삼았다는 점에서, 황폐한 전후의 지성들에게 반근대(Antimoderne)의 정서를 공급하였다는 점에서 같은 길을 가는 타인이었다. 니체가 살던 세상은 생기에 찬 산업화 이전의 사회로부터 창백하고 음울한 상업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문화적 과도기를 겪고 있었다. 이들의 절망은 1차 대전 직전 유럽사람들이 느꼈던 위기의식을 대변하는 것이고(니체), 19세기와 2O세기 초에 형성된 반근대의 전통 위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자본주의와 노동자 계급의 사회주의 운동 둘 다가 '혐오스러운 대안'으로 보았던 데 기인한다(하이데거). 이 절망은 1차 대전을 주도한 독일 제국을 향한 것일 뿐 아니라, 볼셰비키 혁명 운동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그래서 하이데거는 결국 치명적인 잘못된 선택(나치즘)을 하게 되었다.
6. 생태학적 희망의 메시지
이 모든 절망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희망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생태학적 희망'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으로 구성된다:
첫째, 과학-기술적 문명화로 인한 생태계 위기는 인류를 치명적인 조건으로 몰고 가고 있으며, 이는 초국가적, 초인종적, 초문화적(cross-cultural)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도덕적 도전'이다. 우리는 휴머니즘의 권능이 자유를 확대해 온, 저 이성사의 위대한 성취에 의지하여 이 응전해야 한다. 인간과 인간 이외의 생명계의 생존을 위협하는 오늘의 저 약탈적 사회는 이와 같은 '실천적 합리성'이 인도하는 사회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성의 언덕에 올라, 사람에 대한 지독한 긍정의 눈빛으로 신뢰를 보내는, 이른바 '신뢰의 원칙', 그것이 생태학적 희망의 제1원칙이다.
둘째, 허무주의, 신비주의, 지독한 상대주의, 반인간주의가 저 이데올로기 시대의 강철같은 신념을 부식시키고 독버섯처럼 우리의 영혼을 침식한다. 생태계 위기 시대의 휴머니즘은 '불합리한 현실적' 증거들을 제시하며, 저항하는 온갖 유형의 반인간주의에 대항해서 현실적 불합리의 배후를 통찰해야 한다. 맑스의 말로 하자면, "관념이 현실을 추종하여야 할뿐 아니라, 현실 또한 관념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합리적인 현실화를 추구하여야 하며, 불합리하고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비판하는 도덕적 힘을 간직해야 한다. 생태학적 희망의 제2원칙은 '도덕의 복권'이다.
셋째, 인간은 스스로의 실존적 위상을 초월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를 책임지(져야 하)는 이성적 주체이다. 인간이 이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성의 긍지를 회복하기 위해, 오늘날 쇠퇴해 버린 사회성을 강화하기 위해, 나아가서 생태학적인 책임을 보증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의 이념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의 이념에 충실히 복무한다 함은 결국 '이성의 권능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태학적 희망의 제3원칙이다.
생태학적 희망의 원칙은 무지, 미신, 공포로 점철된 신화적인 과거로의 회귀도 아니고, 탐욕, 경쟁, 지배로 점철된 현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않다. 그것은 채집 생활을 하던 원시 공동체의 협동 정신과 근세의 세 가지(개인, 민족, 계급) 해방사상이 옹호했던 보편주의와 평등이념을 결합하는 원칙이다. 이 원칙으로 우리는 정확히 2000년 전에 "보아라,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리라!(요한묵시록, 21.5)"던 어떤 실패한(?) 선지자의 예언이 실현되는 진정 합리적인 사회를 희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으로야 무엇인들 소망하지 못하랴! 문제는 생각을 자유로이 수행할 해방의 시간이 필요하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칸트)"이기에, 해방은 자유를 쟁취한 자에게만 주어진다. 그리고 자유의 쟁취 역시 고도한 지적, 도덕적 성실성에 근거한 자유행위여야 한다. 스스로를 자유케 하려는 정열이 없는 사람은 해방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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