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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퀘이커

퀘이커라 불리는 사람들 /Duncan Wood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1.

<퀘이커 서울모임>

http://www.quakerseoul.org/

 

 

 퀘이커(Quakers)라 불리는 사람들

The People Called Quakers

 
지은이 : Duncan Wood
옮긴이 : 부길만

 

 

1. "퀘이커"란 어떤 사람들인가?

 

"퀘이커"란 명칭은 처음에는 자기네 스스로를 "친우들(Friends)"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썼던 말입니다. 오늘날 친우들은 퀘이커라 불리는 것을 별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좀더 특색 있는 이름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일반 세상이 그렇게 부를 때는 자선사업단체, 혹은 평화운동조직, 그런 것들과 결부시켜서 생각합니다. 그러한 일반의 생각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둘 다 퀘이커들의 활동의 어느 특수한 것에만 붙잡혀서 도리어 근본적으로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Quaker)의 생활과 사업의 한 특수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퀘이커들은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기독교의 한 갈래입니다. 그리 오랜 것도 아니고(1650년경에 와서 겨우 창설됐습니다) 또 그리 큰 교파도 아닙니다. 전 세계의 회원을 다 합한대야 20만 명이 될까말까 합니다. 이들의 신앙과 실천은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증거하는 데서도, 인류의 정신적 전통에서도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2. 친우회의 기원

 

친우회(the Society of Friend)의 창시자, 죠지 폭스(George Fox)는 1624년 영국 레스터 주에서 겸손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진지한 성격의 젊은이로서 성경을 열렬히 탐독했던 사람(그는 성경을 아예 외울 정도였다고 함)이었던 죠지 폭스는, 영국의 내란이 광범위한 지적, 영적 발효를 불러일으키는 시기에 어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폭스 자신의 기질과 당시의 시대 정신은 그를 "찾는 자(seeker)"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즉, 겉으로 볼 때는 하찮을지도 모르는 사건 하나가 계기가 되어 그는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길고도 고통스런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직업적 목회자들이나 여러 가지 종파의 교회들이 하나같이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도 다른 영적 지도자들처럼 깊은 의심과 절망의 늪에 빠져들기도 했었습니다.


그의 일기(Journal)에는 그가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다가 갑자가 깨닫게 된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그들에 대한, 아니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희망 전부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밖으로부터는 내게 도움을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아! 그때에 나는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다. 그 분만이 네 상태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몇 마디 안 되는 말로 죠지 폭스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빛의 원천이 있으며, 이 빛만이 "어떤 사람이나 책이나 문서 따위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속의 빛(Inward Light)", "씨(Seed)",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부분(That of God in every one)"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퀘이커의 중심 사상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을 낙관적으로만 보려는 위험한 견해가 될 수 있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것은 본래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멀리 계셔서 접근할 수 없는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셔서 우리들 모두가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를 써 주십니다. 이 세상은 구원받을 수 있고, 또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낙관주의의 바탕이 아니라 소망의 근거입니다.


다른 종교지도자들도 죄의 짐으로부터 벗어났던 갑작스런 회심(conversion)의 개인적인 경험을 갖고 있으며, 그 경험의 정확한 날짜까지도 기억합니다. 폭스의 체험도 아주 개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것과는 좀 다릅니다. 죠지 폭스는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불충분하다는 느낌은 갖고 있었지만, 그도 무거운 죄짐을 지고 허덕였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는 1647년에 일어났다고 믿어지는 그 자신의 깨달음이 정확히 몇 월 몇 일에 일어났는지 밝히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는 영적 작업을 끝맺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여행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지금도 하고 있는 신앙의 여행을 시작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폭스는 이러한 퀘이커적 체험을 한 첫 번째 인물이었지만, 그 자신이 친우회의 창시자라는 것은 부정하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친우회의 창시는 그의 업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죠지 폭스는 자기와 같은 찾는 자들(seekers)이 매우 많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 찾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의 깨달음의 소식은 모순되는 도그마(dogmas)의 횡포로부터의 해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점은 영국의 서북 지방 사람들에게 있어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영국의 서북 지방은 폭스가 1652년에 여행한 바 있고 울버스톤(Ulverstone) 가까이 있는 스와쓰모어 홀(Swarthmore Hall)에 본부를 설립할 수 있었던 지역인데, 지금은 컴브리아(Cumbria)주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퀘이커주의는 바로 이 지역에서부터 시작하여 영국의 방방곡곡과 나아가 영국 국경을 넘어서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것은 폭스뿐만 아니라 일단의 용기 있는 남녀들에 의해서도 퍼져 나갔는데, 그들은 세속적인 지혜에 별로 큰 자부심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들 속에 있던 놀라울만한 영적 힘은 하나님의 권능과 인도를 내면에서 찾으라는 폭스의 메시지에 의하여 터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친우회는 여러 면에서 혁명적이었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회원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규칙적으로 함께 모인다는 점이었습니다. 1689년 신교자유령(Toleration Act)이 선포되기 전에는 영국국교의 반대자들에게 예배를 드리기 위한 대중적 집회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퀘이커들의 경우에 더욱 불리했던 점은 퀘이커들은 교회제도에서 받아들인 기본 방식에 도전하면서, 목사의 인도 없이 모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초기 친우들은 자기들의 새로운 영적 통찰이 사회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얼른 알아냈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사람, 친구와 적, 그 어느 누구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로 언제든지 직접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는 분이라고 한다면, 인습적인 인간 차별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빛(Light)"을 거부하는 일이 아닐까? 여기에서 그 시대의 계급 차별에 반대했던 초기 친우들의 증언(그들은 그것을 증언(Testimonies)이라고 불렀음)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고관들 앞에서 모자 벗기를 거부한 일, 친근한 호칭인 "당신(thee와 thou)"이라는 말을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사용한 일, 남들에게 자기가 잘 났다고 뽐내려는 겉치장에 반대하여 증거자(witness)로서 검소한 복장을 채택한 일 등입니다. 검소한 생활과 단순하고 꾸밈없는 말은 보다 더 넓은 차원을 열어 줍니다. 친우들은 모든 거래에서 정직의 중요성을 고집했고, 맹세함으로써 진리에 대해 이중적인 기준을 인정하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친우들은 자기들이 추구했던 빛의 인도에 따라 전쟁에 참가할 수 없었는데, 이것은 초창기부터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친우들은 잉글랜드 공화국(Commonwealth / 1649년 찰스 1세(CharlesⅠ)의 처형 후부터 1660년 왕정회복까지의 기간을 말함-역자 주)과 찰스 2세의 재임 기간에 그들의 종교적인 이상과 사회적인 선언 때문에 혹독한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폭스는 조직적인 박해에는 훈련된 대응책(disciplined response)이 필요하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운동에 피라밋식의 구조를 주었는데, 그 구조란 조그만 마을에 월별모임(Monthly Meeting / 月會), 좀더 큰 지역에 분기별모임(Quarterly Meeting / 四李會), 나아가 한 나라에서는 연도별모임(Yearly Meeting / 年會)으로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임은 참석할 수 있는 모든 친우들에게 개방되었으며, 친우들이 퀘이커 신앙에 충실할 수 있게 해 주는 일과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이는 런던의 정기 집회는 "고난받는 이들을 위한 모임(Meeting for Sufferings)"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모임이 지금은 비록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관심을 쏟고 있기는 하지만, "고난받는 이들을 위한 모임"이라는 명칭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3. 오늘날의 친우회

 

신교 자유령이 선포되고, 퀘이커들의 첫 번째 세대가 지나간 후에, 친우회는 "퀘이커 그레이(Quaker-gray)"라는 검소한 복장, "당신(thee와 thou)"이라는 호칭사용, 음악과 미술을 신용하지 않는 일, 경건하고 엄숙하다는 것 등으로 인해서 세속의 사람들과 외따로 떨어진 사람들의 그룹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이 전형적인 퀘이커의 이미지를 보존하고 있는데, 잘 알려진 귀리죽의 상표 도안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퀘이커가 아닌 사람들인데도 자기들 상품인 귀리죽 통조림통의 겉면에, 품질과 신용을 보장하는 표시로 "퀘이커 그레이"라는 복장을 한 초기 퀘이커의 모습을 그려 넣어, 자기들 상표로 사용하는 곳이 아직도 있다고 함 - 역자 주). 그러나, 지금은 세계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퀘이커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퀘이커들을 찾아 볼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퀘이커의 전통적인 복장은 폐지되었고, "당신"이란 호칭의 사용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고, 음악과 미술도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친우들도 진지하다고는 볼 수 있지만 별로 엄숙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친우들은 매우 다양한 실천 방식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각 지역에 있는 모든 친우들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용어로 오늘날의 퀘이커주의를 간결하게 기술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것은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와 북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실천되고 있는 퀘이커주의에 관한 설명입니다.

 

3-1. 예배 모임(Meeting for Worship)

- 종교적 실천과 원리 -

친우회의 본질적 특징은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점입니다. 작은 모임이나 새로 생긴 모임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개인 집에서 모입니다. 대부분의 모임은 그들의 모임집(Meeting House)을 갖고 있는데, 그 모임집은 종교적인 장식이 전혀 없이 간단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모임집은 신성스러운 건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나셔서 거룩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친우들이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임집은 평일에 비종교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일요일(오래된 퀘이커들이 사용한 용어로는 "첫 번째 날(First-days)"), 좌석은 정방형이나 원형으로 배치되는데, 테이블이 있고 보통 그 중앙에 꽃병이 놓여 있습니다. 친우들은 자리에 들어와서 침묵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단순히 침묵의 명상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함께 추구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의 발언도 없이 전체의 예배 시간이 지나가 버리는 적도 가끔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전해야 할 메시지를 받았다고 느끼는 친우는 침묵을 깨뜨립니다. 그러면 또 다른 메시지들이 아마 소리내서 하는 기도의 형태로 뒤따르게 되는데, 각각의 메시지들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완전하지만,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일체감 및 다른 사람들과의 일체감으로 이끌어 갑니다. 퀘이커의 첫 번째 세대에 속하는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퀘이커인 로버트 버클리는 예배모임의 특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침묵의 집회에 갔을 때, 나는 그들 가운데서 신비한 힘을 느꼈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가 그 힘에 푹 빠져들자, 나는 내 속에 있는 악이 쓰러지고 선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버클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이 "침묵의 집회"는 친우회의 회원들만으로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친우들은 성령께서는 우연한 방문자를 먼저 규칙적이고 익숙한 참석자(attender)나 동조자로 이끌어 주시고 나아가 정식회원이 되게도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진지한 찾는 자들(seekers)이 그들의 모임에 오는 것을 환영합니다.


예배 모임은 두 명의 장로가 손을 흔들면서 끝나게 됩니다. 장로는 또한 예배모임이 단순한 토론으로 타락하거나, 매주일 마다 미리 준비된 설교를 하는 자칭(a self-appointed) 설교가에게 청중을 동원시켜 주게 된다든지 하는 위험에서 예배모임을 지켜주는 까다로운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출석한 사람들이 모임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신비한 힘 앞에 겸허한 마음을 지니지 않을 때 일어나곤 합니다. 확실히 그것은 항상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퀘이커의 예배방법은 세속적인 관심을 멀리하고 성령에 자기 자신을 열어 놓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퀘이커 예배에는 찬송가나 기도나 성례 의식과 같은 외면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친우들은 예배모임에서 눈에 보이는 외면적인 징표의 도움 없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면의 영적인 은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을 뿐입니다. 기록된 교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친우들은 종교적 깨달음이란 정해진 어떤 한 순간에 포착될 수도 없고 항상 말로 옮겨질 수도 없는 지속적인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퀘이커 교리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것은 "권면과 신앙반성질문서(Advices and Queries)"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권면과 신앙반성질문서 중에서 몇몇 짤막한 구절들이 한 해 내내 모임에서 가끔씩 읽혀집니다 : 그것은 친우들이 영적인 생활과 사회적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 하는 것을 간략하게 가장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친우들이 참고하는 외면적인 보조자료 중의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대한 위대한 기록인 성경인데, 성경은 항상 모임집 책상에 놓여 있습니다. 많은 연회(Yearly Meetings)는 퀘이커 경험(Quaker Experience)에 대한 그들 자신의 기록을 기독교인들의 신앙훈련서(Book of Christian Discipline)에 모아 놓고 있는데, 그 책에는 초기부터 최근까지의 퀘이커 저술에서 발췌한 것이 실려 있습니다. 친우들은 또한 개별적으로 자신들의 영적인 순례의 기록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즉, 죠지 폭스와 죤 울만(John Woolman)의 "일기(Journals)", 우리와 동시대인인 토마스 켈리(Thomas Kelly)의 "헌신의 약속(Testament of Devotion )" 등이 그것입니다. 이 책들은 모두 성령의 실재하심을 증거하고 있지만, 로버트 버클리가 "변호(Apology)"라는 그의 저서에서 시도했던 것 같은 체계적인 퀘이커 신학에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현대에는 이것에 상응할 만한 책이 없습니다. 오늘날 친우회는 많은 유명한 성서신학자들과 몇 개의 퀘이커 연구센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통합하기 힘들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3세기 동안 물려받았습니다. 어떤 친우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통합이란 바람직하기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기독교인들이 교리적으로 그들에게 대답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질문들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답변에 이를 수 있는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3-2. 친우회 기구

친우회의 기구에서 기본적인 단위는 월회(Monthly Meeting)입니다. 월회는,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몇 개의 특별모임이나 회합에서 온 친우들로 구성되고, 북아메리카와 그 밖의 지역에서는 단 한 개의 모임으로 이루어집니다. 예배모임(Meeting for Worship)과 사무모임(Meeting for Business)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사무모임은 침묵예배가 끝나면서 시작되고 그 예배 분위기에서 계속 진행됩니다.


모임은 사무를 관장할 책임을 서기에게 위임합니다. 서기는 검토해야 할 요목(items)을 준비하고, 한가지 요목이 끝날 때마다 의사록에 "모임의 의견"을 요약해서 기록하고 낭독하는 책임을 맡습니다. 서기가 작성한 의사록을 한번 이상 읽은 다음에, 모임은 그 의사록의 내용을 변경하자는 제의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투표가 아닌 만장일치의 방식으로 거론된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연회나 다른 사무모임도 똑같은 절차로 진행됩니다. 의견이 갈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경우 친우들은 잠깐동안 침묵예배를 함으로써 의견 분열을 수습하곤 합니다. 의견이 분열될 때는 의견의 일치를 볼 때까지 그 문제가 보류될 수밖에 없는데, 그럴 경우 몇 달 혹은 심지어 몇 해가 걸리기도 합니다. 과거에 이런 절차로 친우회 안에서의 분열을 막아내지 못한 적은 거의 없었고, 어쩌다가 분열이 되는 경우에도 잘 수습하곤 했습니다. 이 제도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를 막아 주므로 이 제도야말로 민주적인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민주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정(神政)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정이란 것은 원리상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월회는 자산의 보존 등과 같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어야 합니다. 월회는 모임의 영적 생활을 보살피는 장로(Elders)와, 모임 회원 특히 병자와 노인들의 복지문제에 신경을 쓰는 감독(Overseers)을 임명해야 합니다. 월회는 또한 모임회원들을 돌봐야 하고, 친우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한 일이며, 그 이사한 친우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를 확인해서 알려주어야 합니다. 월회는 퀘이커 방식에 따라 결혼식을 진행할 제반 준비도 해야 합니다. 즉, 결혼할 한 쌍의 남녀가 "하나님과 모임 앞에서" 결혼서약을 하게 되는 특별 예배모임을 대개 주 중에 정해서 마련해 주는 일을 말합니다. 월회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회원 신청을 받고 검토하는 일입니다. 모임에서 회원신청을 받았을 때, 월회는 두 사람의 회원을 지명해서, 그 두 회원으로 하여금 신청인이 퀘이커의 신앙과 실천과 선언(특별히 우리 시대에는 평화 선언)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그가 친우회의 벗들과 영적인 여행을 계속하기를 즐거워하는가 하는 것 등을 알아보기 위하여, 신청인을 방문하게 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이 두 방문자의 보고는 월회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줍니다.

 

3-3. 퀘이커 봉사활동

월회는 또한 친우들이 "관심사"라고 부르는 일들을 추진시킬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초창기부터, 친우들은 민감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윌리암 펜이 이야기했듯이, "진정한 신성스러움은 사람들을 이 세상 바깥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보다 더 잘 살 수 있게 해 주고, 이 세계를 개선하는 데 힘쓰도록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윌리암 펜의 시대 이래로, 친우들의 활동은, 기독교인의 양심에 도전하는 일련의 사회적인 문제들과 인간의 비극에 자극 받아 왔습니다. 이 도전에 대한 퀘이커의 응답은 종종 행동하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는 한 사람의 친우들에게서 비롯되기도 합니다. 그 친우는 월회(나아가 더 큰 기구에)에 그의 관심을 표명합니다. 월회는 그의 관심이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낼 수 있는 일과 정말로 관계가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일을 맡습니다. 월회가 다함께 일할 관심사를 결정하게 되면, 친우회는 새로운 봉사활동에 착수하게 됩니다. 어떤 친우들은 확고한 신념을 갖고 거의 혼자서 친우회를 새로운 길로 이끌어 나갔습니다.


18세기 미국의 성자다운 퀘이커인 죤 울만(John Woolman)이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예를 해방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문제를 다루어 나가는데 있어, 목청을 높여서 하는 선전으로써가 아니라, 아직 노예제도의 사악함을 깨닫지 못한 그 시대의 친우들에게 "사랑으로 진리를 말함"으로써 친우회가 노예해방에 관심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노예제도의 폐지가 깊은 종교적인 관심사가 되었기 때문에, 친우들은 3세대에 걸쳐 노예제도 반대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초엽 영국의 퀘이커였던 엘리자베스 플라이(Elizabeth Fry)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복지문제에 대한 관심을 실행에 옮겼고, 퀘이커로 하여금 (범죄자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진시켜 줄 수 있는) 형벌제도에 대한 조사·연구작업을 시작하도록 했습니다.


친우회는 중대한 관심사가 있으면, 그것에 관련된 기관들을 설립하곤 합니다. 교육의 증진이 전반적인 관심사로 대두됨에 따라, 영국과 아일랜드 친우들은 기숙사를 둔 12개의 고등학교를 설립했으며, 북아메리카의 친우회는 학교뿐만 아니라 상급교육기관인 대학까지도 갖게 되었습니다. 전문적인 상무직원을 두고 있으면서, 친우들이 그들의 종교적인 통찰력을 실제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구위원회의 연회에서는 또 다른 관심사를 위해서도 새로운 기구를 설립합니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유럽대륙 등에 있는 친우들은 런던에 있는 "친우봉사협의회(the Friends Service Council)"와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친우봉사위원회(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등과 같은 봉사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이 두 단체 곧 "친우봉사협의회"와 "미국친우봉사위원회"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도와 준 활동에 대한 감사와 그들을 고취시켰던 평화주의자 신념에 대한 인정의 표시로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친우봉사위원회는 빨간 별과 검정 별이 겹친 모양의 마크를 그들의 상징으로 채택했는데, 이 마크는 1870년도의 전쟁 직후 불란서에서 활동했던 퀘이커 구호사업 담당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퀘이커 전통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봉사 활동은 그 시대의 도전에 대한 새로운 관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이 도전은 다음과 같은 많은 상이한 형태를 취해왔습니다.


1845년 에이레의 기근으로 인한 극심한 곤궁, 이와 비슷하게 1970년 Sahel(사엘)가뭄에 따른 지독한 궁핍: 실업자들, 경제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 소수인종 전쟁시 적국에서 거주하던 사람 등이 겪는 곤경: 무엇보다도 나치즘이나 공산주의 또는 제국주의나 인종차별을 피해 온 사람들과 인간에 대한 잔학 행위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 등.

 

4. 세계의 친우회

 

친우들은 봉사활동 계획에 따라 세계의 모든 대륙에 나가 있지만, 퀘이커주의를 널리 펼치는 데에는 크게 공헌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서독과 동독, 네덜란드, 스위스 등에 지금도 있는 연회(Yearly Meeting)와 오스트리아, 벨기에, 핀란드, 폴란드, 스페인 등에 작은 모임이 있는 유럽대륙을 제외하고는) 이들 몇몇 나라들은 빈약하기는 하지만 죠지 폭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퀘이커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나라에서 퀘이커주의에 대한 관심은 지1차 대전 후 친우들에 의해 수행된 광범위한 구호 사업과 유럽의 수도에 있는 퀘이커 국제 본부의 조직망의 설치에 의해 되살아나고 커졌습니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친우회는 전쟁의 죄악에 대한 기존 기독교회의 눈에 띄는 무관심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발전한 연회(Yearly Meeting)는 퀘이커주의의 두 가지 측면 즉,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평화주의자선언을 특별히 강조하였습니다. 비교적 소수의 회원인데도 불구하고 친우들은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리고 알제리아에서의 교전 동안과 그 교전이 끝난 후에 광범위한 구호 및 재활 프로그램을 수행했습니다. 퀘이커 평화선언에 대한 확고한 집념은 군국주의가 영어 사용권 국가들보다 훨씬 더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국가들의 군국주의적 전통에 대항해서 지켜지고 있습니다.


퀘이커주의의 확산이 퀘이커 봉사활동의 으뜸가는 목적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친우들이 19세기 복음주의적인 운동의 영향을 받아 열성적으로 벌였던 전도활동의 목표는 바로 퀘이커주의의 확산이었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에서 몇 개의 작은 연회가 생겨났는데 그 연회는 대부분 관계된 병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연회는 필라델피아 친우들의 전도의 소산입니다. 근동지역에는 지금도 단 하나의 연회가 레바논에 있는 영국 친우들과 팔레스타인에 있는 미국 친우들의 일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에는 두 개의 분리된 연회가 영국과 미국의 전도사업의 결과로 생겨났습니다. 조직된 퀘이커 단체가 본토의 혁명에서 살아 남지는 못했지만 중국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그러나 오하이오 연회의 친우들은 활동본부를 냉킹(Nanking)에서 아시아의 다른 어느 곳보다 더 커다란 연회를 만들었으며 지금도 필리핀에서 선교사업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퀘이커가 융성한 대만으로 옮겼습니다.


캐나다와 미국을 제외한 신대륙에서는 미국 친우들의 선교활동으로 자메이카, 쿠바, 중앙아메리카. 알래스카, 볼리비아 등에 연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쿠바의 연회는 (쿠바)혁명에서 살아 남기는 했지만 교세와 활동이 점점 미약해져 가고 있으며 과테말라에 있는 본부로부터 혼두라스(Honduras), 엘살바도르 벨리제까지 활동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런 발전은 캘리포니아 연회의 친우들에 의하여 촉진되고 있는데, 그들은 지금은 독립된 연회를 갖고 있는 알래스카의 에스키모인들에게까지 퀘이커주의를 전파시킬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볼리비아와 그 이웃나라인 페루 -현재 1-2만 명의 아이마라 인디안(Aymara Indians)이 독립된 연회의 친우들이 헌신적으로 배려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의 경우 영국 친우들은 런던연회의 또 다른 활동의 결과로 생겨 난 6천명의 회원을 가진 마다가스카르 섬의 강력한 모임과 비교할 때 비록 작기는 하지만 독립된 연회로서 계속 활동하는 선교 본부를 펩바에 설립했습니다. 말라가시의 친우들은 마다가스카르 섬에 처음이자 지금까지도 단 하나인 비퀘이커들과 결합한 퀘이커 "자"교회(a Quaker "daughter" church)의 한 유형인 예수그리스도 교회(the Church of Jesus Christ)를 설립하기 위하여 2개의 다른 교회와 연합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 나라의 어려운 문제들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부룬디에 있는 2천명의 친우들은 그들의 "모"교회("mother" church)인 캔사스 연회에 아직까지도 소속해 있습니다. 아프리카 지역에서의 선교활동 중에서 가장 눈부신 업적은 인디애나주의 리치몬드에서 온 미국 친우들에 의하여 설립된 케냐의 서부지방에 본부를 둔 동아프리카 연회의 창립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연회는 교육에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으며 그 지도적인 회원들에 의하여 케냐의 정치적, 문화적 생활에도 크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친우들은 남아프리카에 퀘이커주의를 전파했습니다, 그곳에는 짐바브웨와 말라위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 소수의 회원들로 구성된 활동적인 연회가 지금 있습니다. 영국 친우들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로 간 초기의 이주자들 가운데에도 섞여 있습니다. 그곳에는 현재도 활발한 연회가 오랜 기간 런던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에이레의 친우들은 한 번도 영국의 연회에 속해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분할된 섬의 전 지역을 관할하는 단 한 개의 연회로 연합돼 있습니다. 친우들은 코스타리카의 고지대에 있는 몬테베르디에 그들의 "식민지"(colony)를 갖고 있는데 알라바마주의 페어호프 모임(Fairhope Meeting)의 일부 친우들은 1951년 그곳에 퀘이커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그 회원들은 자기들이 살던 알라바마주에서 확산되어 가는 군국주의로부터의 피신처를 군대 없는 유일한 나라(코스카타리카)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현재 전세계 퀘이커 회원의 5분의 3을 차지하고 있는 북아메리카에서는 영국과 같은 시기에 퀘이커주의가 성장했습니다. 퀘이커들은 매사추세츠의 청교도들로부터 매우 혹독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초기의 과정은 그렇게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진해서 순교를 받아들이는 그들의 자세는 존경받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런던 연회의 창립보다도 몇 해 앞선 1661년에 뉴잉글랜드연회를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20년 후 보다 더 커진 그들의 활동력은 아메리카 퀘이커주의의 성장을 가져왔고, 그 무렵 윌리암 펜은 친우들이 퀘이커 신앙에 따라 예배를 드릴뿐만 아니라 평화주의자 원리대로 정부의 사무를 집행하는 기회를 갖게 되는 펜실베니아의 퀘이커 식민지(the Quaker colony of Pennsylvania)를 건설했습니다. 윌리암 펜의 "거룩한 실험(Holy Experiment)"은 퀘이커가 다스리고 있었던 동안에는 펜실베니아주에서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무기를 가진 싸움이 없도록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필라델피아는 항상 퀘이커주의의 매우 중요한 중심지이지만 그곳이 미국 퀘이커 활동에 있어서 (런던이 영국 친우회의 중심인 것과 같은) 그러한 중심지는 아닙니다. 통신 시설이 빈약한 데다가 거리도 너무 멀었기 때문에 전 미주 지역에서 단 한 개의 연회를 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했으며 독립할 때까지 6개의 연회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북아메리카에는 30개 이상의 연회가 (캐나다에 하나,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미국에) 있습니다. 많은 친우들은 노예제도가 없는 지역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싶어했기 때문에 대륙을 횡단하면서 서부로 서부로 이주한 결과 그렇게 많은 연회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지리적인 분리는 분립적인 발전을 가져옵니다. 아메리카의 퀘이커주의는(19세기의 다른 교파에서도 그러했듯이) 분립적인 기관을 세운 몇 개의 교파로 갈라져 왔습니다. 영국 친우들은 복음주의를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교파 분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특히 중서부 지방의 친우들은 이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아 19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부흥 운동(the revival movement)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부흥론자들(revivalist)의 종교 방식을 일부 받아들였습니다. 모임은 회원들 곧 최근에 개종한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건강을 돌볼 목사를 고용하고 미리 준비된 설교와 성경 봉독과 찬송가 부르기를 그들의 예배에 포함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즉, 퀘이커 모임집이 친우들의 교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목사의 인도 아래 짜여진 순서대로 진행하는 소위 "프로그램" 모임과 퀘이커 예배의 전통적 방식을 따르는 소위 "비(非)프로그램" 모임이라는 구별이 생겼습니다.


북아메리카에서 "프로그램" 모임의 친우들은 "비프로그램" 모임의 친우들보다 회원수가 많고 또한 해외 선교 사업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므로 전 세계의 친우회에서 그들의 퀘이커 예배 방식이 우세한 것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북아메리카의 비프로그램 모임 친우들은 필라델피아에 본부를 둔 친우전체협의회(The Friends General Conference)로 뭉쳐져 있습니다. 가장 큰 프로그램 모임인 친우연합회(Friends United Meeting)는 인디애나주의 리치몬드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또 다른 프로그램 모임인 복음주의친우연맹(the Evangelical Friends Alliance)은 부흥운동의 선교적이고 복음적인 정신을 보다 더 고집합니다. 덧붙여 이 세 그룹의 어디와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지만 주로 비프로그램 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는 연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보수적인 친우들(the Conservative Friends)인데 그들은 부흥론자들의 개혁에 의해 도전받았던 전통적인 퀘이커의 태도와 실천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퀘이커주의의 이러한 다른 방식들은 서로 섞여 있어서 같은 도시나 같은 주 혹은 같은 국가에서 나란히 발견되기도 합니다. 한 예로 멕시코에는 세 종류의 그룹이 따로 따로 자기들의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미국 친우회들의 그룹들은 서로가 고립된 채, "반대편"의 잘못을 단지 쳐다보기만 함으로써 자기들의 신념을 굳혀 나가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 당시 기독교회에 널리 펴졌었던 풍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있는 초교파 정신이 친우들에게도 미치고 있는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재연합입니다. 친우연합회에 가입하고 있는 프로그램 모임의 친우들과 친우전체협의회에 속하고 있는 비프로그램 모임의 친우들이 연합한 몇 개의 연회가 지금 있습니다. 그 친우들은 각각 서로 다른 예배 방식의 타당성을 받아들였으며, "미국친우봉사위원회"나 워싱턴 시에 있어 퀘이커 로비활동으로 잘 알려진 "국가법률 제정에 관한 친우위원회(the Friends Committee on National Legislation)"등의 사업에서 공통적 근거를 찾아냈던 것입니다.


재연합은 대화와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애쓰는 초교파 운동의 유일하거나 심지어 으뜸가는 목표는 아닙니다. 친우들은 이 세계에 있는 대부분의 연회들이 속해 있는 친우세계위원회(the Friends World Committee for Consultation)를 통하여 이것을 추구합니다. 이 위원회는 1937년에 창립되었고 지금은 매년 지역별 회합을 개최하는 세 개의 섹션(Section / 전미주 지역, 유럽 및 근동지역, 아프리카 지역)을 갖고 있습니다(지금은 아시아-서태평양 섹션이 추가되어 있음(편집자)). 세계 대표자 회의는 3년마다 열립니다. 이 모임들은 세계의 친우회를 구조적으로 결합시킨다던가 각각의 활동을 통일시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권면(Advices)의 말씀에 있듯이 "영원한 일들 속에서 서로를 알도록 힘쓸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서로를 풍부하게 해주는 계기를 제공하려 합니다. 서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마주 봄으로 해서 친우들은 "상대편"도 결국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고 친우회의 증거(witness)에 대해 부정할 수 없는 공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멀리서 볼 때 감당하지 못 할 것 같은 차이점이 가까이에 있음으로 해서 쉽게 극복되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이런 차이점은 비프로그램 모임의 친우들은 봉사 활동을 강조하고, 프로그램 특히 복음주의적 모임의 친우들은 선교에 중점을 둔다는 데서 생겼습니다. 즉, 한 편은 현실적인 필요에, 다른 한 편은 영적인 필요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었습니다. 친우들은 세계친우회 안에서 함께 토론을 해 나가는 중에 지금까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에 바탕을 두었다고 보았던 증거(witness)의 두 가지 방식이, 실상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어서 서로가 서로를 살려내는 정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세계선교위원회에서는 모든 친우들이 평화 수립을 위하여 선교와 봉사의 정신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함께 검토하고 있습니다.

 

5. 퀘이커 평화증언

 

미국에서 친우회는 메노나이트(Mennonites)와 형제교회(the Church of the Brethren)라는 다른 두 평화주의자 교회와 더불어 3대 "역사적 평화교회(Historic Peace Churches)"중의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세 종류의 교회는 폭력이 점점 늘어가는 우리의 시대 상황 속에서 그들의 평화증언을 다시 실험해보는 작업을 최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 친우회의 모든 상이한 그룹들도 이 "평화 수립을 위한 새로운 부흥"에 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공통된 퀘이커 유산인 평화 증언의 활동을 강화시키는 일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1651년 죠지 폭스는 크롬웰의 군대에서 지휘관 자격의 수여를 거부하면서 첫 번째 평화주의자 선언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나는 모든 전쟁 행위를 몰아내는 생명과 권능의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외적인 전쟁과 싸움을 무조건 반대하며 그 어떤 목적이나 어떤 명분을 내세운다해도 외적인 무기를 갖고 하는 모든 싸움을 철저히 부정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알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결코 외적인 무기를 가진 사람들과 대항하여 싸우거나 전쟁을 벌이는 일에 우리를 불러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싸움이나 전쟁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함도 아니요, 세상의 왕국을 위함도 아닙니다."


친우회는 결코 타협없는 선언을 3세기 이상 지지해 오고 있습니다. 친우회의 평화주의자 증언은 하나의 종교적인 관심사로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회원 각자가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그것은 회원들에게 "지켜야할 규범이나 규율이 아니라" 지침이나 안내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이 관심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일은 각 시대와 회원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일부 친우들은 징집법에 응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 끝에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친우들은 징집의무 대신에 봉사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양심적인(징집)거부자(conscientious objectors)로 등록하였습니다. 런던 친우회는 그들과 퀘이커 아닌 평화주의자들을 위하여 전쟁터 가까이에서 일하는 친우앰뷸런스부대(Friends Ambulance Unit)와 민간인들 가운데에서 일하는 친우구호봉사단(Friends Relief Service)을 조직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친우들은 민간인공공봉사단(Civilian Public Service) 업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다른 역사적 평화교회와 결합했는데 징집위원회는 이 대부분의 양심적 거부자들을 민간인공공봉사단에 배정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죠지 폭스가 1651년에 이룩했던 승리의 선언을 반복할 수는 없다고 깨달은 어떤 친우는 다른 사람들보다 퀘이커들에게 보다 쉽게 인정되는 군사의 의무의 면제를 요구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친우회는 각각 특이한 비상사태에 대처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하는 각종 평화 증언에 축복을 보냈습니다. 크리미야 전쟁의 전야에 죠셉 스터지(Joseph Sturge)가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1세를 방문한 일, 영국의 인도 지배를 평화적으로 종식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인도화해그룹(Indian Conciliation Group)의 활동, 1967년에서 1970년 사이에 일어났던 나이제리아 내란에서 적대 세력들을 화해시키려는 시도, 베트남 전쟁에서 양편 모두에게 의약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해준 일, 짐바브웨(Zimbabwe)에서 전쟁을 종식시킨 어려운 협상을 벌인 사람들을 지원하고 격려해 준 일, 등등 그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친우회는 평화와 이해 증진을 위하여 보다 더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추진합니다. 친우회는 국제문제란 오직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일반적인 통설을 반박하기 위하여 문서와 구두 선언 및 대중적인 평화시위 등등의 광범위한 평화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국민들끼리 우호적인 인간관계를 맺게 되면 그들 정부 사이의 관계를 향상시키는 데 보탬이 될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친우회는 수많은 다양한 형태의 국제회합과 국제 교류를 추진해 오고 있습니다. 친우들은 여러 해 동안 이와 같은 신념으로 활동해 오면서 세계 각처에서 온 외교관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들이 직업상 부딪히게 되는 국제적인 문제들을 아주 비공식적으로 함께 터놓고 상의할 수 있는 회담(Conferences)을 주선해 주고 있습니다.


친우들은 국제 기구가 평화를 수립하는데 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초기의 퀘이커 두 사람 즉 윌리암 펜과 죤 벨러스(John Bellers)는 각각 1694년과 1710년에 분쟁을 가라앉히는 수단으로 전쟁방지기구에 대한 제안을 공포했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전쟁방지기구의 모델은 20세기에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을 탄생시키게 한 사상 형성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친우들은 유엔이 평화주의자의 이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불완전한 인간의 기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국제적인 협동의 도구로서 유엔이 지닌 잠재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유엔을 지원합니다. 친우들은 '친우세계위원회'를 통하여 유엔에서 군축의 추진, 인권의 신장, 세계 자원의 올바른 분배들에 관한 그들의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자문역을 즐겨 맡습니다. 친우들은 이런 문제들을 제노바와 뉴욕에 있는 유엔 사무실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 "퀘이커 모임집"의 비공식적인 분위기에서 정부 대표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토의할 수 있습니다.


유엔에서 친우세계위원회를 대표하는 친우들이 국제적인 모임에서 퀘이커의 견해를 표시한 첫 번째 사람들은 아닙니다. 일찍이 1678년 로버트 버클리는 루이 14세와 화란인 사이의 평화 수립을 위하여 니즈메겐(Nijmegen)에 모인 대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과 우정어린 충고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버클리는 그들에게 자신의 "변호(Apology)"에서 약술한 기독교 원리를 채택함으로써 평화를 추구하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저서 "변호"는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위의 "서한"을 덧붙였습니다. 오늘날 친우들은 (버클리가 한 것처럼) 대표단의 서류에 그렇게 많은 분량의 퀘이커 문서를 첨부해서 보내는 일은 망설이겠지만 세속적인 일과 영적인 통찰력을 관련시켜 볼 때 친우들은 버클리의 믿음에 공감할 것입니다. 만일 국가의 지도자들이 평화에 대한 추구가 (퀘이거들이 쓰는 말로) "관심사로 부과된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어떠한 인간의 기구도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친우들을 주장합니다.


일반 대중 곧 관계된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종교적 동기를 요구하지 않는) 사이에서 평화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 예전보다 더 널리 퍼져 있습니다. 많은 친우들은 이런 관심을 나타내려고 설립된 새로운 조직들(대부분 비종교적인 조직들임)과 함께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새로운 평화 운동에 우리 시대의 특수한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미리 마련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친우들은 300년 이상 평화 증언을 지탱해온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란 평화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고한 신념인데, 그들은 이 신념을 다른 역사적 평화교회와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http://www.quakerseoul.org/

 퀘이커 서울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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