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중에, 〈끔찍하게 정상적인〉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6살 때 아버지 친구에게 성추행당했던 소녀는 25년 후 영화감독이 되어 가해자를 찾아간다. 남자는 소녀들의 입 속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언니도 같은 식으로 당했다. 아버지는 딸들에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를 대하라”고 했고, 가해자와 변함없는 친분을 유지했다. 영화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 어색한 대화가 오간 후 감독이 자리를 뜨려 하자, 남자는 “내가 뭘 도와줄까”라고 묻는다. 그때서야 감독은 분노하며 말한다. “당신이 도와줄 건 없고, (내게 떠넘겼던) 당신 짐이나 가져가.”
며칠 전 실연당한 친구를 상담했는데, 내가 보기엔 상대가 지나치게 잔인하게 굴었다. “우리 인연 여기까지, 그만해요”라고만 해도 충분할 것을, 인간 존재와 지난 시간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온갖 모욕을 주었다. 내가 이렇게 해야만 너는 나를 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공주·왕자병을 넘어 ‘성격 장애자’다. 자기 문제를 죄 없는, 더구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고 도망가는 것이다. 나는 친구에게 네 어깨에서 그의 짐을 내려놓으라고 말했다.
장애인권운동단체에서 일하는 후배가 분개하며 들려준 이야기. 도움을 청한 장애 학생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려 하자, 교사와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안마나 배우지 왜 공부하려고 하느냐”며 만류했다고 한다. 학생은 깊은 상처를 받았고, “제 욕심이 지나친가요?”라고 묻더란다. 자신의 눈으로 자기 삶을 정의하고 개척하고자 하는 이 학생 역시, 못난 사람들의 짐을 대신 지고 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차별과 폭력은 자기 잘못 때문이 아니다. 차별 의식과 행동으로 타인에게 상처 주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고통으로부터 면제된다. 반면, ‘피해자’는 ‘가해자’가 저지르는 행위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고통받는다. 두려움, 미성숙, 편견, 무관심 같은, ‘가해자’의 문제가 계급, 인종, 성별, 사랑 등의 권력 관계로 인해 피해자에게 전가된다. 자신과 대면을 피하기 위해 행하는 정치적인 힘의 구사. 이게, 보수주의다. ‘백인’, ‘남성’, ‘부자’의 약자에 대한 적대감과 비하는 그들의 문제지만, 그들의 권력은 약자를 가해의 원인 제공자로 둔갑시킨다. ‘권력자’들은 자신을 성찰하지 않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약자’는 이들의 짐을 대신 지고 살아간다. 한 사회의 민주주의는 ‘가해자’의 전가 행위가 정상화(“자연스러운 일”)되는 과정에, 사회 구성원들이 얼마나 깨어 있으며 저항하는가에 달려 있다.
나를 포함한 소시민들에게 삶의 피로 중 하나는, 권력 관계를 이용해 자기 짐을 남에게 떠넘기려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일이다. 우리는 약자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당한 남의 짐을 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다. “너 때문이야”, “사랑해줘”, “쟤네들 왜 그리 과격해”….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 짐을 맡길 사람, 나눠 가질 사람을 찾아 헤맨다. 지하철역이나 거리에 널린 잠언들, “그대 사랑과 눈물의 수고에 기대어, 나 이제 쉴 수 있어요”,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이런 말들에 감격하면서 말이다. 맥락에 따라 누구나 선한 이들에게 자기 짐을 부리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연말에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남에게 떠민 자기 짐 찾기가 아닐까. 물론, 쉽지 않은 정산이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