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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퀘이커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3.

 

퀘이커 서울모임

http://www.quakerseoul.org/

 

 

조지 폭스(George Fox, 1624.7. - 1691.1.13)

 
  1. 어둠 속에서 진리를 사모하여 - 시대 상황과 성장
2. 주께서 내 마음을 여시어 - '속의 빛'의 체험
3. 진리와 함께 전하며 가르치며 - 전도 여행
4. 진리의 일꾼 - 평가
 

무릇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서려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의 종교 꼴이 형성되는 데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에 한 큰 고비를 주실 때마다 또한 한 큰 인물을 주셔서 큰 역할을 하게 하십니다. 인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숨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섬나라 영국에서도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역사에 드러나 있지 않은 인물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유럽 대륙의 종교 개혁의 영향 아래 있던 17세기 영국에서 태어나서, 서양에서 생긴 종교 형태로서는 가장 동양적이라는 평을 듣는 한 단체가 형성되던 시기에 힘차게 그 이끄는 역할을 했던 조지 폭스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1. 어둠 속에서 진리를 사모하여 - 시대 상황과 성장

 

17세기 영국 사회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공화정에서 다시 왕정으로, 이렇게 사회 운영의 틀이라 할 수 있는 정치 체제를 넘나들기도 했던 그야말로 격랑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종교 문제와 더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영국도 대륙의 종교 개혁의 깊은 영향 아래서 혼란의 시대를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종교의 혼미 속에서 사회의 안정과 개인의 자유를 장려하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물려받은 진리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신중한 탐색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그러한 탐색에 나섰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중세를 지나온 카톨릭이나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교에도 영혼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로서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흔히 Seeker((참을) 찾는 자 / 구도자)라 불리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자신의 의지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새로운 계시를 기대했습니다. 조지 폭스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독특한 종교 체험과 뛰어난 지도력을 갖추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이미 일부 Seeker들로 이루어져 있던 '친우회(Friends)'에 힘을 더해 주고 하나의 신앙운동으로 정착시켜 이끌었던 사람입니다. 오늘날 퀘이커(Quakers)라 불리는 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는 바로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조지 폭스는 영국 중부의 레스터셔, 지금의 페니 드레이튼이라는 곳에서 정직하고 올곧은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Christopher Fox는 직공으로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공정한 크리스터'라 불리었으며, 어머니 Mary Lago는 비슷한 지위의 부인들보다 뛰어난 교양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조지 폭스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공식 교육을 얼마나 받았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나이에 비해 신앙심이 깊고, 생각하기를 좋아했으며, 침착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사려가 깊어서 그가 어떤 사실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면 모두들 깜짝 놀랐으며, 영(spirit)의 일들에 관해서 특히 그러했다고 윌리엄 팬은 전합니다. 그의 십대 시절, 폭스는 목사(priest)가 될 것을 바라는 친척들의 희망을 뒤로한 채 어느 구두제조업자 밑에서 일하면서 양털 장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폭스가 일단 한번 "정말입니다"하면 어쩔 수가 없다'고 평할 정도로 정직하고 성실했습니다. 물건을 속여 팔던 시대에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성실과 정직을 비웃었습니다만, 결국은 그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업도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집을 떠난 후에는 파산지경을 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윌리암 팬(William Penn, 1644.10.14 - 1718.7.30)에 의하면, 폭스는 양치는 일을 아주 좋아해서 양치는 솜씨가 훌륭했는데, 양치는 일은 깨끗하고 고독했던 폭스의 성격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일로서, 후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역하고 봉사하는 일의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

 

 

2. "주께서 내 마음을 여시어" - '속의 빛'의 체험

 

폭스의 신앙의 신실함은 1644년 그의 나이 20이 되던 해에 그를 심각한 고뇌에 휩싸이게 했습니다. 이미 18세에 종교 수업 혹은 체험을 바라고 집을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사회·종교의 문제들을 두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시험받으셨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입니다. 친척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목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위로와 해결을 구해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그들의 실제 삶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알고서는 그들의 신앙의 실상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흔히 그렇듯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번민하는 그를 두고 친척들은 결혼을 시키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정치 싸움에 필요한 지원 부대에 가담하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영의 진리에 민감해 있는 젊은이에게 주는 그러한 제안에 폭스는 몹시도 서글퍼했습니다. 그는 이즈음의 심경을 자신의 일기(Journal)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몸은 그야말로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으로 메말라 있었고, 그러한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벙어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이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게 나았을 것 같았다.

 

고뇌하던 폭스는 하나 둘 깨달음을 얻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일이 '주께서 내 마음을 여시어(opened)' 된 일이라고 분명히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열어 보이신 깨달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신교도이건 카톨릭교도이건 모두가 같은 그리스도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들이어야 한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일꾼의 자격을 온전히 갖추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계신다.' 여기 마지막의 것은 스테반과 바울이 전하는, '주의 백성은 주의 전이며 주께서 주의 백성 안에 계신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당시의 혼란을 틈 타, '여자들은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폭스는 마리아의 찬양을 인용해 그것을 반박했습니다. 폭스의 이러한 깨달음들은 그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들이 있긴 했지만 폭스의 고뇌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이 '아브라함의 가슴속에 있었노라'고 생각할 정도로 큰 기쁨을 맛보는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번민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목사들에게는 실망을 했지만 그는 번민을 씻기 위해서 '열림'의 경험을 한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만났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도달한 것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사람에 대한 희망도 끊어지고 어떻게 해야할지도 몰라했습니다. 이렇게 실의에 빠져 있던 바로 그 때! 바로 그 때, 그에게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 분,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분만이 네 처지를 말해줄 수 있다."

 

폭스는 이 음성에 너무 기뻐서 훌쩍훌쩍 뛰었습니다. 이 음성은 영의 문제로 고민하고 진리를 고대하던 그에게 이전의 다른 어떤 깨달음보다도 더욱 크고 뚜렷한 것이었습니다. 폭스가 들었던 그 음성이 후에 "속의 빛"이라 불리게 된 바로 그것입니다. 그 빛은 또한 "속에 계신 그리스도," "각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것(that of God in every one),"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증거" 등으로도 불리게 됩니다. 그 빛은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 빛은 모든 사람을 비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9). 이 음성은 이후 폭스 자신의 생애와 퀘이커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퀘이커들은 폭스의 이 체험을 진실한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폭스는 자신의 이 체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왜 이 땅에는 내 처지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가를 주님은 깨닫게 하셨으며 그 때문에 나는 주께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사람들 모두가 나처럼 죄 아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불신앙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탁월하신 분으로 우리를 깨우치시며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믿음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면 누가 우리를 가로막겠는가? 이러한 사실을 나는 경험으로 알았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 성경에서 읽기는 하였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나, 이제 계시를 통해 열쇠를 가지신 분이 그 문을 여셨으며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로 나를 인도하셨다.

 

이 체험이 있은 후에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성경이 크게 열리는 체험을 주시고, 사물의 이치를 열어 보이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체험들을 통해 그는 '빛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을 보게 되었고, 어둠과 죽음과 유혹과 불의와 불경건 등이 빛 가운데 분명히 드러남'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위대함을 깨닫고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러한 모든 체험들을 계기로 그는 자신이 '마치 새로이 만들어져 바뀐 것처럼 용모와 사람이 바뀌었다'고 고백합니다. 변화된 폭스에게 이제 세상은 '온통 거두어 들여야 할 하나님의 씨앗들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3. 진리와 함께 전하며 가르치며 - 전도 여행

 

조지 폭스가 진리를 전하기 시작한 것은 종교 체험이 있은 1647년부터였습니다. 이 후, 그는 잉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아메리카 지역까지 두루 돌며 오해와 박해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심각한 정치의 혼란을 겪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반란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거나 모함을 받았고, 수없이 부당한 처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담대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며 전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윌리엄 팬은 폭스의 기도가 자신이 보고 느낀 기도 가운데 가장 놀랍고도 생생하고 경건한 기도라 증언한 바 있습니다. '그의 영혼은 무게와 깊이가 있었고, 말과 행실이 진지하였고, 말수는 적었지만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였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속의 빛'을 전하면서도 성경을 바로 알 것을 가르쳤습니다. 성서는 그의 행동과 가르침의 규범 역할을 했으며, 폭스에게 있어 속의 빛과 성경은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통해 성경을 주셨다는 것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배웠던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과, 바로 그 영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성경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전파하러 전국을 돌기 시작한 초기에, 폭스는 논쟁적인 목적으로 열리는 한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설교자의 설교가 끝난 후, 어떤 여성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벧 1:23)라는 구절의 뜻을 설교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설교자는 '교회에서 여자가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을 막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누구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던 설교자 자신의 말을 모순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폭스가 다른 방향에서 이 논쟁에 가세했습니다. "이 뾰족집(steeple-house)을 교회라고 하십니까? 아니면 여기 함께 섞여 있는 사람들을 교회라고 하십니까?" 설교자가 대답 대신 폭스의 의견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회는 살아 있는 돌, 곧 살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영적인 집으로 진리의 기둥과 초석이 되는 곳이며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는 곳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섞여 있는 군중의 머리도 아니시며 석회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오래된 집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 아니다.


 

폭스는 대성당이나 집회 장소로 쓰이는 건물에 대해서는 뾰족집이라 부르며 드물게 '영적인 신앙 공동체'에 한해서만 '교회'라 했습니다(폭스 이후로 퀘이커들은 자신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곳을 "모임 집"(meeting-house)이라 부릅니다).


폭스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존중하였으며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사회의 약자(고아, 과부, 나그네)를 찾아보고 돌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전했습니다. 노예들을 학대하지 말고 오직 옳고 공정하게 대하라고 권고하며, 노예들에게는 의무를 다하며 정직할 것을 충고했습니다. 노예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계승 발전하여 나중에 미국에서 퀘이커들의 선도적인 노예폐지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폭스는 사람을 차별해 부르던 당시의 호칭 You를 사용하지 않고 Thou(그대), Thee를 사용하여 불렀으며, 신분과 지위 고하에 따라 모자를 벗는 일도 거부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들을 매우 불쾌하게 만들어 시비의 대상이 되었으며, 법정에서도 그가 과연 그럴 것인지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 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폭스는 법정의 재판관 앞에 불려가서 You 대신 Thou를 사용하고 모자를 벗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그대로 실천해 보였습니다. 모자를 벗음으로써 법정의 권위를 도모하던 시절에 그는 "모자를 벗음으로 얻게 되는 영광은 하나님께서 땅에 묻으실 영광이며,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서 사람들끼리 서로 얻고자 하는 영광이자 불신자의 표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진리를 전하는 중에 폭스는 여러 번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 대부분이 오해와 시기, 모함에 의한 것이었지만, 맹세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갇힌 경우도 있었습니다. 1662년에 '퀘이커교도라고 하는 특정한 사람이나 맹세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일으킬 수 있는 사고나 위험을 막기 위한' 법률안이 통과되었는데, 거기에는 맹세를 거부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맹세를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행위는 대체로 불법이며, 하나님의 말씀과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선언되어 있었습니다. 재판관들은 폭스에게 잉글랜드 국왕의 주권과 그에 대한 충성을 승인하는 맹세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폭스는 '평생 한번도 맹세를 한 적이 없으며, 약속이나 계약을 맺은 일도 없다'면서 맹세를 거부했습니다. 맹세를 거부하는 이유가 그 자신에게는 매우 분명했습니다.


 

나는 맹세하는 것에 충성하지 않고, 진리와 신뢰할 수 있는 것에 충성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데 하물며 왕이라면 말해 뭐하겠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맹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그리스도의 말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말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결국 폭스는 수감되었고, 그 재판이 열렸던 마을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법정에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성서를 두고 맹세하라고 폭스에게 성서를 주었는데, 성서를 인정하고 성서에 나온대로 했다고 해서 폭스만 갇혔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폭스만이 아니었습니다. 질서를 어지럽히고 미혹한다하여 수많은 친우회원들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1664년에, 국교 모임을 제외하고는 다섯 사람 이상 모이는 종교 모임을 금하고 선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처벌하라는 비밀집회법(Conventicle Act)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친우회원들은 드러내놓고 모이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곤경이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친우회원들이 투옥된 후 그 가정이 겪는 곤란 등 여러 현실적 어려움들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폭스는 이런 현실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주의를 기울이고, 무질서하고 경솔하게 행하며 진리의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충고하고 권면하기 위해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친우회원들에게 월회(monthly meeting)의 조직을 제안하고 이끌었습니다. 이미 있던 사계회(quarterly meeting)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치 그 수가 늘어났으며, 곤란을 극복할 수 있을 만한 조직력도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폭스는 주의 일을 하는 것과 동시에 모임의 체계와 행정을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이 일은 폭스의 창의력과 지도력을 드러내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장기간의 여행과 투옥으로 폭스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급기야 눈과 귀가 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회복하고는 다시 진리를 전하고 친우들을 격려했습니다. 영국에서 핍박이 누그러지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아메리카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오랜 항해 후에 남아메리카 북단의 여러 섬들을 거쳐 그 너른 북아메리카의 강과 들과 산을 누비며 친우들을 격려하고 진리를 전했습니다. 기회가 닿는 대로 그곳의 토착 주민들(인디언)과도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럴 때면 추장을 비롯 부족 의회원과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애정 어린 경청을 보였으며, 폭스의 말에 공감하였습니다. 그가 본국으로 돌아 간 것은 2년여 후의 일이었습니다.

 

4. 진리의 일꾼 - 평가

 

폭스의 삶이 결코 완전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도 시공의 제약을 받는 인간임이 분명합니다. 그도 부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 예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담대하고, 말과 행동이 솔직했으며, 독창적이고, 무엇보다도 그의 영혼이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하여 충직했음은 긍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의 혼란을 틈타 가능하면 물건을 속여 팔고 부당하게 재판하던 '속임의 시대'에 영혼의 내면에 뿌리를 둔 진실의 삶을 살았음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았던 폭스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폭스는 신비가의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비가는 아무런 매개 없이 절대자와 대면하려는 사람입니다. 폭스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알고자 하기보다는 그 분을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신학 이론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인격 깊은 곳에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영과 만나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모든 인간에게 다가가신다는 발견에 다름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 경험 이후 폭스는 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으로 살았으니, 그를 신비가의 한 사람이라 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그는 진리의 일꾼이었습니다. 유한 것들을 부정하는 신비가들은 세상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자기 개인 속으로 물러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폭스는 진리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려는 일에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오해와 역경을 무릅쓰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피곤하고도 위험한 오랜 항해를 마다하지 않았던 진리의 종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신비가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폭스는 진리의 인도를 받는 개혁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개혁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느끼려는 전인격의 행위입니다. 그 때문에 영과 참으로 드리는 예배는 다른 어떤 수단이나 대리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느끼려는 빈(열린) 마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폭스는 당시 그저 모양뿐이던 예배 형식을 거부하고 고요 속에서(Silence) 주님을 기다리는 가운데 예배했습니다. 그는 또한 불평등한 사회의 관습과 구조를 신앙의 빛 아래서 저항하고 고쳐 나가려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개혁가였습니다. 그의 개혁자로서의 삶은 정체(停滯) 없는 진리의 역동성의 한 드러남이요, 신앙과 실천의 회통(會通)이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