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07-08-24 오후 07:18:04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231269.html
‘비극의 땅’ 다르푸르 난민촌에 가다 | |
사막이 된 밭, 벽돌찍기로 연명…밤엔 성폭행 공포 | |
서수민 기자 | |
인종청소 피해 고향 버리고 몰려들어
수단의 다르푸르는 21세기 최악의 인종학살이 빚어진 곳이다. <한겨레>는 지난달 끝모를 분쟁이 이어지고 있는 황량한 다르푸르 현지를 찾아 벼랑 끝으로 내몰린 주민들의 고통스런 삶을 취재했다. 한국 신문으로는 처음이다. 피살 사건이 속출하고, 구호단체 요원도 폭행당하는 이곳에선 외신 기자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편집자
수도 하르툼에서 ‘비극의 땅’ 다르푸르로 가는 비행기 아래에는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조금씩 보이던 푸르름이 가시더니 붉은 사막이 등장했다. 버석거릴 것 같은 모래언덕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다르푸르로 좀더 가까이 다가서면서 지붕은 타버리고 검은 벽과 집터만 남은 마을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람은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마침내 다르푸르에 도착한 것이다.
다르푸르의 최대 관문인 엘파시르 공항에서 ‘알 살람’ 난민 캠프까지 가는 길은 의외로 활기가 넘쳤다. 사람과 물건, 당나귀와 염소가 뒤엉킨 시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이 도시의 상징인 ‘티코’ 택시는 빈 차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분쟁 지역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다르푸르 난민 40여만명이 사는 엘파시르 시는 그 자체가 거대한 난민 캠프나 다름없다. 비닐과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집들은 훅 불면 날아갈 듯이 보였다. 어린이들이 모래밭에서 뒹굴며 노는 사이, 어머니들은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 수도 펌프 옆에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여성들은 분주하기 그지없는데, 남성들은 그늘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
엘파시르 북쪽 주요 난민수용소 가운데 하나인 알 살람 캠프에는 난민 4만명이 머물고 있다. 다르푸르 분쟁을 ‘인종청소’가 아닌 ‘내전’으로 규정하는 수단 정부는 이들을 ‘난민’이 아닌 ‘국내 피란민’(Internally Displaced Persons·IDP)이라고 부른다. 캠프의 겉모습은 분쟁지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난민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내부에선 성폭행 등 잔혹한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이곳에서 만난 아샤(33)는 캠프내 벽돌공장에서 일한다. 가축을 먹일 풀조차 없는 이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벽돌을 찍을 붉은 모래만은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는 날마다 수백개의 벽돌을 만들지만, 밤마다 벽돌이 아닌 비닐로 만든 천막에서 잠을 청한다.
|
||||||
“우리 부족은 이런 사막에 살지 않았어요.” 다르푸르 중부에 살던 아샤네 가족은 토마토와 땅콩, 수박 농사를 지으며 가축을 길렀다. 넉넉하지 않지만 손님이 오면 한 끼를 대접할 수 있는 행복한 삶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10년 전부터인가, 가뭄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해마다 가뭄이 더욱 맹렬해지면서 가축들이 죽어 나갔다. “밭에 씨를 뿌려도 수확은 이전의 절반에 그쳤어요. 결국 우리는 물이 있는 마을로 떠났고요.” 유엔은 1980년대 초 이후 다르푸르 남부지역 강수량이 40% 이상 줄어든 것으로 추산한다.
가뭄을 피해 남으로 밀려드는 주민들과 토박이들과의 갈등이 심화된 것도 이때다. 2004년 봄, 아샤가 살던 카르메이에도 악명 높은 ‘잔자위드’(친정부 민병대)가 들이닥쳤다. “수단 정부군이 옷을 벗으면 잔자위드죠. 그들은 헬리콥터도 있어요.” 가족은 마을 인근 계곡에 몸을 숨겼지만, 잔자위드의 폭격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그뒤 2주 동안 150㎞의 사막을 가로질러 이 캠프로 왔다.
난민 캠프는 밤이 되면 살벌해진다. 강간은 흔하다. 성폭행당한 여성이 ‘더러운’ 사람으로 간주되는 수단 사회에서 강간당한 여성들이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샤는 “땔감을 모으러 마을 밖으로 나갈 때가 제일 위험하다”며 “이 캠프의 여성들 가운데 절반 가까이는 강간을 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
서구에서는 다르푸르 사태를 촉발한 직접적 원인을 ‘지구 온난화에 따른 사막화’로 보고 있다. 하지만 기후변화라는 껍질 속에는 아랍-아프리카계 인종갈등, 그 갈등 뒤에는 영국 식민통치로 거슬러 올라가는 제국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하르툼에서 만난 한 다국적기업 간부는 말했다.
“서방은 수단이 테러와의 전쟁에 협조해왔기 때문에, 중국은 수단산 석유의 최대 구매자이기 때문에 모두 사태 개입을 꺼려왔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비판이 고조되자 서방은 방향을 틀었다. 미국으로서는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난민들에 대한 우려는 이차적이다.”
다르푸르의 마지막날 밤, 먼 곳에서 간간이 총성이 들려왔다. 칠흑같은 어둠 탓에 어느 지역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다르푸르를 떠나는 비행기가 이륙에 성공하자 탑승자들 몇몇이 박수를 쳤다. 창피하지만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게 기뻤다. 창문 밖 비행기의 날개 아래 살람 캠프의 비닐지붕들이 반짝거렸다.
다르푸르/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 |
다르푸르 주둔 아프리카연합평화군 아과이 사령관 인터뷰
“아프리카 형제는 아프리카가 지킬것”
다르푸르에는 현재 7천여명의 아프리카연합(AU)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다. 2004년 처음 파견된 이들은 이 지역의 유일한 외국군으로 치안 유지를 도맡아왔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는 ‘무능력했다’로 요약된다. 초기 150명에서 7천여명으로 규모는 늘어났지만, 민병대의 학살을 제대로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
||||
엘파셰르 평화유지군 사령부에서 만난 마틴 아과이(사진) 아프리카연합 평화유지군 신임 사령관은 이런 비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만큼 큰 지역에 7천명은 턱없이 적은 숫자”라며 어려움을 강조했다. 더욱이 수도나 전기 등 인프라가 부재한 지역에서 벌이는 평화유지 활동은 상당히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항변이다.
실제 이들이 처한 여건이 매우 열악하다. 나이지리아(2100명), 르완다(1790명), 감비아(216명), 세네갈(570명) 등에서 온 평화유지군 병사들은 다섯 달 넘게 월급도 받지 못했다. 현지에서 만난 병사들은 “식사나 숙소 등도 유례없이 열악하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렇지만 아과이 사령관은 “이번 평화유지군의 가장 큰 의의는 아프리카가 대륙의 일에 직접 팔을 걷고 나섰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아프리카연합은 이미 시에라리온 등에서 분쟁을 종식하고 평화로운 정권 유지를 이끌어냈다”며 “아프리카인이 형제들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아프리카 역사상 최대 규모 평화유지군의 창설은 1994년 르완다 ‘인종청소’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했다. 당시 100만명 이상이 숨지는 처참한 사태가 발생했지만 아프리카 주요국들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이지리아 육군 참모총장 출신인 아과이는 앞으로 유엔·아프리카연합 혼성군 사령관도 겸직할 예정이다. 그는 “유엔군 2만명이 추가되면 우리의 역량은 10배 가까이 늘어날 것”이라며 “평화유지군의 역량 강화를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물질적 지원 또한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확대된 역량을 치안유지와 재건사업 보조로 양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그동안 우리가 무장세력과의 전투에 전념하느라 수용소 내 치안과 성폭력 문제 등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게 사실”이라고 시인한 뒤 “총성은 멎었지만 어린이와 여성들의 고통은 이어지고, 고향에 돌아가도 먹고살 길은 막막하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르푸르/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
기사등록 : 2007-08-24 오후 07:18:04 기사수정 : 2007-08-25 오전 10:32:19 |
'세상 이야기 >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잘나가던 美전쟁용역업체, 이라크에서 철퇴(프레시안 070919) (0) | 2007.09.19 |
---|---|
벨기에 `분열 위기' 확산 (연합뉴스 070905) (0) | 2007.09.06 |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월간 사회운동 011217) (0) | 2007.08.19 |
아베 정권의 참패와 '야당'의 탄생 (레디앙 070807) (0) | 2007.08.12 |
[이라크 현장리포트②](콕번, 프레시안 070810) (0) | 2007.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