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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에 출현한 이양선. 당시에는 일부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런 이양선을 타고 조선침탈에 앞장서기도 했다. 사진은 1871년 4월 14일 남양만에 출현한 미 아시아함대 소속 콜로라도호의 모습. 출처: <고등학교 역사부도>. |
ⓒ <고등학교 역사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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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 샘물교회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권혁수 장로가 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구한말에 미국 선교사들도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했다"는 주장을 해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의 아프간 인질사태를 구한말의 개신교 순교와 연결시키면서, 앞으로도 계속 유사한 활동을 수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히는 발언이다.
샘물교회 관계자의 발언에서 잘 드러나는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19세기말 서양인들의 조선 선교를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구한말 개신교 순교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고 있는 영국 출신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년)의 경우를 보면, 그의 죽음이 실제로는 종교적 순교라기보다는 정치적 죽음에 불과했다는 점을 잘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의 직업이 목사였던 그는 조선에 와서 선교를 하기보다는 서양제국주의의 조선침탈에 앞장선 면이 더 크다는 점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통해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의문①] 토마스, 목사 아닌 통역관으로 탑승
첫째, 토마스의 직업이 목사이긴 했지만, 그는 목사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통역관 신분으로서 제너럴셔먼호에 탑승했다. 이 배의 상인들이 토마스의 입술에서 기대한 것은 조선어 통역이었지 '목사'의 설교가 아니었다.
원래의 직업이 목사였다고 하더라도 제너럴셔먼호라는 상선에 통역관의 신분으로 탔다가 사망한 것이라면, 그 죽음을 통역관의 죽음으로 봐야지 목사의 죽음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죽음을 순교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의문②] 수상한 제너럴셔먼호, 알고보니 해적선?
둘째, 토마스가 탄 제너럴셔먼호는 '목사'가 타기에는 정체가 좀 수상한 배였다. 제너럴셔먼호의 실체에 관해서는 두 개의 학설이 있다.
제1설은 '제너럴셔먼호는 본래 미 해군 소속 프린세스 로열호였는데, 프린스턴이라는 무역상이 구입한 뒤 제너럴셔먼호라고 개칭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미 해군의 공식문서에 따르면 프린세스 로열호가 민간에 판매된 시점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이라는 점에서, 이 학설은 타당성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제2설은 '제너럴셔먼호는 중국·베트남·태국 기타 동남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해적선'이라는 견해다. 평양의 과학백과출판사가 1980년에 펴낸 <조선전사> 권13이 취하고 있는 입장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관한 한 북한측 연구자들이 권위자일 뿐만 아니라 현재 제2설을 반박할 만한 뚜렷한 반대주장도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제너럴셔먼호가 해적선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목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해적선으로 의심되는 배의 통역관 노릇을 수행했다면, 그런 인물을 과연 제대로 된 목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인물의 죽음으로부터 일말의 거룩함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의문③] 조선원정 신청했던 '조선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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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당 샘물교회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권혁수 장로는 "구한말에 미국 선교사들도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했다"는 주장을 해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사진은 분당 샘물교회 건물. |
ⓒ 오마이뉴스 남소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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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토마스는 한 때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에 편승하여 조선선교를 기획한 적이 있을 정도로, 하나님보다는 제국주의침략자들에게 더 의존한 인물이었다. 그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의 정당성 여부를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토마스의 1866년 8월 1일자 서한을 연구한 김승태는 1995년 7월호 <복음과 상황>에 기고한 '토마스 목사의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과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라는 논문에서, 셔먼호 사건 직전에 토마스가 로즈 제독 휘하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에 참여하겠다고 신청하여 승인을 얻은 사실이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
26세의 열혈 청년이었던 그는 '조선을 처음 방문한 개신교 선교사'가 되려는 열망에 몰입된 나머지, 이처럼 아무 거리낌도 없이 부당한 방법으로 조선선교의 꿈을 이루려 했다.
1832년에 이미 귀츠라프라는 개신교 목사가 최초로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최초' 타이틀을 쓰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경보다는 기네스북이 더 소중할 것이다.
[의문④] 목사님의 최우선 관심사는 '교역'
넷째, 제너럴셔먼호에서 토마스와 접촉한 조선 관리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토마스는 진중한 목사라기보다는 차라리 허풍스러운 상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본업이 목사라고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그렇게 행동했다.
당시의 탐문기록을 전하고 있는 <평양지> 등에 따르면, 권총과 환도를 차고 조선 관리들을 응대한 토마스 '목사님'은 "우리의 최우선 관심사는 교역"이라면서 "조선이 우리와 교역을 하면, 내가 직접 베이징에 가서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을 만류해보겠노라"고 허풍을 치기도 하였다.
상선의 일개 통역관이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을 막아주겠다는 말을 했다면, 당시의 조선 관헌들이 그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혹시라도 이 청년이 서양의 성직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의문⑤] 성경 뿌리며 죽었다? 목숨 구걸하며 죽었다
다섯째, 알려진 대로 토마스는 죽기까지 복음을 전파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는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하는 등 '성직자'라기보다는 그냥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에 전설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토마스의 최후는 다음과 같다.
"1866년 7월 24일 정오 무렵 평양성의 군민들이 제너럴셔먼호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토마스 목사는 죽기 직전까지 강안의 군중을 향해 성경을 뿌렸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군인에게까지 성경을 건네주었다. 그 군인은 그때 받은 성경을 읽고 나서 감화되어 훗날 개신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전설'의 기초가 되고 있는 미국인 선교사 게일(J.S. Gale)과 오문환 목사의 저술이 실제로는 사건 발생 수십 년 후에 나이든 개신교도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위의 이야기를 입증할 객관적 자료는 없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토마스 목사의 최후에 관해서라면, 사건 당시 기록된 조선측 문서가 훨씬 더 신빙성이 높을 것이다. 당시의 기록은 토마스가 목사라는 사실을 모른 상태에서 쓰인 것이므로, 조선측이 개신교를 모독하기 위해 사실을 조작했을 것이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당시의 조선 관헌들은 이 약간 '시건방진' 셔먼호 통역이 설마 목사님라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운하견문록>에 수록되어 있는 <적호기>에 따르면, 제너럴셔먼호가 불타던 그날 "(토마스는) 뱃머리에 나와 서서 조선 중군이 잃어버린 인신(印信, 신표)을 창끝에 걸고 바치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조선 중군(관직명)에게서 빼앗은 신표를 돌려줄 테니 나를 살려달라고 애원한 것이다.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의 친구이자 유명한 시인인 조면호의 <서사잡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궁지에 몰린 토마스가 배에서 뛰어내려 항복을 했으나, 분노한 평양성 주민들이 그를 때리고 짓밟아 죽였다는 것이다.
분노한 주민들이 토마스를 죽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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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조 한민족복지재단 이사장은 지난 7월 23일 오전 경기도 분당 샘물교회에서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과 관련해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했다. |
ⓒ 오마이뉴스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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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지>의 내용도 유사하다. 이 기록은 좀 더 자세한 편이다.
"(토마스가) 항복하고 중군의 인신을 바치면서 생환을 애걸하자, 겸중군 백낙연이 '잔당을 모두 불러내오면 잘 대접한 뒤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 요구를 받아들인) 토마스가 편지를 셔먼호에 전달했는데, 그 편지에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모르겠으나 배에 있는 자들이 나오기는커녕 도리어 총포를 마구 쏘는 바람에, 셔먼호에 화공을 가하는 한편 토마스와 자오링펑을 묶어 군인들에게 넘겼다. 그때 인민들 중에서 셔먼호 일당에게 살상된 자의 가족들이 달려들어 두 사람을 살육했다."
위의 세 기록에서 공통적인 것은, 토마스는 죽기까지 전도를 한 게 아니라 죽기까지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애원한 것도 물론 나쁜 일은 아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도 그는 목사로서가 아니라 상선 통역으로서 조선에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죽은 사람을 두고 "죽기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미화한다면, 그것은 엄연한 사실의 왜곡일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평양 군중들이 토마스를 죽인 이유는 간단하다. 목사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제너럴셔먼호의 조선침탈에 앞장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인물의 죽음을 두고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순교로 미화하고 있으니, 이는 역사를 왜곡하고도 한참 왜곡하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또 목사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전도를 하지 않고 해적선으로 의심되는 배의 통역관으로 활동했다면, 이는 하나님과 개신교 전체를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다. 죽음이 그의 과오를 덮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서양제국주의의 조선 침탈에 앞장서다가 평양 군민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토마스 목사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구한말 조선에서 있었던 서양인 사망은 사실 종교적 순교라기보다는 정치적 희생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 죽음을 거룩한 순교로 미화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고 개신교도들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예수는 다른 종교를 모독하지 않았다
서두에 언급한 샘물교회 관계자의 주장처럼, 구한말에는 목숨을 걸고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 선교사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토마스처럼 서양제국주의의 조선침탈에 편승해서 조선에 겁없이 들어왔다가 헛된 정치적 죽음을 당한 예가 많았다. 외세의 침탈에 맞서 국권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보고 죽인 게 아니라 조선 자체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죽인 것이다.
한국 개신교가 위와 같은 19세기 서양 선교사들의 선례를 본받고자 한다면 제2의 아프간 인질사태는 앞으로도 계속 빈발할 것이고, 그 때마다 한국 국민과 정부는 그 뒷감당을 하느라고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 무엇보다도, 그럴 때마다 한국 개신교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이용당하는 오욕의 역사를 축적해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사태에서 확인된 것처럼 미국은 한국 개신교인들의 목숨에는 별 관심도 없는데, 그런 미국의 세계전략에 이용당할 행위를 한국 개신교가 굳이 목숨걸고 할 필요가 있을까?
예수는 로마제국의 약소국 침략에 앞장서지도 않고 또 타종교를 모독하지도 않았는데, 오늘날 일부 개신교인들은 대체 누구를 본받고 있는 걸까? 해적선에 올라탄 '열혈 청년' 토마스를 본받고 있는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