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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리영희 선생에게서 듣는 무위당의 삶과 사상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5.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

http://www.jangilsoon.co.kr/pds/view.php?forum=book1&st=&sk=&page=4&num=6

 

 

“밖에 있으면서 안에 있던 분”
리영희 선생에게서 듣는 무위당의 삶과 사상


대담  :  전표열

원로 언론인이자 우리 시대 실천적 사유의 나침반이셨던 전 한양대 교수인 리영희 선생님은 생명운동의 스승이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던 사이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큰 스승이신 두 분의 만남을 리영희 선생님으로부터 들어보고자 대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여기 수록하는 이 대담 기록은 〈무위당을 기리는 사람들〉소식지 제2호(2001년 11월 1일)에 발표된 것입니다. 대담을 진행하신 전표열 선생님은 현재 도서출판 한살림의 전무로 일하고 있습니다.


전표열    몇년 전에 내신《스핑크스의 코》라는 책에서 무위당 선생과의 각별한 관계를 말씀하신 적이 있고, 현재는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의 자문위원도 맡고 계신데 ⋯ 이참에 두분이 처음 만나시게 된 배경을 말씀해 주십시오.


리영희    그게 정확히 몇년도라는 생각이 나질 않아요.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쯤인데 그 무렵 김지하 시인이 우리집에 자주 드나들었어요. 제 기동에 살 때인데 김 시인이 이런 분이 계시다고 해서 원주로 찾아가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원주에서 ‘재해대책사업’인가를 할 때였지요. 지학순 주교를 먼저 뵈었는지, 장 선생을 먼저 뵙게 되었는지, 거의 동시인 것도 같고 ⋯ 너무나 그 살아오신 삶이 놀랍고, 우러러 보이고, 우리 속세에만 사는 사람들은 생각지 못한 그런 삶이었는데, 거기서 크게 감동 받았어요. 저는 참 자주 드나들고 가깝게 지냈습니다.


전표열  무위당 선생이 교육, 통일, 정치문제 등의 현실참여 운동에 관여하시다가 70년대 말부터 운동 방향이 좀 바뀌었지요? 아마 박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나서 방향을 바꾸신 것 같은데요.


리영희  그렇죠. 그런데 그건 한참 지나서이고, 농민운동을 주도하고 계실 때였는데 무위당 선생은 농민들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도들에게 사회와 인간의 관계 특히 정치, 경제, 문화, 역사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인간들로서의 우리 농민들, 대중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에 관해서 많은 교육도 하시고 그런 프로그램에 관여도 하게 되었죠. 74년인가. 그 무렵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억압과 착취관계 속에서 고생하는 농민들을 교육할 때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그런 운동을 강조했거든요. 그 교본이 페리라는 교육자가 쓴《피압박자의 교육학》같은 책이었어요. 그런 종류의 책들을 장 선생의 부탁을 받아서 제가 번역을 했지요. 그것이 70년대 초였어요.
  그리고 실제 운동으로서는 농민들에게 돼지 새끼들 가져다가 주고 신림이니 뭐니 농민들을 찾아 많이 다니셨는데 그때 나야 뭐 가서 구경하는 격이었지요. 그런 것이 70년대의 중반 정도까지의 사업이었지요.


전표열  그후에 무위당 선생이 방향을 바꾸시고, 교수님도 방향을 바꾸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리영희    박정희 정권 이후쯤 되겠지요. 예전에 나는 한국과 한국 국민의 운명 같은 것을 좀더 지정학적인 또는 국제관계의 역학 속에서 생각하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미국이나 일본, 중국과의 관계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내면적인 요소들에 눈을 돌려 인간 개체 내부의 무한한 우주에 관심을 가지는 그런 방향이 무위당 선생의 독특한 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표열    선생님의《전환시대의 논리》가 한국 민주화운동의 필독서였는데, 이후에 선생님께서도 사상적 전환의 필요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무위당 선생의 변화와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리영희    꼭 그렇게 무위당 선생과의 직결된 상호관계 속에서 변화를 했다기보다는 저 자신도 개인적인 내면적 체험과 인간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시야를 넓히게 된 것이지요. 이전에는 힘의 관계나 정치적인 논리, 이런 것에 비해 인간의 본연적인 요소들은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차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됐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때 맑시즘에 상당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의 운명,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계급, 집단을 사회적 관계나 물질적 토대와 관련시켜서 생각하곤 했어요. 그러던 것이 무위당 선생과의 여러 토론이나 그분의 삶에서 받은 영향을 통해서 사회적 관계나 지적 토대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라기보다 인간 자신의 내면적인 것이 분명하게 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던 것 같아요.


전표열    무위당 선생이 생명운동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구체적으로 시작한 일이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이었지요?


리영희    그렇죠. 70년대 말쯤 될까요.


전표열    선생님은 이러한 생명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리영희    그것과 관련해서는 김지하 시인의 변화도 무위당 선생의 사상의 줄기에 세워놓고 관찰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76년이던가. 내가 75년에 처음 형무소 들어갈 때 김 시인이 들어왔다가 나가더니 아주 많이 변했죠. 형무소 내의 그 콘크리트 틈 사이에서, 어딘가에서 날아온 씨앗이 그 험악한 곳 틈새에서 잎을 틔워내는 것을 보고는 생명이라는 것의 소중함을 발견했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바로 그러한 생각의 토양이 무위당 선생의 인간생명, 인간내면에 대한 깊은 통찰에 바탕한 삶에 있었던 것이에요. 은연중에 그 영향을 받은 결과 김 시인이 시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무위당 선생의 생명사상은 어느 시기에 이렇게 전환했다고 하기보다는 그것이 무위당이라는 한 인간의 밑바닥에 깔린 본연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위당 선생이 농민들, 사회문제, 문화방송과의 문제, 교구와의 관계, 정치권력과의 관계 등에 관여하면서 살던 때에도 그 사시던 집의 모습과 살아가시던 모양은 자연 그 자체였어요. 자연에 있는 모습대로 또는 우주의 생성원리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그게 생명의 본연의 모습이니까, 그속에서 살아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어느 때부터 이렇게 바뀌었다고 생각하기보다 처음부터 무위당 선생은 생명사상에 근거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상적으로 시대적 상황에 맞게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졌던 것이지요. 농민들을 돕는 것도 생명의 사상이거든요. 왜냐하면 자연재해에 의해서 생명이 뭉개졌고, 그걸 정권이나 사회, 제도가 도와주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본 무위당 선생이 공감하고 같은 삶을 취한다고 할 때 그게 다 생명사상의 발현이었다고 봅니다.
전표열    선생님께서는 답답하고 하실 때 무위당 선생을 만나러 술 한 병 가지고 원주에 자주 내려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리영희    자주 내려갔어요. 우선 순전히 물질주의적인 사회, 콘크리트 속을 떠나서 선생님 댁에 가면 아까 말한 것처럼 마당과 주변에 살고 있는 게 그냥 자연이니까, 하나도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자연에 손을 가하려고 생각지도 않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속에서 아주 차원이 다른 인간적 생존양식 같은 것을 느끼고는 했거든요. 다시 말하면 물질적인 생활에서 정신적인 생활로, 또는 현대 자본주의적인 생활에서 인간본연의 생활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어요.
  한편으로는 그 당시에 많은 지식인들이 반(反)군부독재 민주화운동의 행동양식으로 생각했던 맑시즘이나 사회결정론 또는 모든 것을 사회과학적 관점과 맥락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고방식, 그리고 서양학문의 합리주의적 사고의 틀과 환경 속에서 나 또한 공부하고 가르치고 사회활동도 하곤 했는데 종종 벽에 부닥친단 말이에요. 그럴 때 원주에 내려가면 그런 벽이라든가 인위적인 방법의 한계 등이 동양적 사상의 지혜로써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 다방면적인 여러 각도에서의 깨우침 같은 것을 무위당 선생과의 폭넓은 대화 속에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전표열    지학순 주교에게 외국의 신문기자들을 소개하기도 하셨지요? 그때 무위당 선생도 같이 하고 그러셨나요?


리영희    그랬지요. 하지만 장 선생을 통해서 간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장 선생은 외국 언론기관과의 인터뷰나 국가기관과 관계할 때 좀처럼 표면에 안 나섰어요. 언제나 뒤에서 지학순 주교님에게 올바른 방향을 일러드리고는 했지요. 사실 지학순 주교님은 본래 사회의식이 분명하지 않았던 분입니다. 인자하시고 순진하셨으며, 열정적인 분이었어요. 무위당 선생과의 은근하고 태연한 관계 속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셨지요.
  미국 하원에서 지학순 주교의 증언을 듣기 위해서 왔는데, 그땐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으니까 제가 몰래 내려와 주교님하고 같이 잤거든요. 난 가톨릭 신자도 아닌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이지요. 얘기해야 할 것, 저쪽에 질문해야 할 것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고, 그 이튿날 새벽 네시에 떠났어요. 왜냐하면 박정희 정권 모르게 서울 성모병원 병실인가로 와달라고 해서였습니다.


전표열    하원의원이 병실로 온 건가요.


리영희    그렇죠. 혼자가 아니라 몇이 왔었어요. 그래서 밤에 몰래 다 준비를 하고 새벽에 서울로 향해 떠났는데 말이죠. 무위당 선생하고 김영주 사무국장 이렇게 두세 사람만 짜가지고 시간과 장소와 가는 길을 완전히 비밀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문막인가 그쯤 지나니까 벌써 앞뒤로 차가 나타나더군요. 가톨릭 병원에 갈 때는 이미 완전히 당국의 포위 속이었지요. 말하자면 당국에서는 다 알고 있었던 거지요.
  그건 그렇고 장 선생님이 76년인가 ⋯ 난 그게 지금도 조금 궁금한데, 원주에서 사회운동 지도자들을 양성하려면 뭔가 새롭게 읽고 가르치고 또 강의도 하고 해야 하니까 나에게 그 당시 한국 정세 하에서 일반적으로 내놓고 팔지 못하는 책들을 모아서 보내달라고 돈을 주셨어요. 마침 내 중학교 동창이었던 친구가 종로에서 해외서적 수입상을 했었는데, 이 친구가 그림만 하나 이상해도 용공 빨갱이 어쩌고 하던 때이니까 아무것도 아닌 책조차도 내놓지 못하고 알 만한 지식인들이 와서 찾으면 한두권씩 주던 책들이 제법 많았어요. 극우 · 반공 독재시대에 공공연히 드러내고 팔기 어려운 훌륭한 외국서적이 많았지요. 그 서적상에서 국내외 도서 200권 정도를 보내드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전표열    장 선생님이 부분 부분 번역하셔서 많이 쓰셨어요. 저희들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교육도 시키고 하셨어요. 내놓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여기저기 알리진 못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보시기에 무위당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는 어떠했는지요.


리영희    저는 장 선생님의 삶이 노자가 말하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삶 그 자체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이라는 것은 인간도 자연의 현상이지 자연과 대립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성찰에 따라 자연과 무한으로 합일하고 살아가는 아주 이해하기도 실천하기도 지극히 어려운 것을 체현한 삶이지요.
  그보다 좀 낮은 차원으로 보아도 사람과 사람의 사귐에 있어서 그렇게 넓고, 부드러우면서도 거침이 없고, 그러면서도 깊이가 있는 분은 좀처럼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같아서는 저런 놈하고 무슨 상종을 하나 싶은 사람들에게도 아주 따뜻하게 대하셨어요. 깊이로 보면 서양학문을 그렇게 많이 통달하면서도 서양학문에 절대로 빠지지 않고, 오히려 서양학문의 합리주의에 입각해 해석할 것을 동양적인 자연주의적 사상으로 재해석하는 특이한 면이 있었어요. 그러한 면에 나는 굉장히 놀랐어요.
  나는 어떤 면에선 평면적으로, 직선적으로, 합리주의적 서양학문을 응용하고 원용하고 하는 쪽이 강했는데 장 선생님과 같이 그런 문제를 두고서 밤을 거의 새다시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아! 그게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보다더 깊은 관점이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곤 하였습니다. 같은 것을 보는 지식인의 능력에 있어서 난 감히 따를 수가 없구나 하는 것을 자주 느꼈죠.
  하지만 무위당 선생의 사회활동이나 이론적인 면보다는 앞서 말했던 인간적 측면 때문에, 사람들이 선생을 자주 만날수록 마음에 오래가는 뭔가 따뜻한 느낌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전표열    사람들이 흔히 선생님과 무위당 선생은 다른 면이 많이 있다고 하던데요.


리영희    그렇죠. 두가지가 다르죠. 나는 무위당처럼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아울러서 사는 분의 사상이나 자세에는 어림도 없죠.
  나는 너무 서양적인 요소가 많아요. 사회를 직선적으로, 구조적으로, 이론적으로 해석하고 보려고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나의 경우는 분석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같은 의미에서 무위당은 종합적이랄까, 총괄적이랄까, 잡다하게 많은 것을 이렇게 하나의 보자기로 싸서 덮고 거기서 융화해 버린단 말이에요. 난 그걸 굳이 골라서 A, B, C ⋯ 이렇게 분석하고, 그러니까 작은 거죠. 차원이 낮은 거고.
  둘째는 역시 나는 감히 못 따를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삶의 자세인데, 그 철저하면서도 하나도 철저한 거 같지 않으신, 이게 말이 좀 모순이 있지만 말입니다. 그 삶이 얼마나 철저합니까. 그렇게 살 수가 있어요? 한 예로 그 집의 변소를 보면, 남들은 전부 개조해서 세상을 편리하게만 살아가려고 고치는데, 그냥 막 풍덩풍덩 소리가 나고 튀어오르고 야단났어요. 지금도 그 부엌이 그대로인지 모르지만 사모님 사시는 부엌도 그렇지, 마당 그렇지, 우물 그렇지.
  그중에서도 제일 대표적인 게 변소인데 끝까지 안 고치고 ⋯ 철저하면서도 그렇다고 “난 뭐 이렇게 하기 위해서 이런 거 하는 거야” 하고 이론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실제 생활인으로 하신단 말이에요. 그것이 놀라워요. 철저하면서 조금도 철저하지 않은, 그저 일상생활이 되어버리는 이런 인간의 크기 말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그분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단 말이에요.


전표열    선생님은 장 선생님하고 그렇게 밤을 새워서 말씀도 많이 나누시고 했는데, 지금도 그런 분이 계신가요?


리영희    없습니다. 세상에는 어딘가에 산에서 도인생활 하시는 분들도 있고 하겠지만, 그런 크기를 지니고 사회에 밀접하면서도 사회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 속에 있으면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시키면서도 본인은 항상 그 밖에 있는 것 같고,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고, 밖에 있으면서 인간의 무리들 속에 있고, 구슬이 진흙탕에 버무려 있으면서도 나오면 그대로 빛을 발하고 하는 그런 사람은 이제 없겠죠.


전표열    장 선생님에게 어떤 아쉬움 같은 건 느끼신 적이 없으신가요?


리영희    나는 당신의 삶이나 사회적 활동 이런 것에는 아쉬움이 없고, 오히려 조금 실생활에서 당신 사모님이나 아이들과 좀더 정답고 재미있게 사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요. 사모님이 훌륭하신 분이었거든요. 그외에 사상이나 철학, 하신 일들에 아쉬움이랄 것은 없습니다.
  물론 이런 분이 진정 한국 사회에 좀더 뜻을 미칠 수 있는 어떤 역할을 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었죠. 그러나 그건 아마 어려웠을 테지요. 그런 희망 자체가 용납 안되는 그런 시대였으니까. 무위당 같은 그런 사상과 세계관과 인간성과 생활관과 이러한 것이 지난날의 우리사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전적으로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이런 권력적인 사회에 있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큰 역할을 하신 것이지요.


전표열    선생님께서는 장 선생님의 생명사상을 오늘날 젊은이들이 어떻게 배워야 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리영희    난 그런 물음에 대해서는 종합적으로 적절한 답변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지금이야말로 무위당 선생의 삶과 사상을 연구하고 더욱 심화시켜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생활화해 나가야 할 가장 적절하고도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소위 신경제시대, 미국 일변도의 이 물질주의적인 무한경쟁, 인간과 인간 사이에 사랑과 나눔이 아닌 그야말로 경쟁과 빼앗음과 이른바 능력위주의, 나와 남을 완전히 갈라놓는 이런 사회, 지금이 그런 사회인데, 이때야말로 인간이 정말로 이렇게 물질화하지 않고, 인간이 경쟁의 상대로만 존재하지 않는, 선생님의 살아왔던 그대로의 삶이 실천되는 사회와 인간형이 지금 또 앞으로 절실히 필요하다고 봅니다. 인간이 완전히 물질에 의해서 좌우되고, 윤리나 도덕이나 인간성이나 아름다움 등이 숨 가쁘고 순간적인 어떠한 구조에 의해서 지배되는 한마디로 비인간화된 세상을 바로잡는 사상적 전환이 바로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표열    선생님께서 뜻깊은 인장함을 가지고 계시다고 하는데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리영희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겠는데 굉장히 딱딱해요. 큰 오리알만한 크기에 도장이 들어갈 수 있도록 네모나게 팠어요. 굉장히 힘든 일이었을 거예요. 그 어렵고 힘든 작업을 했었다는 게 뭔가 나를 각별히 생각하셨다는 그런 면이 연상되어 고맙지요.
  장 선생님이 달걀모양의 뚜껑과 본체가 접하는 부분에 새의 주둥이 같은 것을 조그맣게 해서 노랗게 새의 부리 모양으로 붙였어요. 엄격하면서도 간결하고 거기에 장난기 같은 면을 표현했거든요. 여기 눈 모양 두개를 보세요. 장 선생에게서 연상하기 어려운 그런 장난기 같은 것을 볼 때 더 따스한 것을 느끼지 않아요? 눈 두개를 파서 넣고 부리를 붙이고.
  나도 도장을 장난으로 많이 파봐서 알지만 네모난 구멍을 판다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아요.


전표열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의 앞으로의 방향은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리영희    일반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네요. 어떤 일이건 그 행해지는 곳의 특성을 고려해야 하니까, 원주를 중심으로 조금더 구체적인 방향이 수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조금 전에 나왔던 이야기인데 지금 세상이 신경제, 신자유주의, 신물질주의, 무한경쟁, 과학기술 만능주의가 중심이거든요. 그것만이 살길이라는 식으로 마치 신앙처럼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요컨대 과학기술, 돈, 경쟁, 생산, 이런 거 다 물질중심적 사고 아닙니까? 그 물신주의를 무위당의 생명사상을 통해 재해석하고 대안을 찾아보는 토론회 같은 것도 하나의 좋은 활동내용이 되지 않겠나 싶어요. 예를 들면 인간을 인간이 마음대로 변형시켜나갈 수 있다는 유전자복제 등을 통해 자연의 모습과는 전혀 별개의 인공적인 환경을 만들어 낸다고 할 때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무위당 선생의 삶과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후세에도 전할 수 있도록 기념관을 건립하는 문제도 고려해보았으면 합니다. 소박하게 사신 분이니까 화려하게 할 것은 없고 현재의 생가 근처면 더욱 좋겠지요.


전표열    저는 무위당 선생님 곁에서 수십년을 살았는데도 오늘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서 무위당 선생님의 새로운 모습을 뵙는 것 같았습니다. 편찮으신 중에 이렇게 좋으신 말씀 감사드리고, 하루속히 선생님의 건강이 회복되시기를 간절히 빌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