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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김종철 교수의 마음의 스승 무위당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5.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
http://www.jangilsoon.co.kr/pds/view.php?forum=book1&st=&sk=&page=1&num=42

 


**박윤석 기자의 인물탐험 <김종철> 편 (월간동아 98년3월)에서 무위당 선생에 대한 이야기 발췌

 


스승

그의 얘기는 결국 과거로 돌아갔다. 90년을 전후한 그 멀지 않은 격변기는 두 사람의 스승을 만난 것으로 요약된다. 그중 한 사람은 딱 한번 만났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만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진짜로 필요한 것은 사회생활을 하고 삶을 조망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구체적인 물음에 직면했을 때, 그때 진짜 스승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는 어느날 한 잡지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장일순(張壹淳)의 말을 몇마디 접하고 이내 그에게 빠져들었다. 이름이야 그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원주의 반체제 인사로 김지하의 스승이며 배후다 하는 풍문으로만 들었지 그의 생각을 진지하게 알아볼 기회는 없었다.

『평생 명사로서 활동한 사람도 아니고 또 글쓰는 사람 특유의 이상한 자만심 같은 것도 없었고 늘 보통 사람들과 삶을 나누다 가신 분인데… 그의 말이 참 쉽잖아요. 쉽다는 말이 좀 어폐가 있지만, 굉장히 친근하잖아요. 꾸밈이 없고 다정스러워요. 젊었을 때 연설 좀 하셨겠구나 느낌을 주죠. 말하는 게 참 박력이 있고, 말을 참 맛있게 하죠. 뭐랄까, 어머니 같은 느낌을 줘요. 말에 힘이 있으면서도 말이죠』

문제의 인터뷰 대목은 그의 할아버지가 그의 아버지에게 들려준 말을 회고한 내용이었다. 어린 장일순이 문 밖에서 우연히 듣고 평생을 두고 귀감으로 삼았다고 하는 이 이야기는 97년 김종철이 펴낸 장일순의 문집 「나락 한알 속의 우주」에 실려 있다.

『누가 돈을 꿔 가도 달라 소리를 안 하세요. 내가 아홉 살 땐데, 「돈 3백원을 아무개가 꿔가서 안 가져 오니 제가 가서 얘기를 할까요」하고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여쭈었어요. 그러니까 내 조부님 말씀이 「너도 자식 키우잖니, 돈은 줬으면 그만이지 달라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하시는 거예요. 「갚을 마음이 있어야 되는 거지, 갚을 마음이 없는 사람한테 가서 돈을 달래면 돈은 받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잃고, 또 갚을 마음은 있는데 돈이 없는 사람한테 가서 달래면 그 사람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워. 그러니 그런 슬기롭지 못한 짓은 하지마라」하고 당신 자식을 그렇게 가르치시더라구요』

『역사에 남지 않았을 뿐 그 할아버지는 비범한 인물이었던 것 같고 그 말을 소싯적부터 체화시킨 장일순 선생을 직감적으로 존경하게 됐다』는 김종철은 『할아버지 말씀은 과학적이네요』라는 대꾸에 큰 소리로 『그거 참 재미난 표현이네』라며 모처럼 크게 웃었다.

『과학적인 얘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과학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윤리도 사실은 그거 과학이거든요. 원래 과학을 잘 했을 때 윤리라는 게 나오는 거고. 생태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잖아요. 사람이 제대로 살려면 지구가 건강해야 된다는 것 아닙니까. 이건 윤리 문제가 아니거든, 따지고 보면』

말하자면 장일순은 할아버지 얘기와 같은 생활 속의 쉬운 예에 직관을 담아 쉽게 뜻을 전하고 사람들을 키웠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92년 9월 원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일순을 만났다. 장일순이 창시한 공동체운동 「한살림」에 대한 얘기를 듣기 위한 자리였다.

「녹색평론」 창간 1주년 기념호에 실린 이 대담 모두에 김종철은 『지난 1년간 녹색평론이 해보려고 했던 작업이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지금까지의 지배적인 문화와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문화의 실마리를 실제로 우리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는 말로 한살림공동체운동의 의미를 평가했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농민 천규석을 도와 「대구한살림」의 일에 간여하고 있다.


『시간이 좀 걸릴 거요』

그가 마음 속의 스승 장일순을 처음 만나 나눈 대화 중에는 이런 대목들이 있다.

『내가 보기엔 김교수가 「녹색평론」 하면서 요새 심정이 아마 강태공이 낚시 내려뜨리고 있는 거와 같을 거야. 그날이 오기까지 그런 걸 걸라구. 콩물에다가 간수를 넣으면 바로 두부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 뭉게뭉게 하잖아』

『시간이 좀 갈거요. 시간과 잘 싸워야지. 생명운동이란 확신이 있어야 하는 거지. 생명이란 것은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지만 분명히 있단 말이지. 그 덕에 모든 것이 살아가니까. 어차피 사람은 뒤는 보지 못하고 앞만 보면서 각자는 나름대로 이런 게 아닌가 하고 가다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답답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꽤 풀려가지 않겠는가 나는 그런 생각이죠』

『천규석선생이나 김선생이 생각하는 모양으로 언젠가는 도시사람, 또 있는 사람들이 농촌으로 많이 가야 할 겁니다. 요새 비어있는 곳이 많으니까 적절한 곳을 선택해서 가서 생활을 하고 농사도 짓고 해보는 거지요. 형편이 되는 사람부터 그렇게 하다보면 아이들 교육문제는 중학교까지는 자체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기지 않을까. 전국에 이런 형편 저런 형편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언젠가는 이런 경험들을 서로 만나 얘기하고, 옆으로 자꾸 나누어가면 많은 변화가 점차적으로 생기게 될 거라고 봐요. 물량이나 편의, 이런 것을 가지고 비교우위적인 잣대로만 성장해온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근원적인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생활이 보편적으로 열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거지요』

농촌오염이라든지 토양침식 같은 현상이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는 걸 보면 맥이 다 빠지고 비관적으로 되는 경우가 많다는 김종철의 말에 장일순은 이렇게 달랬다.

『어차피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사는 즐거움이 있고 보람이 있어야 하니까. 그러면 내일 망한다 해도 그냥 밀고 가야 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요. 또 한 가지는, 그렇게 하면 소망이 있다고 믿어요』

장일순은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46년부터 삶의 안내자로 모시고 있었다. 종래 역사학계의 비판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해월을 「세계인류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를 정확하게 일러주신 분」으로 숭앙하는 이유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랬다.

『어차피 여태까지의 사회과학은 사회과학이 갖는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 관점을 가지고 해월선생의 삶을 투사해보면 전혀 맞질 않아요. 종래 사회과학의 잣대로는 안된다는 것을 파악하는 시기에 있어서는 사정이 달라지겠죠. 전 우주가 하나의 생태적인 관계에 있다든가 하나의 생명관계에 있다든가 하는 이런 것이 자꾸 증명이 되고 고증이 되는 과정에 해월의 일생을 보게 되면 이건 그대로 다 맞아떨어지는 것이거든요. 새로운 현대물리학이나 우주과학이나 현대생물학의 안목으로 들여다보면 우리 땅에 이런 선각이 계셨나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장일순과의 접촉은 김종철로 하여금 해월을 또 다른 스승으로 삼고 공부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동안 우리가 배워온 교육의 중심적 정신풍토의 하나는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부국강병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책에서 항상 열등감을 느끼는 한편으로 우리가 고생했기 때문에 강국이 되어야 하고 또 중심국가가 될 것이라는 그런 암시로 위안받은 성향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에콜로지 문제랄까 환경문제랄까 이런 것을 생각하고 녹색평론도 낼 결심을 한 것도 이러한 성향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뿌리깊은 어떤 편향된 사고방식 문제에 직접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온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런 중에 두 분 선생을 만난 것이죠. 두 분이 보인 사회운동 형태가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