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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무위당 선생의 취지서(趣旨書)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5.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의 모임

http://www.jangilsoon.co.kr/pds/view.php?forum=book1&st=&sk=&page=0&num=55

 

 

※ 여기에 싣는 글은 1956년 무위당 장일순 선생께서 대성중고등학교의 초대 이사장으로 재직시, 열악한 학교 재정의 돌파구를 마련해 보고자 지역의 유지들과 장학 사업에 뜻이 있는 분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기 위해 보냈던 문서의 전문입니다. 학교를 설립했던 근본적인 정신과 취지를 느낄 수 있으며, 또한 학교 설립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과 이를 뜻있는 분들의 힘을 모아 함께 타개해 나가려고 했던 강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취지서라는 제목의 이글은 당시(1950년대)의 시대 여건상 한자말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여기에 실으면서 편집자가 일일이 괄호에 독음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문장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지금과 맞지 않는 당시의 문법적 표현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실었습니다. 20대 후반의 무위당 선생님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기상을 그대로 한번 느껴 보십시오.[편집자]


                               취지서(趣旨書)

  오늘날 우리 社會(사회)는 貴下(귀하)의 힘이 必要(필요)합니다. 貴下(귀하)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精誠(정성)이 切實(절실)히 要請(요청)됩니다. 이 社會(사회)는 貴下(귀하)의 熱誠(열성)에서 솟아오른 行爲(행위)의 表跡(표적)을 보기를 바랍니다.
  回想(회상)하건대 우리나라 近世史以後(근세사이후) 오늘날까지 우리 民族(민족)은 果然(과연) 무엇을 하여 왔는가?
  우리는 손을 고요히 가슴에 대고 反省(반성)할 때요 痛悔(통회)할 때요 잘못을 是認(시인)한다면 良心(양심)이 命令(명령)하는 바로 果敢(과감)히 零(영)으로부터 再建(재건)하는 行動(행동)과 賢明(현명)한 態度(태도)가 있어야 할 때입니다.
  부질없는 外面(외면)에 나타나는 現象(현상)만 보고 그 勢(세)를 다투고 서로 辱(욕)하고 서로 害(해)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民族(민족)같이 過去(과거) 五百數十餘年(오백수십여년) 동안 남의 장단에만 功事(공사)를 삼고 着實(착실)한 내 自身(자신)의 일을 갖지 못한 不幸(불행)한 民族(민족)이 또 어데 있겠습니까?
  나라를 섬길 때 남의 나라의 힘과 榮華(영화)에만 눈이 어두워 내 나라는 二次(이차)요 내가 바로 할 일을 갖지 못하고 쓸데없이 남의 일에만 참견하여 謀害(모해)와 嫉妬(질투)만 일  삼았으니 이 어찌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우리는 자구 깨면 이웃끼리 서로 險口(험구)와 辱說(욕설)로서 營事(영사)하고 있으니 이래고서야 나라의 紀綱(기강)이 安全(안전)할 수 있으며 每事(매사)에 좋은 結果(결과)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民族(민족)이 아직껏 깊이 反省(반성)하지 못한 탓이오 우리 國民(국민)이 眞正(진정)한 生活(생활)을 갖지 못한 탓입니다.
  그동안 우리 民族(민족)은 여러 가지 形態(형태)로 政治(정치) 經濟(경제) 社會(사회) 宗敎(종교) 文化面(문화면)에서 變遷(변천)하는 影響(영향)은 받었다 할지라도 이것은 外的變化(외적변화) 뿐이었고 何等(하등) 內的反省(내적반성)이 없는 世代(세대)의 繼續(계속)이었든 것입니다.
  마치 우리 社會(사회)는 外治(외치)는 하여왔을 망정 內治(내치)를 하지 못하여 呻吟(신음)하는 病者(병자)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社會(사회)는 僞善(위선)과 沈滯(침체)만이 있었을 뿐이요 進步(진보)와 向上(향상)을 갖어 오는 생활(生活)의 明朗性(명랑성)은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個人(개인)과 國民(국민)의 精神手術(정신수술)을 하기 爲(위)한 反省(반성)을 해야 할 同時(동시)에 善(선)을 爲(위)하여 勇敢(용감)한 心性(심성)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反省(반성)할 줄 모르고 善(선)에 對한 恒久(항구)한 勇氣(용기)가 없는 個人(개인)과 國民(국민)에게는 아무리 聖(성)스럽고 偉大(위대)한 佛敎(불교)나 儒敎(유교)나 基督敎(기독교)나 民主主義(민주주의)도 消化(소화)할 수 없는 돌맹이와 같은 것입니다. 일찍히 佛敎(불교)나 儒敎(유교)를 國敎(국교)로 삼았든 우리의 歷史(역사)가 證明(증명)하는 바이요 基督敎(기독교)나 民主主義(민주주의)가 제대로 잘 消化(소화)되지 못하고 愚弄(우롱)을 當(당)하고 있는 現實(현실)이 또한 證明(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옛 이스라엘 百姓(백성)들에게 排斥(배척)을 받었고 孔子(공자)의 道(도)가 春秋時代(춘추시대) 列王(열왕)들의 받어들임을 얻지 못하였고 또한 新羅(신라)의 大僧(대승) 異次頓(이차돈)이가 斬刑(참형)을 當(당)하였으며 오늘날 世界的(세계적) 人類(인류)의 政治理念(정치이념)인 民主主義(민주주의)가 似而非(사이비) 民主主義(민주주의)의 跋扈(발호)로 크게 威脅(위협)을 느끼고 있음은 歷歷(역력)한 史實(사실)입니다. 좋은 思想(사상)이나 宗敎(종교)도 사람의 良心(양심)에서 받어 드릴때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各個(각개)가 反省(반성)할 點(점)은 무엇인가?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거슬림은 불가피하다.』한 李成桂(이성계)의 野慾(야욕)으로부터 李朝(이조)가 始作(시작)되었거니와 自己(자기)의 榮達(영달)과 安寧(안녕)을 爲(위)해서 上典(상전)에게 빌고 아첨하며 父母兄弟(부모형제)를 파는 根性(근성)을 없애야 할 反省(반성)입니다. 이웃을 猜疑(시의)하고 嫉妬(질투)하고 殺戮(살육)을 해서라도 自己(자기)를 내세우는 根性(근성)을 버리자는 反省(반성)입니다.
  이러한 根性(근성)은 私利(사리)를 爲(위)하여 同胞(동포)를 팔고 나라까지 파는 同時(동시)에 自己(자기)가 잘못을 저질르고도 그에 對(대)한 責任(책임)을 轉嫁(전가)하기 爲(위)하여 民族(민족)과 國家(국가)를 犧牲(희생)시킵니다. 이 根性(근성)에서 나오는 罪惡(죄악)은 每日(매일)같이 小規模(소규모)로나 大規模(대규모)로 우리의 國力(국력)을 衰殘(쇠잔)시키고 있으며 우리의 生活(생활)을 더욱 塗炭(도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現在(현재) 이러한 行爲(행위)는 누구나 싫어하면서도 우리는 서로 不知不識間(부지불식간)에 先天的(선천적)인 根性(근성)의 탓이거나 環境(환경)에 支配되는 立場(입장)에서 自己(자기)가 茶飯事(다반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야흐로 우리는 自身(자신)의 一大反省(일대반성)을 할 때요 民族的(민족적)으로 이를 覺醒(각성)해서 새 世界(세계)를 이룩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固陋(고루)한 根性(근성)을 버리고 光明(광명)한 社會(사회)를 이룩하자면 어찌해야 될 것인가?
  全面的(전면적)으로는 實際的(실제적)이고 段階的(단계적)인 社會啓蒙(사회계몽)이 必要(필요)할 것이고 이를 根本的으로 具體化(구체화)하자면 學校敎育(학교교육)을 通(통)해서 이루어 져야 할 것입니다. 未久(미구)에 社會(사회)에서 일꾼이 될 우리의 靑少年(청소년)을 學校(학교)에서 바로 敎育(교육)시켜야 할 것입니다.
  舊態依然(구태의연)한 模倣敎育(모방교육)이거나 職業意識(직업의식)에서 흘러나오는 姑息的 敎育(고식적 교육)이 아니라 熱誠(열성)의 敎育(교육)이래야 할 것입니다.民族(민족)의 魂(혼)에 呼訴(호소)하는 敎育(교육)이래야 할 것입니다. 世界人類道義(세계인류도의)에 立脚(입각)한 敎育(교육)이래야 할 것입니다. 個人(개인)의 생명을 鼓舞(고무)하는 敎育(교육)이래야 할 것입니다. 하늘이 命(명)하는 大通(대통)에 선 敎育(교육)이래야 할 것입니다.
  虛飾(허식)이 아니라 眞實(진실)이요 尊嚴(존엄)보다 사랑이요 保守(보수)가 아니라 改善(개선)이요 固執(고집)이 아니라 反省(반성)이요 無知(무지)한 叱責(질책)이 아니라 雅量(아량)있는 善導(선도)이요 無氣力(무기력)한 遲鈍(지둔)이 아니라 勇躍(용약)이요 輕妄(경망)한 才能(재능)보다 沈着(침착)한 忍耐(인내)와 知慧(지혜)이요 淸談高論(청담고론)보다 하나의 실천(實踐)을 말하는 敎育(교육)일 것입니다.
  위에 말씀드린 理想(이상)을 實現(실현)하기 爲(위)하여 일찍이 우리는 微力(미력)하고 不實(부실)하나마 原州(원주)에 大成中高等學校(대성중고등학교)를 세웠습니다.
  이와 같은 敎育(교육)의 理想(이상)은 우리 國民(국민) 大多數(대다수)의 熱意(열의)와 精誠(정성)이 없이는 到底(도저)히 實現(실현)할 수 없다고 確信(확신)합니다.保守的(보수적)이며 現狀維持的(현상유지적)인 學校敎育(학교교육)으로서 滿足(만족)한다면 모르거니와 우리 民族의 明朗(명랑)하고 참된 生活(생활)을 이룩할 것을 理想(이상)으로 하는 敎育(교육)은 創造的(창조적)인 計劃(계획)과 同時(동시)에 이와 隨伴(수반)하는 充實(충실)한 施設(시설)과 器材(기재)가 있어야만이 비로서 理想(이상)을 實現(실현)하기 爲(위)한 軌道(궤도)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러분께 腐敗(부패)와 沈倫(침륜)에 흐르는 金錢(금전)과 物資(물자)와 精力(정력)과 時間(시간)을 防止(방지)하고 이것들을 敎育(교육)과 建設(건설)을 爲(위)해서 躊躇(주저)없이 바처 달라고 呼訴(호소)합니다. 우리는 여러분께 우리 國民(국민)의 精神改造(정신개조)를 爲(위)하여 여러분이 社會(사회)에서 誠心(성심)으로 累積(누적)된 固疾的(고질적) 根性(근성)을 打破(타파)할 것을 力說해 주시기를 呼訴(호소)합니다.
  貴下께서 우리에게 眞正(진정)한 誠意(성의)로 浪費(낭비)되는 用(용)에서 每月(매월) 定(정)하게 五百(오백)환이건 千(천)환이건 貳千(이천)환을 生活形便(생활형편)에 依(의)해서 決定(결정)하시고 주실 수 있으시다면 우리는 이것으로서 눈에 보이는 敎育施設(교육시설)을 計劃的(계획적)으로 만들것이오며 이 施設(시설)을 通(통)해서 우리의 子女를 理想(이상)하는 우리 社會(사회)의 有爲(유위)한 人材(인재)로 英育(영육)하여 이 社會(사회)를 救(구)하고자 합니다.
  지난 우리 社會(사회)에서 憑公營私(빙공영사)했든 例(예)를 連想(연상)하시고 貴下(귀하)께서는 적지 않은 疑懼(의구)와 努力(노력)의 不足(부족)에서 오는 龍頭蛇尾格(용두사미격)이 되리라는 失望(실망)을 갖이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現實(현실)을 怨望(원망)하기보다는 無理(무리)아닌 것을 理解(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믿노니 여러분 여러분은 協助者(협조자)가 아니시고 이 社會(사회)의 共通善(공통선)을 爲한 同步者(동보자)이시요 主導者(주도자)의 立場(입장)이십니다.
  이 事業(사업)은 어느 一個人(일개인)이나 一派(일파)나 一部사람의 事業(사업)이 아니요 우리 民族(민족) 全體(전체)가 마땅히 해야 할 課業(과업)이요 義務(의무)인 同時(동시)에 오늘날 人類(인류)가 念願(염원)하는 世界史(세계사)의 課題(과제)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事業(사업)을 爲(위)해서 國內(국내)의 뜻있는 사람은 勿論(물론)이거니와 世界(세계)의 理解(이해)있는 人士들이 呼應(호응)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貴下(귀하)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남의 일이 아니요 이웃의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우리; 社會(사회)에서 이 理想(이상)을 完遂(완수)하는 것은 無望(무망)한 것이라고 無視(무시)와 嘲笑(조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歷史上(역사상) 어느 한 나라의 民族(민족)이 天道(천도)에 悖戾(패려)하였을 때 滅亡(멸망)을 하였다는 事實(사실)은 보았으나 한 사람의 참된 行爲(행위)가 無意味(무의미)하였다는 事實(사실)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現下(현하) 여러 先進國家群(선진국가군)은 한때는 逆境(역경)에서 難關(난관)을 突破(돌파)하고 이러한 참된 國民運動(국민운동)에서 그들의 幸福(행복)을 갖어왔습니다.
  오늘날 貴下(귀하) 한 분의 참된 行爲(행위)가 이 社會(사회)를 爲(위)해서는 무엇보다도 貴重(귀중)합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는 理致(이치)가 眞實(진실)일진댄 우리는 이 敎育(교육)의 成就(성취)를 爲(위)해서 한사람이고 두사람이고 이 분들의 熱誠(열성)을 곻아서 恒久(항구)한 우리 民族(민족)의 福樂(복락)의 源泉(원천)을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以上

  단기 四二八九년 四월 一일(서기 1956년 4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