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간의 전쟁-내셔널리즘의 충돌
- 허 우성 -
1. 인간은 이기적 행위자이면서 아견(我見)의 소지자다―불교적 인간관
무궁화와 국화(菊花)가 무궁하지 않듯이 국가와 민족 역시 영원|절대의 존재가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인간이 이름 지어 부르는 일체―은 인연에 따라 생기고 없어지기 때문이다. 들녘에 피는 풀꽃은 주로 자연의 힘으로 피어나지만, 특정 국가와 민족은 집단의 공동 기억과 형성력을 토대로 하여 생성되고 유지된다. 국가와 민족을 형성하는 힘, 그리고 그 생명을 유지하려는 욕망은 자연적|본능적|생리적|습관적인 것으로 본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각기 국가와 민족을 역동적으로 형성해 가면서 고대와 근대라는 역사를 비롯하여 문학․철학․음악․미술도 만들고, 국화와 무궁화, 후지산과 백두산, 일본해와 동해, 다케시마와 독도 등 가지가지 이름(名)으로써 국토도 만들어간다. 그리고 국가나 민족이 살아 있는 한 그 형성력은 자기 추동적인 것이고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특정 국가와 민족이 기억을 공유하고 형성력을 발휘하는 것이 본성에 가깝다면, 기억을 공유하여 국가와 민족을 형성하고 독자적인 국사를 기록하는 행위가 왜 문제가 될까? 그 행위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에, 즉 그 행위의 중심에 @나#와 @우리#의 심신(心身)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며, 그 문제는 중대하다. 그 이기성 때문에 사람은 자아는 찬미하고, 타자는 자아를 위해 이용하려 하고, 때로는 공격|침략|억압|유린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불교는 깨닫지 못한 중생의 행위에 욕망과 분노(欲瞋, 곧 이기성과 공격성)가 잔뜩 배어 있고, 이것이야말로 인간 사회의 온갖 고통과 불행의 원인으로 본다. 그리고 근대 국민국가들은 항상 경쟁했고 경쟁이 심해지면 침략과 전쟁을 낳았다. 국가와 민족을 형성하고 그 형성 과정에서 형성되는 자아를 국민이라고 하면, 국민은 대체로 중생의 지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국민-중생이 내셔널리즘의 집단적 이기주의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내셔널리즘의 최초의 움직임이 아주 미세하고 움직이는 장소 역시 우리의 심층 심리라는 점, 그리고 집단 이기주의가 집단 내부에서는 공동 기억의 형식을 취하면서 현실적|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스스로 자기 반복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내셔널리즘의 형성력과 욕망은 아주 광포해져서, 내부의 일원이 자기 반복을 거부하거나 그 반복을 비판하는 자가 있다면 그를 비국민(非國民)이라는 이름하에 가차없이 처단하기도 한다.
인간 사회에 엄존하는 집단적 이기성은 근대에 국민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 훨씬 이전부터 인간 개개인과 집단 속에 거의 언제나 존재해 왔다. 불교 심리학에 따르면, 이기성은 주관과 객관 분리 이후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분리 이전 또는 그 아래에 이미 원초적 성향―객관을 인지하고 이용하려는 원초적 성향―으로 존재한다.1) 타자를 욕망과 분노의 대상으로 삼는 원초적 성향은 우리가 대상을 만나기 전에 이미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이기성과 공격성이 깃든 심층 심리를 유식불교(唯識佛敎)2)에서는 장식(藏識 또는 아라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부른다. 이 장식은 우리의 현의식(現意識)과 기억의 저장고로서 몸|입|뜻(身口意)에 의한 모든 행위의 원천이고 힘이지만, 그것의 진상이 우리의 일상적인 현의식에는 대부분 은폐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무의식이나 하(下)의식으로 부를 수 있다.
대승 경전의 하나인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3)과 거기에 주석을 단 신라의 원효(元曉 617~686)에 따르면, 장식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무명업상(無明業相), 능견상(能見相), 경계상(境界相)이 바로 그것이다. 무명업상이란 무명(또는 不覺)에 의해 생겨난 업상이란 뜻이다.4) 원효는 업상의 대표적인 사례로 욕망과 분노(欲瞋)를 들고 있다.5) 무명은 원인이고 업상은 결과이지만 이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존재하므로 무명업상이라고 한다. 달리 말해 우리에게 타자에 대한 욕망과 분노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무명의 존재 증명이다. 능견상이란 주관의 의미이고, 경계상은 대상을 말한다. 무명에서 욕망과 분노라는 최초의 움직임이 나왔고, 그것들이 결국 주관을 세우고 그 주관에 의지하여 경계상[대상]6)이 생긴다. 장식(藏識) 곧 제팔식(第八識)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모습은 아주 미세하므로 삼세상(三細相)이라고 부른다.
장식의 능견상과 경계상은 일종의 가능태이다. 장식이 대상을 실제로 만나 생겨나는 의식과 행위의 전개 과정은 모두 삼세상에서 나온 움직임이란 뜻으로, 불각(不覺)의 거친 모습[추상麤相]이라고 불렀다. 추상에는 여섯 종류[六種相]가 있다. 육종상에 대해 +대승기신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가 칠식(七識)이라는 지상(智相)인데, 지상은 보통 ‘지성(知性)의 분별하는 모습’의 뜻으로, 삼세상을 갖춘 팔식이 경계상을 애(愛)와 불애(不愛)로 분별하는 것이 바로 지상이다. 그러니까 중생이 대상을 만나서 행하는 최초의 분별은 애|불애의 분별이라는 칠식이다.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인데 애의 대상에 대해서는 낙(樂)을, 불애의 대상에 대해서는 고(苦)를 일으키고, 낙이다, 고다 하는 생각을 지속․반복하므로 상속상이라 한다. 셋째는 집취상(執取相)인데 앞의 고와 낙에 머물러 대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넷째는 계명자상(計名字相)으로 계는 분별한다는 뜻이다. 낙의 대상에 대해서는 집착을 일으키고, 고의 대상에 대해서는 혐오를 일으키고, 이들 대상에 대해 거짓된 이름과 언설의 모습으로써 분별하기 때문에 계명자상이라고 한다. @명자#란 곧 언어 행위이고, @거짓된 이름과 언설(假名字)#이라고 한 것은 이름과 언설이 집착과 혐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기업상(起業相)인데, 거짓된 이름을 찾고 그것에 집착하면서 여러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인데, 업이 주는 과보를 받아서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7) 예를 들어 한|일간의 축구시합에서 우리 국민이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면서 몸짓을 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외침과 몸짓 안에 한국에 대한 집착과 일본에 대한 혐오가 들어 있다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이미 거짓된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이 거짓된 것이라면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부자유의 업을 하나 더 쌓는 셈이다.
원효는 ~기신론소^에서 지상(智相)에 대해 애|불애(愛不愛) 대신 @아|진(我塵) 분별#8)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아(我)는 자아, 진(塵)은 주로 대상을 가리키는데, 대상이 사람이면 타자로 부를 수 있다. 아진 분별을 애|불애와 연결하면, 자아는 사랑의 대상, 타자는 불애의 대상이 된다. 원효는 ~기신론소^의 다른 부분에서 아진 분별은 아치|아견|아애|아만(我癡我見我愛我慢)이라는 네 가지 모습(四相)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아진 분별의 핵심에 자기사랑(我愛)과 자만(我慢)이 있고, 자아에 대한 판단은 모두 아견이며, 아견과 아진 분별은 모두 자아에 대한 무지(我癡)에서 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대상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말할 때는 이미 아진 분별이 작동하고 난 다음이다. 우리가 중생으로 남아 있는 한, 자아와 대상에 대한 모든 견해는 아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자기 견해를 갖는 것은 본성은 아니라고 해도 본성에 아주 가까운 것이다.
자타 분별이 거짓의 이름과 언설(假名字)이라고 했을 때의 @거짓#(假)라는 말은 중생 스스로 자신들의 자타 분별을 거짓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국민-중생의 입장에서는 자타 분별은 보통 아주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것이며 때로는 생존과 생육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중생이 만드는 애|불애의 이분법은 단순히 관념적인 구분, 즉 상부구조적인 구분이 아니라, 생존과 생육을 뒷받침하는 물적 토대에까지 내려가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9) 아진 분별은 처음부터 차별을 내재하고 있으므로, 이 분별은 곧 차별이다. 국민-중생은 이 차별을 지키기 위해 종종 목숨을 걸어 왔다. 그것이 전쟁인 것이다.
애|불애의 대상에 내 나라와 남의 나라를 각각 대입해보자. 우리 국민-중생은 내셔널리즘의 형성과 그 과정에서 고와 낙이 이어진다는 상속상, 고와 낙의 대상에 집착한다는 집취상에 빠지고, @대~한민국#이라는 가명(假名)을 거쳐 갖가지 애국적인 행위를 하게 되고, 그 과보로 부자유, 심하면 전쟁이라는 고통을 받게 된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열렬한 애국심을 지닌 국민-중생은 하릴없는 중생이고 부처에서는 한 없이 떨어져 있는 존재다.
2. 내셔널리즘은 아진 분별의 집단적 표출이고, 국사는 아견(我見)이다
내셔널리즘은 개인 의식에 아주 깊이 내재해 있는 아진 분별이 근대 국가의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학자들은 내셔널리즘이 자기 민족을 인식과 실천의 주체로 놓는 태도라고도 하고,10) 자신의 민족이나 국가를 형성함에 있어서 대립항을 설정하고 자기 우월성을 추구하는 태도라고도 했다.11)
국민국가와 내셔널리즘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일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치열하게 반성하고 있는 니시카와 나가오(西川長夫, 1934~ )에 따르면, 근대 국가는 모두 국민국가(nation state)이고, 다섯 가지 특성이 있다고 한다. 그것들은 ①명확한 국경의 존재, ②국가주권, ③국민 개념의 형성과 국민 통합 이데올로기의 지배(내셔널리즘), ④국가 장치와 제도, ⑤국제 관계이다. 국민국가는 언제나 복수로 존재한다.12) 니시카와는 국민 통합과 국민화의 과정을 거쳐 내셔널리즘과 국민이 탄생하는 과정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13)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시장|식민지|헌법|경찰|군대|학교|국기|국가(國歌)|국어|문학|예술|종교|전통을 만들고, 좀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공간|시간|습속|신체|언어|사고를 만든다고 한다. 이 모든 형성의 총체적인 결과가 내셔널리즘이고 국민이다.14) 그리고 $국민국가는 항상 잠재적인 전쟁 상태에 있는 국가&라고 덧붙였다.15)
니시카와는 $사람은 ~에 의해 국가로 회수된다&는 구절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사람은 문화|문학|예술을 통해, 그래서 문화 국가|국민 문학|국민 문화 등을 통해 국가로 회수된다. 사람은 역사에 의해 회수된다. 이 역사에는 권력자의 역사, 민중의 역사, 문화사, 종교사, 과학사 등 모든 역사가 다 포함된다. 사람은 또 가족, 학교, 교육, 과학(인문과학|사회과학|자연과학 모두), 즉 학문 일반에 의해서도 회수된다. 학문도 일종의 내셔널리즘이다. 종교는 어떤가? 니시카와에 따르면 종교는 때로 강렬한 반국가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사람을 국가로 회수하는 회로를 갖추고 있다.16) 그리고 니시카와는 $사람은 @국민#과 @민족#과 @대중#의 개념을 통해 국가로 회수된다& 하고 그 극단적인 예로 나치즘과 파시즘을 들고 있다.17) 그리고 국민국가 형성과 함께 탄생한 @국민#조차 괴물[Leviathan]로 불렀다.18) 결국 $사람이 국가로 회수된다& 함은 $사람이 국민과 내셔널리즘을 형성하고 그 과정에서 국민으로 형성된다&는 말과 같은 취지의 것으로 보인다.
국가와 국민의 형성에 반드시 수반되는 국사(國史)는 아견, 곧 아애와 아만의 기록, 다시 말해 특정 국민의, 특정 국민에 의한, 특정 국민을 위한 기록이다. 국사는 속성상 자아 중심의 @가명자상#을 지닌 것이다. 한국사의 내용에 있어서 @우리#와 @저들#간의 분별이 엄존하는 한, 한국인과 일본인, 한국인과 중국인이 이견 없이 합의할 수 있는 한국사 기술은 애당초 존재할 수 없다. 국사가 자타분별 위에서만 성립되는 기록이라면, 자만과 자기 사랑에서 나온 기록이라면, 미화가 아니고 왜곡이 아닌 국사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이런 국사에 @진실#과 @왜곡#을 가르는 기준은 존재할 수 없다. 아진 분별에 질적인 변화가 있기 전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합의할 수 있는 역사 교과서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서양제국주의란 인간 심리 내부의 이기성과 공격성이 복합적인 정치적|경제적 조건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리력을 동원하여 세계적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며, 이에 필사적으로 대응했던 일본은 동아시아 내부의 타자를 식민지로 보고 또 하나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가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항했던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는 독립과 자유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그 밑바닥에 아진 분별이 아직도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국민국가의 형성기에 말과 글로 먹고 사는 동아시아의 인문학자들은 어떻게 해왔는가? 그들은 단일 @국가#로 회수되는 길을 피해 인류, 아니 동아시아가 하나라는 이상을 꿈꿀 수 있었을까? 근대 일본의 교토(京都) 학파의 태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를 보자.
3. 니시다의 역사|정치 철학은 철학적 내셔널리즘이다
공동 기억과 전통의 핵심에 교육칙어가 있었다19)
동시대의 국민은 대체로 공동의 기억과 전통으로 살아간다. 메이지 유신 이래 니시다와 그의 동시대인이 공유하고 있던 역사적 기억의 중심에 가장 선명하고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천황과 국가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공동 기억의 기원은 니시다의 참선 수행이나 서양철학서 읽기가 아니라 역사적 환경이었다. 역사 철학 시기의 니시다의 말을 빌리면, $우리들의 기억은 역사적 세계의 기억이고, 우리들의 습관은 역사적 세계의 습관&이었던 것이다.(11: 370)20) 여기서 말하는 기억과 습관이란 메이지 일본 정부와 그 지도자들이 천황제 국가주의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과거의 전통을 되살려 현재의 상황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정리와 확대 재생산을 통해 형성되고 축적된 것이다. 역사적 기억은 일본 그리고 일본인의 생존과 생육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당연히 생물학적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기억과 습관은 일본 국민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주고 서세 동점에 대하여 거국적으로 대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실제 천황 정권 성립 당시에 일본 인민 대다수는 천황이 무엇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정부와 메이지의 지도자들은 정신적 지배와 의무교육 제도를 통하여 천황을 정점으로 공동의 가치를 형성해갈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천황․국가․국체(國體)는 점차로 일본인이라면 누구라도 피하기 어려운 운명적 환경으로 변해가게 되었다. 가령 $전국 인민들의 뇌리 속에 국가[國]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21)는 것을 절실한 과제로 삼았던 사상가와 행동가들의 노력으로, 천황과 국가 관념이 니시다 개인에게도 점차 운명처럼 각인되었을 것이다.
공동의 기억과 습관의 핵심에는 교육칙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칙어의 내용은 메이지, 다이쇼, 쇼와의 시기를 살아갔던 일본인이라면 대부분 배워 익혔을 것이고, 1890년 반포 이후 1945년 종전에 이르기까지 근대 일본의 교육 이념을 담은 것으로 일본인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칙어의 반포는 니시다가 열아홉 살 때의 일이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육에 관한 칙어
짐(메이지 천황)이 생각건대, 우리 황조(皇祖) 황종(皇宗) 국(國)을 시작한 일, 넓고 멀고, 덕을 세움에 깊고 두텁다. 우리 신민(臣民) 지극한 충에 지극한 효로써 억조심(億兆心)을 하나로 하여, 세세(世世) 진력을 다(厥)하는 아름다움을 보였다. 그것 우리 국체(國體)의 정화(精華)고, 교육의 연원(淵源) 역시 여기에 있다. 오 그대 신민이여, 부모에게 효하고, 형제에게 우애 있으며, 부부 서로 화합하고 붕우 서로 믿고 스스로는 삼가고 검소하며(恭儉), 무리에게 박애를 미치게 하고, 학을 닦고 업을 연습함으로써 지능을 계발(啓發)하고 도덕의 능력(德器)을 성취하시오. 나아가 공익(公益)을 넓히고 사회를 위한 일(世務)을 진작시키고, 언제나 국헌(國憲)을 중시하고 국법을 지키고, 일단 국가의 일대사가 있다면, 의롭게 용감하게 공(公)에 바치고(奉), 그리하여 천지처럼 무궁한(天壤無窮) 황제의 운을 도와야 한다. 이리하여 그대들 충량(忠良)의 신민이 될 뿐 아니라 그대들의 조선(祖先)의 遺風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이 길(道)은 실로 우리 황조 황종의 유훈이고, 자손 신민 함께 존수해야 할 바 이것은 고금(古今)에 통해서 잘못 없고, 그것을 중외(中外)에 베풀어 어긋남이 없다. 짐은 그대 신민과 함께 그것을 늘 마음에 간직하여 정성스럽게 지켜서, 우리 모두 그 덕을 하나로 하는 일을 원하도다.(메이지 23년 10월)
1890년 이래 모든 방면에서 국민 교육의 근간이 된 교육칙어는 주로 신도(神道)적이고 유교적인 원리에 근거를 두면서 가족과 국가에 대한 충효를 강조하고 있다. 억조의 마음이 지극한 충효로써 황조(皇祖) 황종(皇宗) 국(國)을 위하여 진력을 다하는 일, 즉 황조를 중심으로 모든 국민을 하나로 묶는 일, 충효를 세세 이어가며 온 힘을 다하는 일, 그것이 국체의 정화며 교육의 연원이라는 내용이다. 뿐 아니라 칙어는 화합|검소|박애의 덕목을 권장하고 학을 닦고 업을 연습하기를 권유하고 있다. 신민이라면 공익을 넓혀야 하고 국헌과 국법을 준수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마땅히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천지처럼 무궁한 황제의 운을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민이 되고, 조상의 유풍을 잇기도 한다. 그 길은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오류의 길이다. 이른바 황민화 교육에 의해서 충군애국의 정신을 국민에게 철저하게 심어주려는 당시 메이지 정부 담당자의 의도를 잘 요약하여 반영하고 있다.
@국#과 @황실#이란 말은 칙어를 비롯한 국민 교육의 각종 수단을 통하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초기의 니시다는 이것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역사 철학기의 니시다는 천황을 경애하고 천황과 국체를 모두 철학적으로 옹호하게 된다.
순수경험이나 자각의 철학에서 역사|정치 철학으로
15년 전쟁 시기에 니시다는 철학자로서 자신의 초기 순수경험의 철학을, 달라진 환경에 맞춰 창조적으로 변화시켜 역사|정치 철학을 형성했다.22) 철학자 니시다는 1910년 이래 교토 제국 대학의 교수로 봉직했다. 역사적|정치적 사건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일기에 부단히 이어지다가, 후기로 갈수록 그의 일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니시다는 1905년 1월 초 일기에 러일 전쟁 중 일본군이 러시아의 여순항을 함락시킨 사실을 적고 있다.
1월 2일(월) 맑음 [<>] 오후 3시 반경 여순구(口) 함락. 스테스셀 항복의 호외 도착하다. 유쾌 스스로 금할 수 없다. 북국 남자 충용의 공이다. 전 도시 종치고 북을 두들겨 이를 축하하다. 밤에는 좀 열심히 일하다.(17: 129)
1월 5일(목) 비|맑음. 오전 타좌. 어제 저녁 이래 나의 마음 심히 의심한다. 나는 자기를 알지 못하고, 헛되이 대망을 품는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선택한 길을 맹진(猛進)할 수밖에 없다. 물러나기에는 나는 너무 늙었다. 오후 타좌. 정오 공원에서 여순 함락 축하회 있다. 만세소리 들린다. 오늘 저녁은 축하의 제등(提燈) 행렬을 한다고 하지만, 기다(幾多)의 희생과 전도의 요원함도 생각지 않고, 이러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인심은 부박(浮薄)한 것이다. 밤 타좌.<>(17: 130)
2월 7일(화) [<>] 야 타좌. 잡념, 잡언(雜言), 간식 가장 유해. 최대의 용기는 자기를 이기는 데 있고, 최대의 사업은 자기의 개량에 있고, 이 대사업은 만주 경영보다 더 나은 것임에 틀림없다. 나의 사업은 도(道)와 학(學)<>(17: 134)
이 일기는 니시다가 역사적 생명이란 개념을 사용하기 훨씬 이전의 기록이다. 위의 1월 2일자 일기에 니시다는 여순항 함락이 남자 충용의 공이라고 생각하여 유쾌함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가, 1월 5일자 일기에는 승전 축하를 위한 제등행렬을 야단법석의 @부박#이라고 불렀다.
위의 세 편의 일기에서 니시다는 러일 전쟁의 승리에 대해 이중적이고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근대 일본사에서 기념비적인 러일 전쟁의 승리에 대해서조차 확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것은, 니시다가 순수경험과 절대무(絶對無)의 자각(自覺)을 중심으로 철학을 전개하던 시기에 역사적 사건, 즉 공적(公的) 세계에 대하여 취했던 태도의 특징적인 일면이었다. 역사적 사건과 국가 사업은 애매한 일이었고 도와 학의 사업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일이었다.
니시다는 본격적으로 역사|정치 철학을 전개하기 전 순수경험과 자각의 철학을 먼저 전개했다. 인생의 비애와 좌절 그리고 덧없는 세상(浮世)을 뛰어넘어 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다는 참된 자기로 향하려고 했던 니시다의 욕구가 초기 철학의 성격을 크게 규정한다. 순수경험과 자각의 철학이 그 핵심 개념이었다. 이 자각은 @자기가 자기 안에서 자기를 보는 행위#이고 @자기가 자기 안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빛나는 행위#로 말할 수 있고, 우리 경험 중 가장 내밀한 부분이고 모든 의식 운동의 출발점이며 생명의 원천이다. 이때 니시다는 내적 인간을 참된 자기로 보고 역사를 초월한 곳에 두었다.23) 그런데 1930년대부터 내적 자기와 역사적 세계―곧 내적 생명과 역사적 생명―를 나누면서 내적 자기를 역사적 세계 안에 있다고 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내적 자기와 외적 자기,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니시다 철학에서 국가를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는―니시카와의 말을 빌린다면 국가로 회수되지 않는―개(個)의 자리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24)
니시다는 나라 사랑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여겼다. 역사적 생명의 구현은 내적 생명의 한 순간이 변화하고 응용되어 나타났다. 이 변화 또는 응용으로 인하여 초기 철학의 주요 용어들이 역사적인 것으로 변한다. 자각은 역사적 자각으로, 개인은 역사적 개인으로, 행위는 역사적 행위로, 장소는 역사적 또는 공공의 장소로, 그리고 표현의 들[野]로 바뀌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와 시대는 신성화되고 마침내 절대무의 자각 및 내적 생명이 누릴 수 있었던 최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시대를 비롯하여 민족|국가|천황 같은 역사적|정치적 개념이 절대화된다. 바로 여기서 니시다의 역사|정치 철학이 탄생한다. 이 철학은 초기의 내적 생명의 철학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므로 필자는 전회(轉回)라고 불러 보았다.
그런데 전회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철학자 니시다는 메이지와 쇼와기에 형성되어가는 내셔널리즘과 국민의 형성 과정에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국가로 점점 회수되었다는 의미에서, 피동적으로 움직였다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가 초기의 내적 생명의 철학을 떠나 역사적 생명의 철학을 형성해 간 데에는 상당한 정도의 능동성과 자발성을 발휘했을 것이다. 1919년 1월 10일 일기의 상란에 있는 구절―$작은 인간은 역사의 중에 태어나지만, 큰 인간은 역사를 만드는 자다. Amor fati.&(17: 361~62)―에 영웅사관, 대인사관이 보인다. 천황을 비롯하여 역사의 무대 위에서 크게 활동하고 있던 일제의 지도자들, 일본군 그리고 니시다 자신도 여기 @큰 인간#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역사 형성의 일익을 담당한 창조자였기 때문이다.25) 그의 후기 역사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던 국체, 황실, 국가에 대한 그의 주장을 검토해보자.
니시다의 종교적 국가론―국가 지상주의
니시다는 유럽 민족의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동아시아에 특수 세계를 하나 세워야 한다 하고, 유구하고 심원한 전통을 가진 일본만이 그와 같은 세계사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전통의 기초에 황실을 두었다. 대략 이와 같은 내용이 천황론 또는 황실론의 골격이다. 니시다는 1940년대에 쓴 여러 논문에서 확고한 국가 철학을 개진하게 되며, 1943년에는 히로히토 천황에게 어전 강의를 하고 훈장을 받기도 한다.
니시다에게 황실론과 국가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의 국가론은 천황 중심의 종교적 국가론이라고 할 수 있다. 논문 ~국가 이유의 문제^(1941)에 나오는 다음 일절에서 그는 역사 세계|국체|국가|국민|민족|황실|제정일치|팔굉일우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적극 옹호하고 있다.
역사적 세계는 여러 가지 전통을 가진 여러 민족의 자기 형성에서 시작한다. 즉 역사적|종적(種的) 형성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렇게 주체와 환경이 상호 형성함으로써, 특히 하나의 환경에서 많은 주체가 상호 한정함으로써, 주체 즉 세계적으로 자각하고, 여러 국가가 형성되는 것이다. 각 민족이 하나의 개성적 세계를 형성한다. 국체란 이런 개성적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여러 가지 역사적 지반으로부터 여러 가지 국체가 형성된다.<>그러나 현실의 국가로서는 제각기 개성을 갖춘 것이어야만 한다. 랑케가 말하듯이 국가는 하나의 생명이고 개체여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국가라고 해도 전체주의적 국가라고 해도 유의 종이란 것은 아니다. 내가 ~일본 문화의 문제^에서 말했듯이, 전체적 일(一)과 개체적 다(多)와의 모순적 자기 동일로서 주체적 즉 세계적으로 형성된 아국의 국체란 것은, 절대자의 표현적 자기 형성으로서 승의(勝義)에서의 국가라고 불러야 하리라. 황실은 과거|미래를 포함하는 절대 현재로서, 우리는 여기에서 태어나고 여기에서 활동하며 여기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때문에 아국에서는 제정일치라고 말하듯이, 주권은 곧 종교적 성질을 갖는 것이다. <>아(我)국체는 조국(肇國)의 신화로서 시작하고, 수많은 사회적 변천을 경과하면서도, 그것을 근저로 삼고 금일까지 발전해온 것이다. 아국체(我國體)에서는 종교적인 것이 시작이고 끝이다. 거기에 아국체는 참으로 주체 즉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 세계 창조란 것이 아국체의 본의(本義)이리라. 이 때문에 내부에 만민보익(萬民輔益)이고, 외부로 팔굉일우(八紘一宇)다. 이런 국체를 기초로 하여 세계 형성에 나서는 것이 아국민(我國民)의 사명이어야만 한다.(10: 333~34)
역사 세계의 각 민족과 국가는 주체와 환경과의 상호 한정의 관계에서 하나의 개성적 세계를 형성해간다. 국체란 바로 이 개성적 세계다. 니시다가 역사 세계에 각기 역사적 기반을 달리하는 복수의 민족들이 존재하므로 여러 가지 국체의 형성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복수 민족론이나 복수 국가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국가 하나하나는 하나의 종(種)으로서 각기 개성을 지닌 하나의 생명이고 하나의 개체이므로, 민주주의적 국가든 전체주의적 국가든 모두 하나의 종─유(類)가 아니라 종─이다. 여러 국가와 여러 민족이 어우러져가는 역사 세계가 전체적 일(一)이라면 현실 일본은 개체적 다(多)이다. 전체적 일과 개체적 다는 모순적 자기 동일의 관계에서 주체적으로 즉 세계적으로 형성해간다고 했다.
황실은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는 절대 현재다. 일본 국민이라면 누구든 태어나 활동하다가 죽어가야 할 바로 그 장소다. 주권과 국가가 종교적 성질을 갖는다고 하므로 그의 국가론은 종교적 국가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니시다가 국가와 국체를 도덕의 근거로, 때로는 가치 창조자로 보고 있는 대목은 수없이 많다. 니시다의 역사 철학은 국가|도덕|종교의 삼위일체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체는 조국(肇國)의 신화로서 시작했다고 했다. 조국이란 나라를 세운다는 뜻이다. 일본국을 세울 때 그 신화가 된 것은 국체로서, 그것이 근저가 되어 수많은 사회 변천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발전되어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국체란 참으로 영원의 과거로부터 존재해왔던 세세고금(世世古今)의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등이 헌법 제정의 기축(機軸)이란 의미로 창출해낸 것이었다. 국체는 서세동점의 대응책으로 근대 일본이 시도했던 중요한 정치 행위의 결과였는데, 니시다는 이것을 옹호하게 되었다.
니시다에게 국체의 진정한 뜻은 역사적 세계 창조다. 역사적 세계 창조의 중점에는 서세동점 아래에 조국(祖國) 일본의 국가 형성이었을 것이다. 세계 창조와 국가 형성을 위해서 안으로는 만민을 돕는다는 정신을 가지고 바깥으로는 팔굉, 즉 온 세상이 하나의 지붕 아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세계 창조와 국가 형성에 나서는 것이 일본 국민의 사명이다. 니시다는 당시 전쟁기의 갖가지 정치 이념을 철학적으로 옹호하고 말았다. 특히 황실을 절대 현재라 하고 국가를 절대 @현실의 국가#라고 했을 때 현실을 무조건 용인한다는 절대 현실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니시다의 정치 현실주의의 종착점은 나치스 옹호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개성과 일즉다(一卽多)의 논리가 적용되어 생긴 가장 파멸적인 결과를 목격하게 된다.
더욱이 나치스의 국가관에서는, 민족의 개성이란 것이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이다. 개성은 실천의 지반이 될 뿐 아니라 실천의 힘이 되는 것이다. 개성이란 데모니쉬(demonisch)한 역사적 형성력이다. 낭만주의는 금일 역사적 현실주의다. 개성주의란 개인주의라는 것은 아니다. 개성이란 개인의 것이 아니다. 개인적 개성으로 여겨지는 것은 도리어 특수성을 벗어난 세계적 내용을 의미하고 있다.(10: 379~80)
역사 현실주의와 개성주의, 이 두 단어는 니시다 역사 철학의 핵심어다. 하나의 시대가 그랬듯이, 하나의 국가 또한 민족의 개성을 기초로 삼고 있다. 니시다는 나아가 나치 국가의 개성이 갖는 악마적인 힘, 그 국가 형성력을 강조했다. 니시다는 다른 곳에서26) 개성이란 개념을 낭만주의, 예술적 직관,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의 시대론, 그리고 화엄에서 사용되는 사리무애(事理無礙) 또는 사사무애(事事無礙)의 논리와 연결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개성과 일즉다의 논리를, 나치즘과 화엄에서 사용되는 개념들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 개념으로 삼고 있다. 달리 말하면 니시다는 우리가 일즉다 논리의 관점에서 국가 개념을 발전시켜 나가면, 랑케나 나치식의 국가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 공영권은 영미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이념이었지만, 이웃 나라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동아 공영권은 제국 일본이 태평양 전쟁 말기에 주창했던 침략 이론의 일부였지만, 니시다는 이것을 자신의 주체와 환경의 상호 한정론으로 설명하고 옹호했다. 한 국가의 세계성은 오직 다른 국가와의 관계 아래서만 드러날 수 있다는 의미다. 그 세계성을 동아시아에 적용한 것이 동아 공영권이란 개념이다. 팔굉일우(온 세상이 한 집)라는 슬로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동아 공영권의 이념은 오늘날 국제 정치와 경제에서 블록 경제, 블록 외교 등의 토대가 되는 지역론과 유사한 점이 있다. 하지만 동아 공영권 내부에서의 일본의 역할이 다른 어떤 동남아 국가에 비하여 우월한 지위를 점한다고 했을 때, 침략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니시다는 간과하고 말았다.
니시다는 태평양 전쟁 발발 후 18개월 만에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역할에 대해서 글을 쓰라는 군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세계 신질서의 원리^(世界新秩序의 原理, 1943)를 집필했는데, 그 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1) 종래, 동아 민족은 유럽 민족의 제국주의 때문에, 압박받고, 식민지시(視)되어, 각자의 세계사적 사명을 박탈당했다. 오늘이야말로 동아의 제민족(諸民族)은 동아 민족의 세계사적 사명을 자각하고, 각자 자기를 초월하여 하나의 특수한 세계를 구성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사적 사명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동아 공영권 구성의 원리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동아 민족은 함께 동아 문화의 이념을 내걸고, 세계사적으로 분기(奮起)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하나의 특수적 세계라고 하는 것이 구성되자면, 그 중심이 되고, 그 과제를 지고 일어설 것이 있어야만 한다. 동아에 있어서 금일 그것은 우리 일본밖에 없다. <>금일의 동아 전쟁은 후세의 세계사에 있어서 하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리라. (12: 429)
2) 일과 다의 매개로서 공영권과 같은 특수한 세계가 요구되는 것이다.(12: 430~31)
3) 아국의 황실은 단순히 하나의 민족적 국가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국의
황도에는 팔굉위우(八紘爲宇)의 세계 형성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12: 430)
1)에 따르면 제국주의적인 유럽 민족 특히 교전 당사국인 영국과 미국은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을 식민지로 보고 동아시아의 민족들에게서 각자의 세계사적 사명을 박탈해갔다.27) 이에 동아 민족이 세계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동아 공영권이라는 특수 세계를 구성해야 한다고 했다. 공영권이 일즉다의 세계라면 하나의 공영권을 중심으로 일본과 다른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관계는 수평적|호혜적 관계를 형성하고, 단일 세력이 되어 영미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니시다가 그 중심에 일본이 있어야 한다 하고 역사가 주는 과제를 담당하기 위하여 일어설 수 있는 자가 일본밖에 없다고 했을 때, 그리고 절대 현재의 일본 황실이 팔굉위우의 세계 형성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을 때, @일과 다의 매개#가 @일의 다#로 바뀌고 말았다. 니시다는 모든 행위의 중심에 일본의 국체와 황실을 둠으로써, 자아만을 보고 타자의 개성은 박탈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타자를 거의 @진(塵)#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 그는 동아 민족이 유럽 민족의 제국주의 때문에 압박받고, 식민지로 간주되어 각자의 세계사적 사명을 박탈당할 수 있다는 점은 말하면서도, 일본이 동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들어 각자의 사명을 박탈했다는 점, 즉 일본이 제국주의자가 되었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4. 국가와 국민을 넘어서
우리가 니시다의 역사|정치 철학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것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그 자신은 그 철학이 아진 분별의 무지에서 나왔다고 꿈에도 생각지 않고, 오히려 역사를 만들어가는 @큰 인간#의 사명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는 역사적 기억과 습관을 운명처럼, 현실로 받아들였으므로, 이것들이 집단적 아견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최근 한국과 일본의 일부 사학자들은 국가|민족|국사의 형성 과정을 밝혀 그것들이 고안되고 실체화된 것, 그리고 그 형성의 중앙에 이기성과 공격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지적하며 통렬하게 반성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성시는 +만들어진 고대=에서 일본사|일본문화는 서양을 대립항으로, 한국인에 의한 조선사 내지 한국사 연구는 일본을 대립항으로 각각 설정하여 성립되었음을, 따라서 서양-일본-한국(조선)이 모두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쇄과정에서 성립했고, 한 민족은 다른 민족에 대해 언제나 우월성을 추구한다고 한다.28) 이성시는 $원래 자기 @민족# 혹은 자기 @문화#의 강조는 대립항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29) @자기 민족은 원래 대립항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구절의 ‘원래’(原來)라는 말에 주목하여 우리는 내셔널리즘을 인간의 본성의 발로로 봐야 할까?
임지현은 국사 형성 작업이 서양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거치고, 한국에까지 이어져 온 과정을 @국사 대연쇄#라 부르고 이를 끊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또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관계#는 @국사#의 대연쇄를 촉발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을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하는 주요한 기제였다. <>동아시아 차원에서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민족주의의 고양은 @적#과 @동지#의 이분법을 날카롭게 하고 민족을 기준으로 하는 집단적 정체성을 강화시켰다. 한반도와 중국을 타자화한 일본의 오리엔탈리즘과 식민지/반식민지의 역사적 경험은<>동아시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민족적 관점에서 사고하는, 실천하는 방식을 본성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다.30)
위의 인용에 따르면, 적과 동지의 이분법을 날카롭게 하고, 민족적 관점에서 사고|실천하는 성향이나 태도, 그것이 바로 내셔널리즘인데, 임지현은 그것이 @본성의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이를 거부하고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 포럼&을 구성하여, 서양이나 일본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리의 @민족주의#나 @국사#를 강화할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차원으로 얽혀 있는 @국사#의 대연쇄를 잘라내는 작업이야말로 서양의 헤게모니를 해체하는 첫걸음인 것&이라고 논했다.31) 그런데 역사 전쟁에서 대연쇄를 자르기 위해 자국의 국사를 해체하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을까? 도대체 서양의 헤게모니를 해체할 수 있을까? 임지현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자기 민족을 인식과 실천의 주체로 놓고 팽팽하게 맞선 이 역사 전쟁에서 @국사#를 해체하여 자민족 중심주의를 상대화시키고 공통의 동아시아 역사상을 수립하자는 주장은 설 곳이 없다. @국사# 해체는 적의 공격적 민족주의 앞에서 우리 민족의 방어 논리를 무장해제할 뿐이라는 감정적 반발이 역사적|비판적 성찰을 압도하는 것이다.32)
위의 인용에서 임지현은 내셔널리즘적인 태도를 극복하고 일국사를 해체하여 @공통의 동아시아 역사상#을 수립하자는 주장이 설 곳이 없다고 한다. 그 주된 이유는 @적# 앞에서 국사를 해체하는 것이 일방적 무장 해제와 같다는 감정적 반발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란다. 우리의 말로 하자면, @국사#의 연쇄 고리는 국경을 넘어서 인근 국가로 퍼지지만 그 뿌리는 국민-중생들의 공동의 기억|습관|생리에 있으므로, 이것들을 바꾸지 않는 한 국사 해체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니시카와는 조선에서 태어났고, 국민국가가 자신의 전 생애를 좌우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에게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은 그것에 대한 $반성과 분노에서 나온, 말하자면 통한의 담론&이다.33) 그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국민국가는 그 구조와 본질로 인해, 그것의 본질은 항상 은폐되어 있다. 국민국가를 논의하는 것은 그러한 국가를 상대화하고 대상화할 수 있는 시점을 탐색하는 작업을 수반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국민화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상대화하고, 국민으로서의 자기를 해체=재구축하기 위한 작업을 항상 필요로 한다.34)
진지하며 감동적이기조차 한 니시카와는 @국가#를 상대화|대상화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국민#을 상대화하고 해체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국가 비판은 국민국가가 지배적인 한, 소수이지 주류가 될 수 없다&고 전망하고, 때로는 자신의 소속 집단에서 비판 받을 각오도 해야 한다고 한다.35) 그에 따르면, 국민사 즉 내셔널 히스토리를 긍정하는 한, 역사적 오류를 지적하는 수준에 머물고 말뿐, $자국 중심적 이데올로기성의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 $어떤 식으로 고치든 그것은 @애국적인# 역사교과서이기 때문에&라고 말한다.36) 불교의 말로 하자면, 아진 분별 위에 근거해 있는 우리의 역사 기술은 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왜곡된 것이고 언제나 미화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국을 대한민국이라고 명명할 때 우리의 역사 기술은 왜곡되거나 미화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니시카와는 ~저자 서문―한국의 독자들에게 주는 글^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형성된 한국과 중국 및 그 외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국민국가 비판 이론이 통하지도, 환영받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니시카와는 $국민국가가 민족의 독립|해방과 불가분의 것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37)이라 하고, 국민국가의 주권 수립이 그 나라 인민의 독립과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 다음, 일본 근대에 대한 자신의 역사관을 간략히 피력하고 있다. 그 역사관에 따르면, 일본에도 메이지 전반기에는 저항적 민족주의란 것이 있었지만 이것이 청일|러일 전쟁의 시기에 확대적|침략적 민족주의로 변질되었다. 이 두 전쟁을 통해 @국민의 창출#에 성공했다. 1905년 8월 @한일조약# 이후 국민의 확장과 비국민에 대한 억압의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21세기에 들어서 100년 전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글로벌화라는 이름의 식민주의 아래에서 민족과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38)
5. $불멸의 이순신& 대 $전쟁론&: 내셔널리즘의 충돌
내셔널리즘은 공동의, 역사적 기억과 역사적 습관을 먹고 산다. 그리고 기억과 습관은 개인의 것이든 공동의 것이든 자기 반복하려 하고, 자기 반복을 통해 더욱 강고(强固)한 것으로 변해간다. 불교는 이런 자기 반복을 윤회전생(輪廻轉生)이라고 한다. 윤회전생은 개인에게만 아니라 국가, 국민, 민족 등의 집단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윤회전생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발생한다. 내셔널리즘은 한 개체에 주목해서 보면 시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만, 이웃 국가로 확산되는 국사의 대연쇄를 생각하면 공간적으로도 윤회하고 전생하는 것이다. 소수의 학자들이 이런 윤회전생의 힘을 감소시키기 위해 일국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역사의 민주화, 동아시아 인민의 독립과 해방, 그리고 억압과 전쟁 없는 평화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아주 미세하다. 반대로 내셔널리즘의 목소리는 크고 우렁차며, 텔레비전이나 만화 등의 대중 매체를 이용하여 쉽게 전파되고 점점 커지고 있다.
@국민의 방송#을 표방하는 공영 KBS 한국방송은 2005년 1월 현재 @불멸의 이순신#과 @해신#(海神)을 방영하고 있다. 이 두 드라마의 기획 의도는 아주 민족주의적이며, 특히 @해신#의 경우 물리력만 갖춘다면 제국주의라도 감행할 태세다. @불멸의 이순신#의 제작진이 밝힌 기획 의도는 대략 다음과 같은 네 가지다.39) $21세기의 새로운 지도자상이 필요한 시점이다.& $경제 전쟁의 시대, 이순신은 유효하다.& $임진왜란을 되돌아보며 역사에서 배운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드라마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이다.& KBS는 이 네 가지 기획 의도를 보다 상세히 설명하면서 @국가 존망의 위기#, @통일#, @애국심#, @무한 국가경쟁시대#, @경제 전쟁의 시대#, @침략자# 등의 용어를 동원하고,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아 마침내 칠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그의 생애를 통해 우리의 꿈과 희망을 다시 확인할 것이라는 취지의 말로 끝맺고 있다.40)
여기에서 사용된 @위기#와 @애국심# 등은, 메이지와 쇼와기의 일본 국민과 지식인들이 반복해서 들었던 말과 아주 유사하다. 그리고 니시카와가 말했듯이, 국민국가의 출현 이후 우리는 항상 경쟁의 시대를 살아 왔다. 아니 인류 역사에 집단간의 경쟁, 정복과 전쟁이 없었던 때가 과연 얼마나 될까? 미국, 영국, 일본, 중국도 하나의 제국(帝國)으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집단간의 치열한 내전과 갈등을 통과해야만 했다. KBS와 같은 @국민의 방송#은 @국민#이 존재하는 한 @국민# 드라마를 주기적으로 반복|제작할 것이다. 국민 개개인의 신체에 각인된 국가와 민족에 대한 기억―시각과 청각 등 감각 기관을 통해 신체에 축적되므로 언제나 신체에도 각인되는 기억―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자기 반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불멸성은 하지만 한국 내셔널리즘의 불멸성을 의미하며, 이는 @연쇄적으로# 일본과 중국의 내셔널리즘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이런 불멸성은 @국사# 해체론자에게는 악몽일 것이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1923~1996)는 흔히 일본의 국민 작가로 불린다. 일본의 공영 NHK가 러일 전쟁을 소재로 하며 민족 서사시의 하나가 되어버린 시바의 +언덕 위의 구름=(1969~1972)을 원작 삼아 드라마를 제작 방영하여, 국민 정신을 고취하고 일본의 역사를 미화한다면, KBS는 무슨 논리로 그 드라마를 비판할 수 있을까? 우리 드라마는 저항적 민족주의이고 그들의 드라마는 공격적 민족주의라는 말로 저들을 과연 설득할 수 있을까?
만화 +전쟁론=―보통 사람들의 하의식(下意識)에 있는 내셔널리즘을 표현한 것
한국에 @불멸의 이순신#과 최인호와 같은 작가가 있다면 일본에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 1953~ )와 우익 세력이 있다. 고바야시는 직설적이고 대담한 비평 만화 +오만주의 선언=41)으로 유명한 자로, 천민 집단에 대한 차별대우, 매체의 검열 제도, 강간, 이지메, 마약, 옴진리교 등 아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전쟁 경험이 없는 젊은 층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이 선언의 충격은 1980년대 일본의 사상 논단을 격렬한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최대 사건이었다고 한다.42) 그는 성인용 뉴스 주간지 +Spa!=에 회당 2~8페이지의 만화를 1991년에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일본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하기를 꺼려하는 터부에 대해서도 대담하게 발언하여 비평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그가 이제 장편만화 +신(新)오만주의 선언 Special 전쟁론(戰爭論)=(이하+전쟁론=)을 펴내고, 60만 부 이상 팔리면서 만화의 대중적인 영향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43) 이 만화는 대동아 전쟁이 구미의 아시아 침략을 막으려는 @성전#(聖戰)이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44) 그는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구미의 식민지로 되었던 시대에 일본만이 독립국이었고, 일본만이 구미와 싸웠던 것이다. 싸울 책무가 있었다. 세계 지도는 일변했다. 제국주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45)고 주장하고, $대동아 전쟁이야말로 일본인의 민족성을 건,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감동을 자아내는 일대 서사시&로 찬미하고 있다.46) 난징(南京) 대학살은 @날조#로, 한일 합방은 $코리아 최대 정당 일진회가 원했고 세계가 승인했&던 것으로 그리고 있다.47) +전쟁론=은 대동아 전쟁 발발의 필요성을 논증하고 인종차별주의자 백인과 싸운 조부를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편48), 일본 내부의 평화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 만화는 대동아 전쟁 찬미 이외에도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사적인 욕망만을 강조하고, 사회에 대한 봉사나 자기 희생 같은 가치를 완전히 무시해 온 것을 비판하면서, @공을 위하여#(公のため)라는 덕목을 권장하고 있다. 고바야시는 $공(公)에서 이탈한 개인은 사람이 아니&라고 갈파하고,49) 공(公)이라는 제약을 받으면서 길러지는 개(個)만을 인정하고 있다.50) 그런데 고바야시는 @공(公) 즉 국(國)#이라 하고,51) @공공성의 범위는 국(國)#이라고도 했다.52) 종래에는 @나라를 위하여#가 아니라, 민중|인민|인류|피지배자 등을 위한다고 하는 것이 통념이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한다#는 것은 곧 다수 전체자나 서민 대중을 위한다는 것이다.53)
고바야시는 작가나 문화인과 같은 특수한 재능을 지닌 개성 있는 사람을 에고만의 개인과 공공심 있는 개인이라는 두 부류로 나누고 후자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 개인은 단순한 쾌감과 욕망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민족|종교|전통|가문 등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탄스럽게도 $일본에서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으로#라고 진보적 문화인|지식인이 대합창한 결과 욕망만이 지지하는 @에고만의 개인#이 대규모로 번식해버렸다&고 한다.54)
고바야시와 공저로 책도 냈고, 또 하나의 내셔널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아사바 미치아키(淺羽通明)는 위에서 인용되었던 책에서, ~누구라도 내셔널리스트가 되지 않을 수 없다―그 신체성^이라는 소제목 아래에서 내셔널리즘의 신체성, 자연성과 현실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컨대 내셔널리즘이란, 사상(思想)이라기보다는, 의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들 대부분이 거기에 근거하여 생각[思想]하고 행동하고 있는 전제와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로는, 사상이라고 하기 보다는 본능이나 생리 및 관습에 가깝다.55)
중요한 것은, 자각, 무자각을 불문하고, 긍정하든 부정하든, 國=내셔널한 것은 우리들의 의식을 깊은 곳에서 규정해가는 리얼리티로서 현재 있다.56)
내셔널리즘을, 이 내이션=國=일본에 가치를 인정하고, 거기에 기저를 두고 전개되는 사회 사상으로 파악해두자.57)
위의 세 개의 인용문에서 아사바는 우리가 의식해서 내셔널리스트가 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장소에 태어났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내셔널리스트가 된다는 것이다. 그가 내셔널리즘이 본능․생리․관습(습관)에 가깝다고 한 것도 모두 그 신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아사바에 따르면 그들이 내셔널리즘이 친체제적인지 반체제적인지 물어봐도 의미가 없다. 반체제 사상도 이미 @일본=국#은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사바는 근대 국가 이전에는 내셔널리즘이 향토애, 애국심, 왕이나 황제에 대한 충성의 형식으로 @맹아적으로만# 있었다고 한다.58)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는 번역투 이상으로, 곧 지식인의 사상 이상으로 될 수 없었지만, 내셔널리즘은 서민 대중 사이에 상당히 침투할 수 있었다고 한다.59)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셔널리즘이 논리적인 책으로 두뇌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소설이나 영화, 스포츠를 이용하고 견고한 동포 의식을 이용하여 그들의 정감이나 신체에까지 침투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60) 달리 말하면 내셔널리즘은 책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심신에 각인되어 공동 기억의 저장고에 축적되는 방식을 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목 역시 신체성을 지적하는 말이다.61)
내이션=일본이 왜 중요한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스스로 거기에 태어나 자라나고, 그 지역의 문화를 몸에 익혀 왔다는 사실 이외에 근거는 없기 때문&이라고 아사바는 말한다.62) 아사바는 이를 내셔널리즘의 부조리성이라 부르고, 내셔널리즘이 부조리하다는 점에서 근대 사상과 다르고, 그것을 넘어간다고 한다. 부조리성을 설명하자니 신화적인 언어들, 즉 만세일계의 황통, 신주불멸(神州不滅), 단일 민족의 동질적 사회, 초고대문명 등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사바의 말이 옳다면 니시다의 철학적 내셔널리즘은 내이션의 신체성과 부조리성을 철학적인 언어로 설명해 본 것에 불과한 셈이다.
아사바에 따르면,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은 대미 종속이라는 굴욕적 상황을 청산하기 위해63)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꿈꾸었으나, 혁명의 가능성이 멀어지자 그들 대부분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전쟁 포기의 선언을 통해서 세계의 선구가 된 일본이라는 관념적 내셔널리즘으로 퇴영해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서민 사이에는 수십 년에 걸쳐 침투해 온 내셔널리즘은, 기본적으로 전후에도 존속했다. 군사와 외교의 독립을 박탈당한 조건하에서, 그[내셔널리즘] 정념(情念)은 일본의 기술자, 비즈니스맨을 힘껏 움직이고, 메이드 인 저팬의 세계 석권, GNP 대국이 되는 모습으로, 자기실현을 꾀하고 있다. 그 언어적, 비언어적인 표현은 시바 료타로의 역사 소설, TV 드라마, 영화, 소년 만화, 대부분의 스포츠, 엔카(演歌) 및 팝스 등에서 얼마든지 간파할 수 있으리라.64)
서민 대중은 내셔널리즘이란 정념을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 $표현을 갈망하는 [서민 대중의] 심성&65)―을 표현해 준 사람이 바로 고바야시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사바는 $현재,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전쟁론=,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에서 보이는 내셔널리즘 현상은, 많은 지식인이 볼 수 없게 가려버린 대중의 하의식의 분출이리라&고 말했다.66) +전쟁론=을 읽고 환호했을 저 수십만의 보통 사람들은 그 만화에서 자신들의 하의식을 본 것이고,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 서민 대중들의 하의식에 민감했던 단체인 셈이다. 아사바는 근대 국가 일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지금, 일본은 근대 국가로서 성숙기에 있다. 내셔널리즘을 과잉할 정도로까지 고양시켜, 구미의 근대 도전에 대하여 독립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메이지 시기. 그 결과 돌출해버린 군사력과 대중적 내셔널리즘을 소프트랜딩시키지 못하고 대동아 전쟁 패전에 도달했던 쇼와의 시기. 군사력과 내셔널리즘의 파행의 수정이 또 지나쳐서, 근대 국가화라는 선택지를 선택한 원점도, 자존 자위의 에고이즘과 그 수단인 군사력의 의의도 모두 터부로 의식 아래로 몰아넣고, 생각하지도 못하게 된 전후의 시기. . . . +전쟁론= 그리고 북조선의 핵개발과 대포동 [미사일]은, 지금도 불안정 요인을 안고 있는 국제 사회에서, 일본이 어디까지나 군사력(현재는 아메리카의 군사력) 때문에 평화와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현실을 명확하게 가르쳐주었다.67)
아사바는 $고상한 체하는 하는 사람이기를 그치고, 살아남으려는 이기주의적인 자신들을 우선 긍정한다. 그것은 자신들이 파워 폴리틱스의 주체라는 자각의 회복이기도 하다&68)고 한 다음, 현재의 상황과 선택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재는 100년 전과 유사하게 파워 폴리틱스가 판치고 있으며, 일본은 미국의 군사 외교력에 종속되어 있다, 종속 상태를 계속하든지, 아니면 내셔널리즘이 병이라고 했던 강상준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한안보조약을 통해 미국 견제를 고려해 보든지, 그것도 아니면 희생의 길에서 죽으면 된다. 이 세 갈래의 길 중에서 아사바는 일본과 한국이 안보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을 견제하는 길이 현실적으로 가능했다면 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것은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확립하는 것이어야 하고, 주체성을 발휘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들이 궁극적으로는 선택할 주체임을 잊지 말자. 진자(振子)는 요즘 소프트랜딩으로
가리라. 이렇게 해서 우리들에게 필요 충분한 @국가 의식#=주체성의 회복에로의 점근
(漸近). 그것이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현재이다.69)
고바야시와 아사바에 따르면, 일본은 자위와 자주를 위해, 일정한 정도의 군사력을 수반한 내셔널리즘을 당연히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일본 주체성의 회복이다. 고바야시와 아사바의 내셔널리즘 옹호론―그것은 우리의 본능․생리․습관과 비슷해서 우리 신체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고, 우리가 무자각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바로 내셔널리즘이라는 옹호론―은 결코 쉽게 부정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 한국인들 역시 경제 성장과 메이드 인 코리아의 확산에 대해 환호하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학수고대하고, 이순신의 불멸성에서 한국의 불멸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4강 진출한 사실을 현대판 신화의 반열에 올린다고 해서 누가 시비하겠는가?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정치|군사|외교|교육의 모든 면에서 대미 자주|독립국가가 되고 싶은 것이 많은 국민들의 소망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에게 하의식|본능|생리|습관에서 오는 내셔널리즘을 그대로 인정하지도 않고 활용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것을 견제하며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아진 분별을 극복하고 국가와 민족간에도 사랑이나 비폭력이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평생을 버틴 사람도 있었다. 마하뜨마 간디(1869~1948)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6. 간디의 희생적 내셔널리즘은 실천 가능한가?
니시다는 +선의 연구=에서 내셔널리즘을 넘어가는 참된 선행을 꿈꾸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도 있었다. $우리들이 안으로는 자기를 단련하여 자기의 진체(眞体)에 도달하면서, 겉으로는 스스로 인류일미(人類一味)의 사랑[愛]을 낳아 최상의 선목적(善目的)에 합하게 되는 일, 이것을 완전한 참된 선행이라고 한다.&70) 니시다는 여기에서 모든 인류를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것이 참된 선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이런 사랑을 후기에까지 유지했더라면 천황과 국체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 철학을 전개하지도 않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 공영권을 지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당시 인도에서 영국 제국주의와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던 간디의 내셔널리즘을 지지했을지도 모른다. 간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따라서 내셔널리즘에 대한 내 사랑, 즉 내셔널리즘에 대한 내 이념은, 인류 전체가 살 수 있도록 우리나라가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부득이 하다면 우리나라가 죽을 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인종간의 증오가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내셔널리즘으로 삼읍시다.―메카노 클럽 연설(1925년)71)
나는 스스로 내셔널리스트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점에 대해 자부심이 있습니다. 나의 내셔널리즘은 우주만큼이나 광대합니다. 그 범위 안에는 저급한 동물에서부터, 지상의 모든 나라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의 진리성에 대해 전 인도를 설득시킬 수만 있다면, 인도는 세상의 온 나라가 동경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나의 내셔널리즘은 전 세계의 복지를 포함합니다. 나는 나의 인도가 다른 나라들의 잔해를 밟고 일어서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나의 인도가 단 한 사람이라도 착취하기를 원치 않습니다.<>나는 물리력을 토대로 삼는 헌법의 기초에 공범자가 도저히 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기독교인 집회에서의 연설(1925년)72)
간디의 내셔널리즘은 우주와 같이 광대한 내셔널리즘으로 지상의 모든 나라, 심지어 저급한 동물까지를 포함하는 내셔널리즘이었다. 사람에 한정해서보더라도 그의 내셔널리즘은 인도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려는 것이지만 인류 전체를 살리려는 것이므로, 이기적일 수 없었고, 다른 민족에 대한 증오|유린|침략이 들어가 여지도 없었다. 그래서 간디는 $사랑은 경계가 없습니다. 나의 내셔널리즘은 어떤 강령과 관계없이 지상의 모든 나라들에 대한 사랑을 포함합니다&라고 쓰기도 하고(1935년)73) $인도의 내셔널리즘은 인터내셔널리즘을 말한다&는 내용의 성명을언론에 발표하기도 했다.(1945년)74)
이와 같은 내셔널리즘은 물리력에서 그 토대를 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간디는 물리력에 토대를 두는 헌법의 기초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비폭력을 보편 진리로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력|경제력|군사력 등 일체의 물리력을 포기해야 하고, 자신이나 인도 전체를 희생할 수 있는 각오와 훈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75) 간디의 말을 들어보면, @국사# 해체와 국민의 상대화는 모든 생명에 대해 비폭력(자비)의 원리를 실천할 것을 요구할 지도 모른다. 그런 요구가 정당하다면 국민이 개인적|집단적 차원에서 종교적인 회개에까지 도달하지 않는다면 국사 해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7. 결론: 기억간의 전쟁
필자는 일종의 불교 심리학의 시각에서, 무자각적인 인간의 하의식―본능, 생리, 습관, 공동의 기억 등―에는 자기 추동적인 형성력이 있다고 하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76) 내셔널리즘은 집단적 형성력의 자연적이며 현실적인 발로이지만, 인류 역사에 엄청난 비극과 고통[業繫苦]을 초래한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했다. 내셔널리즘이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본성 자체라고는 부르지 않으련다. 만일 그것이 인간의 본성 자체라면,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발생했던 온갖 침략|착취|억압|폭력을 우리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에 대해 도덕적인 단죄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사 해체와 국민의 상대화, 그리고 내셔널리즘의 초극을 주창하는 자들은 숙명을 거부하는 자들이고 어느 정도는 낙관적인 자들이다.
우리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도 무자각의 내셔널리즘이 침략과 억압을 가져온 역사를 기억하며 그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국가로 회수되기 이전의, 또는 국가를 넘어선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고바야시 류의 @국가의식#=주체성은 사이비 주체성이다. 공(公)의 제약을 넘어가는 개(個)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의식#=주체성은 초국가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개인을, 국가의 공(公)을 넘어가는 보편을 꿈꾸는 개인을, 그리고 니시다 식의 국가·도덕·종교의 삼위일체를 넘어가는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런 개인을 인정할 수 없다면 국민의 상대화와 @국사#의 대연쇄 고리의 단절에 대해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국가간의 아진 분별 위에 성립한 근대 국가에는 무지와 폭력이 내재해 있다. 여기에 내재한 무지와 폭력의 역사적인 기원을 찾기 위해서라면 인류가 지구상에서 집단으로 삶을 영위하기 시작한 태고까지 소급해야 할 것이다. 이제 국가의 무지와 폭력의 뿌리는 국민 개개인의 심신에까지 깊이 뿌리 박혀 있다. 내셔널리즘은 국가간이나 민족간의 역사적|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문제이기도 하고, 내셔널리즘에서 집단과 개인의 속박과 해방을 보는 자에게는 종교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이라는 국민국가가 오늘날 진정으로 성숙하자면, 과거 쇼와기에 내셔널리즘의 돌출|과도|파행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 반성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오늘날 상당수의 일본 정치가와 지식인들이 공동의 기억, 무자각적 자연주의를 내세워 내셔널리즘을 고양시키고 있다. 일본의 보수 우익에 맞선 한국인의 내셔널리즘도 그 강고성에 있어서 단 한치도 밀리지 않는다. 아니 우리의 내셔널리즘이 더 단단하고 더 뜨겁고 그래서 더욱 맹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의 불멸성을 강조하고, @고구려#를 열렬히 찾아 나서고, 실제로 무인도에 가까운 독도를 위해 나라 전체의 존망까지 걸기도 하고, 일방적인 국사 교육을 강화한다면, 이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이런 행위가 장기간 지속되면 당연히 일본이나 중국의 내셔널리즘을 부추겨서 결국에는 그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긴장, 갈등, 대립은 전쟁의 위험을 낳을 수 있으므로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외교적인 설득을 앞세워 독도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독도를 두고 전쟁까지야 할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 전쟁을 하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일본을 이길 만한 해군력도 없다. 미국이 은밀하게 일본을 돕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해전은 그만 두고 외교전에서나마 승리할 수 있을까? 애국심이 아무리 뜨거워도 그것이 해전이나 외교전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외교전의 승리도 외교만이 아니라 군사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승산 없는 전쟁이라면 처음부터 벌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오히려 후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기억간의 전쟁은 다차원의 것이다. 어느 차원의 전쟁이든 모두 국가간에 벌어지는 정치적|역사적|생물학적인 싸움과 깊이 관련이 있다. 일본 내부에서는 과거의 전쟁 책임을 둘러싸고 기억과 증언의 의무를 강조하는 그룹들이, 대동아 전쟁을 찬미하고 @공 즉 국#을 부르짖는 세력과 격돌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분단의 반세기 동안 서로 다른 기억을 축적해 온 남과 북이 싸우고 있다. 남한 내부에서도 과거사를 정리하는 방법에 대해 시비가 일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간의 아진 분별을 완화하기 위해, 국사와 국민의 해체를 주장하면서 내셔널리스트들과의 싸움에서 공동 전선을 펴고 있다. 이 싸움은 정치와 역사, 교육, 스포츠 그리고 문화 전반에서 벌어지는 전면전이다. 우리 개개인의 마음속에는 아진 분별심과 자타불이의 자비심이 싸우고 있다.77) 기억은 강고하고 싸움은 지구전이다. 기억간의 전쟁이라고 해도 우리가 말법(末法)의 시대에 사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인지도 모른다.
다차원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억간의 전쟁 앞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첫째, 다수 대중의 국민이 공유하고 있는 내셔널리즘은 대단히 이기적이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는 점, 둘째, 국민이 무자각의 내셔널리즘이 초래할 결과를 제대로 예측하고 두려워하기 전에는, 그리고 무연의 자비를 어느 정도나마 배우기 전에는 국민-중생의 위치를 상대화할 수 없다는 점, 셋째, 일본의 초국가주의 아래에서 그리고 한국의 군사 파쇼 아래에서 개(個)의 확립이 중요했듯이, 민주주의 시대의 대중 매체가 생산하고 전파하는―획일성을 강요하는 파쇼적―국민 정서나 국민감정에 저항할 수 있는 개인을 확립하는 것이 아주 긴요하다는 점, 넷째, 국사 해체를 위한 연대는 국민의 본능과 생리에 대해, 그리고 국민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 본성에 대해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위의 어느 것도 아주 어려운 작업임을 고백해야 한다.
아(我)와 진(塵)을 분별하는 것, 곧 적과 동지를 나누는 것은, 인간 본성에 가까운 욕망의 표현이고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비를 가르치는 불교는 국민-중생이 아진 분별의 형성력으로써 조작해 낸 내셔널리즘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78)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는 일체의 아진 분별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랑을 무연지비(無緣之悲)라고 불렀다. 그 사랑은 부처가 중생 모두를 자식으로 삼아 자타의 분별을 떠나 사랑하는 대비심이다.79) 대비심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 아진 분별력을 연(緣)으로 삼고 있는 국민은 지극히 왜소한 중생이다. 앞에서 뜨거운 애국심을 지닌 국민-중생은 하릴없는 중생이고 부처에서는 한 없이 떨어져 있는 존재라고 했다. 말법의 시대에 국민이 집단적으로 부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천 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불교와 인연을 맺어온 동아시아 사람들이 자비심을 조금이라도 내어 극히 왜소한 중생의 지경은 면해야만, 지금보다는 좀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라는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우리 국민이 애국적인 열정과 구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아둔한 존재다.
백불(百佛)이 출현해도 우리 속에서 역동적으로 그리고 종종 광포하게 움직이는 집단적인 형성력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힘의 결과인 군사력과 경제력이 판치고 있는 이 냉혹한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의 생존마저 재대로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형성하고 지속하려는 욕망에 관한 한, 우리는 우리 속에서 저들의 욕망을, 저들 속에서 우리의 욕망을 보아야 한다. 욕망에 대한 이런 통찰은 우리를 반드시 희생이나 자비로 인도하지는 않더라도 공존으로는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욕망과 힘 그리고 상대방의 욕망과 힘을 알아서 공존하자는 것이다. 비록 모든 국가들이 전부 국민-중생의 집단이라고 해도, 욕망과 분노, 아견을 적절히 통제하고 식혀서 공존하는 편이 공멸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지금은 이 정도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국사# 해체론자들은 아진 분별에 기초를 둔 애국심의 진상을 폭로하고 힐문하는 과정에서 국적(國賊)이나 매국노로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심신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내셔널리즘을 깨닫고 그것을 개인적 차원에서나마 극복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지에 대해서는, 한국인 와카(和歌) 시인이었던 고 손호연(1923~2003)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과 일본 정신의 상징 사이에서 거의 평생 갈등했던 그 시인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었다. $절실한 소원이/ 나에겐 하나 있지/ 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는.&
허우성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하와이대학교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이다. 미국 뉴욕주립대학 학술진흥재단 강의파견 교수를 역임하였고, 일본 경도대학교 종교학 세미나 연구원, 동경대학교 외국인 연구원을 지냄,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연구위원, 일본사상사학회 부회장 및『철학과 현실』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
근대일본의 두 얼굴: 니시다 철학 연구(문학과 지성사, 2000)
인간이란 무엇인가? (공저, 민음사)
번역
인도인의 길(M. Koller) 소명출판 (2003)
문명/정치/종교 상 마하뜨마 간디의 도덕-정치사상 1, 2(소명출판, 2004), 등 다수
논문:
A monk of Mukti and Karma: The Thought and life of Baik Yongsung Korea Journal (2005)
A Philosophy of History in later Nishida: A Philosophic Turn in Nishida`s Later Philosophy. Philosophy East and West vol. 40-3 1990
'종교사상 이야기 >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일순 선생의 영전에 눈물로 고합니다(리영희) (0) | 2006.12.15 |
---|---|
무위당 선생의 취지서(趣旨書) (0) | 2006.12.15 |
법정이 철학자에게 던지는 화두(허우성) (0) | 2006.12.14 |
[좌담]불교학이 가야 할 길(현대불교 2001년 5월 1일) (0) | 2006.12.14 |
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 (0) | 2006.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