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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좌담]불교학이 가야 할 길(현대불교 2001년 5월 1일)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4.

 

 

현대불교 317호(2001년 5월 1일)

http://www.buddhapia.co.kr/mem/hyundae/auto/newspaper/317/special/k-2.htm

 

 

【특별좌담】 불교학이 가야할 길


“‘지구촌 불교’로 거듭나도록 학문적 지원”

 

불교학의 발전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불교의 역할을 바로 볼 때 가능하다. 불교학의 연구 대상은 불교이지만 구체적인 공간, 즉 사회와 문화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불교신문사는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불교학이 가야할 길’이라는 주제로 좌담을 마련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학문으로 불교학의 목표를 설정해야 할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참석자

보광 스님(동국대 교수·선학과)

허우성 교수(경희대·철학과)

신규탁 교수(연세대·철학과)

사회 : 유승무 교수(중앙승가대·포교사회학과)

 

일시 : 2001년 4월 21일

장소 : 본사 불교사랑방

 

“응용불교학 21세기 중요역할” - 보광 스님

“깨달음의 목표 명확하게 제시” - 허우성 교수

“역사 문화 토대 불교학 세우자” - 신규탁 교수

 

사회자 - 서구에서도 불교와 같은 전통 종교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불교학계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것 같은데요.

 

보광 스님 - 우선 우리의 불교학이 제 역할에 충실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의 불교학은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교학은 수행의 방법과 과정을 추적하고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깨달음에 이르는 데 도움을 주는 데 목표가 있습니다. 교학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교란 바로 불교학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불교학과 서양의 불교학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학은 수행자의 본분을 가슴에 안고 깨달음을 향하는 제도적인 방법입니다.

 

허우성 교수 - 깨달음이란 게 너무 추상적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생활공동체를 만들며, 그 목표를 ‘나라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아주 명료하게 설정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단에서 추구하고 있는 목표는 너무 추상적입니다. 깨달음의 과정을 연구하는 불교학 역시 방향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출가와 재가의 수행이나 신행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이는 중생을 대상으로 한 불교가 존재해야 하는 명분을 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신규탁 교수 -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활동 중 하나가 종교입니다. 지금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불교학도 그런 틀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현대사회 속에 불교는 편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학은, 현대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우리 아닌 다른 세계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어떻게 21세기를 준비했는가? 등을 질문하는 과정에서 그 방향성을 찾아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는 한자문화권이라는 테두리에서만 이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세 말 아편전쟁을 계기로 ‘天下(천하)’에서 ‘The world(세계)’로 그 체제가 변했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과거에 중국의 사유 체계로만 보았던 불교지만, 지금은 서양의 사유 체계와 만나는 과정 속에서 불교를 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 현대사회에서 불교학의 존재 이유와 그 역할을 알기 위해서는 현대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불교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주목해야 한다 게 공통된 의견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기반으로 세계의 불교학의 경향을 점검해 보죠.

 

보광 스님 - 일본의 불교계는 메이지 유신과 함께 현대적인 교육 체제를 도입했습니다. 또 그 체제 하에서 교육받은 스님들은 대학의 문을 두드리고 문학·사학·철학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갔습니다. 현재 일본에는 75개의 불교 종립대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들 대학에서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택대나 용곡대와 같은 종합대학에서는 불교가 위축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교육 목적을 달성하고 있지만, 참다운 불교 인재를 양성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특정 종단에서 불교 인재만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한 소규모 대학에서는 한 차원 발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응용불교학과 같이 현실 사회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바로 적용시킬 수 있는 교육에 주력하고 있다는 게 특징입니다.

 

신규탁 교수 - 불교학은 시대적 측면만 아니라 지역적 측면까지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선불교는 당나라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인식 없이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연구 주제는 불교만이 아니라 보다 포괄적이어야 합니다.

 

허우성 교수 - 글쎄요. 지역성보다는 보편성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89년도에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불교를 강의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수강생들은 지역적, 역사적 얘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미국의 서점가에서 다양한 불교 서적들이 진열되고, 달라이 라마나 틱낙한에 대한 관심이 큰 것을 보아도, 세계를 보는 눈으로써 불교의 보편성에 주목한 것입니다.

 

신규탁 교수 - 서양에서 일고 있는 불교에 대한 관심은 불교 자체보다는 자기 문화를 반성하는 연장선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저는 중국불교를 연구하고 있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그 속에 내재된 중국의 문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는 역사, 문화, 언어를 초월해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사 맥락에서 이해하는 게 이상적입니다.

 

허우성 교수 - 지역학 역시 중요합니다. 인간 내면에는 종교성이 있습니다. 미국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가 호소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이 다르니까 불교에 대한 태도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신규탁 교수 - 불교의 보편성이란 게 더 맞지 않을까요. 그로 인해 지역과 언어가 달라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겠죠.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해답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 속의 불교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보광 스님 - 불교학은 고전문헌을 토대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공부할 때 중국불교를 강의하셨던 교수님은 당대의 지도를 펴놓고 강의하셨습니다. 원전만을 보는 것보다 더 알차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신교수님의 지적처럼 지역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문헌학 중심의 공부에 있어서도 시대와 지역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신규탁 교수 - 역사를 보고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지금 당장’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공간에 존재하는 우리의 문화는 역동적입니다. 이런 문화가 어떤 과정을 통해 움직이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불교학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최근 불교학계에 대해 ‘문헌학 연구가 부족하다’, ‘기초 자료가 부실하다’ 등의 비판이 있는데, 이 역시 시대를 간과했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용성스님의 불교운동은 구국운동 차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분들에 있어서 문헌적인 연구는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구에서 문헌학이 일차적인 것은 제국주의 산물로써 불교학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문헌학은 이제 우리에게 이제 닥친 문제입니다.

 

사회자 - 시대적 배경을 염두해 두고 불교학을 보아야 한다는 신교수님의 지적입니다. 이제 현재와 미래의 불교학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허우성 교수 - 종합대학이라면 불교 전공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의 주요 종합대학에서조차 불교 전공자가 없는 곳이 많습니다.

 

보광 스님 - 종합대학의 인문대학에 유교나 도교를 전공한 학자는 들어가는 데 불교전공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국문학이나 사학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높습니까? 지금 유교는 종단과 같은 조직도 없는데도 동양철학 속에 여러 사람이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거대한 종단이 있는 불교는 없습니다. 교단에서 이런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신규탁 교수 - 우리 나라는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를 연구해 왔습니다. 그것은 동양을 지배하고자 했던 서양의 동기와는 달리 순수한 종교성에 따른 것이다. 불교학은 여기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불교의 이상세계가 무엇인지를 탐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자 - 불교학과 수행 즉, 교(敎)와 선(禪)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도 불교학의 방향 설정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한국불교의 특수한 상황을 토대로 말씀해주십시오.

 

보광 스님-, 불교학의 목표 깨달음 이르도록 도움주는 학문

허우성 교수 - 한국불교 세계화 나라별 특성고려 보편성에 주목

신규탁 교수 - 시대별 연구 충실 순수 종교성 추구 이상세계 탐구

유승무 교수 - 불교학자뿐 아니라 타전공학자 연구물 자료로 적극활용

 

보광 스님 - 고려 불교 연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행결사체나 수행결사체말고는 공부할 게 없습니다. 이는 지금의 한국불교가 200, 300년 후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시사적입니다. 종단사가 남겠습니까? 아니면 신행이나 수행결사체가 남겠습니까? 시대적 상황에 따라 수행 방법은 재편돼야 합니다. 최근 간화선에 대한 한계와 효용이 문제시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새로운 수행방법이 다양하게 제시돼야 합니다.

 

신규탁 교수 - 선종(禪宗)은 정치·경제적 어려움을 겪고있던 당나라의 지식인들에게 적합한 불교였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정혜쌍수를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불교를 연구할 때 지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고 선사들이 이를 어떻게 타개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시험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은 시험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 때 가능한 말입니다. 사교입선 역시 경전을 열심히 읽고 통찰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진실한 동기’를 찾을 때 성립할 수 있습니다. 선교(禪敎)의 관계도 이러한 맥락으로 보아야 합니다.

 

허우성 교수 - 과거에는 불교의 범위를 절집으로만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깨달음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어떻게 보고 이끌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간디는 인도, 남아프리카, 영국 등지에서 서민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제국주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었습니다. 불교도 사회를 분석하고, 그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목표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동기와 과정을 무시한 채 추상적인 깨달음만을 주입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보다 실질적인 불교의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 현대에서 불교의 존재 이유를 밝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보광 스님 - 일본에서 공부할 때, 제가 “성불하십시오”라는 말을 하자 정토종계 일본인 스님이 깜짝 놀라며 “금생(今生)에 깨달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자신은 깨달음보다는 대중들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저는 그 차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자력신앙인 선(禪)은 ‘성불병’을 좇다 사회를 망각하기 십상입니다. 염불을 주로 한 정토 신앙도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생각입니다. 물건을 보는 것은 눈이지만 빛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두 가지를 융합할 수 있는, 지혜를 용(用)으로 삼는 새로운 형태의 신앙이 필요한 때입니다.

 

허우성 교수 - 비체지용(非體智用)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먼저고 그 후에 깨달음을 향한 정진이 필요합니다. 이를 아는 사람은 운명적으로 봉사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자 - 불교가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공통된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동국대는 석·박사과정에 응용불교학 교과목을 개설해 놓고 있지만, 그 역할을 충분하게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응용불교’라 했을 때 응용의 영역을 불교와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보광 스님 - 응용불교를 하는 사람과 순수불교를 하는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일개 연구자로서는 두 영역을 다 포괄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원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순수불교를 연구하는 사람은 기존의 불교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고 우리말로 옮기고 주석을 다는 작업에 몰두해야 합니다. 또한 유실된 자료를 복원해야 합니다. 전해지지 않는 한국 고승들의 저술 일부는 중국이나 일본의 고문헌에 인용돼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찾아서 완전하지 않더라도 복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들 기초자료를 전산화시켜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응용불교 연구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동국대는 이 토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일본의 구택대는 불교경제학연구소가 있지만, 동국대는 그렇지 못합니다. 학교당국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허우성 교수 - 응용불교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이념과 구체적인 장(場)이 필수 조건입니다. 예를 들어 ‘불교경제학자’라는 개념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기존의 자본주의 세계관이 너무나 막강해서 다른 이념이나 방법론들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보광 스님 - 응용불교는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현재, 미래의 불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모든 학문들은 서구의 것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적잖은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불교적인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기존의 학자들이 응용불교를 학문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불교아동학, 불교경영학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학문의 틀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문가를 양성해야 합니다. 당장 필요한 응용불교학 분야가 있고, 장기적인 응용불교학 분야가 있습니다. 아동, 문화재 관련 분야는 당장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학교당국에 불교전문대학원을 만들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학위가 있는 국제포교사, 국제역경사, 선치료사 등을 양성하자고 주장해 왔습니다. 건국대학의 경우 음악 치료로 자격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응용불교를 전문분야로 만들고 이를 계속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응용불교에 대한 학문적인 기초를 다져가야 합니다.

 

사회자 - 불교 전공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인력도 끌어들여서 활용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보광 스님 - 그렇습니다. 여기에 응용불교에 관심 있는 학자들이 모일 수 있는 연구회와 같은 소그룹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교단에서는 이들 소그룹에서 나오는 자료집을 집대성하는 역할을 맡아야 할 것입니다.

 

허우성 교수 - 역시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중생이라고 했을 때, 100년 전과 지금은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중생은 깊은 신심을 가졌다면 지금의 중생은 소비자로서 자본주의에 물든 소비자입니다. 즉 자본주의적 틀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응용불교학은 현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학문이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자 - 대만이나 일본은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그 속에서 불교계의 활동은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우리의 논의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다고 보는데요.

 

보광 스님 - 참여불교는 응용불교학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에서 불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을 양성될 때 가능합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정치나 사업을 하겠다는 사람이 나올 때를 말하는 겁니다.

사회자 - 성공한 CEO(최고경영자)들의 가치관을 조사해 봤는데, 21세기형 경영의 리더십은 불설의 패러다임 그 자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보광 스님 -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사성제, 팔정도에서 노사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 이를 산업 현장에 적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사람을 길러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불교계에서 응용불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교육 체계 개선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자 - 불교학의 지평을 사회 속으로 넓혀가야 한다는 보광 스님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허교수님의 지적처럼, 현실적인 논리와 불교의 가치들이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허우성 교수 -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대안 공동체를 스스로 만들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교계에서도 인드라망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야수성을 완화시킬 수 있는 소규모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서구의 근대화와 함께 나타난 자본주의가 야수성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예전에 식민이었던 대중을 시민으로 해방시키는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이런 점을 교단에서도 적극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현실적 논리와 불교의 가치 사이의 괴리감을 없애는 방편도 됩니다. 조계종을 가리켜 ‘남성위주의 집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현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먼저 이런 전근대적인 요소를 없애는 문제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외에 기복성에서도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보광 스님 - 기복성을 제외하고 종교를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기복’을 긍정할 것인지 부정할 것인지는, 그것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현실화하는가, 그렇지 않는 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현상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으로만 다룰 수 없습니다.

 

신규탁 교수 - 응용불교학은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모색하는 학문이고 또한 자본주의 틀 속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방법,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주려는 시도입니다. 오늘날 불교는 세속적인 삶 이외에도 행복한 삶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인간의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불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불교의 경전을 읽다보면 상상으로만 가능한 세계들이 많이 나옵니다. 저는 이런 대목을 볼 때마다, 부처님은 세간의 유한한 삶이 아닌 영원한 삶으로 중생들의 눈을 돌리고 집착과 탐욕을 여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응용불교학은 바로 그러한 상상의 세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우성 교수 - 수행자는 어떤 시대이든지 세간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 왔습니다. 남다른 삶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제 그 삶을 하나씩 펴내는 작업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 과정에서 불교는 인류를 위해 특별한 일을 해 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오종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