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하느님
한 20여년 전, 친구한테 얘기했던 게 생각난다. 내용은 내가 만약 교회를 세운다면, 뾰족탑에 십자가도 없애고 우리 정서에 맞는 오두막 같은 집을 짓겠다. 물론 집안 넓이는 사람이 쉰명에서 백명쯤 앉을 수 있는 크기는 되어야겠지. 정면에 보이는 강단 같은 거추장스런 것도 없이 그냥 맨마루바닥이면 되고, 여럿이 둘러앉아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는 예배면 된다. ㅇㅇ교회라는 간판도 안붙이고 꼭 무슨 이름이 필요하다면 '까치네 집'이라든가 '심청이네 집'이라든가 '망이네 집' 같은 걸로 하면 되겠지. 함께 모여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성경책 얘기도 하고, 가끔씩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서당 훈장님 같은 분께 공자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오날이나 풋굿 같은 날엔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궃은 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갖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도 하고 괜히 혼자서 가슴을 설레어도 봤지만 그냥 생각만으로 그치고 말았다.
나는 세례를 받은 지도 30년이나 되고, 집사라는 직책을 받은 것도 비슷한 햇수가 되는데도 한번도 만족한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다. 참으로 이름 그대로 돌예수꾼이었다. 다만 내가 예배당 문간방에 살면서 새벽종을 울리던 때가 진짜 하느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특히 추운 겨울날 캄캄한 새벽에 종줄을 잡아당기며 유난히 빛나는 별빛을 바라보는 상쾌한 기분은 지금도 그리워진다. 1960년대만 해도 농촌교회의 새벽기도는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전깃불도 없고 석유 램프불을 켜놓고 차가운 바루바닥에 꿇어앉아 조용히 기도했던 기억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교인들은 모두 가난하고 슬픈 사연들을 지니고 있어 가식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그 중에 6.25때 남편을 잃고 외딸 하나 데리고 살던 김아무개 집사님의 찬송가 소리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애절했다. 새벽기도 시간이면 제일 늦게까지 남아서 부르던 <고요한 바다로> 찬송가는 그분의 전속곡이었다. 마지막 4절의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줍소서.
하면서 흐느끼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가난한 사람의 행복은 이렇게 욕심없는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기도가 끝나 모두 돌아가고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비출 때, 교회 안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마루바닥에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고 그 눈물은 모두가 얼어 있었다.
60년대는 참 가난했다. 그러나 그때의 교회는 따뜻한 정이 있었다. 당시의 교회 회계장부를 들춰보면 누가 몇백원 빌려갔다가 언제 갚았다는 기록이 종종 보인다. 어려운 교인들에게 교회재정에서 꾸어주고 되돌려받기도 했던 것이다. 가난한 전도사님의 사례금은 말할 나위 없이 부족했고 심지어는 좁쌀 한말, 쌀 몇되가 전부일 때도 있었다.
전도사님은 손수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때고, 무너진 교회담장을 쌓기도 하고 우물을 손수 팠다.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이 상례였고, 그래서 교인들과 훨씬 인간적으로 사귈 수 있었다. 청년들은 밤마다 교회 문간방에 모여 가마니도 치고 책읽기도 했다. 밤늦도록 일하다가 고구마를 삶아 먹기도 하고 날무우를 깎아 먹기도 했다.
예배시간에 헌금봉투에 이름을 적어 바치는 그런 외식적인 것도 없었고, 오히려 남에게 알려질까봐 부끄러워했다. 물질이 풍족하지 못해 거의가 몸으로 봉사했고 마음으로 정을 나눴다. 이래서 그때의 기독교는 우리 한국민의 정서를 크게 다치지 않고 소리없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도 가끔 이야기하지만, 샛들이라는 마을은 50여호가 살고 있는 산골 외딴 곳이다. 교회가 들어온 지 백년이 가까웠는데, 60년대까지만 해도 그 마을 전체가 지상천국이었다. 언덕배기와 산비탈로 옹기종기 모인 초가집과 함석지붕의 교회당이 있었다. 도둑 없고, 술 담배 먹는 사람이 없고, 고함을 치거나 욕설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그 마을엔 보릿고개가 없었다. 집집마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토를 가졌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기를 옛날 보릿고개 때 굶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는데, 그 까닭은 농토가 없는 가난한 소작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주들은 흉년을 모르고 보릿고개도 없었다. 오늘날 가난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나라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백인 선진국들의 침략과 약탈로 인해 빚어진 가난이 계속 이어져온 까닭이다.
어쨌든 교회는 70년대에 들면서 갑자기 권위주의, 물질만능주의, 거기다 신비주의까지 밀려와서 인간상실의 역할을 단단히 했다. 조용히 가슴으로 하던 기도는 큰 소리로 미친듯이 떠들어야 했고, 장로와 집사도 직분이 아니라 명예가 되고 계급이 되고 권력이 되었다.
같은 목사님인데도 큰 교회 목사님과 작은 교회 목사님에 대한 차별이 생기고, 도시교회 목사님과 농촌교회 목사님에 대한 인격적인 차이까지 생겼다. 인간차별은 평신도들까지도 서먹서먹하게 만들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인사를 해도 마음을 드러내놓고 얘기할 상대가 없어졌다. 하느님게 의지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이용하여 출세와 권력과 돈을 얻으려 하고,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의 믿음의 전부가 되었다. 예수 믿어 삼년 안에 부자 못되면 그건 문제교인이 된다.
부흥사들의 억양은 우리말의 발음까지 비뚤어지게 해놓았다. 특히 "믿습니다."는 믿쑵니다"로 "예수님 이름 받들어"는 "예슐룸 받들어"로, "사랑"은 "샤랑"으로....... 글로는 이루 다 기술할 수 없을 만큼 잘못된 억양들이 익숙해지기 전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을 정도다.
성령을 받거나 은사를 받으면 말투가 그렇게 되는 것인지, 참으로 불손하기 그지없다. 시장에서 가짜약을 파는 약장수도 그렇게까지는 안한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만하지 않고 자랑하지도 않는다고 했잖은가? 예수님은, 기도는 골방에 숨어서 하고, 더욱이 금식할 때는 머리를 빗고 절대로 남에게 티를 내지 말라고 했다.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고 시장거리에서 떠들지 말라고 했다.
지금 교회는 어떤가? 선교를 한답시고 온 세계에 떠들고 다니며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있지 않은가? 온갖 공해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교회도 하나의 공해물로 인식된다면 빛과 소금은커녕 쓰레기만 배출해내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한번 반성할 틈도 없이 그냥 발가벗은 임금님처럼 앞으로 앞으로 가고만 있다.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서 예수님은 많이도 시달려왔다. 한때는 십자군 군대의 앞장에 서서 전쟁과 학살에 이용당하기도 하고, 천국 가는 입장료를 어마어마하게 받아내는 그야말로 뚜쟁이 노릇도 했고, 대한민국 기독교 백년사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선봉장이 되어 무찌르자 오랑캐를 외쳤고, 더러는 땅투기꾼에게 더러는 출세주의자에게, 얼마나 이용당하며 시달려왔던가.
열매를 보고 그 나무의 실상을 안다고 했던가. 물질만능과 출세지향적 기독교는 우리 사회에 어떤 빛으로 도움이 되었던가. 밤이면 빨갛게 높이 빛나는 십자가가 정말 교회의 빛인가. 성폭행에 음주에 교통사고에 입시지옥에 온갖 나쁜 것만 세계 일등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기껏 국민일인당 소득 6천달러를 자랑하기 위해 세계선교를 하러 가는 것인가. 산과 강물은 쓰레기로 덮이고 도시의 하늘은 매연으로 가득찼다.
정말이지, 하느님을 더이상 속이지 말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온갖 해로운 화학약품을 섞어 만든 식품을, 포장만 그럴 듯하게 싸서 이름있는 상표를 붙여 팔아먹는 장사꾼처럼, 예수라는 상표만 붙은 가짜 기독교를 더이상 퍼뜨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 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로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기독교가 참다운 예수님을 전해주었나 하는 문제부터 돌이켜봐야 한다. 앞서 말한 이곳 산골동네 기독교마을에 대해서 좋은 점만 이야기했는데, 사실 모든 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이면 어느 집이나 어느 마을이나 우리들의 전통문화가 파괴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마을 밖 서낭당의 돌무더기도 없어지고, 정월 대보름날 동신제에도 기독교인은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 집집마다 가지고 있던 성주단지나 용단지도 깨뜨리고 부숴버린다. 조상들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논밭에서 음식을 먹을 때 고수레도 안한다.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게 한 것이다. 이런 건 모두가 미신이고 우상이라 매도하고 철저히 파괴했던 것이다. 이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본래 가지고 있던 우리의 아름다운 풍습이나 명절도 멀리하고, 생일날짜도 분명치 않은 크리스마스만 최고의 명절로 삼고 있다. 산타클로스에, 루돌프 사슴에, 성탄나무에, 아기천사에, 성탄카드에 넋을 잃게 된 것이다.
나는 우리의 전통문화가 전부 다 우리 고유의 문화고 우리 조상들이 창조했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거기에도 불교나 유교나 또 다른 외국문화가 섞여있고, 그 속에는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관습도 들어있다는 것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천년, 수만년 이어져오고, 그 속에서 우리의 얼을 가꾸어온 전통문화를 깡그리 우상이나 미신이라고 배척하는 것은 절대 반대한다. 진정한 기독교라면 겨레의 문화를 보호하고 살려주는 역할도 해야 한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간의 모습도 검기도 하고, 희기도 하고, 누렇기도 하지 않은가? 백인이나 흑인이나 황인종이나 모두가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지니고 있다. 비록 겉으로 보이는 색깔이나 모양이 달라도 모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외양과 형식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그 내용까지 다르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란으로 가던 야곱이 들판에서 돌단을 쌓고 기도를 했던 것처럼, 우리네 조상들은 마을 밖 서낭당에 돌을 쌓으며 신에게 빌었다. 그 신의 이름을 야훼나 서낭당이라 다르게 부른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기를 점지해주는 천사의 이름이 성서에는 가브리엘이지만 우리는 삼신할머니다. 고기를 먹던 유대인들은 악귀를 쫓는 데 양의 피를 뿌렸고, 농사를 지어 곡식을 주로 먹고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붉은 팥죽물로 악귀를 막았다.
해를 기준으로 만든 달력은 양력이고, 달을 기준으로 만든 달역은 음력이다. 어느 것을 사용해도 세월은 같이 흐른다. 양력이 편리할 때도 있고, 음력이 유리할 때도 있다. 달력이야 있으나 없으나 지구는 돌아가고 철은 바뀐다. 그런데도 요새 사람들은 흡사 달력이 있기 때문에 날짜가 가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이와 같이 기독교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있고, 교회에 가서 울부짖는다고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기독교가 있든 없든, 교회가 있든 없든, 하느님은 헤일 수 없는 아득한 세월 동안 우주를 다스려왔다. 선교사가 하느님을 전파하면 하느님이 거기 따라다니며 머물고 같이 사는 게 아니라,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부터 하느님은 어디서나 온 세계 만물을 보살펴오셨다. 하느님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의 마음이다. 종교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려는 의지이지, 종교가 요구하는 대로 하느님의 섭리를 바꾸는 게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바로 자연의 섭리가 된다. 하느님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 했다. 그러니 하느님은 곧 자연인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날, 저녁먹는 자리에서 빵을 떼어주며 "이건 내 살이라" 했고,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이건 내 피다"라고 했다. 사실은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 뒤에 없어질 자신의 살과 피의 갈 길을 가르쳐준 것이다. 세상의 모든 목숨은 희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온몸을 희생하고, 그 자식은 또 그 자식을 위해 희생하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가 이어져왔다. 어머니 아버지의 희생만이 아니라 우리가 먹고 있는 모든 먹을거리는 자연에서 얻는다. 공기로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온갖 동식물을 잡아먹고 산다. 결국 우리 몸속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와서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움직인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함께 내 몸속에 살고 있다. 그러니 나는 자연의 일부이며 또한 하느님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이 사람들속에 내가 있고 내속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하신 것은, 백번 옳은 말씀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나'라는 개별적인 개념보다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이 아주 강한 국민이다. 그래서 '나의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라 했고, '우리마을', '우리나라'라는 복수개념이 일상화되어 있다.
산에 사는 노루나 토끼가 마을에 내려오면 절대 잡지 않는다. 그들이 마을에 내려온 이상, 우리 마을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집안에 살고 있는 능구렁이도 우리집을 지켜주는 집지키미가 된다. 비록 돌아가신 부모님이지만 명절날이면 그분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차례를 지낸다. 우리와 함께 먹고 한자리에 계신다는 따뜻한 마음씨는 죽음이란 시공을 초월한 정(情) 때문이다. 이것을 미신이나 우상으로 매도하는 것은 오히려 신성을 모독하는 짓이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 회개를 부르짖고, 정의를 부르짖고,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해도, 수십만명이 모이는 교회를 만들어도, 인간에게 따뜻한 정(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성서를 수만번 읽고 외어도, 수만명의 병자를 고쳐도, 일류 신학교의 박사학위를 받아도, 이런 소박하고 지극히 작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판손이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기를 낳고 쌀이 없어 굶고 있다니까 자기 집 용단지의 쌀을 퍼가지고 가서 산모에게 밥을 지어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용단지의 쌀은 단순히 용신(龍神)을 섬기는 단지가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비상식량 역할도 했던 것이다. 성주단지의 곡식도 마찬가지다. 흉년이 들면 그 곡식을 함께 나누어먹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아름다운 관습이 참으로 많다. 가족 중에 누군가 먼길을 떠나면 그날부터 끼니마다 밥을 한그릇씩 떠놓는다. 그 떠놓은 밥을 우연히 집에 찾아오는 나그네가 있으면 기꺼이 대접한다. 아무리 가난한 집에도 일단 집에 찾아온 손님은 박대하지 않고 먹이고 재워준다. 좀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아예 사랑채를 비워놓고 나그네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들판에서 점심을 먹다가도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으면 큰 소리로 불러 함께 점심을 먹는다. 이렇듯 나누는 일은 철저했다. 조상에게 제사지낸 음식마저도 절대 혼자 먹지 않고 이웃끼리 나누어먹는다. '고수레'로 들판에 던진 음식은 벌레도 먹고 새도 먹는다. 가을 감나무 꼭대기의 까치밥과 까마귀밥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자연과의 사랑이다.
한국의 모든 교회는 이런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서구인들이 마음대로 변질시켜 놓은 예수의 참된 복음을 깨닫는다면, 창조 이래 이 땅에서 역사하신 하느님의 숨결을 금방 찾아낼 것이다. 나는 지금 20여년 전에 내가 구상하고 꿈꿨던 교회는 벌써 전에 잊었다. 교회는 새삼스레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온 우주가 바로 하느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나는 떳떳하게 모든 자연과 더불어 사람이나 동물이나 서로 섬기며 살고 싶을 뿐이다. 하느님은 그것을 원하셨기에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서로 섬기는 삶이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준 사랑이며 그것을 위해 피흘려 희생하신 것이다. 이 땅위의 진짜 우상과 마귀는 제국주의와 전쟁과 핵무기와 분단과 독재와 폭력이다.
* 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녹색평론사, 1996. 중에서 p. 14-21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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