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력서/서영훈] 스승 류영모와 함석헌 |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선생은 함석헌(咸錫憲) 선생보다 11세 연장(年長)인데 생일이 같고 돌아가신 날도 저녁과 새벽 사이였다. 류 선생은 처음에는 김정식(金貞植) 목사가 담임인 승동(勝洞)교회에 다니며 정통기독교 신앙으로 시작했으나 차츰 유교 도교 불교 등 동양철학의 요체를 파악하여 독특한 종교철학을 형성하셨다. 물론 유일자(하나님)신앙을 갖고 계시지만, 모든 종교의 신학이나 교리를넘어서서 가장 깊은 진리는 하나라고 파악하신 분이다. 그분의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얼’로 사는 생명의 철학이요, 생명의 종교이다. 우주천체로부터 인간 개개인에게 이르기까지 하나의 생명활동으로 파악하고,그 생명 하나하나의 분자로서 씨알사상을 도출해 낸 분이다. 선생은 40세 이후로는 일일일식(一日一食)으로 일관하셨고, 사모님과는 43세부터 부부의 연을 해소하는 해혼례(解婚禮)를 지낸 후 남매처럼 지내셨다. 낮은 나무 평상에서 베게도 없이 주무셨다. 80세를 넘어서도 눈의 광채나 붉은 입술이 소년 같았다. 나는 해방 전후많은 종교인을 보았으나 류 선생만큼 생각이 깊고 언행(言行)이 일치되며, 얼과 몸이 건강한 분을 보지 못했다. 선생은 개성이나 인천도 걸어서 당일에 왕복하셨다. 남산 대한적십자사 사택에서 강의하실 때도 눈이 오나비가 오나 구기동 자택에서 걸어서 오고 가셨다. 함 선생은 류 선생을 그냥 선생님이라고 할 정도였고, 류 선생도 함 선생을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로 기대를 거셨다. 그렇게 가깝던 두분 사이에 금이 가고 멀어지는 사건이 생겼던 것은 참으로 수수께끼 같고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에 소문난 것 같이 그 사건은 함 선생이 곽모라는 20대 초반의 여성을 사랑한 연애 사건이었다. 5ㆍ16 전후였던 것 같다. 함 선생은 기독교 신앙이 깊고, 높은 지조를 지켜온 분이다. 선생은 강한 정신력과 섬세한 시적 정서를 가진 분이어서 강연과 문장이 사람의 혼을 일깨우고 매료시키는 힘을 가졌다. 그런 점 때문에 곽씨는 함 선생을 크게 존경하고 애정을 느꼈던 것 같다. 함 선생에게 이러한 이면이 있는 것을 안 ‘사상계’의 주역 장준하(張俊河)씨나 선생과 가까웠던 김동길(金東吉) 연세대 교수 등이 함 선생과 그여인을 떼어 놓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런 전후사정을 듣게 된 류 선생은 매우 분노한 것은 물론이요, 세상에대해서까지 비관하게 된다. 나는 선생께서 한적 사택 모임에서 자주 ‘함석헌이 이럴 수 있는가’라고 한탄하시는 것을 여러 번 보고 위로의 말씀을 드리곤 했다. 그 때 그 여인을 먼저 사랑하던 청년이 정보기관의 사주를 받아 ‘거짓 예언자 함석헌’이란 책을 집필, 서점에 뿌린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동서고금에 우리가 숭배하고 또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 철인과 위인, 학자들에게도 이런 이면의 인생 행각들이 있지 않았는가. 함 선생 자신도 그 후에 많은 고민도 하였고, 그 일로 고통을 당한 것을우리가 안다. 함 선생이 1960년대 초에 손수 번역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실린 그의 긴 서문 속에도 그러한 고백이 나온다. 류 선생을 따른 많은 제자들 사이에는 함 선생을 비난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내가 ‘다석 류영모 사상연구회’ 회장으로 84년에 흥사단 강당에서류 선생 추모의 모임을 가졌을 때 함 선생을 모셔 추모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함 선생은 “스승에게 죄지은 것이 많다”면서 많이 우시기까지 하셨다. 그 때도 그 자리에 있던 일부 사람들이 함 선생을 비판했지만 나는 “함선생이 연애를 서투르게 해서 그렇습니다”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 적이있다. 인간은 누구나 100% 완전할 수 없다. 어떤 위대한 인간도 잘못을 할 수 있고, 뜻밖의 실족을 하여 흠이 갈 수 있는 것이다. 함 선생이 톨스토이나어거스틴처럼 말년에 참회록을 썼으면 명저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일보 04/08 1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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