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사상연구회 월례발표회
2005년 7월
함석헌과 간디
함석헌과 간디-1
종교 없는 민중은 씨이 아니고, 붉은 함성은 씨의 소리가 아니다:
- 허우성 교수 -
1. 깊고 오랜 기억
사람은 가고 기억과 글은 남는다. 남은 자는 떠난 사람을 기억하거나 쓴 글을 읽음으로써 그 사람을 해석한다. 현대 한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사상가와 실천가의 한 사람인 함석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이 흘렀다. 사람들은 씨의 소리를 발행하면서 씨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다. 하지만 기억의 차이에 따라 그를 해석하기 때문에 계승되는 함석헌은 혹 반쪽이 된 것은 아닐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다. 게다가 모든 해석에는 해석자 자신의 기억이 관여한다. 우리 개개인에게 욕망과 분노[욕진, 欲 瞋]이 남아 있는 한 기억은 순수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이기적인 것이 된다. 아니 욕망과 분노 자체가 기억 아래의 기억이 되어 우리 의식의 깊은 곳에서 작동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집단이 신뢰 할만한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그것도 어렵다. 집단의 해석에는 흔히 집단의 기억이나 이익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한 정치 집단이 함석헌의 이름으로 정치행위를 한다면 그 행위에는 왜곡이 끼어들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함석헌은 사랑과 지혜에 있어서 보통 사람보다는 높은 경지에 도달한 분이고, 우리는 기도와 훈련이 부족하여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가 그 분을 ‘올바로’ 계승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기도와 훈련의 부족, 사랑과 지혜에서의 차이, 이런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함석헌 전집 편집위원들이 인용했던 에머슨의 말 “위대한 것은 오해받기 마련”이라는 구절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1)
함석헌은 흔히 ‘한국의 간디’로 불리고 스스로도 이것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2) 그는 20대 초반 이미 간디의 이름을 들었다고 술회하고 있고, 3‧1 운동 당시는 간디가 인도에서 사탸그라하(진리파지) 운동을 크게 전개하던 때이므로 우리나라에서도 간디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하고, 로망 롤랑의 간디 전을 읽은 것이 1924-5년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3) 그날 이래, 평생 그 길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1958년에는 ‘간디 연구회’를 시작하기도 했다.4) 그는 「간디의 글」 (1961), 「간디의 참모습」 (1965), 「현대사의 조명탄」 (1969), 「새 印度와 간디」 (197x), 그리고 「마하트마 간디」 (1976), 이렇게 간디에 대해 다섯 편의 글을 남겼고, 십수 년에 걸쳐 쓴 것이지만 어느 글에서나 간디에 대한 사랑과 존경에는 변함이 없었다.
함석헌의 간디사랑과 인도사랑은 이에 그치지 않아서 그는 1975년 무렵 필자를 포함하여 다른 십여 명의 또래 청년들을 모아 바가바드 기타를 공부하기도 했다. 영어로 번역된기타의 시구를 함께 읽고 해설을 붙이는 방식이었다. 나중에 그것을 손질하고 보충하여 씨의 소리에 연재했고, 생전에 책으로 냈다. 그리고 칠순이 훌쩍 넘어 간디 자서전도 번역‧출판 했다.(1975) 그래서 함석헌 전집의 편집위원들은 “오래 동안 그가 인도의 간디에 대하여 품고 있는 사랑과 존경은 참으로 뜨거운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5)
함석헌은 왜 간디를 사랑하고 존경했을까? 정치를 많이 한 간디이지만 그의 정치행위에는 비폭력 정신이 속속들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고, 간디가 “조직적인 악에는 조직적인 사랑으로 대항할 것과 그렇게 하면 반드시 이기는 것을 증명”하고 “개인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체에 있어서도 죽음으로써 사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 이었다.6)
함석헌에게 간디는 씨 중의 씨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씨의 소리의 씨은 완전한인격의 가능태인가 완성 태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오늘날 남한이나 북한에서 씨을 온전히 구현한 사람이 있을까? 노무현인가, 김정일인가? 아니면 아홉 살의 나이에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어 10년을 보내고, 북한을 탈출하여 체험수기 수용소의 노래를 써서 부시를 만나게 되었던 강철환(1968-)인가? 그도 아니면 의무 수행보다는 자기주장에 더 능한 시민단체 중의 하나인가? 제 속에 씨을 어느 정도 깨우친 사람이나마 우리 가운데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씨의 소리의 겉장에 있는 「우리가 내세우는 것」을 검토해 봐야 한다.
1. 씨의 소리는 순수하게 씨 자신의 힘으로 하는 교육의 기구입니다.
2. 씨은 하나의 세계를 믿고 그 실현을 위해 세계의 모든 씨과 손을 잡기를 힘씁니다.
3. 씨의 소리는 어떤 종교, 어떤 종파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4. 씨은 어떤 정치 세력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5. 씨은 어떤 형태의 권력 숭배도 반대합니다.
6. 씨은 스스로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압니다.
7. 씨의 소리는 같이 살기 운동을 펴 나가려고 힘씁니다.
8. 싸은 비폭력을 그 사상과 행동의 원리로 삼습니다.
위의 ‘씨 8조목을 순서대로 요약하면, 스스로 함, 세계 모든 씨과의 연대, 종파의 초월, 정치 세력에서의 독립성, 권력 숭배 반대, 씨의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악과의 투쟁, 공동체 운동, 비폭력이 될 것이다. 씨이란 말은 民people의 뜻인데, 우리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기 위해 일부러 새로 만든 말이다. 「ㅇ」은 극대 혹은 초월적인 하늘을 표시하는 것이고, 「‧」은 극소 혹은 내재적인 하늘 곧 자아를 표시하는 것이며, 「ㄹ」은 활동하는 생명을 표시한다.
함석헌이 씨 8조목으로써 ‘우리 자신’을 표시하면서도 “더 분명하고 깊고 큰 생각이 나시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하고 독자에게 부탁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아직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공약4장(公約四章, 또는 실천 강령)으로 불릴만한 것을 끝에 붙이고 있다.
씨은 선(善)을 혼자서 하려하지 않습니다.
씨은 너 나가 있으면서도 너 나가 없습니다.
네 마음 따로 내 마음 따로 가 아닌 것이 참 마음입니다.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우리 하나하나 속에 다 있습니다.
씨 이라면 최소한 씨 8조목과 공약4장에 담겨 있는 이념과 실천 강령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노력의 최종 목적은 초월적인 하늘(극대)과 내재적인 하늘(극소, 자아)을 실현하는 데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의 의미이다.「」이 극대, 극소, 그리고 활동하는 생으로 이뤄져 있다고 하지만, 삼자의 관계에 대해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극대와 극소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제 속의 씨을 깨닫는 경우 자아라는 극소가 극대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극소가 극대 속으로 들어가 합일하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 속에서 깨달음을 요청하고 깨달음에로 우리를 움직여 가는 것이 생명의 활동인가?7)
「」에 대한 함석헌의 해설은 인도의 지적 전통인 우파니샤드 가르침에서 말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궁극적인 경지를 연상시킨다. 범은 초월적 원리 브라만의 음역(音譯)이고 아(我)는 아트만의 의역으로서 내재적 원리를 지칭하는데, 이 둘이 하나 됨을 깨달으면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간디는 아트만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그 아트만이 브라만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브라만이 더 큰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함석헌이 기독교도라면 양자의 관계에 대해 우파니샤드 철학자와는 달리 생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글은 저 다섯 편의 글을 주로 읽고 함석헌이 간디의 어떤 면을 사랑하고 존경했던가를 확인 하고, 우리가 함석헌의 어떤 부분을 놓치고 있는가를 지적하려고 한다.
II. 함석헌은 간디에게서 무엇을 배웠던가?
1) 진리와 비폭력
함석헌은 간디의 진리(사탸)와 비폭력(아힘사)에 특히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 편의 글 모두에 참(또는 진리)이나 비폭력이란 말이 나오며, 이 글 이외에도 ‘비폭력’이 제목에 들어간 글도 여러 편이 있다. 함석헌은 「간디의 길」에서 “나는 이제 우리의 나갈 길은 간디를 배우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8) 이글을 발표했던 1961년 2월은 4.19가 일어난 이듬해이고, 5.16 군사 쿠데타가 나기 3개월 전이었다. 이 말은 또한 일제시대와 6.25 동란을 비롯해서 해방 후 15년을 격어보고 난 다음, 나이 60이 넘어서 한 말이었다. 이남의 부패정치와 이북의 공포정치를 바라보며, 더 이상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인물도 언론도 정말 없다는 것도 겪어보고 한 말이었다. 간디의 길은 어떤 길인가?
그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스스로 부른 대로 그것은 ‘사탸그라하’다, 진리파지(眞理把持)다. 참을 지킴이다. 또 세상이 보통 일컫는 데로 비폭력 운동이다. 사나운 힘을 쓰지 않음이다. 그는 죽어도 저항해 싸우자는 주의다. 다만 폭력 곧 사나운 힘을 쓰지 말자는 주의다. 그러므로 자세히 말하면 비폭력 저항주의다. 그럼 폭력이 아니면 무슨 힘인가? 혼의 힘이다. 사람들이 그를 높이어 ‘마하트마’ 곧 위대한 혼이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혼의 힘을 가지고 모든 폭력 곧 물력으로 되는 옳지 않음을 싸워 이기자는 것이다. 혼, 곧 ‘아트만’은 저(自我)의 힘을 드러냄이다. 간디는 자기의 몇십 년 정치 투쟁의 목적은 저를 드러냄, 곧 하나님께 이름에 있다고 하였다. 인도 사상으로 하면 ‘아트만’은 곧 ‘브라만’이다. 절대다.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저를 드러냄. 곧 하나님에까지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디의 길은 밖으로는 정치인 동시에 안으로는 종교 즉 믿음이다. 비밀이 없다. 대도직여발(大道直如髮)이다.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그 길이다. 그러나 반드시 대중으로 하는 데모도 아니다. 그것은 혼자서도 하는 싸움이다.9)
간디의 길은 무엇보다도 진리파지, 비폭력 운동 곧 비폭력 저항주의이다. 함석헌은 세상에 존재하는 옳지 않음에 죽어도 저항해야 한다 하고, 비폭력 저항주의의 표본을 간디에게서 찾았다. 비폭력 저항주의는 혼의 힘으로 물리력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 투쟁은 혼[아트만]의 힘을 사용하므로 아트만의 힘을 드러냄이다. 아트만이 곧 브라만인 절대를 실현하는 길이다. 자아실현과 하나님 실현이 하나 됨이다. 여기서 정치 투쟁은 금방 종교적 행위가 된다.
우리는 왜 간디의 비폭력 저항주의의 길을 따라야 하는가? 함석헌은 첫째 이유로 우리와 인도 사정에 비슷한 점이 많다는 점을 꼽고 있다. 우리도 인도인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수백 년 동안 지치고 병든 민족이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갖가지 내란, 일청, 일로 등 전쟁을 거듭 겪다가 보니 그만 “민중이 건전한 살림을 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며, 백성에 대한 지배계급의 수탈이 심해서 백성은 더욱 참혹하게 되어버려, “그 가운데서 구차하게 살기를 다투어 오는 동안에 가지가지의 고약한 성격이 생겨버렸다.”는 것이다.10) 함석헌은 40여 년 전 우리의 결점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세계 어느 민족에게서도 볼 수 없는 우리나라 독특으로 있는 당파 싸움, 팔자 철학, 앞을 내다 보아 큰 계획을 할 줄 모르고 아주 그만 그만으로 지나가버리는 버릇, 뻐젓하지 못하고 구차한 생각, 용기가 없고 아주 비겁한 버릇, 크게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시기 하고 음해하는 버릇, 이런 모든 것들이다. 가난과 무지와 타락, 이 세 가지 불행은 . . . 우리나라는 그 누구보다도 더 심히 그렇다. 이점에서 우리는 인도와 같았다. 독립을 잃고 오랫동안 다른 민족의 지배 아래 있는 동안 인도인은 지칠 대로 지쳐서 살자는 의욕을 거의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다 죽은 시체 같은 민족에 새 정신을 불어넣어 그것을 하나로 통일하여 그 힘으로 손에 바늘 하나 든 것 없이 순전히 정신의 힘으로 영국의 세력을 몰아낸 것이 간디다. 그러니 배울 만 하지 않는가?11)
함석헌은 수많은 역사적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당파싸움, 팔자 철학, 비겁, 생에 대한 의욕 상실, 시기하고 음해하는 버릇 등의 고약한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역사, 철학, 그리고 시에 낙망‧원망‧비관‧구차한 소망이 들어 있으며, 오늘날도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을 뿌리에서부터 뽑기 전에는 새 나라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간디가 인도 민중에게 한 것 같은, 깊은 속의 혼을 불러내는 진리운동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12) 함석헌은 우리 민족의 갖가지 나쁜 성격을 언급하며 새 나라를 위해서는 혼의 힘을 불러내는 진리 운동을 펴야하고, 그래서 간디에게 배워야 한다고 했다.
4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민중의 피 속에 낙망과 비관, 팔자 철학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박정희에게서 “하면 된다.”는 신념을 배웠고, 민주투쟁, 국민의 정부 수립과 참여정부의 출현을 통하여 국민 대다수는 강렬한 주체 의식과 권리 주장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낙망과 비관은 사라진지 오래며 자신감을 넘어서 교만에까지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은 졸지에 ‘대-한 민국’이 되었고,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4강 된 것이 마치 나라를 측량하는 모든 지표에서 4등이 된 듯한 흥분과 자만에 빠져 있다. 붉은 함성과 붉은 물결을 만들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한국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면,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해서는 일본에게, 고구려사의 귀속권을 두고는 중국에게 각각 항의하고, 수시로 반미 자주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하는 청년을 보면, 그리고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호언장담하는 정치가를 보면, 이 나라에 더 이상 비관이나 팔자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국민은 생에 대해 의욕 상실은커녕 의욕 과잉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파 싸움, 위대한 계획을 못하는 버릇, 서로 시기하고 음해하는 버릇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 이런 나쁜 버릇을 고치는데 간디와 함석헌이 말하는 혼의 힘이 효과가 있을까? 남북한을 통틀어 씨의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은 무엇일까? 1961년 함석헌은 남한의 정치를 부패정치로, 북한의 정치를 공포정치로 각각 규정했다. 지금 얼마나 달라졌을까? 물리력이 판치는 세상에서 누가 혼의 힘, 비폭력의 힘을 믿을까? 9-9
2) 정치는 종교에서 떨어질 수 없다.
가) 함석헌의 경우: 영과 육의 하나
종교는 정치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이 문제는 함석헌에게 평생 화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종교인이면서도 정치 악을 외면할 수 없었고, 고난의 역사에서 고난을 지고 나가는 길에는 반드시 정치악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간디를 배워야 할 이유의 하나로 간디 사상에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잘 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정치문제를 종교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치가 종교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말은 앞서 정치 투쟁의 목적이 저를 드러냄, 곧 하나님께 이름에 있다고 했을 때 이미 분명해 졌다. 아래 긴 인용은 그 요점을 풀어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간디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함석헌 특유의 역사관이 담겨 있다.
그다음 또 간디를 배우자는 이유의 하나는 그에게 있어서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잘 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정치문제를 종교적으로 해결 했다. 그것이 옳은 길이다. 오늘만 아니라 어느 시대도 역사는 결국 정치와 종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오늘날은 더구나 그러하다. 인류가 오늘 당하는 고민은 종교를 무시하고 모든 문제를 정치적으로만 해결하려 했던 결과로 오는 것이다. 본래 맨 처음에 있어서 종교와 정치는 하나였다. 몸과 혼이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이라면 종교와 정치가 하나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안팎으로 발달함에 따라 종교와 정치는 분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 하나인 것이 발달로 인해 분립을 하게 되면 거기 유기적인 통일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실지의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아 매양 충돌이 있었다. 혹은 종교가 정치까지를 차지하려 하기도 하고 반대로 정치가 종교까지를 차지하려 하기도 했다. 그 어느 때에도 폐단이 생긴다.
먼저 것의 실례는 중세기의 가톨릭이요, 뒤의 것은 19세기의 제국주의에서 볼 수 있다. 과학이 발달하는 것을 따라 물질주의의 인생관이 퍼져나갔고 한편 민족주의가 성해 감을 따라, 그것이 한데 합하여 침략적인 제국주의가 유행하게 되자, 종교는 그 사이에 있어서 나라 법의 공인을 얻는 반면 인심의 지배권을 아주 정치에 넘겨주고 순전히 저 세상만을 위하는, 현실을 피하는 종교로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인생관은 점점 천박한 것이 되어 버렸고, 마침내는 큰 규모의 살벌적인 전쟁, 학살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꺼림 없이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한 결과가 이제 와서는 그 물질주의 문명은 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데 빠져버렸다.
그리하여 오늘 사람의 고민은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서로 딴 것이 되어 조화할 수 없이 되어 자아의 분열을 일으킨 데 있다. 오늘의 세계의 문제는 곧 정치와 종교가 얼크러져 반대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있어서 간디가 몇 백 년 압박 정치에서 산송장이 된 2억의 인도사람을 다른 것 아닌 다만 단순한 가슴속에 있는 단순한 종교심에 호소하여 불러일으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이었던 대영제국에 반항하여 그 억누르는 힘을 물리치고 자유 하는 나라의 기초를 닦았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크게 주의할 만한 일이다. 「간디의 길」 (1961)13)
함석헌은 역사가 결국 정치와 종교의 싸움이라는 역사철학적 명제에서부터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는 세계라는 큰 맥락에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논의하고 있는데, 그것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살아 있는 사람이 몸과 혼으로 이뤄져 있듯이, 정치와 종교가 조화를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 ‘본래 맨 처음’(인류 역사의 최초)에는 이런 조화로운 상태가 실현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 본래 하나이던 것이 전개하여 분립하게 되고 ,유기적인 통일이 생기는 대신 충돌이 발생했다.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여 문제가 된 것은 중세였고, 정치가 종교를 지배하여 출현한 것이 19세기 민족주의와 침략적인 제국주의였다. 침략적인 제국주의는 과학의 발달에 따라 물질주의 인생관이 확산되고, 동시에 민족주의가 강화된 결과로 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종교는 나라의 공인을 받고 인심의 지배권을 정치에 넘겨주고 저세상만을 돌보게 되어서, 정치와 종교는 완전히 딴 것이 되고 말았다. 오늘 세계 문제의 핵심에는 정치와 종교가 서로 반대하고 대립한 데에 있다. 간디의 공로는 종교심을 이용하여 영국 제국주의가 갖고 있는 물리력에서 인도인을 해방시킨 데에 있다. 인도 해방은 그래서 정치와 종교의 하나 됨에서 가능했다. 함석헌이 본 간디의 길은 정치와 종교가 하나 되는 길, 역사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간디에게서 배울 바가 있다고 한 것이다.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 (1964)에서 종교와 정치의 하나 됨을 인류역사의 시초에서 찾고 있다. 종교와 정치를 결합하려는 충동은 하나의 생명 현상으로 돌리고 있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신화라고 할 정도의 언어를 빌어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시도를 할 만큼 양자의 관계에 대해 이론적으로도 몹시 고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몸 대신에 특별히 손이란 개념도 사용하면서, 생명이 손과 마음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손은 땅에 속하는 것으로 정치를 대변하고, 마음은 하늘에 속하는 것으로 영과 종교를 표하는 것이다.
생명이란 기이한 것이어서 반대되는 여러 가지 모순을 안에 싸가지고 있다. 생과 사, 정신과 물질, 활동과 휴양하는 것과 같이 복잡한 대립이 있다. 그리고 그 모순이야말로 생명의 무한한 양상의 기인이요, 끝없는 향상의 동기다. . . 역사의 진행은 직선운동이 아니요 나선운동이다. 활주가 아니요 약진이다. 역사를 단순히 사건으로서만 보아서는 피상에 지나지 않는다. 대립으로 보아서만은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싸움으로 볼 것이다. 시험하여 역사를 해방의 과정으로, 곧 자유가 속박과, 문(文)이 야(野)와, 평민이 귀족과, 이성이 본능과, 靈이 肉과, 신앙이 정치와 싸워 이기는 일로 보라. 얼마나 많은 것을 네게 가르치나? 전자 홀로 선이요, 후자 반드시 악이란 말은 아니다. 싸운다. 함은 반드시 싸워 멸한다함이 아니다. 靈이 肉을 멸한다하지 않는다. 삼킨다고 한다. 정신이 물질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것으로 안으려는 것이다. 대적을 사랑한다고 한다. 역사는 사랑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 손은 육을 대표하는 것이요, 땅에 속하는 것이요, 마음은 영을 표하는 것이요, 하늘에 속하는 것이다. 손의 나라는 정치의 나라니 그는 힘으로써 되는 나라다. . . . 그와 반대로 마음의 나라는 종교의 세계니 그는 깨달음으로 되는 나라요, 믿음으로 되는 나라요, 바람으로 되는 나라다. 사람은 이 두 나라에 적을 둔다. 육체에 관한 한 정치의 사람이요, 영에 관한 한 종교의 사람이다. 그리고 이 둘이 서로 싸운다. 영이 육을 삼키고, 사랑이 힘을 쓸어안는 날이 올 때까지 그 싸움은 그칠 14)날이 없다. 거기 인생의 번뇌가 있고, 역사의 파란이 있다. 눈물과 피와 한숨은 거기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역사추진의 힘은 거기 있다. 도덕이 거기 있고 예술, 학문이 거기 있다. 우주의 처음에 이 두 세계는 갈라지지 않았다.
함석헌은 사람은 영(깨달음)과 육(힘)의 나라 모두에 속한다고 한다. 역사를 시험 삼아 영과 육의 대립으로 보면 배울 것이 많을 것이라 한다. 이 둘은 대립하여 싸우고, 싸움이 바로 생명현상이며, 역사의 진행이다. 靈만이 옳은 것도 아니고 영이 육을 멸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은 사랑싸움을 통해 역사는 더디지만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사랑싸움이라고 해도 육이 영을 안는 것이 아니라 영이 육을 안게 되어 있다.
태초에는 혼돈이어서 분간이 없었지만 “아가페의 신이 명하여”15) 우주는 손과 마음의 세계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다고 한다.16) 함석헌은 최초의 분리의 전형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찾아 신화적‧상상적인 언어를 빌어 기술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암흑의 동굴 속에서 몽매한 요람 안에 흔들리고 있을 때, 인간에게 행동과 의식의 분리가 없었다. 그러나 신의 손이 저를 그 굴에서 몰아내어 빛의 세계에 보냈다. 그리하여 짐승같이 네 발로 기지 말고, 위로 하늘을 향하고, 직립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많이 넘어졌지만 결국 직립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큰 변동이 일어났다. 손이 생긴 것이다. 힘의 보고의 열쇠를 쥔 것이다. 그 안에서는 무수한 손, 무한히 긴 손, 무한히 힘 있는 손이 이어 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기구란 손의 연장(延長)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힘의 나라에 들어서게 되었다."17)
암흑의 세계에서 나와 먼저 이뤄진 것이 손의 세계, 힘의 세계다. 그런데 그 결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음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암흑 속에서 빛이 나온 것 같이, 미묘한 생명의 원리에 의하여 손의 힘으로 마음의 세계의 문이 열렸다.”18) 기구를 많이 사용하는 후(後) 석기 시대에 들어와 인간의 정신생활이 풍부해졌다. 설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 때 비로소 그들은 내적 세계에 눈이 열렸다. 성장기의 처음에 있어서 인류문화가 전혀 종교적이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놀랍게도 눈이 처음 열렸고 신비의 소리가 처음 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보고 듣는 그대로 직접 어떤 산 인격의 얼굴이요, 목소리였다. 저들은 봄으로써 신령체의 맥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를 가르쳐 준 것은 사제였다.19)
사제(
그런데 ‘산 인격’이나 ‘신령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어떤 인격을 의미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성령, 아트만, 씨, 불성, 道 와 仁과 같은 것일까? ‘산 인격’은 마음‧혼‧종교의 알짬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석가모니 같은 분은 사제 전통에 우뚝 선 봉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일단 이해해두자. 우리가 ‘산 인격’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 자체가 종교는 제쳐두고 물질주의 인생관과 정치에 몰두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함석헌은 제사‧종교의 시대가 소년의 시대라면 다음에는 청년의 시대가 도래 한다고 한다. 손이 마음을 향하여 유모와 가정교사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는 어제와 같이 상상의 날개를 타고, 신비의 세계에 소요하는 것이 아니라, “두 다리를 확실한 땅에 디디고, 현실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물건을 붙드는 것이 일이다. 전시대가 산 세계를 발견한 시대라면 이제 오는 세계는 인류가 자기의 힘을 발견하는 시대다. . . . 인류가 혈관 속에 처음으로 청년의 혈조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는 시대다. 그리하여 힘의 세계는 열리기 시작하였다.”20)
함석헌은 이어서 「僧과 왕」 이라는 소제목 아래에서 오늘날의 국가를 아주 예전에 발생한 초기 국가와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다. 국가 발생 당시에는 무력과 종교라는 두 요소 가운데 종교가 더 중시되었다. 국가를 건설한 것은 손이라기보다는 마음이었다. 검이 아니라 양심으로 다스려졌다. 하지만 나중에는 무력 국가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력 국가가 생기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인류문명에 정주 형과 유목 형이 있었고, 전자는 知的이라면 후자는 能的이다. 그런데 후자는 정주형의 문명이 이룩한 문화도성 안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즙에 욕심이 생겼고, 도시는 스스로도 부패하여, 그 약해진 때를 타서 유목형의 문명 하의 용감한 자들이 무력이 약한 도시를 약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복‧피정복의 계급이 생기고, 왕자가 생겼다. 사제 계급은 유목 문명을 가진 다른 종족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한다. 하지만 왕자도 통치의 필요상 종교의 권위와 타협하게 된다. 그런데 새 정복자는 문화적으로 떨어진 자이므로 피정복자의 역사적 문 화류에 녹아서 동화되고 만다. 이상과 같이 함석헌은 승려와 왕자의 싸움을 설명하고 있다.21)
인류 역사는 손과 마음, 정치와 종교, 그리고 힘과 깨달음 사이의 투쟁이다. 3천년 내지 2천 5백 년 전에는 정치 곧 무력국가가 성히 일어난 때이다. 이 때 왕권신수사상도 나왔다. 국교라는 것과 종교국가도 일어났다.
함석헌의 세계사관에 따르면 “사제가 인류의 제1의 교사였다면 王者는 제 2의 교사다. 전자가 인류의 눈을 산 우주에 향하게 하였다면, 후자는 현실의 자아에 향하게 하였다. . . 제1의 교사가 교사(狡詐)에 빠졌던 것같이 제2의 교사는 가혹에 기울어졌다. “22) 손과 마음의 싸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은 인류에게 던져 준 영원의 과제다. 이는 인간성 그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23) 이런 역사관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사제의 간교한 사기에 빠져서도 안 되고 정치가의 가혹에 빠져서도 안 된다. 간교와 가혹, 모두를 극복하는 것이 씨의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함석헌이 「간디의 길」에서 기술한 대로라면 19세기는 손의 힘 곧 가혹 이 그 극단에 도달한 때였다. 17-16
나) 간디의 경우: 진리와 세속의 불리(不 離)
간디는 정치가 뱀의 똬리처럼 우리를 휘감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이 함석헌의 뇌리에 깊이 박혔던 것으로 보인다.24) 그는 몸과 혼이 하나이듯 정치와 종교가 하나인 점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했다. 간디는 정치와 종교의 하나 됨을 정치적 삶이 반드시 영화(靈化)되어야한다는 ‘큰 말씀’, 자신의 정치 구루인 고칼레(Gopal Krishna Gokhake, 1866-1915)에게서 배웠다는 큰 말씀으로 표현했다. 간디는 세속에서 정치‧종교‧경제‧법률‧문화‧교육 등은 서로 얽혀 있다고,25) 진리는 세속에서 떨어질 수 없다고 보았다.26)
간디에게는 세속을 변화시키기 위한 행위를 동반하지 않는 명상이나 수행은 모두 정신적 방탕이고 순결(브라마차르야, 梵行) 계율의 정면 위반이다. 그리고 행위를 위한 적당한 장소 는 히말라야 같은 곳이 아니라 봄베이나 캘커타와 같이 세속사가 일어나는 세속이었다. 다음의 한 대목을 보자.
진리의 길을 밟으면서 동시에 세속 사(事) 곧 쁘라브리띠에서 떨어져 있는 일은 공화(空華)처럼 불가능한 일이네. 쁘라브리띠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이 자신이 어떤 길을 따라가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진리의 길을 밟는다는 것 자체가 쁘라브리띠 안으로 들어감을 상정한다네. 쁘라브리띠가 없다면 진리의 길을 밟을 기회도, 밟지 않을 기회조차 없네. 거룩한 기따는 여러 시구에서 사람은 단 한 순간도 쁘라브리띠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네. 귀의자와 귀의자가 아닌 자와의 차이는 다음과 같네. 즉, 귀의자는 최고선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쁘라브리띠 안에 남아 있는 자로서 쁘라브리띠 안에 살면서도 결코 진리에 대한 고수를 포기하지 않으며 집착과 혐오를 약화시키는 자이고, 귀의자가 아닌 자는 쁘라브리띠에 탐닉하고, 그의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 거짓 등의 악마적 행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라네. 이 세속 사는 경멸의 시선으로 보아야할 것은 아니네. 주님에 대한 비전은 오로지 세속 사를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네. 미혹을 일으키는 세속 사는 경멸의 시선으로 봐야 하고 언제나 피해야 할 일이라네. 이것은 나의 확고한 생각이며 경험이라네.27)
이 대목은 간디가 형제라고 부른 동료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쁘라브리띠(pravritti)라는 범어는 ‘세속에서의 행위’로 옮길 수 있다. 간디에게 세속이나 세속 사를 떠나 진리를 추구하는 일은 空華나 신기루를 좇는 일이다. 세속에서가 아니라면 진리의 길을 밟을 기회조차, 아니 진리를 언급할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존재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세속을 버리는 것은 진리 추구를 아예 포기하는 일이다. 간디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바가 바드 기타의 가르침으로 뒷받침하기도 했다. 그는 진실한 귀의자란 세속 사를 실행하는 가운데 최고선을 실현하는 자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극히 작은 부분이나마 보자면 세속을 떠나서는 안 된다.
모든 종교는 자아실현의 길과 자기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 간디에게는 “자아실현이나 자기 지식(Self-knowledge)은 우리가 모든 생명(有情 者)과 일치되기 전-신과 하나되기 전-까지는 불가능하다. 그와 같은 일치를 완수하는 일은 타인의 고통을 의도적으로 나누는 것, 그 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포함한다.”28) 유정 자와 그들의 고통, 그리고 신을 외면하거나 도외시 한다면 개인적 완성, 자아에 대한 지식, 진리추구도 모두 거짓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아완성은 봉사를 통해 얻어진다는 간디의 말을 수용하면29), 자아가 완성되기를 기다려 봉사하려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봉사 없는 자아완성은 도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리와 세속은 처음부터 같이 가는 것이므로, 정치와 경제 등의 세속과 세속의 역사를 떠난 자에게는 진리도 없고 진리 추구의 역사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간디의 삶이 세상에 소리 높여 선포하는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를 함석헌은 귀하게 여겼다. 간디가 소란하고 더러운 봄베이, 캘커타에서 봉사했듯이, 함석헌은 서울에서 진리를 구현하려고 했다.
정치는 그래서 간디에게 진리를 구현할 수 있는 뿌라브리띠의 한 부분이다. 간디는 영국의 제국주의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일을 사탸그라하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므로 정치 분야에서 가장 많이 활동한 셈이다. 스스로 성자라고 부르지도 않고 정치가의 기질이 자신을 지배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고 했던 간디이지만, 그가 한 모든 일은 자신에게는 정치라고 했고, 인도의 자치(스와라지)를 얻기 위한 노력조차 해탈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데도 간디는 나이 70이 넘어서 자신의 이름을 딴 봉사 단체인 간디봉사회 앞에서 연설했는데(1940), 거기에서 “정치는 나에게는 성가신 일입니다. 내가 정치를 털어버릴 수 있다면 기뻐 춤출 것입니다.”30)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토록 성가신 정치에 깊이 연루될 수밖에 없었을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앞서 말한 대로 진리가 삶의 모든 실제적인 측면에 적용될 수 있다는 그의 확신 때문이다. 그는 진리와 비폭력이 사람이 하는 모든 말, 행위와 거래 안에 구현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간디가 구루 고칼레에게서 배웠다는 큰 말씀이 바로 이 신념이었다.
둘째. 정치판을 차마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간디의 불인지심(不忍地心) 때문이다. 간디는 오늘날의 정치가 더 이상 왕들의 관심사가 아니라 사회의 최하층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하고31), “민중이 약탈당하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라고도 했다.32)
간디는 자신의 정치참여에 대해 변호하면서 “나는 내 속에 있는 정치가가 단 한 차례의 결정조차 지배한 적이 없었고, 내가 정치에 참여하는 듯이 보여도 그것은 오늘날의 정치가 뱀의 똬리처럼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빠져 나올 수 없게끔 우리를 휘감고 있기 때문 이었다. . . . 따라서 의식적인 면에서 나는 1894년 이래 줄곧 정치라는 뱀과 씨름해 왔다.”라는 말도 했다.33) 이 구절은 간디가 1920년 성자가 아니라 정치가가 되고 말았다는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성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영 인디아(1920,5,12))에 기고했던 글에 나온다. 그는 1894년 나이 스물다섯 남아프리카에서 공적 생활과 공공봉사에 투신한 뒤로 죽을 때까지 뱀과 같이 자신의 몸을 휘감고 있는 정치, 민중을 약탈하는 정치라는 뱀과 씨름했다. 그 씨름에는 정치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과 정치에 대한 불인지심이 함께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간디와 함석헌은 정치와 종교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다. 간디는 진리가 세속을 떠날 수 없다는 말로, 함석헌은 육과 영이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말로 각각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좀 다를 뿐이다. 함석헌의 말을 빌린다면 간디가 비판한 인도 사회에 뿌리박힌 해탈에의 욕구, 곧 정치와는 무관한 해탈에의 욕구는 사제의 간교다. 19
* 한국기독교와 불교에 깊이 뿌리박힌 천국, 극락정토(極樂淨土)에의 욕구, 곧 정치와 사회개혁과는 무관한 천국, 극락정토의 욕구 또한 인도 사회 못지않은 사제의 간교다! -옮긴이(오철근)의 견해
111. 옛길과 새길
함석헌은 간디의 길을 “이웃을 사랑하라, 자기희생을 하라 하는 말”로 간단히 표현하고 있다. 이 길은 간디가 만든 길이 아니라 공자, 석가, 예수가 다 같이 갔던 옛길이다. 다음구절을 보면 고등 종교는 모두 이 길을 가르친 것이 된다. 사랑과 자기희생의 길이 옛길이고 여러 고등 종교에 공통된 것이라면 간디의 새 길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으로서는 아무리 고상한 도덕이라도 나라에 들어가면 문제가 달랐다. 자기희생이 개인으로는 다시 없이 높은 도덕이나 그것을 국가적으로 하면 죄로 알았다. 그러나 지난날의 도덕‧종교의 힘없는 원인이 바로 여기 있었다. 나라라는 이름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행하여졌고 얼마나 많은 선이 말살 당했으며 교회라, 하나님이라, 하는 이름 아래 개인으로는 도저히 허락될 수 없는 살인이 아름다운 덕으로 찬양이 된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 때문에 개인으로는 수많은 갸륵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도덕‧종교가 사회적으로는 아주 힘없이 온 것이다. 이제 여기 이 큰 모순의 바위에 쇠망치를 내린 것이 간디다. 인제 저가 수염도 한 대 없는 조그만 알몸에 개짐 하나만 지고‘사탸그라하’ 운동을 나섰을 때 깨진 것은 대영제국이 아니고, 이 큰 인류 역사의 모순의 경계선이었다. 이제 선에 개인과 단체의 구별이 없어졌다. 개인의 경우만 아니라 단체에 있어서도 생명은 내버림으로만 얻어진다는 것이 진리임이 증명되었다. 저 조그만 사람으로 인하여 지나간 날에 인류를 한없이 속여오던 나라요, 교회요 하는 단체라는 우상이 깨지고 말았다. 진리 앞에 개인도 단체도 없다. 이것은 인류 역사만 아니라 우주 전체의 정신이 자라나는 역사에서 큰 한 걸음을 내킨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우상이 아직은 채 꺼꾸러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리도 이 고난의 짐을 지는 것이지만 그는 이미 치명상을 입었다. 우리가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 . . 인류 앞에 지금 놓여진 길은 간디가 열어놓은 좁고 험한, 그러나 큰 이참의 길, 평화의 길이다.34)
간디의 새 길은 사랑과 자기희생의 길을 개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단체로서, 나라로서, 집단으로서 곧 국가적 차원에서 하려고 한 데에 있다고 한다. 간디의 사탸그라하 운동은 개인 도덕과 국가도덕을 가르는 모순의 경계선을 깬 것이다. 간디는 종족 간에도, 민족 간에도 사랑과 자기희생을 적용하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점, 이점을 함석헌은 더 할 나위 없이 높이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살인을 금기시 한다. 하지만 종족 간, 국가간의 전쟁에서 살인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본다. 그 살인자는 때때로 의사(義士)나 용사로 불린다. 또 개인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면 그 행위는 찬양의 대상이 되고 그 사람은 의인이 된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나 나라를 희생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절대로 없다고 본다. 그것은 오히려 죄가 된다. 그런데 개인과 전체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상식적인 차별을 함석헌은 모순이라고 부르고, 과거의 도덕‧종교가 무력했던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은 왜곡된 상식이 생겼을까? 그것은 민족이 절대 가치를 지닌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자기희생을 단체로서, 나라로서 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간디는 이런 큰 모순의 바위에 큰 쇠망치를 내린 사람이었다. 간디의 사탸그라하 운동이 깨어버린 것은 대영제국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 있는 모순의 경계선이었다. 그는 개인과 집단간의 차별을 허물었다. “개인의 경우만 아니라 단체에 있어서도 생명은 내버림으로만 얻어진다는 것이 진리임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 진리 앞에는 개인도 단체도 없다. 절대 희생시킬 수 없다는 교회, 민족, 국가라는 단체는 전부 우상에 불과하다. 22
1) 「함석헌 전집 간행에 부처」 함석헌 전집 (서울: 한길사. 1976년). 1권 5면.
2) 「서정웅에게 보낸 편지」 (1971). 18권271-272면 참조. 이편지에서 함석헌은 인도를 방문하여 거기 에서 간디 추종자들에게 환대 받은 경험을 적고 있다. 그 때 간디 추종자들이 자신을 “한국의 간디”라고 소개하며 생일 축하를 해 주었다는 것과, 이에 응답하며 함석헌은 “내가 바라는 것은 인한(印 韓)의 친교다. 우리는 다 수난의 민족이다. 그러나 세계 장래는 우리 거다. 다만 서로 떨어져 제각기로는 못하니 우리는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고 적고 있다. 같은 책. 272면
3) 「마하트마 간디」 , 함석헌 전집 , 7권 36면.
4)「간디 자서전을 옮기면서」 같은 책, 48면.
5) 「함석헌 전집 간행에 부처」 함석헌 전집 , 1권 4면.
6) 「현대사의 조명탄 간디」 , 7권 42면.
7) 또 「씨」이라고 할 때 「씨」와 「」은 어떻게 구분되는지, 그것도 궁금하다. 씨이 백성, 민의 뜻이라면 하나의 단어 이므로 「씨」와 「」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하지만 함석헌은 「」을 셋으로 나눠 설명하기도 하므로 궁금한 것이다. 씨을 씨답게 하는 것이 인가?
8) 함석헌 전집 7권 9면. 이글은 사상계 , 1961년 2월호에 실린 것으로 되어 있다.
10) 같은 책, 12면.
12)같은 책, 13면.
13) 같은 책, 7권 13-14면.
15) 같은 책, 171면.
16) 같은 책, 171면 이하 참조.
17) 같은 책, 171면.
18) 같은 책, 172면.
19) 같은 책, 같은 곳.
20) 같은 책, 172-73면.
21) 같은 책, 173-74면 참조.
22) 같은 책, 175면.
23) 같은 책, 같은 곳.
24) 함석헌은 「새 인도와 간디」에서 “그는 정치문제가 사랑하는 인도의 몸에 구렁이처럼 감겨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겨 놓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다가 마침내 거기 순교(殉敎)하고 말았지만 그는 결코 정치인이 아니었고 권력을 쥐자는 더러운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 고 했다. 함석헌 전집 7권 30면.
25) 이 부분은 간디, 이예르 편, 허우성 역 문명‧정치‧종교 (상) (2004, 소명출판), 「역자 서문」 58면 이하를 많이 참조했다.
26) 이 부분은 같은 책, 「역자 서문」 , 31면 이하를 많이 참조했다.
27) 간디, 이예르 편, 허우성 역 진리와 비폭력 (하) (2004, 소명출판), 810-811면.
28) 간디, 이예르 편, 허우성 역 문명‧정치‧종교 (하), (2004, 소명출판), 761면.
29) 간디, 이예르 편, 허우성 역 문명‧정치‧종교 (상). 50면.
30) 같은 책, 553-554면.
31) 간디, 이예르 편, 허우성 역 문명‧정치‧종교 (하), 505면.
32) 같은 책,558면.
33) 간디, 이예르 편, 허우성 역 문명‧정치‧종교 (상), 58면.
34) 함석헌 전집 , 7권 15-16면.
간디와 함석헌-2
민족주의, 세계주의, 진리
함석헌은 민족의 고난 속에서 전체의 고난을 보려고 했다. 그는 민족의 역사적 비극을 비탄해하고, 민족적인 거에 대해 부단히 사랑을 표현했지만, 단순하고 편협한 민족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간디와 함석헌에게 일편단심(一片丹心)의 애국심은 분명히 있었지만, 세계적인 것과 진리에 대한 그들의 단심은 더욱 높고 더욱 강했다. 함석헌은 1983년의 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 나라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나는 민족보다도 세계적인 것을 강조하는 사람입니다. 민족주의 아니에요. 난 민족주의 싫어요.……. 민족주의자라면 민족이 도덕의 최고다. 생의 표준이 민족에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민족에 이익 되는 것 그건 좋은 거고, 민족에 반대되는 것이나 다른 민족은 덮어놓고 안 된다. 사람 아무리 좋고 그래도 안 된다. 이랬던 것이 19세기 오면서 한참 시세를 날렸던 민족주의예요. 그런 건 나는 싫어요.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민족적 것은 지켜가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제 나라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 나라의 뿌리가 내 뿌리예요.1)
함석헌은 나라의 뿌리를 자신의 뿌리로 여기며, 나라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생과 도덕의 표준을 민족에서 구하는 민족주의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때문에 그에게 민족의 뿌리를 지켜나가는 것은 세계의 뿌리를 키우는 것과 같고, 민족을 세우는 일은 세계를 세우는 일과 같다. 민족주의가 민족을 세우는 한편 세계나 동아시아가 망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런 민족주의는 당연히 배격할 터이다. “다른 민족은 덮어놓고 안 된다.” 이는 집단적 오만의 표출이다.
함석헌은 간디가 사랑을 모든 선의 근본으로 삼아 민족과 인종을 그리고 종파를 하면 마침내 세계와 우주에까지 나아간 모습을 서술하고 있고, 이 대목에서 간디가 현대사의 조명탄이 되어 인류역사가 나아가는 필연의 방향을 보여주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사랑을 모든 선의 근본으로 여겼습니다. 민족주의가 박해하면 민족을 초월해 인도주의에 오르고 인종차별의 업신여김을 당하면 인종을 초월해 세계에 올라갔으며, 종파주의 설움을 당하면 모든 종교를 초월해 우주에 섰습니다. 크다 크다 못해 다시 더 용납될 수가 없이 됐을 때 그는 폭발하는 조명탄이 되어 공중에서 타올라, 그 빛 속에 내편과 대적을 다 비치게 됐습니다. . . 조명탄은 양쪽 에 다 같이 빛이 되듯이, 참 속에는 옳은 것 그른 것이 다 같이 서는 것이고, 사랑 안에는 선한 것 악한 것이 다 하나로 살 수 있습니다. . 그의 비쳐주는 길이, 어쩔 수 없이 인류 역사가 나가야 하는 필연의 방향이기 때문 입니다.2)
간디의 내셔널리즘이 실제 인류 전체와 우주를 위해, 민족을 초월해 가는 모습이 아래 인용문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영국 제국주의와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던 간디 자신의 말이다.
따라서 내셔널리즘에 대한 내 사랑, 즉 내셔널리즘에 대한 내 이념은, 인류 전체가 살 수 있도록 우리나라가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부득이 하다면 우리나라가 죽을 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인종간의 증오가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내셔널리즘으로 삼읍시다. -메카노 클럽 연설3)
나는 스스로 내셔널리스트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점에 대해 자부심이 있습니다. 나의 내셔널리즘은 우주만큼이나 광대합니다. 그 범위 안에는 저급한 동물에서부터, 지상의 모든 나라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의 진리성에 대해 전 인도를 설득시킬 수만 있다면, 인도는 세상의 온 나라가 동경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나의 내셔널리즘은 전 세계의 복지를 포함합니다. 나는 나의 인도가 다른 나라들의 잔해를 밟고 일어서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나의 인도가 단 한 사람이라도 착취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물리력을 토대로 삼는 헌법의 기초에 공범자가 도저히 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 집회에서의 연설4)
간디의 내셔널리즘은 우주와 같이 광대한 내셔널리즘으로 지상의 모든 나라, 심지어 저급한 동물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사람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그의 내셔널리즘은 인도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려는 것이지만 인류 전체를 살리려는 것이므로, 이기적일 수 없었고, 다른 민족에 대한 증오‧유린‧침략이 들어갈 여지도 없었다. 그래서 간디는 “사랑은 경계가 없습니다. 나의 내셔널리즘은 어떤 강령과 관계없이 지상의 모든 나라들에 대한 사랑을 포함합니다.”라고 쓰기도 했다.5) “ 인도의 내셔널리즘은 인터내셔널리즘을 말한다. “는 내용의 성명을 언론에 보내기도 했다.6) 이와 같은 내셔널리즘은 물리력에 근거 할 수 없으므로, 간디는 물리력에 토대를 두는 헌법의 기초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비폭력을 보편 진리로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력‧경제력‧군사력 등 일체의 물리력을 포기해야 하고, 자기나 인도 전체를 희생할 수 있는 각오와 훈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7) 함석헌이 저급한 동물까지를 포함하는 내셔널리즘에 찬성할 수 있을지 그것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에 한정하는 한, 함석헌과 간디의 내셔널리즘은 인류 전체를 포함할 만큼 넓은 것으로 보인다.
간디는 자신의 사명이 인도에 국한될 수 없음을, 세계를 위해 인도를 순수한 희생물로 바칠 각오가 되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 사명이 인도에 국한해서는 성취될 수 없다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의 한계를 인정할 만큼 겸손하기를, 그리고 인도 자체에서 실험의 결과를 알 때까지 제한된 인도 무대를 당분간 고수하기를 바랍니다. 이미 답변한 대로 나는 인도가 자유롭고 강하게 되어 세계의 개선을 위해 자발적이고도 순수한 희생물로 자신을 바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순수한 개인은 가족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가족은 촌락을 위해, 촌락은 지역을 위해, 지역은 주를 위해, 주는 나라를 위해, 나라는 전체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8)
이 인용문은 자기희생의 차례를 적고 있다. 작은 것은 큰 것에게 희생해야 한다고 본다. 개인은 가족을 위해, 가족은 촌락을 위해, 촌락은 지역을 위해, 지역은 나라를 위해, 나라는 전체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디라면 민족이라도, 민족이 아끼는 독도라도 참과 진리를 위해서라면 희생하라는 것이다. 간디에게 진리는 비폭력이다. 그에게 비폭력이 아니면 참이 아닌 것이다.
당그라와 안중근
간디 당시 인도에서 폭력으로 영국 제국주의에 항거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인도 폭력과 소속이면서, 조국에 대한 충성과 영국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마단랄 당그라(Madanlal Dhngra, 1887-1909)가 있었다. 그는 1909년 7월 1일, 안중근(1879-1910, 3, 26)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오를 암살하기 2개월 여 전, 런던에서 인도담당 국무장관 몰리Moreley 경의 정치 보좌관 커진 와일리(Curzon Wyllie, 1848-1909)를 저격하여 암살했다. 사건 당시 그는 런던에서 유학하고 있던 공학도였다. 체포되어 같은 해 8월17일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나이 스물두 살에 불과했다. 인도에서는 오늘날까지 당그라의 행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9) 간디는 저 유명한 힌드 스와라즈 (1909)에서 당그라의 행동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당그라의 행동 및 인도에서 행해진 그와 유사한 행동에 의해 인도가 이득을 얻었다고 믿는 자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당그라는 애국자였지만 그의 애국은 눈 먼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릇된 방식으로 몸을 바쳤습니다. 궁극적인 결과는 해로울 뿐입니다.10)
안중근의 암살 행위에 대해 국내 사학자들은 대체로 의로운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의 자기희생은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희생이고 의로운 행위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민족으로 머물러 있는 한 그는 의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간디는 당그라의 행위를 비판했듯이 안중근의 행위를 비판했을 것이다. 간디가 말한 참의길, 평화의 길에서는 이런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닐지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조직적인 악에 조직적인 사랑으로 대한다는 것이 불가능했을까? 혹자는 영국 제국주의가 일본 제국주의보다 훨씬 온정주의적이어서 비폭력이 통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간디는 이 주장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안중근의 암살 행위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없는 것 같다. 첫째 이유는 ‘성공한’ 비폭력 운동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생각해 보면 함석헌이 지적한바 곧 우리 역사나 문화 전통에 종교심(깨달음)이나 비폭력 정신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간디는 진리 앞에 민족과 국가는 우상일 뿐이라고 믿고, 개인 도덕과 국가 도덕을 가르는 모순의 경계선을 깨버렸다. 함석헌은 바로 여기에 간디의 새 길이 있다고 보았다. 민족을 세계와 진리의 하위 개념으로 보는 이 두 사람의 태도를 깊이 새기면서, 100년 전의 과거를 위해서가 아니라 앞날을 위해 끊어 오르는 민족감정을 달래면서라도 안중근의 ‘애국적인 살인 행위’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 29-27
IV. 간디의 아슈람 규약: 씨 교육론
함석헌은 「새 인도와 간디」11)에서 간디가 민중을 교육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를 기술하고 있다. 그 노력의 목표는 민중을 깨우는 것이었다. “깬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기적인 욕심을 이기고 공동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알아 역사 창조의 전체적인 운동12)에 자진 참여하자는 결심을 가지게 되는 일이다.”13) 함석헌은 간디가 그런 운동의 주요 수단으로 인도의 소리 , 청년인도, 하리잔 이라는 주간지를 발행했고, 곳곳에 공동체를 설립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함석헌은 간디의 아슈람을 ‘새 인도의 산실’로 부르며, “여기서 훈련된 정예분자가 아니고는 그 대중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 수 없었을 것”이라 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피닉스, 톨스토이 농장, 그리고 귀국 후에는 사바르마띠 아슈람 등을 운영하면서 사탸그라하 운동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런데 공동체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상 시간과 식사법을 포함하여 아주 세세한 데까지 엄격한 규율을 정해두고 실천했다. 간디는 1915년 5월 20일 아메다바드에 사탸그라하 아슈람을 설립했고, 그 전에 그 아슈람을 위한 규약 초안을 만들어 회람시켰는데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14) 우선 아슈람의 목적에 대해서는 “아슈람의 목적은 우리의 일생 동안 모국에 봉사하는 방식을 배우고 또한 봉사하는 것이다.”15) 이는 함석헌이 앞에서 민중을 공동사회의 일원으로 깨운다는 것과 흡사하다.
모국에 대한 봉사라는 아슈람의 목적이 인생의 목적이기도 하다면, 이 규약은 전인교육을 위한 것, 곧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전인이 되고 자아를 실현하는 전 과정에서 정치는 일부만을, 그러니까 대략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아슈람은 감독, 초심자, 학생으로 이뤄져 있다. 먼저 감독은 아래 6개항의 주 서약과 3개항의 보조 서약을 하고 준수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먼저 아슈람 내부의 지도자격-씨의 유력한 후보자? -에 해당되는 감독이 지켜야 할 6개항의 주 서약을 보자.
①진리서약
진리 서약의 아래에 있는 사람은 보통 허위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그런 사람은 나라의 선을 위해서라도 속임수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②비폭력 서약
살아 있는 모든 생명(有情者)의 살생을 금지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 서약을 한 사람은 자신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라도 죽이면 안 된다. 그들에 대해 성을 내서는 안 되고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부모의 폭정이든 정부나 다른 사람들에 의한 폭정에 반대할 것이지만, 폭군을 결코 죽이거나 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와 비폭력 추종자는 폭정에 대해 사탸그라하를 실천할 것이고, 사랑으로 폭군의 마음을 얻을 것이다. 그는 폭군의 의지를 따르지 않을 것이지만, 폭군 자신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그의 의지에 불복하기 위해 사형을 포함하여 어떤 처벌이라도 감수할 것이다.
③순결 서약
순결이 준수되지 않는다면, 위의 두 서약은 준수하기가 거의 불가능 하다. 이 서약을 지키기 위해, 남의 아내를 정력의 눈으로 보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므로, 동물적인 정염을 제어해서, 그 정염이 생각에서조차 움직이지 않게 되어야 한다. 만일 결혼했다면, 자기 자신의 아내와도 성교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를 친구로 간주하고 그녀와 완전한 순결의 관계를 확립할 것이다.
④미각의 제어
사람은 미각을 정복할 때까지, 앞서 말한 서약 특히 순결 서약을 준수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미각의 제어는 나라에 봉사하기를 원하는 자들에 의해 별도의 서약으로 다뤄져야 한다. 사람들은 식사가 오직 육신을 유지하기 위함이란 사실을 믿고, 자신의 식사법을 매일 조절하고 정화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동물적인 정염을 자극할 만한 음식을 당장 혹은 서서히 그만두게 될 것이다.
⑤불투도(不偸盜) 서약
보통 타인의 재산으로 간주되는 것을 훔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이 서약을 한 사람은, 자연이 자신에게 일용을 위한 음식은 충분히 제공하지만 그 이상은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고, 실제로 필요 없는 음식이나 의복 등의 물건을 사용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도둑질로 간주한다.
⑥무소유 서약
물건을 많이 소유하고 저장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 육신의 자양분 공급과 보호를 위해 꼭 필요 없는 것은 어떤 것도 저장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람이 의자 없이 지낼 수 있다면 그래야 한다. 이 서약을 한자는 이것을 언제나 심중에 두어야하고, 그의 삶을 더욱더 단순화하기를 노력해야 한다.
이상이 주 서약이라면 아래는 보조 서약으로 처음에는 둘이 있었는데 수개월 뒤 하나가 더 추가되어 셋이 되었다. 스와데시 서약은 같지만 자세히 적어 본다. 이 서약은 진리를 위반하는, 정말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인 국가나 민족이 있다면 그들과는 어떤 거래도 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①스와데시 서약
스와데시 서약을 한 사람은 물건들의 제조 과정에 또는 물건들의 제조자 편에서 진리의 위반과 관련된 것이 있다면 그런 물건들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여기에서 진리의 신봉자는 맨체스터, 독일, 인도의 공장에서 제조된 물건들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들이 진리의 위반과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해 그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한다. 엄청난 열기의 발생은 엄청난 생명 파괴를 야기한다. 그 이외에도 기계제작에서 발생하는 노동자 생명의 손실과 과도한 열기에 따른 다른 생명체들의 손실은 도저히 글과 말로는 형언할 수 없다. 그래서 외제 직물과 기계로 만든 직물은 삼중의 폭력에 연관되어 있으므로 비폭력 신봉자는 피해야 한다.
②무외(無畏)의 서약
공포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은 진리 등의 서약을 거의 준수할 수 없다. 그래서 감독들은 왕‧사회‧자신의 계급‧가족‧도둑‧강도에 대한 공포, 호랑이와 같은 포악한 짐승에 대한 공포, 심지어 죽음에 대한 포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무외의 서약을 준수하는 사람은 진리의 힘 또는 혼의 힘으로 자신을 방어할 것이다.
③불가촉천민제도를 반대하는 서약
전통적으로 실천되어 온 힌두교에 따르면, 일부의 집단들은 불가촉천민으로 간주되어 왔다. 다른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힌두교도들은 상기 집단들 중 어느 하나의 구성원과 접촉하게 되면 오염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불가촉천민과 우연히 접촉하게 된 사람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아슈람의 창립자들은 이런 실천이 힌두교의 맹점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스스로 독실한 힌두교들인데, 힌두교도 종족이 단 하나의 집단이라도 그것을 불가촉천민으로 간주하는 한, 죄의 무거운 짐이 계속 무거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죄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아슈람 거주자들은 불가촉천민 집단을 가촉민으로 간주한다는 서약을 받는다.
이 규약은 다음으로는 감독이 실행해야 할 항목으로 바르나 아슈람, 모국어, 육체노동, 베 짜기, 정치에 대한 일정한 규율을 정해두고 있다.
바르나아슈람(Varnashram)16)
우리 아슈람은 바르나아슈람을 따르지 않는다. 아슈람을 감독하는 사람들은 학생들에 대해 부모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순결과 비축적 등의 평생 서약이 준수되는 곳에서는 바르나아슈람 다르마가 들어갈 여지는 없다. 아슈람 동지들은 산야시(포기자)17)의 단계에 있게 될 것이므로, 이 다르마의 규칙을 따라야 할 필요가 없다. 이런 사실을 제외한다면 아슈람은 바르나아슈람 다르마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카스트 규율은 나라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모국어
어느 나라나 어느 집단이나 자신의 모국어를 버리고서는 진정한 진보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감독들의 신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할 것이다. 그들은 인도 전지역에서 온 형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싶어 하기 때문에, 다른 주요 인도언어들도 배울 것이다. 산스크리트가 인도 언어들의 열쇠이므로 그것도 배울 것이다.
육체노동
감독들은 육체노동이 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한 의무라고 믿는다. 육체노동은 인간이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의 정신적‧영적 힘들은 공동선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이 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감독들은 땅에서 하는 일에 시간의 일부를 항상 바칠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그들은 다른 육체노동을 수행할 것이다.
베 짜기
감독들은 이 땅에 있는 빈곤의 주요 이유 중에 하나가 물레와 수직기가 실제로 사라진 일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수직기로 천을 짬으로 해서 이러한 수공업을 부흥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정치
정치와 경제적 진보 등은 분리된 사안들이 아니다. 그것들이 모두 종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고, 감독들은 종교적인 정신에서 정치‧경제‧사회 개혁 등을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발휘할 수 있는 온갖 열정을 다해 이들 분야에서 일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상이 아슈람에서 지도자격에 해당되는 감독들이 지켜야 할 일이다. 감독에 관련된 사항 중에서 정치는 제일 마지막에 나온다. 진리와 비폭력 등의 주 서약과 보조 서약은 물론이고 모국어, 육체노동, 심지어 베 짜기 뒤에 비로소 정치가 나온다. 정치적‧경제적 개혁을 이루는데 진실로 기여하기 위해서는 앞에 열거한 서약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탸그라하 아슈람 규약」은 그 다음에 초심자와 학생에 관련된 사항, 기타 사항, 요구사항, 일과표를 차례로 담고 있다. 앞서 언급한 프로그램을 따르기를 원하지만 필요한 서약을 당장 할 수 없는 자들은, 초심자로서 수용될 수 있다. 그들은 아슈람 안에 머무는 동안 감독들이 지키는 모든 규율에 순응하는 것이 의무이다. 그들은 인생을 위한 필수적 서약을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감독의 지위를 얻게 된다.
다음에는 학생인데 학생에 대해 아래와 같이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①네 살 이상의 남녀 아동은 누구든 부모의 동의가 있으면 받아들일 수 있다.
②부모는 아동들에 대한 모든 통제를 양도해야 한다.
③전 과정의 공부가 끝나기 전에는 아동들은 어떤 이유에서도 부모를 방문할 수 없다.
④학생들은 감독이 준수해야 하는 모든 서약을 준수하도록 배울 것이다.
⑤그들은 종교, 농업, 수직기에 의한 베 짜기와 문자에 대해 배울 것이다.
⑥문자교육은 학생들 자신의 언어로 진행될 것이고, 역사‧지리‧산술‧대수‧기하‧경제 등을
포함할 것이고, 산스크리트와 힌디 그리고 적어도 드라비다어 중에 하나는 필수과목이 될 것이다.
⑦영어는 제2외국어로서 배울 것이다.
⑧우르드, 벵골리, 타밀, 떼루구, 데반나가리와 구자라트 문자는 모두가 배울 것이다.
⑨감독들은 전 과정이 10년에 끝날 것이라고 믿는다. 성년에 이르게 되면, 학생들은 서약하기와 아슈람을 떠나기 중에서 양자택일하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이 기회는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아슈람을 떠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⑩그들은 부모나 보호자로부터 아무 도움이 필요 없을 나이에 이런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⑪그들이 아슈람을 나갈 때 그들의 삶의 유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아무 공포도 느끼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강건하게 되도록, 첫 순간부터 모든 노력이 경주될 것이다.
⑫성인 역시 학생으로 수용될 수 있다.
⑬규칙상 모두가 가장 간단한 옷과 일종의 제복을 입게 될 것이다.
⑭음식은 간단한 것이다. 칠리는 완전히 배제될 것이고, 소금‧후추‧심황18)을 제외하고는 어떤 양념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우유, 버터기름, 다른 우유 제품들은 독신 생활에 방해가 되는데, 우유는 흔히 결핵의 원인이 되고 육류와 같은 자극적인 성질이 있으므로, 그것들을 사용한다고 해도 아주 적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식사는 하루 세 차례 제공될 것이고 마른 과일이나 신선한 과일이 충분히 포함할 것이다. 본 아슈람의 모든 거주자들은 위생의 일반 원리에 대해서도 교육받을 것이다.
⑮본 아슈람은 어떤 공휴일도 지키지 않을 것이지만, 매주 하루 반은 일상적인 일이 변경될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 사적인 일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16매년 3개월, 건강이 허락하는 자들은 도보여행, 주로 인도 내부의 도보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7학생이나 초심자에게는 월 교육비를 물릴 수 없다. 부모 또는 구성원 자신들이 아슈람의 비용에 대해 그들의 능력 범위 내에서 기부할 것이다.
본 규약은 학생에 대해 규정한 다음, 기타 사항으로 아슈람 감독 장의 권리와 아슈람 소요경비의 조달방식을 논하고 있는데 주로 아슈람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주는 기부금에 의존하도록 되어 있다.
다음에는 일과표를 정해 두고 있다.
‧아슈람의 모든 사람들은 4시에 기상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첫 종소리는 4시에 울린다.
‧몸이 불편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4시 30분까지 기상하는 것이 모두의 의무이다. 전원이 5시 까지 목욕을 마쳐야 한다.
‧5시~5시 30분 : 기도와 성전(聖典)읽기.
‧5시 30~7시 : 바나나와 같은 과일로 아침식사.
‧7시~8시 30분 : 육체노동. 이것은 물 긷기. 곡식 빻기, 청소, 베 짜기, 취사 등을 포함한다.
‧8시 30분~10시 : 학교 수업.
‧10시~12시 : 식사와 식기 세척. 식사는 주 5일은 달(dal),19) 쌀, 채소, 로뜨리 빵으로 이뤄 져 있고, 주 2일 동안은 로뜨리 빵과 과일로 한다.
‧12시~3시 : 학교 수업.
‧3시~5시 : 노동, 오전과 동일.
‧5시~6시 : 식사와 식기 세척, 식사는 오전과 거의 동일.
6시 30분~7시 : 기도, 아침과 동일.
‧7시~9시 : 공부, 방문객 만나기 등.
9시전에 모든 아동들은 자러 가야 한다. 10시에 소등한다.
학교 수업의 과목으로 현재는 산스크리트‧구자라트어‧타밀어‧힌디어‧산술이 포함된다. 역사와 지리 공부는 언어 공부 안에 포함되어 있다.
아슈람은 유급(有給)의 선생이나 하인을 고용하지 않는다.
이상은 「사탸그라하 아슈람 규약」의 초안을 자세히 살펴본 것이다. 간디가 이 초안을 회람했을 때 아슈람에는 모두 35인의 거주자가 있었다고 했다. 그 중 네 사람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선생은 5인이고 교수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인도의 여러 지역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구자라트와 카티아와르 출신이 제일 많았다.
위의 규약은 엄격하며 상세하다. 간디는 감독에게는 특히 엄격했다. 그들은 아슈람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정치 변혁을 위한 정예분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나라에 대한 봉사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진리와 비폭력을 수행하기도 어려운 법이다.
함석헌은 상당 기간 잡지운동은 했지만 간디식의 아슈람과 같은 것을 운영했다는 기록은 없다. 간디에게 아슈람 운영이 가능했고, 함석헌에게 불가능했던 것은 인도 종교 전통의 깊이, 우리 종교 전통의 척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함석헌은 대신 성경모임, 노자모임, 장자모임, 등을, 유대와 일치에 있어서 간디의 아슈람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 진리와 비폭력을 훈련할 수 있는 장(場)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다. 36-34
V.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자기책임, 겸손과 진실 추구
씨은 생각해야 한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생각의 결과는 무엇인가? 참 씨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씨 8조목과 공약4장은 씨의 자격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자격은 생각을 통해서만 갖춰지는 것이기도 하다. 함석헌은 「마하트마 간디」에서 간디가 마하트마에까지 올라가게 된 원동력을 “생각함”에서 찾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간디는 어려서부터 끝 날까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남이 못하는 놀라운 활동을 했다 해서 그저 쉽게 행동의 사람이라고만 해서는 안 된다. 생각은 없이 하는 행동은 껍데기의 행동이요, 속고 속이는 행동이요, 남을 죽이고 저도 망하는 행동이다. 이 세상은 행동이 부족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부족함으로 망하는 것이다. 간디의 이루어 놓은 일만보고 욕심을 내고 스스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럴 뿐 아니라 매양 사탸그라하는 과학이라고 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큰 영향력을 대중 위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그들을 기분에 도취시키거나 탈선시킨 일이 없다. 이 점은 크게 주의할 만한 점이다. 그야말로 씨을 깨워서 올라가게 하는 참 지도자였지, 역대의 많은 지도자들이 했던 것같이 씨을 우롱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알짬은 도덕이라고 늘 강조했다....... 그를 몰아 총알에 쓰러지는 순간까지 지칠 줄을 모르고 그저 올라만 가게 한 것은 씨에 대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간디는 자기와 씨의 구별이 없다. 자기가 곧 씨이 돼서 하는 것이다.20)
생각의 가장 중요한 결과 중의 하나는 우리 민족이 당한 역사적인 고난에 대해서는 우리민족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공동 책임의식이다. 모든 역사적 불행은 모두 내 탓이고, 우리 탓이다.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 6‧25의 원인에 대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6‧25의 직접 원인은 38선을 그어놓은 데 있고, 선을 그은 자들은 미국과 소련이다.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가 바로 우리다. 그렇다면 미국과 소련의 잘못인가? 아니다. 잘못은 그 싸움판에 등을 내놓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왜 등을 내놓았든가? 왜 남의 미끼가 됐던가? 거기는 우리 속에서 찾을 까닭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역사적 현실은 자신이 택한 것이다. 쉬운 말로 만만한데 말뚝이지, 만만치 않다면 아무 놈도 말뚝을 내 등에 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른바 약소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진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이 원인 아닌가? 그렇다면 미운 것은 미국도 소련도 아니며, 일본도 아니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왜 남의 식민지가 됐던가? 19세기에 남들은 다 근대식의 민주국가를 완성하는데 우리만이 그것을 못했다. 왜 못했나?...... 원인은 여러 말 할 것 없이 서민, 곧 백성이란 것이, 이 씨이 힘 있게 자라지 못했기 때문 아닌가? . . 민족주의의 물결이 세계를 뒤덮고 일어날 때 우리만이 그것을 타지 못하고 떨어져 민족 전체가 남의 종이 됐던 것은, 우리나라 씨이 양반이라는 이리떼보다 더한 짜먹는 놈들의 등쌀에 여지없이 파괴를 당하였기 때문이다.
민족국가 시대에 제 노릇을 못하고 남의 종이 됐기 때문에 그 다음 시대에도 다른데 종으로 팔리는 수밖에 없었다. 잘못은 애당초 전주 이씨에서 시작이 됐다....... 이조 500년에 이 나라는 결딴이 나고 말았다....... 6‧25동란 때 . . 놓치지 못한 것은 당파싸움, 오늘날까지도 그것인데 당초에 그 시작은 전주 이 씨네의 정치에 있다.21)
“모든 역사적 현실은 자신이 택한 것,” 이 결론에 이르자는 것이 생각이다. 함석헌은 6‧25전쟁의 속 원인은 약소민족이 된 것에, 전주 이씨 네의 당파싸움과 이성계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또 거슬러 올라가서 고려 김부식이 묘청의 혁명 운동을 꺽어 버린 날에, 김춘추와 김유신이 당나라에 불티나듯 드나들던 날에 잘못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그는 마침내 민족 성격에서 잘못의 까닭을 찾고 있다.
6‧25 싸움이라는 역사적 현실에 서서 지나온 것을 내다볼 때 그것은 역사 처음에서 부터, 민족 성격에서부터, 내다뵈는 것임을 알 수 있고 돌아서서 앞을 볼 때 “아, 그것은 이렇게 되잔 것이다.” 하는 것이 보여 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를 역사적 현실에서 건진다.22)
과거를 향해서는 민족의 성격에까지, 미래를 향해서는 우리의 당위의 모습을 볼 때 비로소 제대로 생각한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역사적 현실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함석헌은 다음 대목에서 당파싸움으로 세월을 보낸 이조 500년을 혹독하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결코 식민사관의 주장자는 아니지만, 당파싸움의 심리를 이해하는 것이 이씨조선 역사 이해의 요체로 보고 있다.
5천년 역사의 내리밀림이 이조 500년인데 그것은 그저 당파싸움으로 그쳤다. 아무도 이 당파싸움의 심리를 모르고는 우리나라 역사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500년의 참혹한 고난은 이 한 점에 몰린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 되는데 있다. 민족으로 당하는 모든 고난, 그 원인이 우리 잘못에 있든 남의 약점에 있든 그 뜻은 작은 생각 버리고 크게 하나(大同)돼봐라 하는 하나님의 교훈으로 역사의 명령으로 알아야만 우리는 역사적 민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 되지 못하는 원인을 찾으면 독립하지 못하는 데, 제 노릇하지 못하는데 있다. 하나 됨은 남의 인격을 존중해서만 될 수 있는 일인데 남의 인격을 아는 것은 내가 인간적으로 서고야 될 일이다. . . . 그러나 또 다시 독립정신은 어디서 나오나? 깊은 인생관, 높은 세계관 없이는 될 수 없다. 그럼 그것은 어디서 나오나? 위대한 종교 아니고는 될 수 없다. 종교란 다른 것 아니요, 뜻을 찾음이다. 현상의 세계를 뚫음이다. 절대에 대듦이다. 하나님과 맞섬이다. 하나님이 되잠이다. 하나를 함이다. . . 이것이 맨 처음이요, 이것이 맨 끝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따져 올라가면 여기 이르고 만다.23)
함석헌은 당파싸움이 이조 500년 역사를 이해하는 데 요체라고 하면서도, 그 당파싸움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교훈 즉 하나 되라는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가 고난의 역사가 된 것은, 민족의 성격에 통일정신, 독립정신, 신앙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위대한 종교의 부재가 그 원인이다.
19세기 남들은 다 완성한 근대식의 민주국가를 완성하지 못한 것, 민족주의 국가 시대에 일본의 종이 된 것은 누구 탓이냐? 일본 탓이냐, 러시아 탓이냐? 아니다. 그 일차적 책임은 우리 민족의 성격 탓이다. 당시 일본 수상 카쓰라와 미 국무장관 태프트 사이의 밀약(1905)으로, 미국이 필리핀에 대해, 일본이 조선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상호 인정하기로 했다고 해도, 근대적 민주국가를 완성하지 못한 것은 애당초 우리 탓이다.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로 함석헌은 이리떼보다 못한 양반 놈들이 씨을 파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24)
이와 같은 자기 책임론의 역사관이 옳다면, 우리 역사 기술에서 ‘일제의 강점기’라는 구절은 일종의 역사왜곡이다. 일제 통치에 ‘강점’의 성격은 물론 있었다. 하지만 ‘강점’이라는 말은 ‘일제’를 가해자로, 우리를 순전히 ‘피해자’로만 규정함으로써, 강점당하도록 우리가 약소민족이 된 일에 대한 책임의식은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생산을 맡아야 하는 서민계급을 길러내지 못한 우리나라의 정치업자들,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중산층이란 것을 살려두지 못하여 역사적 변동에 적응하지 못하게 한 “우리” 양반 놈들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 추궁이 빠져있다.25) 따라서 “모든 역사적 현실은 자신이 택한 것“ 이 명제를 인정하면서 과거사에 대해 일본에 책임 추궁할 것이 있으면 추궁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우리의 비판이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씨이 감당해야 할 최초의 의무는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 대해 우리가 책임지는 일이다. 스스로 역사의 주체라고 선언하는 씨에게 자기 책임론 또는 공동 책임론은 당연하다. 오해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한 시점에서 특정인의 특정 행위에 대해 눈감아 주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알아야 하지만 그런 행위를 가능케 한 ‘우리 전체’에게도 책임을 지우자는 말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우리 역사가 후퇴하는 이유를 당파싸움, 대동(大同)정신의 결핍, 독립하지 못한 점, 남의 인격을 존중하지 못한 점, 결국 “‘하나’를 하자”는 위대한 종교의 결핍에서 찾았던 것이다.
* ‘일제의 강점기’라는 구절은 일종의 역사왜곡이라는 견해는 역사적 현실에 대해 우리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데는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이글을 옮긴 나 자신의 견해로는 일차적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만 아무리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나 제국주의가 팽배하고 있던 상황이라 할지라도 일제가 침략하고 지배한 엄연한 사실을 ‘강점기’라고 표현한 것이 역사왜곡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다고 본다. - 옮긴이(오철근)
역사적 현실에 대해 궁극적으로는 국민 전체가 책임져야 한다는 국민 공동책임론은 정치형태란 결국 대다수 국민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간디의 주장과도 상통한다. 간디는 정치형태란 평균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힘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평균적 개인이 가진 혼의 힘(average individual`s soul-force)은 어떤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정치 형태는 영ㅈ억인 힘의 구체적 표현일 따름입니다. 나는 평균적 개인이 가진 영혼의 힘은 정부의 정치 형태와 분명히 구별되고 동떨어진 채 존재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민족은 결국 그 민족에게 마땅한 정부를 갖게 된다고 믿습니다.26)
평균적 개인 곧 일반 국민이 가지고 있는 혼의 힘이 그 나라의 정치 형태를 결정한다는 간디의 말, 그리고 역사적 현실은 우리자신이 택한 것이라는 함석헌의 말, 이 둘은 같은 취지로 이해랄 수 있다. 우리 역사가 목격한 갖가지 부당한 형태의 정치, 곧 이 씨 왕조의 양반 중심의 정치, 식민지 통치, 그리고 해방 이후 남한의 독재와 군부정치, 북한의 공포정치까지 포함하여, 이 모든 정치 형태는 일반 국민이 가지고 있는 혼의 힘의 축약적‧구체적 표현이다.
역사반성이든 역사왜곡에 대한 비판이든 반성과 비판이 특정인이나 남의 나라를 주목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부족하다. 보통사람들의 혼의 힘을 키워나가는 방향에서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찾아야 한다면, 정치 형태의 원인도 결국 보통사람의 의식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그래서 공동책임론이 필요하다.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 대해 우리 전체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역사반성은 또 다른 유형의 당파싸움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리고 씨 8조목을 보면 씨의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악이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남‧북한의 정치 형태의 도덕성을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도 평균적 개인이 가진 혼의 힘을 양성할 수 있는지, 그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1) 함석헌, 함석헌 기념사업회 엮음,끝나지 않은 강연 (서울: 삼인, 2001), 107면 이하 참조
2) 「현대사의 조명탄 간디」 함석헌 전집 , 7권 40면.
3) 간디, 이예르 편, 허우성 역 문명‧정치‧종교 (상), 460면.
4) 간디, 이예르 편, 허우성 역 문명‧정치‧종교 (하), 704-5면.
5) 간디, 이예르 편, 허우성 역 진리와 비폭력 (상) (2004, 소명출판), 381면.
6) 간디, 이예르 편, 허우성 역 진리와 비폭력 (하), 643면.
7) 인도의 희생은 동료 힌두교도들도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간디의 이런 태도는 극우파 힌두교도에 의한 암살과 무관하지 않다.
8) 간디, 이예르 편, 허우성 역 진리와 비폭력 (상), 71-72면.
9) 당시 로이드 조지LLoyd Geroge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등의 정치가들은 오히려 인도 청년의 순수한 애국심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조길태 인도사 (서울, 민음사,1994), 460면 참조.
10) 간디, 문명정치종교(상), 321면. 간디는 당그라의 행위는 ‘마취 생태’에서 행해진 것이고, 당그라보다 그 배후에 그를 세뇌시킨 집단에 더 책임이 무겁다고 했다. 만일 그 암살행위의 결과로 영국이 인도를 떠났다고 해도 대신 누가 인도를 통치할 것인가, 영국인은 영국인이기 때문에 악하고 인도인은 인도인의 거죽을 하고 있다고 해서 선 한가 반문하고, 인도는 살인자들의 총치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 통치 아래에서는 인도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탕진되고 말 것이라고도 했다.
11) 함석헌 전집 , 7권 25-33면.
12)같은 책, 31면.
13) 같은 책, 32면.
14) 간디, 이예르 편, 허우성 역 진리와 비폭력 (하), 662면 이하 참조.
15)같은 책, 662면.
16) 사회를 각기 고유한 기능을 지닌 네 카스트로 조직하는 일과 인생을 네 단계로 나누는 일.
17) 생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사람으로 세상을 포기한 자들.
18) 인도 산의 생강, 카레 가루의 원료.
19) 렌즈콩과 향료를 사용한 인도 요리.
21) 함석헌 전집, 14권 110-111면.
22) 같은책, 114면.
23) 함석헌 전집 ,14권 114-115면.
24) 같은 책, 111면.
25) 같은 책, 111면. 참조.
26) 간디, 이예르 편, 허우성 역 문명‧정치‧종교 (상), 72면.
간디와 함석헌-3
씨알은 대중에 영합해서는 안 되고, 겸손해야 하며,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이란 붉은 함성에 수시로 파묻히는 우리의 현실을 고려하며 두세 가지 진실에 주목하고 싶다. 간디는 대중을 기분에 도취시키거나 탈선시킨 일이 없다. 진리와 비폭력에 어긋난다면 아무리 숫자가 많은 대중이라도 거기에 영합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나운 네티즌의 성화와 분노가 있다고 해도, 그 속에 참이나 비폭력이 없다면, 생각하는 씨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올바르게 생각한 것이다.
우리가 대-한민국 몇 번 외치고 나서 이제 집단적으로 오만해진 것 같다. 민주 좀 하고, 돈 좀 벌고, 축구 좀 했다고 해서 잘난 백성으로 여기는 사람이 꽤 많아 졌다. 우리 역사에 3‧1운동,4‧19혁명 그리고 7‧80년대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고 해서 우리가 미국이나 일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런 나라에도 그 나라 건설에 왜 자랑스러운 대목이 없었겠는가? 냉정하게 보자면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도 우리 역사에 자랑만은 아니다. 그것들이 꼭 필요했을 만큼 가혹한 정치에 빠져 있었음의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3‧1운동의 이면에는 19세기 제국주의 시절 우리가 국민국가조차 성립시키지 못한 무능함이 있었고, 4‧19혁명의 이면에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개선이나 개혁이 도저히 불가능할 만큼 이승만 독재와 부정‧부패의 뿌리가 깊었다는 점을 시인해야 하고, 7‧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자랑하기 전에 권력욕과 무력에 미친 군인들과 그들에 동조하거나 그들의 행위를 묵인했던 수많은 관료나 민간인의 존재를 인정해야한다. 따라서 3‧1운동, 4‧19혁명 그리고 7‧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이면에는 수치의 역사가 있다. 3‧1운동의 존재가 경술년 국치의 역사적 현실을 없앨 수는 없다. 그래서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1958)에서 3‧1운동이 있은 뒤에 거의 40년 뒤에도 “어머니가 벌거벗기고 쫓겨나셨던 이 8월29일, 이 글을 쓰자니 만 가지 생각에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다 못합니다.”로 끝을 맺고 있다.1) 그래서 3‧1운동,4‧19의거의 존재가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증거는 결코 아니다.
제대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보고 들어야 한다. 진실이야 말로 진리 추구의 대상이자 동시에 생각의 자료이기 때문이다.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라도 진실을 감추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진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짓말을 잘한다는 사실이다. 김승규 전 법무장관은 2005년 5월 말게 어느 모임 가연에서 우리나라의 대표 범죄는 위증‧무고‧사기 이 세 가지라고 했다. 인구 비를 고려하지 않은 단순비교로도 2003년 우리나라의 위증은 일본의 16배, 무고는 39배, 사기는 26배가 많았다는 것이다. 위증‧무고‧사기의 공통분모는 ‘거짓말’이다. 일본의 인구가 우리의 3배 가까이 되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의 거짓말은 일본의 수십 배에 해당된다. 김 전장관은 검찰 업무의 70%가 이 세 가지 범죄를 처리하는 데 쓰인다고 했다. 국제적으로도 우리나라 대표 범죄가 ‘사기’라는 인식이 있다고 한다. 거짓말을 많이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적어도 이점에서는 도덕적으로 우월하지 못한 백성임을 말해 준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우리 사회 내부에 불신의 뿌리를 깊게 한다는 점이다.
이 시점, 곧 우리가 북핵 관련 6자회담 재개에 대해 온 언론이 흥분하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 진실 추구가 정말로 문제가 되는 곳은 바로 북한의 실상일 것이다. 이 진실은 한반도의 역사적 현실로 엄존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도 국제관계를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강철환의 수용소의 노래 (평양의 어항)2)는 이 논의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196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63년 북송된 재일 북송교포 가족으로서 조총련 교도지부 상공회 회장을 지냈던 할아버지가 민족반역죄로 국가 안전보위부에 끌려간 후 온 가족이 1977년 8월에 함경남도 요덕 군에 위치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다. 그의 나이 9세 때이다. 그곳에서 10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출소해 요덕 군에 거주하던 중 김정일을 비난하는 발언으로 국가안전보위부에 재수감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친구와 함께 탈북을 결심,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다. 6개월간의 탈북생활 끝에 1992년 8월 한국에 입국했다. 이 책은 북한 주민의 굶주림, 개인숭배, 공포정치, 언론의 자유 부재, 정치범의 강제수용, 연좌제, 강제노동, 고문, 부당한 가족 해체를 말하고 있고, 아동에 대한 굶주림, 구타와 학대를 담고 있다. 오늘날의 남한 사람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인권 유린이다. 이것이 폭정의 폭력이 아니라면 무엇이 폭력일까?
그런데 강철환은 인간쓰레기인가? 북한 주민이 겪고 있다는 폭정과 고통에 대한 그의 슬픈 고발, 눈물, 억울함, 그리고 절망은 모두 허위인가? 그의 노래가 진실이거나 진실에 가깝다면, 함석헌이 북한 정치를 ‘공포정치’로 규정한 이래 북한 정치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강철환의 묘사대로 북한 주민의 고통이 사실이라면, 북한 정치는 ‘손’이 ‘마음’을 거의 완전히 장악한 경우이며, 정치의 가혹이 그 극에 도달한 경우가 된다. 북한 당국이 보장받고 싶은 ‘체제’란 누구를 위한 체제인가? 그 체제 유지는 북한 주민 일반에게도 善인가? 북한의 주권(sovereignty)은 침공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상당히 옳은 말이다. 하지만 그 주권이 북한 주민 일반이 누려야할 기본적인 인권을 지켜주지 못하는 데도 그 주권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씨 8조목이 금지하는 권력숭배나 우상숭배가 아닐까? 전태일의 죽음을 가슴으로 받아 안았던 함석헌은 저 슬픈 노래를 어떤 마음으로 들을까? 폭정의 가혹과 잔인성을 신랄하게 비판했을까? 지금 강철환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사항인가? 그것을 ‘금기사항’으로 만드는 것은 흥분한, 그래서 붉디붉은 민족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왜 이런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가?
간디의 진리 서약은 민족의 善을 위해서라도 허위, 속임수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원리상 진리만이 선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재개하려는 6자회담에 비춰지는 하얀 조명은 누구(또는 무엇)를 비쳐주고 누구(또는 무엇)를 숨기는가? 강철환의 체험수기가 허위라면 그것은 한낮에 아침 이슬 증발하듯 사라지고 말 것이다. 반대로 진실이라면 그 진실은 그 자체로 인과의 힘을 지닌 만큼 미래 언젠가 (아니면 곧) 반드시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강철환은 문학자는 아니지만, 그의 책이 솔제니친(1918-)의 수용소 군도 (1973)를 상기(想起)시킨다. 여기서 상기되는 기억이 잘못일까? 아니면 북한의 인권상황을 외면하는 사람들의 기억,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이미 제한되어 있는 기억이 잘못일까?
함석헌과 간디는 행동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세상은 행동의 부족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과잉으로 망한다고 보았다. 행동이 부족하면 세상이 진보를 이루지 못하지만 망하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도 제대로 생각하는 데서 온다. 제대로 생각했다면 씨 8조목과 공약4장, 그래서 참과 비폭력을 잘 지킬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잘 지키지 못한다면 제대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생각함에는 훈련이 필수적이다. 교과서 왜곡, 역사반성, 민족주의 주장이든 뭐든 그 속에 남에 대한 증오가 들어 있다면 이는 씨 8조목 가운데 조목 2(세계의 씨의 하나 됨)와 8(비폭력)의 직접적 위반이다. 이는 생각의 결과가 아니다. 만일 씨의 소리와 유관 단체가 공개적으로 어떤 정파를 지지하거나 관련을 맺는다면 이는 조목 1(스스로 함), 4(정치색에서의 독립성 유지)와 5(권력 숭배 반대)의 위반이 아닐까? 이는 정치적 행위의 금지를 명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분열‧대립시키는 정치의 손에 잡히면 일치를 목표로 삼는 종교의 심성을 잃기가 쉽다. 45-44
Ⅵ. 붉은색 유감: 붉은 함성은 씨의 소리가 아니다.
사랑과 자기희생, 그리고 비폭력은 개인차원의 서약 준수를 엄격히 요구한다. 의무 수행보다 권리 주장에 재빠른 민중과 시민단체는 씨 8조목, 공약4장, 그리고 간디의 아슈람규약에 어느 정도 공감하며 따를 수 있을까? 우리 가운데 누가 정치와 경제 분야의 변혁을 위해 감독의 규약을 지킬 수 있는가? 위의 서약은 거의 무시하면서도 씨의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제 속에 씨을 깨우지 못한 자는 차라리 침묵해야 세상이 더 잘 돌아갈 것이 아닌가?
붉은 색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미셀 파스투로 Michel Pastoureau는 색의 상징성과 사회적 의미를 다룬 책에서 맨 먼저 빨강의 상징적인 의미를 논하고 있다. 빨강은 거의 언제나 피와 불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기독교 문화에서 피의 빨강은 생명을 부여하고, 더러움을 정화시키며, 영혼을 성스럽게 하는 빨강이다. 반대로 나뿐 피의 빨강은 불순, 폭력, 죄의 상징이다. 분노, 더러움, 죽음의 빨강이다. 적어도 서양에서는 빨강에는 성령의 빨강, 태양처럼 휘황찬란함, 따뜻함, 비춤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반대로 악마의 빨강, 즉 불태우고 상처주고 파괴하는 지옥의 불꽃같은 빨강도 있다고 한다.3)
필자는 거룩함과 생명의 빨강이 아니라 대립과 분노, 폭력의 빨강을 생각하고 싶다. 전자는 현재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 대신, 후자는 2002년을 전후로 하여 우리 눈과 귀를 사로잡아, 우리 민중을 때때로 집단 최면에까지 걸리게 하는, 붉은 함성의 붉음이기 때문이다. 이 붉음은 열정, 애국, 집단의 일치를 구가하고, 우리의 승리와 적의 패배를 염원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대립의 붉은 열정이 긍정적으로 기여한 적도 분명히 있었다. 이민족의 침략,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것도 주로 이런 붉은 열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일제와 (적어도 남쪽에서는) 독재는 사라졌고, 세상은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하나의 지구촌이 되었다. 이제 나와 너를 첨예하게 나누는 예전의 붉은 열정만으로는 한없이 부족하다. 붉은 민족주의가 최고선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인간 마음의 저 깊은 고에 나와 너를 분열시키는 붉음 너머에 전체를 희구하는 종교심이 있고, 그것을 망각하면 참 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붉음은 동지와 적을 선명하게 나누는 자타분별 의식-이분법적 분열과 대립-을 먹고 살고 있으므로 정치색이다. 그런데 자타분별은 이기적이고 본능적이다. 이 분별의 열정은 때때로 너무도 뜨거워 ‘우리’와 같은 편에 서면 애국자로 불리고 다른 편에 서면 매국노로 간단히 매도된다. 붉은 함성은 우리 편에 대해 열정적인 애착, 다른 편에 대해서는 편협성, 과격성, 배타성, 폐쇄성, 때로는 공격성까지 갖고 있으므로, 이 함성에 구가 멀면 ‘너’의 소리도 ‘전체’의 소리도 듣기 힘들다. 심지어 우리가 이기고 싶은 적의 정체도 파악하기 어렵다.
이 땅의 붉은 함성과 붉은 열기는 1960년대 중국에서 일어났던 문화대혁명을 상기시킨다. 그 혁명의 주도자인 마오쩌둥은 “모든 지혜는 대중에게서 나온다. 나는 늘 지식인들의 지성이 가장 뒤처져 있다”고 말하고 “다수가 옳고 소수가 그르다는 믿음“을 굳게 지니고 있었든 것 같다. 4) 그는 젊은이 의 열기를 한 없이 부추기고 그 열기 속에서 정적을 처단하고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려고 했다. 대중에 의해 지주, 깡패, 우익분자, 자본가로 낙인찍힌 사람은 누구나 집 밖에 나갈 때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명패를 패용해야 했다. 모든 방에는 최소한 세 사람이 함께 거주해야 했고, 남은 공간이 있으면 무조건 국가에서 사용하는 사무실로 내주어야 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비판했고, 학생들은 교사들을 비판했다. 문화대혁명에서 무차별적 폭력으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정확히 셀 수조차 없지만 수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살해된 사람들도 있었고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 불구가 되거나 평생토록 치유되지 못한 정신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혁명의 가담자들은 ‘혁명의 열정’을 과시함으로써 조상이 물려준 업보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그 결과는 자기부모의 집을 때려 부순다거나, 자신을 가르친 교사를 폭행한다든가, 오지로 가서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대중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등으로 나타났다.5) 학생들은 군복에 가까운 제복을 입고 붉은 완장을 두르고서 마오쩌둥 주석을 수호하는 홍위병이라고 자처했다. 이들은 마오쩌둥이 텐안면의 연단에 나타나면 그의 교시가 담긴 붉은 깃발과 붉은 책자를 들고 열광했다. 그는 그들의 마음에 ‘불타는 붉은 태양’이 되었다.
우리의 붉은 열정은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집을 때려 부수지도 않으며, 자본가에 대해 신체적 위해를 가할 정도도 아니다. 우리가 추앙하는 붉은 태양 같은 존재도 없다. 하지만 단결과 일치를 과시하는 통일된 복장과 구호, ‘다수의 진리성’에 대한 믿음, 반지성주의적 움직임, 폭력적인 성향은 중국 홍위병의 붉은 열정을 닮았다. 지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는 행위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를 생각하는 능력이라면 반지성은 눈앞의 결과밖에 보지 못한다. 따라서 붉은 함성은 소리는 커도 대개 단견이어서 먼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다.
2005년 현재에도 예전처럼 자타분별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 빨강이 가장 뜨겁게 빨게 보이는 곳은 이민족이나 외국을 ‘적’으로 간주할 때이다. 흥분한 민족주의, 민족감정, 국민정서는 상대국에 대해 사납고, 거칠고, 비합리적이기 쉽다. 무엇보다도 집단 기억-장구한 세월에 걸쳐 축적되어 온 집단 기억-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곳도 민족간, 국가간에서이다. 대중영합이 가장 쉽고, 냉정하기가 가장 어려운 곳도 바로 여기이다.
한‧일간의 축구 경기를 생각해봐라. 우리는 무조건 이겨야 하고 상대는 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우리 편에 대해서는 잘 하기를 바라고 상대는 못하기를 바란다. 우리 편의 잘못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상대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하다. 시합에서 상대팀의 불행은 곧 우리 팀의 행복이다. 상대팀 선수가 퇴장이라도 당한다면 그건 우리의 경사다. 일방적인 응원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여기므로, 붉은 물결에는 연민, 사랑과 자기희생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붉은 열정의 전염력은 대단히 강하다. 경기장에서 시작된 열기는 길거리로 넘쳐 나와 삽시간에 온 땅덩이를 뒤덮으면서 정치‧외교‧사회의 모든 분야, 학교생활, 개인적인 관계, 심지어 과학적인 발견까지 뜨겁게 달구고 있다. 붉은 집단심리에 빠진 자는 무리지어 다니며 마녀 사냥하듯 공격대상을 찾아 헤맨다. 공격할 만한 대상이 포착되면 그것을 적으로 간주하고 집단 전체가 한 떼가 되어 잔인하게 공격한다. 이런 패거리 문화는 현대판 당파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현대의 집단은 과거의 당파와 비교하면 쉽게 모이고 쉽게 흩어진다는 점에서, 곧 변덕이 심하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사이버폭력, 부도덕하고 비겁한 인민재판(‘개똥녀’ 사례), 그리고 초등학교에까지 만연한 사나움, 이 모든 것들이 붉은 열정의 자식들이다.
붉음의 전염에는 TV나 인터넷 매체와 같은 매스 미디어의 발전과 확장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래서 붉음의 전염은 현대문명 성격 자체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매체의 발달과 확장은 시각과 청각의 확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각과 청각이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면 우리는 쉽게 흥분하여 차분한 생각은 어렵게 된다. 결과적으로 붉고 흥분된 마음은 인과 관계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건이나 사태에 대해서도 감정적으로 판단하여 쉽게 오류에 빠진다. 3, 40년 전 우리 사회에 언론의 자유가 있기 전에는 많은 것들이 은폐되어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기가 어려웠다면, 이제는 그 반대로 오히려 감각적인 자극이 너무 많아서 생각의 능력이 크게 퇴화한 것으로 보인다. 과도한 시청각의 자극과 흥분, 여기에서 오는 조급함과 사나움은 현대문명과 그 매스 미디어의 성격 자체에서 오는 것이므로 극복하기가 아주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은 고사하고 책조차 읽으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집단의 색깔, 붉음에 물들면 군중에 함몰되어 개성, 주체성, 독립성을 잃게 되고, 붉은 시청각 매체에 종속되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되며, 우리 속의 을 깨울 수 없게 된다. 붉음에 감염되면 대중영향주의에 빠지고, 정치가들의 노리개가 될 뿐이다.
붉음의 뿌리는 아주 깊고 오래다
붉음은 본능적이며 이기적인 자타분별을 먹고 산다고 했는데 그 뿌리는 아주 깊고 오래여서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중생의 無明과 맞닿아 있고, 기독교식으로 말한다면 원죄와 유사하다. 석가모니도 신라의 원효(元曉 617-686)도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보았다. 불교는 깨닫지 못한 중생의 행위에 욕망과 분노[欲瞋 곧 이기성과 공격성]이 잔뜩 배어 있고, 이것이야 말로 인간 사회에 있어서 온갖 고통과 불행의 원인으로 본다.
이기성과 공격성은 한 개인과 집단에서 사라지기가 아주 어렵다. 불교심리학에 따르면 이기성과 공격성은 주관과 객관 분리 이후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분리 이전 또는 그 배후에 이미 원초적 성향-객관을 인지하고 전유하려는 원초적 성향-으로 존재한다.6) 중생이 행하는 최초의 분별[智相]은 애‧불‧애(愛‧不‧愛)의 분별인데 이를 원효는 ‘아진(我塵)분별’7)아라고도 했다. 我는 자아, 진(塵)은 주로 대상을 가리키는데, 곧 나와 너의 분별이다. 나와 너의 분별을 애‧불 애와 연결하면, 나는 원래 사랑의 대상이고 너는 처음부터 불 애의 대상이다.
아진 분별은 아치‧아견‧아애‧아만‧(我癡我見我愛我慢)의 네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분별의 핵심에 자기사랑[我愛]와 아만我慢]이 있고, 자아에 대한 판단은 모두 아견이며, 아진분별은 결국 자아에 대한 무지[我癡]에서 온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대상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말할 때는 이미 아진분별이 작동하고 난 다음이다. 우리가 중생으로 남아 있는 한, 대상에 대한 모든 견해는 아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아견은 거의 본성 수준까지 간 것이다.
분별을 먹고 사는 붉은 함성, 붉은 물결에는 깨달음은 없고 피아 대립의 정치만 있다. 제 속에 주어진 씨을 깨우지 않거나 씨을 자각한 사람들의 안내를 받지 못한다며 민중은 금방 우중(愚衆)이 된다. 제 속의 씨을 깨우자면 붉은 함성이나 붉은 물결에 가담하지 말아야 하고, 붉은 열정을 식힐 수 있어야 한다. 함성은 가녀린 소리, 슬픈 소리,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대중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가 될 필요가 있다.
붉은 마음의 활동은 육의 몸짓이지 영의 활동은 아니다. 분열과 대립을 먹고 사는 붉은 마음은 거짓 마음이다. 씨 공약4장에, “네 마음 따로 내 마음 따로가 아닌 것이 참 마음입니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중생이 행하는 최초의 분별을 깨라고 하는 실천 강령이며, 원죄를 씻으라는 명령이다. 어떤 이슈에 대해서건 붉은 물결이 요동치면 그것은 정치이지 종교가 아니며, 힘의 드러냄이지 깨달음의 작용이 아니다. 일본의 패권주의의 뿌리를 뽑겠다는 대통령의 말은 그 속에 도덕이 있는 듯 보여도 정치적 구호, 그것도 아주 미숙한 정치적 구호이다.
파란 마음 하얀 마음
붉음이 분열과 대립 위에 성립하는 정치색 곧 힘의 색이며, 파랑이나 하양은 일치와 깨달음의 색이라고 해보자. 네 마음 따로 내 마음 따로가 아닌 참 마음, 곧 일치와 평화를 상징하는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 없다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도 일치와 평화를 배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학교와 가정에서 성급하고 사나운 아이들로 자라날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겉으로는 왕따 당하고 속으로는 생명이 자라지 못하고 말라 죽고 말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 다음 노래를 배운 적이 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여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거여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낮은 목소리로 한번 불러봐라. 2005년 4월 개학하는 일본 소학교(초등학교) 6학년 음악시간에 우리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 울려 퍼질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금년 초에 있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일본 교과서 전문 출판사 도쿄쇼세키(동경서적)가 올해 처음 발행한 새로운 음악(新しぃ音樂) 6학년 교과서 6면에 실린 것이다. ‘靑ぃ心 自ぃ心’(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라는 일본어 번역 가사 아래 한글 가사를 일본어 발음으로 실어 한글 버전으로 도 부른다. 이 교과서는 일본 전국 1200여개 소학교에서 사용된다.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은 첫 단원인 ’다같이 노래하면서 음악친구‘의 첫 곡이란다. 음악을 통해 여러 사람과 의사소통을 넓혀가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고 한다. 일본 음악 교과서에 우리 동요가 ’중심 교재 곡‘(필수 곡)으로 채택된 것도, 광복 이후에 작곡된 우리 동요가 일본 교과서에 수록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아리랑‘ ’고향의 봄‘ ’반달‘ 등 우리 민요와 동요가 수록된 적이 있었지만 모두 참조 곡(선택 곡)이어서 교사가 마음먹기에 따라 가르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은 반드시 배워야하는 정규곡이어서 수업시간은 물론 교내외 행사, 국제교류 행사 등에서 두루 불리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회사가 작곡가 한용희(74, 한국동요음악회 회장)를 초청했고 그는 “1월말 도쿄 서적 본사를 방문했을 때 직원들이 로비에 나와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을 합창해 감격했다”고 한다.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은 어린아이들이 마음에 오래오래 간직하고 있어야 할 평화와 순진무구를 노래하고 있다. 열정, 애국, 대립의 색깔, 붉은 마음을 어린이에게 주입하려 해서는 안 된다. 혹 그들에게 이기적인 욕심에 앞서 애국심을 가르치더라도 그것이 마음 바탕에 있는 파란 마음과 하얀 마음을 가리게 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파랑과 하양으로 붉은 열정을 식혀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거칠고 사나운, 진짜 “붉은 악마”가 되고 말 것이다. 때문에 애국은 좀 나이 들어서 교육해도 늦지 않다. 아이들이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을 불러 순진함과 평화를 좀 오래 간직할 수 있다면 가장 크게 득보는 곳은 바로 우리나라일 것이다.
일본의 우익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2001년 역사교과서를 집필했지만 그 교과서는 10여개 학교에서 채택하여 채택 율 0.039%에 불과했다. 그 때 우리는 열정적으로 규탄했고, 2005년 그 책의 개정판이 나온다고 했을 때 우리의 정치인, 언론 그리고 지식인까지 포함하여 지독하게 뜨거운 열을 뿜었다. 우리가 보기에 별 볼일 없는 그런 역사책, 일본 국내에서도 별 볼일 없었던 역사책에 우리가 쏟은 정열이 너무 아깝다. 이제 그 교과서 개정판이 금년 채택 율이 10%를 넘어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악의 무리와는 비협조나 스와데시의 서약을 지켜야 한다는 간디의 충고를 받아들여 일본과 단교하거나 전면전을 벌려야 하나? 이길 자신이 없으므로 모두 테러리스트가 되어야 하나. 자결해야 하나?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어 버려 대-한민국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까봐 정말로 걱정이다. 그리고 그 채택 율의 제고(提高)와 한국이나 중국에서 세차게 불고 있는 민족주의 열풍 사이에 인과 관계가 전혀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애국적인 사안에는 처음부터 인과 관계를 고려할 필요조차 없는 것일까?
‘새역모’와 같은 우익 단체는 일본이 존속하는 한 존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익 단체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며, 한 나라의 우익단체의 함성은 다른 나라에서 우익이 내는 함성에 비례하여 커지고, 한나라의 우익이 펴는 애국 운동의 가장 좋은 자양분은 바로 이웃 나라우익이 하는 애국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적대적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 종교‧혼‧깨달음이 정치‧육체‧힘을 안에서 이기기 전에는, 아니면 최소한 전자가 후자를 좀 누그러뜨리기 전에는 적대적 공범자들의 출현과 준동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건 애국심은 붉다. 한국의 민족주의와 일본의 민족주의는 색깔이 같다. 초록이 동색(同色)이듯, 일본우익의 마음도 붉고, 그 우익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도 붉다. 남북한,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국가에 피, 일치, 분노, 폭력을 상징하는 붉은 색이 들어있음은 우연의 일치일까? 우리가 국가 유지에 국민의 피와 열정이 필수적 요소임을 알고 있고, 은연중에 다른 국가를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일까? 붉음에 쉽게 흥분하던 한국 언론은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 일본 음악교과서에 실린다는 사실을 보도할 때, 그 때 비로소 냉정을 찾더라. 55-55
결론
함석헌은 가고 우리는 남아 각자의 기억에 따라 그를 해석한다. 역사는 육(힘)과 영(깨달음)의 싸움으로 진행한다는 것, 그리고 결국 영이 육을 안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역사관의 요체다. 함석헌이 간디에게서 가장 존경했던 것은 조직적인 악에는 조직적인 사랑으로 대항하라는 권면, 그리고 그렇게 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이었다.
우리는 현재 심각한 이념적 갈등을 겪고 있다. 정치에서는 현 정부의 전 방위 개혁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경제에서는 세계화를 두고 소위 보수와 진보가 다투고 있고, 교육에서는 평준화 정책과 경쟁체제 도입이 격돌하고 있으며, 그리고 북한 문제에서는 민족공조를 최고 가치로 삼으려는 이구동성과 ‘폭정의 거점’이라는 성격 규정이 충돌하고 있다.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일단 붉은 색의 자만이나 도취에서 벗어나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고, 그 인식이 없다면 백년대계(百年大計)는커녕 5년소계에도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 시민 단체, 여당과 야당, 정부는 더 이상 체념하거나 팔자 타령하지 않는 대신, 비폭력과 겸손, 남을 인정하는 일에는 아주 미숙하다. 일부 네티즌은 익명 뒤에 숨어서 그 누구보다도 빨리 흥분하고, 화내고, 욕설에 가까운 말을 내뱉고 있다. 평등이나 정의, 역사 반성, 역사교과서 왜곡 비판 등 그것들이 아무리 고상한 도덕적 주장으로 보여도 상대국이나 상대방을 정치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면 그 주장은 손과 땅에 속하는 것이지 영이나 하늘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붉은 열정은 죽을 때까지 적을 찾아 헤매고 찾으면 싸운다. 피터지게 싸우다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역사의 종국이나 완성에 이르기까지 싸울 것이다. 이것이 내셔널리즘의 운명이기에 간디와 함석헌은 민족을 위하면서도 민족을 초월하여 인류 전체, 우주에까지 가려고 했던 것이다. 함석헌이 되돌아온다면 또 한번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칠 것이다.
생명의 목적은 씨을 깨우는 것이고 그 목적을 실현하려는 것이 생명 자체의 요청이며 씨을 깨우는 힘도 생명 안에 있다고 해도, 일정한 감관 훈련은 필수적이다. 씨이 눈과 귀에 주어지는 것만을 받아먹는 경우 듣고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며, 정치적 여론몰이꾼들의 밥이 되고, 결과적으로 정치적‧문화적 파퓰리즘이 창궐할 것이다.
현대문명이 물질적‧폭력적이라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역시 그러하다. 때문에 씨은 생각하기 위해, 그리고 비물질적‧비폭력적‧비정치적인 신령체를 살리기 위해 문명과 투쟁할 수밖에 없다. 그 첫걸음 역시 우리의 눈과 귀에 들려오는 물질적‧폭력적인 내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그렇게 자신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정치적인 기억을 변화시킬 수 있는 첫 걸음이기도 하다.
본능과 지성 모두를 기억에 포함시킨다면 기억은 아주 중층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다. 이 역사에는 개인 전기(傳記), 민족의 기억, 그리고 종으로서의 인류의 기억 전부가 포함된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적인 것을 초월하여 ‘신령체’로 변화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무오류의 순수 기억은 존재할 수 없다. 기억 아래의 기억 곧 하의식(下意識)의 기억이 욕망과 분노이고, 최초의 분별이 자타분별이기 때문에 기억은 정치적이라고 했다. 욕망과 분노는 무지에서 오지만 무지를 강화시키기도 한다. 무지란 바로 인과 법칙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그런데 욕망, 분노, 그리고 역사적‧정치적인 무지가 주는 한계성을 극복하는 데에 인간의 종교성이 있다.8)
우리 속의 씨이 깨어나자면 낮에는 활동해야 하고 밤에는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자아실련의 길이다. 우리는 밤에도 낮처럼 활동한다. 아니 밤이 아예 없어짐으로써 자아실현이라는 최고 덕목이 사라지고 말았다. 정치와 종교의 대결, 힘과 깨달음의 대결이 인간에 본능적이라는 함석헌의 말, 그리고 성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라는 간디의 말을 곱씹어 보지 않는다면 생각하는 씨이 될 수 없다.
의 「ㅇ」은 전체를 말한다. 나와 남의 분별을 넘어가 전체를 추구하지 않는 어떤 투쟁도 정치에 불과하다. 민족주의라고 해도 함석헌이나 간디의 민족주의 정도는 되어야 정치‧종교가 하나 되는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 붉은 함성에 귀먹고 붉은 물결에 눈멀면 안 된다. 붉음 하나만으로는 극소의 자아, 극대의 하늘, 그리고 생명 가운데 어느 것도 충족시킬 수 없다. 함석헌과 간디의 정치 행위의 배후에는 씨의 생명이 약동하고 있었다. 함석헌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진실을 외면하고, “조직적인 악에는 조직적인 사랑으로 대항하라”는 비폭력 강령을 신봉하지 않는다면, 계승되는 함석헌은 반쪽이 되고 말 것이다. 60
1) 함석헌 전집 , 14권 129면.
2) 개정판, (서울, 시대정신), 2005년.
3) 미셀 파스트로, 전창림 옮김 색의 비밀: 색의 상징성과 사회적 의미 (서울: 미술문화, 2003). 21-22면 참조.
5) 문화혁명에 대해 더 세세한 점에 대해서는 같은 책 223면 이하 참조할 것.
6) ‘원초’에는 시간으로 ‘최초’, 작용의 면에서 ‘가장 강력한’ 의 두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7) 初言智相者, 是第七識塵中之始. . . . 分別我塵, 故名智相. 「기신론소」 韓國佛敎全書 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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