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함석헌을 그렸다. | ||||||
[인터뷰] '함석헌 평전'을 쓴 이치석 | ||||||
함석헌 선생의 평전을 쓴 이치석 선생님을 만나봤다. 이치석 선생님은 70년대 말부터 교직에 몸담으며 당대의 여러 사건들을 직접 몸으로 겪었고, 눈으로 봐온 분이다. 우리나라 교육계와 교육 조직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이치석 선생님은 과거 ‘초등학교 명칭 개정 운동’에 앞장섰던 이력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교육과 사회의 문제를 국민교육과, 병영문화, 국가주의 등 국가권력이 개인을 옭죄는 데 있다고 생각하며, 지난 100년간 우리학교사를 지배한 국민교육의 문제를 다룬 책 ‘전쟁과 학교(문화관광부 추천 도서)’를 내기도 했다. 현재는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역사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프랑스 Tours 대학교 대학원과 Amiens 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사 연구로 각각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사진은 인터뷰이의 거부로 싣지 않기로 했다.) '씨알 함석헌 평전'과 관련해서 함석헌 평전을 내셨는데, 책이 조금 어렵다는 평도 있는 것 같다. 그 반대의 독후감도 들은 적이 있다. 원래 함석헌 선생님은 금강산의 만물상 같다고 한다. 책을 내기는 했지만 솔직히 나도 함석헌 선생님을 잘 모른다. 그냥 내가 읽은 함석헌을 한번 만용을 부려서 그려보았을 따름이다. 함석헌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나? 그 집필 계기를 알고 싶다. 집필 계기는 현재 독립기념관장으로 계신 김삼웅 선생님의 추천과 권유 덕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함석헌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은 없다. 청소년 시절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감명깊게 읽었다는 점과 20대 청년교사 시절에 명동 가톨릭 여학생관에서 강의하시던 <노자(老子)>와 <성경(聖經)>을 들었던 일이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함석헌 선생님은 자유당 때부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자들과 끊임없이 투쟁하신 모습인 것 같다. 사실 우리는 그의 투쟁을 내놓고 분단시대의 민주화운동을 말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부분은 그의 88년 전 생애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나 일상생활을 강조했던 삶에 대한 태도에서 본다면, 민주화운동은 하나의 파격일지 모른다. 나는 그 함석헌 선생님의 일상적 삶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아버지의 날카로운 양심과 어머니의 부드러운 마음, 그 ‘연한 순 날카로운 마음’을 바탕으로 남강 이승훈, 다석 유영모, 우찌무라 등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서 배우고 또 영원한 친구 김교신과 우정을 주고 받던 일이 어린시절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여섯 마디로 구성된 인간 함석헌의 아름다운 진실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 인생의 무대는 인류의 자기파괴를 자행한 양차대전과 일제 식민지, 분단시대와 한국전쟁과 독재정치 치하였다. 공식적으로는 일제치하에서 세 번(실제로는 다섯 번), 해방 후 소련군 치하에서는 두 번, 월남 후 이승만 때 한번, 이어 박정희와 전두환시절에는 경찰과 보안사와 중앙정보부에 수 없이 연행되면서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를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사상은 그 무대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스런 인내의 열매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점을 충분히 그려내지 못했다는 점을 무척 아쉬워하고 있다. 함석헌 선생의 씨알사상과 민중의 개념에 대해... 씨알이란 말은 1970년 4월에 창간한 <씨알의 소리> 때문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함석헌 선생님은 1957년 3월부터 “씨알농장”을 운영한 바 있다. 그 둘은 씨알을 사회적 운동으로 확산시키려던 선생님의 뜻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씨알은 1956년 12월에 그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 선생님이 <대학(大學)>을 강의할 때 (民)자를 씨알로 옮겼는데 그것을 소중히 여겨서 그 다음 해 “씨알 농장” 때부터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기 전까지는 씨알보다는 민중이란 용어를 더 많이 사용했다. 민중은 그가 <성서조선>에 글을 싣던 1920년대 후반부터 즐겨쓰던 말이다. 즉 동경유학 시절부터 인식한 용어로 보인다. 그 민중이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가 아닌가 한다. 물론 1980년대의 전투적인 민중개념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일수도 있겠지만 용어의 사회성이 시대마다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획일적으로 차별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실제로 1960년대에 사용하던 민중의 뉘앙스는 당시로서는 매우 과격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자 고난의 주인공, 집단자아 ‘우리’의 주체의식등을 상징하면서 독재정치와의 싸움을 계속하는 정신적 진지였다. 현재 사람들이 말하는 그 민중의 개념과도 분명 연관이 있을 것이다. 씨알은 그 민중보다 사회학적으로 적극적이자 능동적인 성격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토착적, 생태학적, 그리고 인류적으로 진전시켜 표현한 말이다. 함석헌 선생님과 퀘이커와의 관계에 대해... 퀘이커교도는 세계적으로 30만 정도로 알려져 있다. 전쟁를 반대하고 평화운동에 헌신한 결과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한 단체다. 그 퀘이커가 함석헌선생님을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하기도 했다. 함석헌 선생님은 생전에 약 20여명의 한국 퀘이커교도 중 한 분이셨다. 그는 퀘이커의 양식이 동양적 분위기에 잘 맞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목사도 신부도 없고, 침묵과 명상을 위주로 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모임이다. 그 모임도 선교도 하지 않고 무조직의 조직처럼 운영된다. 함석헌 선생님이 미안해 할 정도로 퀘이커는 많은 도움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분과 퀘이커는 그 만큼 자연스러운 인간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 선생의 교육사상에 대해... 과거 <성서조선>에 글을 쓰고 강연을 한 것들 중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등과 함께 ‘성서적 입장에서 본 교육’이라는 주제가 있다. 그 원고는 지금 전해지지 않는 것 같은데, 아마 그 때부터 선생님은 국가주의 교육제도를 부정하고 양차대전 사이에 만연한 전쟁교육을 철저하게 부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크리스챤으로서 물질주의와 인종과 계급과 종파를 초월한 교육관을 강조하였다. 그것이 <씨의 소리>에 발표된 “씨교육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1930년대 말부터 이미 종교와 농사와 교육을 하나로 통일시킨 교육관을 실천에 옮기려는 시도를 했었다. 만약 일제치하에서 평양의 대동경찰서와 서울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지 않았다면 그 교육실험은 우리 교육사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씨교육이야말로 장차 함석헌선생님을 기념하는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그것은 현행 국민교육기관인 학교제도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의 사상에 가장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하는 인물은?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다석 유영모와 우찌무라라고 생각한다. 우찌무라를 일제 36년 동안 종살이와 바꿀 수 있는 사람으로 묘사했을 만큼 크리스챤인 그 자신에게 끼친 기독교적 신앙태도는 매우 큰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우찌무라를 부정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우찌무라에게 배운 것이 인격의 독립성을 강조한 사상의 주체성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비중도 결코 그것 못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사상도 중요하지만, 인격 형성에 끼치는 스승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학교현장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부럽고 진기한 풍경이 아닌가 한다. 개인적인 궁금증과 사회 현안에 대한 여러 생각들... 현재 하고 있는 일은? 백수다. (웃음) 백수, 정말 살아가는데 판무식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무능력자라는 좋은 말 아닌가? 한자를 풀이하면 흰 손이라는 말인데,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인터넷에서 선생님 이름을 조회해 보니 제자인 듯한 사람이 자신의 학창시절에 만난 이치석 선생님을 회상하는 글을 블로그에 올려놓은 것이 눈에 띠었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직 무슨 내용인지 모른다. 왠지 내 뒷모습을 들킨 기분이라서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철없던 시절에 뭘 모르고 한 선생을 나는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그가 누군지 한번 보고 싶기도 하다. 아울러 그런 글을 내려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군부독재가 학교를 병영화하던 그 시절은 이미 세월 따라 흘러갔고, 세상 또한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내겐 비인간적인 학교풍토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랜기간 교사로 재직하셨고 또 전두환 정권 때 해직을 당하신 일도 있는데, 교사시절 보람과 좌절에 대해서. 다 지나간 일이다. 남은 것은 맨손 아닌가. 굶지만 않는다면 멍청하게 지내는 지금이 좋다. 단지 안타까운 일 하나가 생각난다. 지난 99년 6월말에 일어난 화성 씨랜드 대형 화재 사건 때 어린 아이를 구하려다 도리어 자신의 목숨을 잃은 김영재선생의 희생정신을 살리려는 일이 좌절된 일이다. 당시에 “김영재정신살리기”를 하면서 뜻있는 분들(약 3천여명)의 도움을 받아 ‘김영재장학금’을 마련한 바 있다. 물론 그 기금(약 2천만원)이 너무 적어서 장학금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소액의 장학금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시켜서 어린 생명을 구하려고 했던 그의 이타적인 정신을 오늘날 학교풍토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무슨 보람을 말할 수 있을까. 일제 식민지 치하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명하는 데 산파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이야기 해 달라. 그것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당시에 국회청원서명운동을 처음 벌일 때(1993년 4월) 이를 반대하던 일부 교장들과 동료 교사들로부터 ‘정신병자’라고 소리를 들었던 일이 생각날 뿐이다. 심지어 전교조의 초등교사들에게 이를 두 차례나 제안했을 때(1991년말과 1992년)도 거부당한 바 있다. 그래서 그 서명운동은, 지금까지 40년이 넘도록 쓰레기를 주우면서 일제치하에서 저지른 친일교육을 속죄하시는 김남식 선생님을 모시고, 모두 4명이 시작했었다. 뜻밖에 사회적 여론을 환기시킨 언론의 도움으로 일제 명칭을 고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교육에 대한 역사인식보다는 자신의 명예욕을 드러내기 위한 기회로 삼던 일부 관변학자들과 교육현장의 과거 청산을 남의 일로 여기면서 훼방을 놓던 일부 교육관료들, 그리고 이에 무관심했던 일부 교사들의 한심한 행태는 세월이 흐른 후에도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그 때도 우리의 진심은 ‘국민학교’란 명칭보다는 국민학교제도 아래서 저질러진 국가주의교육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현재는 그러한 국민교육이 사라졌다고 보는가? (단호하게) 아니다. 토인비는 국민국가를 전쟁수행기관으로 간주했다. 그 전쟁을 일상적으로 세뇌시키는 국가주의 교육이 국민교육이었다. 분단시대를 겪어오면서 불가피하게든 무감각하게든 국가주의 교육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명칭 자체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그 국가주의 교육제도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뿌리를 내렸고, 오늘날 우리와 우리 사회는 그 제도를 통해서 생산되고 복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 학교사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 없는 한, 또한 국가주의 교육의 시스템이 개혁되지 않는 한, 일제 잔재는 과거완료 형태가 아니라 알게 모르게 우리와 우리 아이들에게 최소한 현재진행형으로 존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명칭개정의 의미는 두 가지로 평가될 수 있다. 하나는 ‘불행 중 다행’으로 청산해야 할 일제 잔재 중 하나인 식민지 학교 명칭을 고쳤다는 점일 것이다. 또 하나는 ‘다행 중 불행’으로 마치 돼지꼬리나 하나 자른 것처럼 그 상징의 제거 때문에 도리어 진짜 청산하고 개혁해야 할 국민교육이라는 본질과 학교제도에 대한 접근이 ‘국민학교’가 존속할 때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현재 그러한 국민교육을 담당하던 문교부가 교육부를 거쳐 ‘교육인적자원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라고 했는데, 교육의 의미에 있어서 시장권력에 자리를 내주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글쎄, 섣불리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당연한 말 같기도 한 반면에 교육적으로는 무책임한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변화를 전제하는 어떤 모순을 드러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사실 푸코도 오늘날 권력은 수직적인 것이 아니라 그물망으로 변했다고 지적했으며, 토플러 역시 회사의 권력관계도 생산현장에서 이동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던가. 나아가 그 권력의 중심요소가 지식에 있다는 점에서 정부로서도 교육을 인적자원으로 간주하는 흐름에 편승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정부의 권력이 아직도 국민교육 혹은 국가주의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거나, 일제 식민지에 뿌리를 박고 있는 과거의 국민교육을 그냥 방치한 채 시장권력의 비판에만 초점을 맞추는 모습은 왠지 석연치가 않다. 하기야 우리 교육현장이야말로 그 두 측면이 반대의 일치를 보여주는 공간이 아닌가 한다. 일개 시민으로서 교육 문제가 교육적으로 풀어지기를 기대할 뿐이다. 현재 교육 현안으로 돌아와 보자. 전교조의 참교육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나? 참교육이란 참을 찾고 배우는 일 아닌가. 그 고귀한 가치를 주장하고 실현하겠다는 단체가 전교조 아닌가. 따라서 그런 질문 자체가 의아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이 현실적으로 부자연스럽지 않게 되었다면, 그것은 전교조의 문제가 아니라 참교육의 문제요, 참교육이 문제라면 우리 교육 전체의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언제나 참교육을 위한 전교조의 존재를 생각했지, 전교조를 위한 참교육을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과연 지금 그런 정도까지 갔다는 것인지 도리어 내가 묻고 싶다.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하다. |
<카툰저널 News TOON>
2005/12/01 [03:55] ⓒnews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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