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의소리 1990년 7월호
안반덕 (安盤德) 산 살림 이야기 김 종 태 |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안반덕(安磐德) 이야기를 하고싶지 않았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더욱 그렇다. 첫째는 내가 감히 안반덕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고, 다음 하나는 안반덕은 하나의 실패작으로 끝났다는 나의 생각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당시 함석헌 선생님과 관련된 안반덕이기 때문에 무슨 굉장한 내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나 사실은 내놓을 만한 아무런 내용이 없다고 생각된다. 지금 그때의 자취는 간 곳 없고 하나의 울창한 숲으로 변해 원초적인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나,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남아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안반덕에서 하산한지 이미 25년이 넘은 오늘, 나도 그동안 세파에 시달릴대로 시달리고 찌들대로 찌들은 영혼이기 때문에 그때의 이야기를 다 잊어 버리기도 하였고, 감히 말할 자리에 있는 것인지 나의 의문은 계속된다. 그러나 편집실의 이야기는 자격을 따지지 말고 실패한 이야기도 좋으니 사실대로만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반덕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하고자 한다. 사실 안반덕을 개간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했지만 안반덕에는 나혼자만 있은 것은 아니다. 그후 10여명 이상의 동지들이 안반덕을 드나들면서 많은 고생과 수고를 한 숱한 이야기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안반덕 이야기가 제대로 정리가 되자면 내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 동지들의 삶의 이야기까지 포함이 될 때 온전한 안반덕 이야기가 성립 된다고 생각된다.
안반덕이란곳 - 입산 동기
안반덕은 강원도 태백산맥 중턱 ,진부령 고갯길에서 동북쪽으로 12키로쯤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해발 500미터. 고성군 간성면 선유리에 속하는 수십만 정보의 산지이다. 물론 소정리,선유리,흘리 등 어느 정도 평평한 지역에는 개간도 되고 인가가 있었지만 안반덕에는 인적이 미치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없는 태초의 창조의 모습 그대로였다. 산돼지, 노루, 사슴이 뛰놀고, 곰,호랑이까지 출몰하는 안반덕이었다면 지금 사람들이 그게 사실이냐고 물을 것이다. 여름에서부터 가을까지 머루, 다래를 비롯해서 수많은 열매들, 수많은 나무들과 수많은 날짐승 길 짐승들이 우굴대던 곳, 수많은 풀벌레들이 저마다 낮이나 밤이나 어떤 손상도 받지 않고 제 소리를 내는 곳, 여름에는 숲으로 우거지지만 겨울에는 2미터 3미터 눈이 오는곳이기도하다. 나는 왜 이런 산지를 택하게 됐던가. 한창 젊은 나이에 학업도 포기하고 거기에 들어가 개간을 하게 되었는가? 물론 나의 가정이 넉넉지 못한 이유도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꼭 집어서 말하기는 어려우나 어떤 불타는 꿈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설명하자면 나의 고교시설 얘기부터 해야한다. 1951년 쯤이라 생각된다. 강원도 현남면 인구리가 고향인 나는 강릉농고 3년에 재학 중에 어떤 심경의 변화로 강릉중앙교회를 나가고 있었다. 거기서 이호빈 목사님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아 기독교를 좀더 알아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중앙신학에 들어 가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호빈 목사님은 중앙신학교의 교장이셨고, 함석헌 선생님과도 깊은 교분을 갖고 있었던 분이었다. 함석헌 선생님이 일생동안 한복만 입으셨지만 사실은 이 목사님이 함 선생님 보다 먼저 한복을 입으신 분이다. 조만식 선생의 영향을 받아 옷고름 없이 단추만 끼우는 간편한 한복을 입고, 말씀 잘하시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목사님이었다. 그때는 중앙 신학교가 지금 세운상가가 되었지만 종로 편 세운상가 자리, 옛날 포도청 자리에 중앙신학교가 있었다. 거기에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기숙사까지 있어서 나같은 시골 학생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거기서 친구 홍명순 님과 같이 자취를 하면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까지 함석헌 선생이 누군지 모르고 있었고 한번도 본 일도 들은 일도 없었다. 1954년 어느 날이었다. 입학하고 얼마되지 않았다. 유명한 선생님의 동양철학 특강이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중앙신학에서는 당시 특강에는 학생전원이 참석하도록 하는 것이 학교 방침이었다. 그때까지도 세상에서 아는 사람은 알았겠지만 함석헌 선생님이 세상에 등장하기 전이다. 56년부터 사상계에 집필 시작하신 때보다도 2년전 일이다. 나는 처음 동양철학 강의시간을 맞았는데 , 선생님을 만나자 마자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때 강의는 구체적으로 노자 강의였다. 당시 선생님의 강의는 무슨 소리인지 처음듣는 소리였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신상명 (道可道非常 道名可名非常名 ) "을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의 뜻은 이해를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없지만, 나는 선생님의 첫강의에 속된 말로 반해버렸다. 반했다는 말이 어울리는 말이 아니지만 나는 선생님께 그 시간부터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선생님의 나이는 53세 정도이신데 수염을 기르고 마치 어떤 도사같고 할아버지 같았다. 그때부터 다른 선생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다른 선생님의 강의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홍명순과 나는 선생님을 쫒아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선생님은 서울역 앞 구 세브란스병원 자리에 에비슨관에서 주일 집회가 있었다. 나는 거기에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YMCA에서 목요일 2시마다 목요 강좌가 있었는데, 그 강좌는 유영모 선생님 강좌였다. 그렇게 훌륭하신 함 선생님 위에 또 선생님이 계신 것을 보고 우리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 유영모 선생님 강좌에 함 선생님이 맨 앞에 나와 앉아계셨고, 김흥호 목사나 안병무 박사의 얼굴도 보였다. 우리는 중앙신학을 다니면서 거의 3,4년 가까이 선생님의 강연이나 선생님의 집회에 따라다녔다. 따라다니면서 선생님의 심부름이라할까 선생님의 시키시는 일이면 무엇이나 발벗고 나서서 일했다. 그러므로 선생님도 우리를 믿을만한 청년으로 보신 것 같았다.
내가 산으로 가게 된 이유도 함 선생님과 유 선생님 말씀을 듣는 중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함 선생님의 시중에 이런 시가 있다.
집에 앉아 산을보니 산이 내집 산이러니
유영모 선생님도 강의 중에 산살림을 많이 강조하셨다. "이 앞으로 산을 개발하고 산에가서 소를 길러야 한다"고 하셨다. 20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때 선생님들의 말씀은 나로 하여금 산을 동경하게 되었고, 꼭 한번 실천해 보려고 마음에 다짐하고 있었다. 또 사실 그당시 국토개발 붐이라 할까 산을 개간하고 개척하는 단체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복합적으로 나를 산으로 가게 한 것도 같다.
먼저 천안 씨알농장으로 가다
1956년 봄이라고 생각된다. 함 선생님은 이미 세상에 "황야의 예언자" 처럼 등장하기 시작했고, 선생님 글 때 문에 사상계의 주가가 올라가던 때라 할 수 있다. 정만수 장로가 함 선생님께 천안시 봉명동에 있는 1만평의 농장을 기증해 씨알농장이 시작되었다. 거기에 선착으로 홍명순과 내가 갔다. 우리들은 그때 선생님이 하시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할 각오가 돼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씨알농장을 하신다기에 다니던 학교도 중퇴하고 씨알농장으로 갔다. 우리는 그때 한창 나이에 힘도 좋았다. 농사 일에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젊은 힘이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대로 할 수 있었다. 당시 농장이 박토가 돼서 농사가 잘되지 않은 땅이었다. 우리는 새벽 3시 일어나서 천안 시내에 나가 똥을 펐다. 똥을 퍼서 농장의 거름으로 했다. 아마 당시 천안 시내 인분은 거의 우리가 푸다시피했다. 참 일을 많이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무슨 월급 받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의 일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다해 기쁨으로 솔선해 한 것이다. 그때는 우리는 사실 두 끼를 먹고 일했다. 10시 아침 , 오후 5 - 6시에 저녁을 먹었다. 선생님이 일식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두 끼를 먹으면서 항상 선생님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거의 1년 가까이 일일 일식도 해봤다. 일식을 하면서 도저히 일식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했다. 당시 천안농장은 과수원이었는데 복숭아와 사과를 재배했고 고구마와 보리 농사도 조금했다. 함 선생님은 1주일이면 3 - 4일을 씨알농장에 와서 사셨다. 선생님이 오시면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회를 갖고 농장에 나가 일했다. 선생님도 열심으로 일을 잘하셨다. 그런데 1957년 11월경 나는 씨알 농장을 떠나게 되었다. 소집영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전쟁반대라든지 병역거부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거대한 국가권력에 나같은 것이 감히 저항하고 거부한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 그만한 용기도 없어 어찌할수 없이 남들이 하는대로 소집영장에 응하기 위해 씨알 농장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몹시 서운 하셨던 모양이었다. 봉명동에서 천안역까지 2키로미터 이상되는 거리인데 선생님은 거기까지 나를 따라 나오셨다. 한 마디 말씀도 안하시고 따라나오시면서 가끔 한숨을 지으시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때 선생님의 한숨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와서 생각해 볼 때 선생님의 한숨은 보통 한숨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은 그동안 나를 지켜보면서 어떤 기대를가지셨던 모양인데 내가 거기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나와 같이 있던 홍명순 님은 군대 소집영장이 나왔을 때 단연 그것을 거부하고 법정에 섰고 6개월 선고를 받아 대전감옥에 복역 중이라는 사실을 내가 해병대에 입대해서 복무 중에 그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 앞에 홍명순은 합격하고 나는 낙제한 셈이다. 그러나 자나깨나 선생님과 씨알농장이 걱정이 되어 내가 다니던 인구교회의 동지 중에 권술용,김부근 등 몇명 친구들을 설득해서 천안농장으로 안내하기도 했다. 내가 해병대를 만기제대한 때는 5.16이 일어날 직후였다. 함 선생님은 5.16군사정권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한창 싸우시던 때다. 선생님의 쿠테타반대투쟁에 대해서는 구태여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일이다. 선생님은 총칼 들고 일어난 그들 앞에 누구도 함부로 말못하고 있을 때, 단연히 유대광야의 세례요한 처럼 대담하게 군사정부를 규탄하고 민정 이양을 주장했다. 일선에서 군사정부와 싸움을 하시면서도 씨알농장에 대한 꿈이 대단하셨다. 선생님은 당시 씨알농장을 중심으로 마하트마 간디의 아슈람 같은 공동체를 이루어 참된 운동을 해보시려는 뜻을 갖고 마음을 쓰신 것도 사실이다. 나는 제대를 앞에 놓고 무척 망서렸다. 씨알농장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곳을 택하여 개간을 하면서 나의 젊음을 한번 불태워 볼 것인가? 고민 중에 마침내 선택된 지점이 안반덕이었다.
안반덕의 산살림 시작
내가 안반덕을 점찍고 거기를 개척의 대상으로 삼게된 것은 함 선생님과 의논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대로 함 선생님과 유 선생님의 말씀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거기 들어가기를 결정한 것은 나 나름대로의 생각이었다. 우선 내가 그 고장을 잘알고 있고,산타기를 좋아해서 몇 번이고 다녀 본 지역이기 때문에 나보다 더 잘아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제대를 앞두고 동지들과 나의 뜻을 편지로 연락하면서 동지 규합을 했고, 제대하기 얼마전 휴가를 얻어가지고 동지 권술용 등 몇몇이 함께 안반덕 개척을 시작했다. 우선 오솔길을 내고 좋은 터를 잡아 통나무 집을 지었다. 통나무 집 구조는 비록 산간벽촌이지만 이상적으로 꾸였다. 온돌방 하나, 침대방 하나, 응접실,부엌등 명색이 네 칸이었다. 응접실에는 자연석을 굴려서 식탁을 놓고 나무토막을잘라 의자를 만들고 토끼가죽을 덮어씌워 따뜻하게 했다. 우리가 보아도 괜찮은 집이었다. "안반덕"이란 이름은 처음부터 안반덕은 아니었다. 옛날부터 그 지역에 넓고 평안한 바위가 많다해서 안반(安磐)이란 이름이 있었는데, 덕(德)자는 내 가 붙인 것이다. 내가 덕(德)자를 첨가하게 된 것은 역시 함선생님과 유영모 선생님 말씀에서 얻어들은 것이 다. 덕(業)자는 함 선생님도 좋아하셨지만 유 선생님도 좋아하신 글자라고 생각된다. 특히 유명모 선생님이 덕자를 "속알"이라고 번역하신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우리가 한창 부푼 꿈을 안고 안반덕 약 2만평정도 개간을 목표로 일을 시작하고 있을 때 ,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산불이 난 것이다. 우리는 개간하면서 풀과 나무들을 모아 불을 지르고 완전히 불을 끄고 숙소로 돌아왔는제,불씨가 남아있던 모양이다. 우리가 숙소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남아있던 불씨가 바람에 번져 온 산천이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정신없이 올라가 불을 끄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바람은 세차게 불어 우리가 집을 지어놓은 곳까지 온통 불바다가 되고 우리는 미처 살림도 옮길 겨를도 없이 몸만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대산불이 날 것을 인근주민이 알고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으나 불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온 산천이 탈대로 다 타버리고 불은 제풀에 꺼진 셈이 되었다. 물론 인근주민의 수고가 많았다. 우리는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나무가 탄 것도 문제지만 방화자로서 잡혀갈것을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때 권술용 님이 잠시 보이지 않더니 자진해서 단독 방화범으로 신고하고 돌아왔다. 그후 그가 강릉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야 안반덕 일을 함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권술용이 수감된 것을 몹시 걱정을 하시면서 강릉엘 일부러 내려오셨다. 그때 마침 어떤 부인이 선생님을 맞이했는데, 알고보니 선생님 말씀을 많이 들은 분인데,그 부인이 바로 권술용 담당판사 부인이었다. 선생님이 여간해서 그런 부탁을 하시는 분이 아닌데 그부인께 권술용이 일을 부탁 하신 모양이다. 반드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지 모르나, 그 판사가 직접 안반덕 불난 자리까지 험한길을 다녀갔다. 그때 즉시 오질 않고 3개월인가 지나서 왔다. 불은 4월쯤 났는데 7월쯤 판사가 도착했을 때는 풀이 이미 무성하게 자라서 불이 났는지 흔적을 찾아블 수 없을 정도가 되어있었다. 핀사가 선생님의 말씀을 전달 받고 일부러 늦게 왔는지 제대로 온 것이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나 어쨌든 권술용 님에게 유리하게 되어 구속 45일만에 집행유예로 나오게 되었다. 함 선생님과 안반덕과의 인연은 이렇게 되어 맺어진 셈이다.
함 선생님 안반덕에 오시다
내가 안반덕으로 아주 입산하게 된때는 1961년 7월, 제대하고 바로였다. 안반덕으로 입산했을 때는 산불 이후 다른 동지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나혼자만 이었다. 나는 앞에서 인급한대로 이미 제대전부터 마음에 다짐하고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산불 정도로 모든 것을 포기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단신으로 자취를 하면서 차근차근히 다시 일을 계획하고 진행해 나갔다. 나는 거의 2년동안은 혼자 있었다. 혼자 있으면서 어려움도 많았다. 돈이 있어서 들어간 것도 아니고 산에 먹 을 것 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농사를 아직 짓지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칡뿌리도 캐먹고 산채 도 뜯어먹고 초근목피 생활을 하기도 했다. 가끔 친구들이 찾아오긴 했지만 주로 혼자 개간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나혼자 농사를 지었지만 꽤 잘했다. 농사는 주로 감자,콩.옥수수였다. 2년이 지난 다음 나를 걱정하고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계셨다. 어머니와 함께 산 기간까지 합치면 내가 안반적에 산 기간이 족히 5년은 된다. 1962년 여름이 라고 생각된다. 산살림에 어느 정도 익숙해가고 있던 어느날,함 선생님이 안반덕으로 오시겠다는 전갈이 왔다. 나의 마음은 흥분하고 있었다. "이 산촌에 선생님이 오시다니 ! 길을 예비하자!" 오시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 같은 심정으로 나는 선생님의 오시는 길을 닦기 시작했다. 울창한 나무와 숲으로 우거진 산에 좌우 2미터 간격으로 길을 내기 시작해서 약 20라 길을 닦았다. 선생님이 안반덕으로 오시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준비했다. 마침내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을 가까이서 뵙기는 천안 씨알농장 이래 4년만인 것 같다. 더욱이 이 산촌에서 선생님을 단독으로 뵈오니 그때의 감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사실 선생님이 안반덕에 처음 오실 때는 5.16군사 쿠테타 이후 군사정권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는 함석헌 선생 을 모르는 국민이 없을 때였다. 함 선생님이 강연하시는 곳이면 어디를 가나 입추의 여지 없이 구름같이 모여 들던 때다. 또 선생님은 속시원한 말씀을 서슴없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느 정치인 보다도 선생님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런 선생님을 내가 독대하다니! 얼마나 젊은 나이에 감격했는지 모른다. 선생님이 안반덕에 오시면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회를 갖고 그 다음에는 밭에 나가 일하지 않으면 선생님은 주로 여기저기 산을 혼자 오르내리면서 자연을 감상하시기도 하시고, 아니면 집에서 책을 보시기도 하시고, 큰 소리고 책을 읽으시기도 하셨다. 주로 흰두교경전 바가바드기타를 애독하시는 것을 보았다. 선생님이 바람에 수염을 날리시며 흰 한복을 입으시고 여기저기 다니시는 것을 보면 영낙없는 시골 할아버지 모습이다. 어떤 분은 산신령 같다고도 하고 도사 같다고 했지만, 가까이 뵐 때 선생님은 마음 좋은 할아버지 모습이다. 선생님은 안반덕에 와 보시고 "참좋다"고 하셨다. 그리고 무슨 깊은 계획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후 돌아가셔서 얼마후 나에게 편지를 보내셨다. 그것이 유명한 "안반덕으로 보내는글"이다. 이것이 김 광주 편 "너와 나"라는 책에 실렸는데 그것으로 인해 선생님이 안반덕에 관계 하신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고, 나 또한 선생님 때문에 세상의 많은사람들이 내 이름까지 알게 되었다. 1961년 9월 23일자로 보내신 편지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태백산 호랑이를 만나던 날
선생님 말씀대로 나는 그때 토막집을 짓고 있었다. 그때 내게 집을 지을 수 있는 쟁기라고는 손도끼와 톱 뿐이었다. 토막 집을 주로 톱 하나와 손도끼로 집을 짓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그것을 보시고 가신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떻게 그런 집을 지었는지 의심이 날 정도로 거의 완벽하게 토막집을 완성했다. 더욱이 그 토막집을 지은 곳은 안반덕에서 제일 높은 산봉우리 위였다. 거기서 창문을 열고 보면 망망한 동해바다. 일본열도와 태평양까지 바라볼듯한 그런 끝없는 바다와 하늘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밤이 되면 오징어잡이 배의 불꽃이 장관을 이룬다. 그것은 말로만으로 그 경험을 말하기 어렵다. 내가 어떻게 5-6미터나 되는 통나무를 그 산봉우리까지 옮겼는지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 토막집이 완성되었을 때 선생님이 다시 오셨다. 선생님이 그 토막집에 들어가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다른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내가 만점을 주겠다"고 하셨다. 모든 것 집어치우고 여기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씨알농장과 안반덕을 합해서 젊은이들의 정신적 수련도장을 만들자고 여러 번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때 나는 가끔 사냥에 쓰기 위해 창과 스키를 가지고 있었다. 창쓰는 솜씨는 시원찮았지만 스키는 내가 생각해도 잘탔다. 진부령 이나 대관령의 어느 스키어들에 못지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냥꾼들과 같이 멧돼지 사냥을 나갈 때는 나는 주로 스키를 타고 멧돼지 모리를 했다. 멧돼지가 아무리 빨라도 내 스키를 당하지 못했고, 창잡이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멧돼지를 몰아가는 일을 했다. 창잡이는 선창과 재창이 대기하고 있다. 멧돼지의 습성은 사람을 보면 일직선으로 공격하기 위해 달려오는 습성이 있다. 선창이 먼저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멧돼지를 겨누고 있다가 산돼지 허벅지의 연한 부분을 정확하게 찔러야한다. 그러면 다음 재창이 마무리를 해서 잡는다. 중요한 것은 선창이다. 선창이 실수하면 사람이 다친다. 산돼지의 어떤 놈은 음이 칼날처럼 나와 있고 빠르고 힘이 보통이 아니다. 겨울이면 사냥꾼들이 오는데 나는 그들과 같이 및돼지 10마리까지 잡아 본 일이 있다. 그리고 산돼지 가죽을 솟처림 만들어놓고 삭다리 나무로 불을 지펴 멧돼지 고기를 구워먹던 그맛! 안반덕의 잊을 수 없는 경험 이다. 나는 창잡이 노릇은 못해 봤으나 사냥꾼과 같이 곰의 발자국을 따라 1주일 만에 곰 한마리 잡은 경험도 있다. 그때는 내가 생각해도 산을 펄펄 날라다녔다 할 수 있다. 겨울이 가고 봄을 지나 무더운 여름이 오면서 안반덕은 다시 숲으로 덮혔다. 전기가 있을 리 없고 밤에는 호롱불 하나로 어둠을 밝힌다. 어느때나 내허리에는 손도끼가 있다. 그것은 일종의 호신용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없지만 멧돼지나 곰, 호랑이까지 출몰한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허리에는 어느 때나 손도끼를 잊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좀 어숙어숙한 초여름 저녁이었다. 내가 저녁 바람을 쏘이기 위해 숲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앞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턱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과 5, 6미터 정도 거리였다. 소름이 쪽 끼쳤다. 얼룩 얼룩란 줄무늬가 있고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만큼 크지는 않으나 상당한 몸집을 가지고 있는 태백산 호랑이를 만난 것이다. 나는 순간 허리에 찬 손도끼를 빼들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을 생각하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물러서면 죽는다,저놈과 한번 대결하지 않으면 내가 당할 판"이기 때문에 도끼 하나를 들고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호랑이 앞에 나도 끝까지 버터고 당장이라도 한 차례 대결할 태세로 서 있었다. 이놈이 나를 꼬나보더니 쉽게 생각이 않되었던지 폭탄이 떨어지는 듯하게 으르렁대며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때 비호(飛虎)라는 말을 처음 실감했다. 문자 그대로 비호였다. 호랑이가 물러간 다음 내옷을 보니 온통 옷 전체가 쥐어짜야할만큼 땀이 흠뻑 배어 있었다. 지금 이런 이야기는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먹던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그게 정말 사실이야? 거짓말 아니냐? 할 사람도 있을 것도 같다. 무슨 여우나 늑대를 잘못 본건 아니냐. 할지모르나 그것은 절대 아니다. 그 증거로 내 동생이 나를 찾아 안반덕으로 왔다가 호랑이를 만나 한 달을 앓아누운 일이 있고. 이웃 동네 사람도 당시에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내가 호랑이와 대결해 물러서지않고 호랑이를 쫓아버릴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할 때 , 나는 그다음부터는 더욱 자신감이 생겼고 겁나는 것이 없었다. 여우, 늑대 , 멧돼지 , 곰 같은 것은 그냥 나가서 내손으로 사로잡을 것도 같았다.
5년만에 내려온 안반덕. 다시 그리워지는 오늘
세월은 어느덧 내가 안반덕에 입산한지 5년이 흘렀다. 5년만에 나는 하산하게되었다. 내가 하신하게 된 동기는 이런저런 다른 동기도 있지만 결정적인 동기는 안반덕 산촌에서 아내를 만난 때문이다. 어찌 인적의 그림자도 없는 안반덕에서 처녀를 만났던 말이냐.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내가 살던 안반덕에서 20리를 내려가면 거기 작은 마을이 있고 거기에 당시 이대 햇불회에서 지원을 하여 세운 선혜학원(선혜학원)이 있었다. 나의 아내는 이대 계몽반으로서 졸업후 거기에 와서 책임을 맡고 교사노릇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안반덕에서 간성을내려가려면 반드시 선유리의 선혜학원을 자연히 지나게 되는데,오며가며 거기서 쉬어서 다니다보니 자연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아내는 나의 남성다움에 끌렸는지 모르나 우리들은 거기서 만나 장래를 약속했다. 그후 나의 생각만 고집할 수가 없고 자연 아내와 의논하다 보니 하산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타락이라는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나,산속에다 살림을 차릴수도 없다는 생각이고. 안반덕 생활도 어느만큼 했으니 그정신을 가지고 도시를 나갈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산 이후 중간에 여러가지 이야기는 생략하고 안반덕을 내려온지 1년후 우리는 결혼했고,그후 일산 홀트 고아원 원장이라는 중책을 13년이나 맡게 되었고,지금은 수원 경기사무소 소장을 맡고 있지만 홀트아동복지회에서만 자그만치 24년이 흘렀다. 도시생활 20년이 넘었지만 나의 머리 속에는 언제나 안반덕을 잊지못한다. 내가 도시의 직장생활 속에 이런 저런 육적 심적 고통이 있고 시련이 있었을 때 , 나를 강하게 하고 끝까지 버티게 하고 굳굳하게 살아오게 한 것은 "안반덕의 산살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젊은날 나에게 안반덕 산살림을 이끌어 주신 함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내가 하산한 이후에 오히려 나 있을 때보다도 안반덕이 훨씬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김복관 선생이 안반덕에 들어오셨을 때 한우 30마리까지 있었다. 그후에 송용등, 문대골, 이금용, 박세정 , 김종성 , 윤형로, 박상균, 김영록, 송상호 님 등 여러 동지들이 안반덕을 거쳐나가 큰 사업가도 되고 훌륭한 목회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 등을 볼때 마음 든든하게 여겨진다. 지금 나는 안반덕의 소식을 모른다. 선생님도 세상을 떠나셨고 동지들도 안반덕을 다 떠나 나온지도 이미 오래다. 안반덕은 다시 태초의 신비경으로 돌아갔을까? 태백산 호랑이 없는지는 벌써 오래지만 멧돼지, 여우, 늑대 , 사슴은 그냥 있을까? 찌들은 도시생활에서 안반덕이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우리가 안반덕을 다 떠나 왔지만 안반덕 정신으로 그 후속 사업을 생각하며 고민하던 중,국제적 대 사업을 하고 있는 송용등 님의 도움으로, 안반덕 동지들이 중심이 되어 대전 애육원을 맡아 운영하게 된 것은 하나의 좋은 징검다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끝으로 1965년 5월 13일 밤에 함 선생님이 "안반덕 씨알농장 일꾼들에게 보낸 편지" 일부를 소개하면서 이글을 맺는다.
"어떻게들 지나오? 심을 것을 다 심었으며 , 심은 것이 잘 나기도 하는지? 새로 뒤집는 것도 많이 했으며, 산양이 새끼를 낳았는지? 송아지들은 살이 좀 올랐으며 토끼는 잘 자라고 새끼를 낳았는지? 나물도 많이하고 나물꾼이 동산을 과히 해치지나 않았는지? 나는 그 떠나던 날 골짜기를 내려오며 , 그 신록과 산벚꽃이 수놓은 경치,그 폭포의 음악에 아주 반해버려서 안반덕은 도저히 놓을 수 없다 생각했고, 앞으로의 여러가지 꿈을 그렸소 꿈의 제 1장은 우선 집을 것는 것이오. 돈을 어디서 좀 구해서라도 금년내에 30명 가량 숙식할 수 있는 집을 한 채 지어야겠소. 다음번 가서 더 자세히 의논하기로 하지요. 그러니 두고 생각들 해보시오. 목조로 하는 것이 쉬울까? 석조로하는 것이 쉬울까?노력 관계는 어떠며 경비관계는 어떠 할까?
|
'종교사상 이야기 > 함석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터뷰] '함석헌 평전을 쓴 이치석(카툰저널 News TOON) (0) | 2006.12.14 |
---|---|
함석헌과 법정(법정) (0) | 2006.12.14 |
'씨알 함석헌 평전'을 읽고(김조년) (0) | 2006.12.14 |
[서평 인터뷰]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김성수) (0) | 2006.12.14 |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김성수) (0) | 2006.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