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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씨알 함석헌 평전'을 읽고(김조년)

by 마리산인1324 2006. 12. 14.

 <씨알 함석헌 평전>을 읽고
 
- 김조년 -
 

사랑하는 벗에게

 

평화롭게 잘 지내십니까? 어느 덧 겨울로 접어들어 날씨가 싸늘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을걷이도 다 끝났을 것이고, 겨울준비도 상당히 됐겠지요. 그 걷이와 준비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찾아서 매우 분주히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요사이 저는 아주 좋은 책, “씨알 함석헌 평전”을 읽었습니다. 원래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데, 이번 것은 모든 것을 제쳐놓고 읽기 시작하여 아주 잘 읽었습니다. 읽고 나니 마치 긴 굴을 빠져나와 밝은 빛을 맞은 듯, 높은 산을 기어올라 시원히 터진 들판을 보는 듯, 어느 바닷가 바위에 올라 출렁이는 파도너머 먼 수평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책을 쓴 이치석 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선생님께서 특급 빠른우편으로 보내주신 책을 받던 그날부터 읽기 시작하여 어제까지 평전을 다 읽었습니다. 이제까지 절절한 연해편지를 써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었지만, 그런 것이 있다면 마치 이렇게 읽지 않았을까 하듯이 그것을 그런 설레임으로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여러 대목에서 많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읽는 제가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면, 쓰는 선생님이야 몇 번, 얼마나 깊은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아름다운 우정에 눈물을 흘리고, 그 친구를 읽고 공허한 모습에 울고, 사람이 인격과 존엄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썩은 막대기 같은 '것'으로 취급되는 것에 울고, 가장 믿고 신뢰한다는 사람들에게 전혀 이해되지 않아 왕따를 당하는 상황에서 울고, 오직 바라볼 것은 하늘밖에 없는 그 허허로운 모습에 울고, 이루려다 그냥 스쳐지나가 사라져버리는 '뜻'의 결정에 울고, 그 뜻을 멀거니 바라보는 안타까운 모습을 그리면서 울고, 그래도 하나 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 조용히 눈감는 모습에서 울음이 나오더군요. 그래도 마지막 믿고 넘길 바통을 던지는 그 모습에서, 저 멀리 아련하기는 하지만, 그 바통을 받으려고 애 쓰는 군상들이 비치는 듯하여 울음이 나왔습니다. 울었다는 말을 표현하려는 이 때 다시 눈물이 나옵니다. 사실 그렇게 울 수 있다는 지금 제가 또 고맙기도 하고, 그런 계기를 준 이치석 선생님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어두웠던 우리시대에 함석헌 선생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던 것을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또 제 자신 그의 먼발치에서 조금이라고 얼쩡거리면서 이슬방울 하나 받아 마셨던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불의와 무섭게 싸우는 이였지만 평화롭게 서로 인격과 인격의 부딪침을 바랬고, 인권과 평화와 민주운동 임시조직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보이는 조직보다는 성숙된 씨알들이 스스로 꾸리는 보이지 않는 조직이 단단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랬고, 이 세상의 순간의 삶들이 영원한 그 님과 일치하는 것이기를 무척 힘썼습니다. 몸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고, 몸과 맘이 뫔으로 하나가 되며, 일상생활과 영성이 하나가 되는 실제생활을 꿈꿨습니다. 정치와 경제생활의 영성과 거룩함이 이루어지기를 바랬습니다. 움직임과 고요가 그에게는 따로 떨어져 놀지 않았습니다. 누구는 그가 시대의 흐름에 너무 깊이 관여하여 깊은 명상과 영성을 성숙시키는데 도달할 기회를 놓쳤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 반대라고 봅니다. 엄밀히 따지면 성과 속이 갈라지지 않고, 세상의 복잡한 일들과 거룩한 수도의 생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지요. 누구든지 맑은 공기를 숨 쉬고 싶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으며, 더럽지 않은 음식을 먹고 싶어 하지만, 더럽고 오염된 것을 함께 먹고 마시고 숨 쉬지 않는 한 맑은 것은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더러움이 있기에 맑음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깊어지고 실제로 만들어지는 것이겠지요. 문제는 눈가림으로, 앞에 있는 무수히 많은 부당한 것들을 옳다고 보려는 속된 맘이 있다는 점입니다. 다만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훈련뿐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흙 속에 뿌리를 박은 연이 탁한 물을 뚫고 솟아올라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그 비결을 우리 생활로 익히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누구나 그런 생명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성자만이 아니라 생명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런 속성을 다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갈고 닦는 훈련이 없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훈련은 한 가지 생각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내 속에 그런 썩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씨가 뿌려져 있다는 인식입니다. 그것이 관습과 교리와 조직과 역사와 사회와 학습된 생활과 관념으로 눌리고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이런 것들은 어쩌면 우리가 그런 본질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중요한 과제는 바로 그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서 참다운 해방의 자리에 도달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하는 혼, 누르고 욱여쌈에 저항하는 생명의 속성에서 올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정신을 차린다면, 그 속성은 약간의 틈새만 있어도 빠져나올 것입니다. 마치 어느 바늘귀만큼 작은 틈새나 구멍으로도 거대한 밝은 빛이 비치어 나오듯이 말입니다. 그 생명의 씨는 빛과 같다고 봅니다. 어떤 어둠이나 틀이나 그릇도 그 빛을 가리고 숨길 수가 없습니다. 빛은 숨겨지지 않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 속에, 가장 중요한 자리에 정중히 모셔져 있다는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려면 평화로운 삶과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건강과 평화를 빌면서


 
** <표주박통신>89호(2005년 12월1일)에서 퍼왔습니다.